- 전원경 저 - 《예술, 역사를 만들다》 중에서...
<클레오파트라,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87, 캔버스에 유채, 56.9 × 65.3cm, 개인 소장
왜 서양인들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그토록 많은 환상을 품고, 그토록 많은 그림을 그렸을까?
클레오파트라를 모델로 한 그림은 후대 화가들에 의해 꾸준히 그려졌지만 정작 그녀는 뛰어난
미인이라기 보다는 여러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구너모술수에 능한 탁월한 정치가였다.
로마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가 그리 특별한 미인은 아니었다고 전한다. 다만 대단히
특이하고 강렬한 매력이 있었으며, 클레오파트라 본인이 그 매력을 십분 이용할 줄 알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뱀에게 물려 죽는 라오콘 부자, BC 200-50년, 대리석(현재 조각은 모작, 원작은 청동)
208 × 163 × 112cm, 바티칸시국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이 거의 신을 모델로 했던 것에 비해 로마의 조각은 특정한 황제나 귀족 등 대부분 실제 모델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조각은 '집의 장식'이라는 개인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이러한 로마의 초상 조각 전통 속에서
그리스의 이상주의적 조각과 중산층의 향토적 조각 양식은 무리 없이 결합했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티치아노, 1553-1554, 캔버스에 유채, 129×180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로마의 길>, 니콜라 푸생, 1648년, 캔버스에 유채, 79.3×100cm, 덜워치 갤러리, 런던, 영국.
로마 건축을 모방한 것들 중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아마 나폴레옹이 상젤리제에 세운 개선문일 것이다.
개선문은 자신을 고대 로마 황제의 후예로 선전하고 싶어 했던 나폴레옹의 염원을 담은 것으로, 로마에
남은 세 개의 개선문 중 가장 오래된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아담과 이브>, 알브레히트 뒤러, 1507년, 두 개의 나무 패널에 유채,
각 209×81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선악과를 따 먹은 죄로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도 화가들의 단골 소재였다.
대개는 마사초(1401-1428)의 그림처럼 비탄에 잦어 낙원을 떠나는 아담과 이브가 등장하지만,
뒤러(1471-1528)는 신에게 종속되어 있기보다는 능동적이고 관능적인 남녀의 모습으로 아담과 이브를
그렸다. 특히 아담은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생기 넘치는 모습이다.
<수산나와 노인들>, 안토니 반 다이크, 1622-1623, 캔버스에 유채,
194×144cm, 알테 피나코덱, 뮌헨, 독일
구약 성경에는 유대 민족의 고난, 예언자들의 예언 외에 철학적, 문학적인 장면들로 많이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성경의 주제는 종종 관능적인 방법으로 재해석되기도 했다. 화가들은 '성화聖畵라는 이유로
여성의 누드 등 당시 금기시되던 장면들을 그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니엘」에
등장하는 간통의 누명을 쓴 수산나의 이야기다. 목욕 도중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수산나의 이야기다.
이때 다니엘이 기지를 발휘해 수산나의 누명을 벗겨 주는데, 옷을 벗은 수산나의 관능적인 모습은 성경 속
장면이라는 이유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화가들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천국의 문>, 로렌초 기베르티, 1425-1452년, 청동, 산 조반니 세례당, 피렌체, 이탈리라
1401년 피렌체 세례당의 청동문이 제작될 때 이 청동문을 기부하기로 한 피렌체 모직물 상인 길드는
공개 입찰을 실시했다. 마지막 심사에 오른 여섯 명의 예술가들에게 길드는 1년의 시간을 주어 향후
제작될 문과 똑같고 크기만 작은 청동 모형을 만들게 했다. 이 시간 동안의 제작비와 생활비는 길드가
지원했다. 그리고 1년 후 결선 작품을 심사하기 위해 길드는 34명으 예술가로 이루어진 심사 위원회를
구성했다. 상인 길드의 부유함과 사회적 권위를 과시하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건축은 신의 영광을 옾여 주는 동시에 기증자의 명예도 드높여 주었다.
<봄>, 산드로 보티첼리, 1482년, 패널에 템페라, 203×314cm, 우피차 미술관, 피렌체, 이탈리아.
육체의 근원적 관능을 신화 속에서 여실히 드러낸 대표적인 15세기 작품 '봄'
메디티 가의 결혼식을 위해 제작된 것이다. 처녀의 행복한 결혼 생활과 다산이라는 의미를 그림에 담기
위해보티첼리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차용했다. 오른편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숲의 님프 클로에를 납치해서 그녀를 꽃의 여신 플로라로 변화시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왼편에서 춤추는
세 명의 님프들은 속살이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의상을 입은 모습이다. 자연히 메디치 가에는 지적인 엘리트들이
풍푸하게 모여들었다. 이런 엘리트들의 현학적이고 시적인 경향이 보티첼리 그림 속 신화의 장면드로
자연스럽게 되살아 났는지도 모른다.
<피에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99년, 대리석, 174×195cm,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시국.
메디치 가의 주문으로 제작된 도나텔로(1386-1466)의 <다비드> 상은 냉정하고도 관능적인 소년이지만
누군가를 죽이기에는 너무나 연약해 보인다. 그는 오히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장년들이 사랑한 소년을
연상 시키는 모습이다. 피렌체인들이 진정으로 사랑했고 피렌체의 표상으로 인정받은 다비드 상은
이로부터 70년 뒤, 젊은 조각가 미켈란젤로 보오나로티의 손에서 탄생했다. 1501년에 시작하여 1504년
완성된 이 <다비드> 상은 일단 5미터가 넘는 크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인상적인 팔과 손 근육, 엄격한
표정은 피렌체의 상징인 다윗이 더 이상 관능적인 소년이 아닌 성장한 청년이며, 동시에 고상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다비드> 상은 실제보다 머리와 손이 더 크게 제작되었고, 얼굴은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고요하고 침착한 표정이지만 사실 정면에서 보면 찌푸린 인사으로 만들어 졌다.
원래 이 <다비드> 상은 지상이 아니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전면에 올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주피터와 이오>, 안토니오 코레조, 1532-1533년, 캔버스에 유채,
16370.5cm, 미술사 박물관, 빈, 오스트리아.
아름다운 여성 누드를 담은 코레조(1494-1534)의 <주피터와 이오>에서는
이미 종교적인 색채는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이상적인 육체에 대한 동경과 일종의 관능미가
그리스 신화라는 풍성한 토양에서 자라났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필리어>,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94년, 캔버스에 유채,
124.573.7cm, 개인 소장
라파엘전파에게 큰 영향을 받았던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1917)가 1894년에 그린
<오필리어>는 순결함을 상징하는 흰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꽂은 차림새다.
물 위에 떠 있는흰 수련들은 오릴리어가 곧 수련들처럼 물 위를 떠가다 하릴없이 물속으로 잠길 운명임을 암시한다.
머리에 꽂은 꽃은 그녀의 광기를 상징한다.
<교황 율리우스 2세>, 라파엘로 산치오, 1511년, 패널에 유채,
10881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영국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년 재위)는 르네상스 시대의 어떤 군주보다도 더 강력한 전제 군주였다.
그는 스스로를 제2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여겨 자신의 교황명 역시 '율리우스'로 지었던 인물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율리우스 2세의 초상을 보면 성직자이기 이전에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전제 군주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의 제위 기간 중에 교황령의 영토는 크게 넓어졌고, 교황은 페루자와
볼로냐의 영유권을 얻었다. 이때 교황령인 톨파에서 백반석 광산이 발견된다.
백반은 당시 직물 염색에 없어서는안 될 중요한 화학 물질로 16세기 당시 백반은 대부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서 비싸게 수입하고 있었다. 백반석 광산을 확보한 교황은 삽시간에 큰 재산을 벌게 되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재원으로 유리우스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 개축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맥반석 광산과 메디치 가의 자금으로도 베드로 대성당 증축에 드는 돈을 모두 댈 수는 없었고,
마침내 대성당의 완공을 위해 1514년부터 다시 종잇조각에 불과한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카라바조, 1610년, 캔버스에 유채,
125×101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이탈리아.
카라바조(1571-1610)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서 다윗은 막 잘린 골리앗의 머를 들어 올리고 있다.
소년티가 역력한 그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자긍심보다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라는 행위에 대한 회회와 경멸이 가득하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골리앗의 피가 묻어 있는 칼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있다. 아직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는
골리앗의 얼굴은 지금 이 사태가 아직 이해되지 않는 듯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일설에 따르면, 이 얼굴은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카라바조는 이 극적인 느낌을 강화하기 위해 빚과 어둠을 과장되게 대비시키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즐겨 사용하곤 했다.
<루이 14세의 초상>, 이야생트 리고, 1701년, 캔버스에 유채,
277×194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랑스.
너무도 완벽하게 '이상적인 전제 군주'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힌 담비 모피를 두른 채 위엄 잇는 자세를 취한 왕은 금색 백합(프랑스 왕실의 상징)이 수놓인 푸른 망토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그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에 흰색 스타킹을 신고 자신 있게 다리를
드러낸 차림새다. 그림이 보여 주는 것처럼 프랑스 궁정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엄격한 궁중예법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매일매일이 화려한 드라마 같았다. 루이 14세는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카라치 일가의 고전적인 회화를
장려함으로써 이런 고급 예술 양식에 쐐기를 박았다.
이로써 유럽 궁정 예술의 모범적인 스타일이 프랑스 궁정에서 확립되었다.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18년, 캔버스에 유채
224×209cm, 알파 피나코텍, 뮌휀, 독일.'화가들의 군주이자 군주의 화가'인 루벤스.
그는 화가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았고, 외교관으로서 플랑드르, 스페인, 영국과 프랑스 궁정을 넘나들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루벤스는 160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뒤 1608년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직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는 100명 이상의 도제로 구성된 시스템을 통해 종교화와 그리스 신화를
중심으로 한 그림들을 공장에서 생산해 내듯 만들어 전 유럽으로 수출했다.
<진공 펌프 실험>, 조셉 라이트, 1768년, 캔버스에 유채,
183×244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영국.
18세기 중반 영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유리병 안ㅇ르 진공 상태로 만들어 그 안에 든 새를 질식 시키는 실험을 묘사하고 있다.
과학자는 손을 대지 않고 새를 죽이는 셈이닌 이 실험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바법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둠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이용해 실험의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1770년대 당시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는 프랑스였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자크루이 다비드, 1784년 캔버스에 유채,
330×42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랑스.
미술사상 최고의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프랑스 대중은 1785년 살롱전에 출품된 이 작품에 앞다투어
꽃을 바쳤다. 이념과 예술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 대중이 처음으로 실감한 것이다.
국가와 목숨을 함께 하겠다는 젊은 군인들의 결심은 간결한 굵은 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꽉 짜인 화면 전체에서 긴장감과 에너지가 폭발하는 듯하다.
다비드의 영광은 혁명 이후, 그리고 나폴레옹 궁정의 수석 화가로 일했던 1812년까지 계속되었다.
<마라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 1793년, 캔버스에 유채,
165×128cm, 왕립미술관, 브뤼셀, 벨기에.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초상은 결코 자랑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마라의 죽음을
(욕실에서 방문객을 맞다왕당파 처녀인 샤롤로트 코르데이의 칼에 피살되었다)
순교자의 죽음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어두운 배경 속에서
팔과 머리를 늘어뜨린 채 죽어 있는 마라의 몸은 마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처럼
비장하고도 엄숙해 보인다. 여기에서 다비드는 다시 한 번 격렬한 혁명 지지자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가면무도회가 끝난 후의 결투>, 장레옹 세롬, 1859년 캔버스에 유채,
39×56cm, 월터스 미술관, 볼티모어, 미국
《가면무도회》가 초연된 1859년,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국왕으로 군림하고 수상 카부르가
실제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입헌군주제로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남부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이었다.
1861년 3월 17일에 통일 이탈리아 의회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 왕국의 왕으로 선언하게 된다.
이에 앞선 1월 베르디는 주위의 권고로 의회 의원에 출마 당선되었다.
이탈리아 통일에 베르디의 오페라가 끼친 영향이 바로 문화 국가주의의 위력이 발휘된 경우일 것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선율에 열광하던 이탈리아 민중들은 자신들이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하나의
민족임을 깨달았으며, 결국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것이 수순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음악은 때로 어떠한 논리나 연설보다도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된 이탈리아는 베르디에게 큰 빚을 진 것이 분명하다.
<폴리 베르제르의 바>, 에두아르 마네, 1882년 캔버스에 유채,
96×130cm, 코톨드 갤러리, 런던, 영국
피로를 애써 참으면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상대하고 있는 무표정한 여급 쉬종이 당시 파리의 가난한 처녀들의
실상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젊음은 어둡고 탁한 술집의 공기 속에서 속절없이 시들어 가고 있다.
쉬종의 모호한 시선과 거울에서 보이는 실제 모습과의 각도의 불일치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마네는 매독으로 인해 중추 신경이 마비되어 더 이상 걸을 수 없었고 다리가 괴사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마네는 쉬종의 시선으로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림이 그려진 지 1년 후인 1884년 4월 마네는 51세로 타계했다.
(위)<두 명의 발레리나>, 에드가 드가, 1879년, 종이에 파스텔, 셀번 미술관, 버몬트, 미국
(아래)<발레 무대 리허설>, 에드가 드가, 1874년, 종이에 파스텔, 52×70.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미국.
마네의 절친한 동료이자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단골 관객이었던 에드가 드가가 그린 숱한 발레리나 그림들은
결고 아름답지 않은 하류층 여인들을 담고 있다. 실제로드가가 모델로 삼았던 무용수들 중 상당수는 나이가
들면서 매춘으로 직업을 바꾸었다. 당시 파리 극장들에는 '아보네' 라고 불리는 부유한 후원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리허설 중에 무대를 드나들거나 무대 옆에서 옷을 갈아입는 무용수들을 볼 수 있었다.
마네의 그림들 중에는 이 아보네들이 보일 듯 말 듯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 1863년, 캔버스에 유채, 130.5×190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
<롤라> 역시 《라 트라비아타》의 내용과 비슷하다. 이 그림은 1878년 살롱전에서 낙선했다.
옷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모습이 진짜 창부의 침실을 연상시켜 부도덕하다는 것이 낙선의 이유였다.
<올랭피아>는 고전적인 기법을 빌려 고급 창부를 그린 작품이다. 누드란 익명이거나 여신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빅토린 뫼랑이라는 모델을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올랭피아는 고객이 보낸 꽃다발을 차갑고
오만한 표정으로 무시한다. 이 작품에 파리의 관객들, 특히 남성들이 격렬한 비난을 퍼부은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다. 19세기 프랑스 예술에서 창부가 인기를 누린 것은 19세기 부르주아의 삶에서
그들이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1856년 강화조약 체결>, 존 에버렛 ㅁ리레이, 1856, 캔버스에 유채, 120×91cm,
미네아폴리스 아트 인스티튜트, 미네아폴리스, 미국
여성은 당시 정치, 사회, 국제 문제에 무지하며 오로지 가정과 연인을 지키고 보호라려고만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즉 여성은 남자만을 구원하는 존재인 동시에 남성에게 종속적인 존재일 뿐이다.
'나이팅게일처럼 헌신적이고 정숙한 여성'의 이미지는 파리의 화가들이 즐겨 그린 거리의 여인들과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이 이미지 역시 19세기 후반의 영국 여성을 구속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유럽 다리>, 귀스타브 카유보트, 1876년, 캔버스에 유채, 125×181cm, 프티 팔레 미술관, 제네바, 스위스.
미술과 음악을 막론하고 19세기 후반의 예술가들 사로잡은 주제는 '주관'과 '도시'
그리고 '역동성'과 '자유로움'이었다. 근대인들은 전례 없이 빠른 발전과 도시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이 이 새로운 풍경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려 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코롤드는 미술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그야말로 자수성가한 상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인상주의의 잠재력을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전까지 다양한 미술 작품들을
수집해 본 경력이 있던 그는 인상주의 작품들이 그때까지의 서양 미술사 경험들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미술마저도 선도해 나갈 수 있는 걸작들임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 프란츠 그사버 빈터할터, 1846년, 캔버스에 유채,
250×317cm, 영국 왕실 컬렉션, 윈저, 영국
'윈저의 미망인'이라고 서명할 정도로 평생 슬픔 속에 잠겨 지낸 빅토리아 여왕이었지만,
시종 브라운과 내연 관계였다는 것은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산업 구조를 이루었으면서도 이러한 경제 발전을 이룬 중산층이
귀족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에 대해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영국만의 특이한 모순이었다.
영국식 영어에 어처구니없이 거들먹거리고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비꼬는 말로
'빅토리아 시대 사람 같다'는 표현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매우 안정되고 완벽했던 빅토리아 시대에는
이런 기묘한 모순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그네스 전야>, 윌리엄 홀먼 헌트, 1848-1857년, 마호가니 패널에 유태
25.3×38.5cm, 워커 미술관 리버풀, 영국.
쉐익스피어와 테니슨의 작품들, 전설의 아서 왕 이야기 등 영국 문학의 오래된 전통이
라파엘전파의 작품 주제로 즐겨 사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영문학의 발전 없이는
라파엘전파라는 지극히 영국적인 회화 장르도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위 그림도 존키츠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결국 라파엘전파라는 시대 착오적인 양식의 회화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숨막히는 현실을 도피해 보려는 화가들의 일탈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황금 계단>, 에드워드 번 존스, 1880년, 패널에 유채, 269.2×116.8,
테이트 브리튼, 런던, 영국.
그리스 신화의 뮤즈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지극히 평면적인 뮤즈들의 신체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은 색감은 명백히 라파엘전파의 것이다.
<어머니(회색과 검은색의 구성)>,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1871년, 캔버스에 유채,
144×162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
휘슬러(1834-1903)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술자나 장교가 되기를 원했던 어머니와의 갈등을 피해 유럽으로
도망친 경우다. 그의 어머니 안나는 아버지가 타계한 수 죽을 때까지 상복을 입었던 전형적인 청교도 여성이었다.
휘슬러의 붓 터치에는 어머니에 대한 어떠한 애정이나 따스함도 보이지 않는다. 휘슬러 특유의 문학적이며
감수성 어린 표현력이 유독 이 그림에서는 실종되어 있는 것이다.
너의 사랑이 머무는 곳 - Day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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