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보
조각彫刻 Sculpture
통일신라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계유명전씨 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 제106호.
1960년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碑巖寺)에서
다른 2점의 불비상(佛碑像)과 함께 발견된 아미타불삼존비상이다.
앞면은 윗부분에 비하여 아랫부분의 너비가 약간 넓은데, 가장자리를 따라서 감실형(龕室形)의 테두리를 새겼다.
그리고 그 안을 한 단 낮게 하여 상부에 커다란 이중의 주형 광배(舟形光背)를 조각하였다.
광배 좌우에는 각각 주악천(奏樂天)이 배치되었으며, 가운데 아미타불삼존상과 그 권속들이 조각되엇다.
본존은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의 연화좌 위의 네모 반듯한 대좌에 결가부좌하였고,
협시보살과 인왕(仁王)·나한(羅漢)들이 좌우에 새겨져 있다. 얼굴 부분은 마멸되어 확실하지 않으나,
머리 위에 육계(肉髻)가 높이 솟아 전체적으로 갸름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신체는 건장하며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으며,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는 두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슴 부근에서 여러 겹의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는 통견(通肩)의 법의는
무릎 아래에서 이중의 Ω자형의 주름을 이루며 네모 반듯한 대좌를 거의 덮어 흐르고 있다.
신체의 굴곡은 옷주름이 두꺼워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두광(頭光)은 원형으로,
세 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이 배치되고 가장자리에 꽃무늬와 연주문(連珠文)이 장식되었다
옆면은 주악천과 용을 새겨 앞면의 아미타세계를 장엄하였다.
이 중 특히 주악상은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이 사실적이며 자연스럽게 표현되었고,
용은 비록 상체만 남아 있으나, 용솟음치는 세부 동작이 충실히 묘사되었다.
뒷면은 4단으로 구획되어 각 단마다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불상이 5구씩 병렬로 조각되었는데,
각 불상 사이사이에 이 비상을 발원한 인명과 관등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비상은 계유년 전씨 일가의 발원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계유년은 조각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직후인 673년(문무왕 13)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비상이 조성된 곳이 옛 백제 지역이며, 발원자인 전씨의 관등 중에
달솔(達率)과 같은 백제의 관등명이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의 유민들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협시보살상은 본존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연화좌 위에 서 있는데,
삼국시대의 엄격한 정면 직립의 자세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아직 통일신라시대의 삼곡(三曲)자세로까지는 발전되지 못한 형태이다.
머리에는 연꽃을 돌린 간단한 원형 광배를 두르고 있으며, 마멸이 심하여 자세하지는 않으나,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듯하다. 목에는 기다란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을 두르고 있고,
천의는 무릎 부근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었다. 한 손은 들어 올려 가슴 근처에서 보주를 들고 있으며,
한 손은 내려 정병(淨甁)을 잡고 있다. 이 협시보살상 아래에는 걷고 있는 형태의 사자 두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보살상 좌우에 있는 인왕상 또한 본존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 있는데,
왼쪽[向右]의 인왕상은 왼손에 긴 창을 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표현된 인왕상은 당시의 인왕 표현과는 달리
갑옷을 입은 모습이며, 허리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는 영락 또한 특이하다.
나한상은 모두 4구로서 상체 부분만 조금 보이고 있는 보살상이나 인왕상과 동일선상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들 불상 위로는 거대한 이중의 주형 광배가 조각되었다.
화염형(火焰形)의 연주문으로 광배를 2분하였는데, 내부에는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화불(化佛) 5구가 조각되고,
본존의 두광 바로 위에 커다랗게 보주를 새겨 놓았다. 외부에는 좌우 각 4구의 비천(飛天)을 새기고,
중앙에는 머리 위로 궁전형을 받들고 있는 좌상 1구를 배치하였다. 광배 밖,
즉 비상의 최상부 좌우에는 천궁(天宮)을 받들고 비약하는 천인을 조각하였다.
앞면 하단에서 측면·뒷면에 이르기까지 비상을 조성한 연대를 비롯하여
발원자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불상 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명문'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국보 제108호.
높이 91㎝.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원위치는 알 수 없고
6·25전쟁 이후부터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 부근의 서광암(瑞光庵)에 봉안되었던 것을
1961년 현위치로 옮겨왔다. 이 상은 비암사(碑巖寺) 납석제비상들과 함께
연기군에서 발견된 납석제불비상 7점 중의 하나이다.
이 비상들의 명문에 의해 백제 유민들이 삼국통일 후
동일한 재료로 조각양식도 유사하게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서광암 불비상은 가장 크고 지붕돌과 연화대석을 갖춘 본격적인 비상으로서
원형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중요한 예이다.
현재 2단의 장방형 지붕돌과 밑부분에 반원형으로 튀어나온 연화대석의 1/3 가량이 파손되었고
납작한 네모기둥 모양의 비신의 표면도 마멸이 심하다.
지붕돌의 밑부분에는 장막형이 늘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상단의 네 귀퉁이와 중앙의 앞뒤 모두 6곳에 장신구가 삽입되었던 구멍이 남아 있다.
2단의 지붕형식은 건축양식 연구에도 중요하며
일본 호류 사[法隆寺] 석가삼존불의 천개, 귤부인주자의 옥개, 송림사(松林寺) 전탑출토 사리기의
2단 상형(箱形)천개 형식 등과 비교된다. 비신의 앞면에 도드라지게 조각된 삼존불상 좌우에
4줄씩 조석기(造石記)를 새겨 조성배경을 밝혔다. 비신과 지붕돌 표면에 소형불좌상 920여 구가
얕게 부조된 것으로 보아 천불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삼존상 중 본존은 네모난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보주형 두광은 연판·연주무늬·불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본존은 통견(通肩)의 법의를 입고 있으며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수평으로 들어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어 아미타수인에 가깝다. 배부분에 반복되는 옷주름 선과 대좌를 덮는 옷단이 파상으로
반복되는 모습은 매우 형식화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양쪽 보살입상은 원형 두광을 뒤로 하고 둥근 연화대석 위에 서 있는데
목걸이는 가슴까지 늘어져 있으며 천의는 세로의 음각선으로 처리된 군의 위에서 X자형으로 교차된다.
불·보살의 두광이나 불의(佛衣)의 단에 돌려진 연주문을 비롯하여 삼존상의 조각양식은
대체로 삼국시대의 백제양식이 형식화된 단계로 보인다.
조석기의 내용 중 판독된 부분만 종합하면 진모(眞牟)씨 등과 신도 250명이
계유년 4월 15일에 국왕대신·칠세부모·법계중생을 위해 '□彌□' 및 제불보살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조성시기인 계유년은 673년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초기의 백제계 불상양식 연구의 자료로서나 천불신앙에 의한 천불상 표현의 예로서 중요한 상이다.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慶州九黃洞金製如來坐
높이 14㎝. 국보 제8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4년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낭산(狼山)의 동북쪽 기슭에 있는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 복원하면서 나온 사리함 속에서 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에 새겨져 있는 기명(記銘)에 의하면
탑은 692년(효소왕 1)에 세운 것이며, 그 뒤 706년 6치[寸] 크기의 전금미타상(全金彌陀像) 1구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및 불사리 4과를 함께 넣었다고 하나,
실제로 발견된 유물은 좌상과 입상의 불상 2구였다.
그중 이 불입상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머리는 소발(素髮)에 육계(肉髻)는 높지 않으나 큼직하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이 꽂혔는데, 한가운데 연꽃을 중심으로 불꽃 모양이 정교한
맞뚫림조각[透彫]으로 되어 있다. 얼굴은 갸름한 편이나 두 볼에 살이 올라 있고,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없고 어깨는 약간 좁은 편이다.
양어깨와 앞가슴을 모두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는 매우 투박한 느낌을 주며,
상의 정면을 축으로 하여 여러 겹의 U자형 주름이 나 있고,
군의(裙衣)의 밑은 좌우로 약간 퍼져서 고식(古式)을 지니고 있다
불상의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왼손은 법의의 자락을 움켜쥐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인도의 불상에서 흔히 보이는 형상으로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예에서는 매우 드문 편이다.
대좌는 따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겹겹의 연잎이 아래로 향한 연화대좌로 그 밑에 다시 12각의 받침이 붙어 있다.
이 금제불입상은 경주의 선방사(禪房寺) 터에 서 있는 삼체석불의 본존상과 같은
삼국시대 말기의 불상 형식에서 좀더 발전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새로운 불상 양식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 이 새로운 불상 양식의 특징으로는 머리와 신체의 비례가 어느 정도 맞게 된 것과 법의의 앞 주름이
여럿으로 늘어나는 표현 방식 등이다.
이와 비교될 수 있는 통일신라 초기의 예로는
경주 남산의 사제사(四祭寺) 터라고 알려진 곳에서 발견된 석조불입상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불상은 탑에서 함께 발견된 좌상보다 양식적인 면에서 고식을 보이므로,
706년에 넣었다는 아미타상이라기보다 692년에 탑을 건립할 때 넣은 불상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여래입상은 연대가 거의 확실한 7세기 말의 왕실 봉납의 불상으로
신라시대 불상 연구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경주 구황리 금제여래좌상慶州九黃里金製如來坐
국보 제79호.
1934년 경주 구황동 낭산(狼山)의 동북쪽 기슭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을 해체 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사리함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성덕왕 때인
706년에 이 사리함 속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및 불사리(佛舍利) 4개와 함께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명문에는 아미타상의
크기가 6치[寸]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발견된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불상 전체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합쳐진 광배와 불신, 연화대좌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고, 각 부분이 분리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불상의 머리는 민머리인 소발(素髮)이고 육계(肉髻)는 비교적 큰 편이다.
양쪽 뺨은 통통하고 얼굴이 둥근 편이며, 눈·코·입의 표현이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서 이상화(理想化)의 경향이 뚜렷하다.
또한 얼굴에는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으나 함께 출토된 입상보다는 더 위엄이 있어 보인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옷은 양어깨를 덮은 통견(通肩) 형식으로 앞가슴을 많이 드러내고
그 속에 대각선으로 걸쳐 입은 내의가 보인다.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한 양다리 위로
법의의 주름이 덮여 있어 신체의 윤곽이 잘 보이지는 않으나,
양무릎의 둥근 부분은 팽팽한 옷주름으로 강조되어 양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좌 위에 덮인 주름은 대칭으로 정돈되어 겹친 부분의 주름이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처럼
왼쪽 손바닥을 무릎 위에 놓고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연결된 판금(板金)으로 두광에는
연화를 중심으로 인동당초문과 화염문이 맞뚫림조각[透彫]으로 되어 있고,
신광은 찍어낸 인동당초문 주위에 다시 인동당초문과 화염문을 맞뚫림 조각으로 해놓았다.
연화대좌는 연잎의 가운데에 두 돌기가 나온 겹꽃잎의 연꽃이 위로 향하고 있는 상대와
밑으로 향하고 있는 하대를 원형의 중대가 이어주고 있으며,
대좌의 앞부분이 불상의 옷주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이 불상에서 보이는 옷주름의 표현이나 불상의 양감이 강조되는 것은
성숙된 당나라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며 수인은 당나라 초기 7세기의 불상에 많이 보이는 것으로,
8세기 초의 우리 나라 불상 양식의 성격을 고찰하는 데 매우 중요한 예가 된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慶州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과 아미타불입상
715년에 제작된 보살상으로 전체 높이 2.57m, 불상 높이 1.83m이며 국보 제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 신계리감산사(甘山寺)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함께 발견된 아미타여래입상과 함께 1915년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광배의 뒷면에는 선각으로 새긴 긴 명문이 있는데,
비슷한 내용의 명문이 같이 발견된 아미타여래입상의 광배 뒷면에도 있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명문에 의하면 이 보살상의 조성한 사람은 김지성(金志誠)이다.
그는 통일신라시대 중아찬(重阿飡)의 집사시랑(執事侍郎)까지 지냈으며, 67세에 관직을 떠나서
719년(성덕왕 18)에 자기의 땅 감산장전(甘山莊田)을 바쳐 감산사를 짓고,
석조아미타불입상과 이 미륵보살상을 만들어 부모의 명복을 빌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중엽까지는 고승들에 의하여 많은 경론 주석서들이 나온 시기로
경주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의 명문에는 『유가사지론』과 관련이 있는
‘무착(無著)’, ‘십칠지지법문(十七地之法門)’ 등이 언급되어 있어 이 보살상을 조성한 김지성이
법상종과 관련 깊은 유가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명문 중 일부는 『삼국유사』 권3 남월산조(南月山條)에도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이 미륵상을 금당에 안치하였다고 하여
감산사의 주존이 미륵보살이었음을 알 수 있고,
아울러 우리나라 불교 법상종(法相宗)의 주불이 미륵보살이었음은 여러 기록에도 보인다.
이 보살상은 커다란 주형 광배(舟形光背)와 고부조(高浮彫)의 불신(佛身)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연꽃의 대좌 위에 얹혀 있다. 얼굴은 살이 찐 편으로 두 턱이 졌으며 눈은 부은 듯하고
큰 코와 꽉 다문 두꺼운 입에서 약간 이국적인 인상을 느낀다.
가슴에는 두 줄의 매우 화려한 목걸이가 있고, 팔뚝과 손목에 팔찌가 있으며,
영락(瓔珞)이 왼쪽 어깨에서 늘어져 오른쪽 무릎 뒤로 돌려져 있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가슴을 가로질러 오른쪽 겨드랑이 뒤로 돌려져서
오른 팔뚝을 두 번 감고 아래로 늘어졌고, 왼쪽 부분은 시무외인(施無畏印)처럼 들려진
왼손의 팔뚝에 걸쳤다가 밑으로 구불거리며 늘어져 있다.
천의의 주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그 접힌 끝부분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치마형식의 하의(下衣)는 허리 부분에서 겹쳐져서 굵은 띠 장식으로 매어졌고,
접힌 자락은 여러 겹의 짧은 주름을 이루고 있다. 치마의 주름은 두 다리 사이로 모아져서
허리쪽으로 끌어올려졌으며, 그 늘어진 주름의 형태가 약간 도식적인 굴곡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한 개의 돌로 조각되었으며, 맨 위에는 위를 향한 앙련(仰蓮)이 있고,
그 밑에는 복련(覆蓮)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맨 밑에는 팔각대석(八角臺石)을 받치고 각 면에 안상(眼象)을 음각하였다.
이 보살상은 복잡한 장식이 있는 높은 관을 썼는데,
그 윗부분에 작은 부처의 앉은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보살의 관에 이러한 화불(化佛)이 있는 경우는 대부분 관음보살을 나타내고 있는데 반하여
미륵보살로 명문화되어 있어 미륵보살의 도상으로서는 특의한 경우이다.
불상 전체로 보아 몸을 약간 오른쪽으로 비튼 삼곡(三曲) 자세이며,
어깨는 넓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둥글고 통통한 팔뚝으로 이어지고,
허리와 두 다리의 신체적 굴곡을 강조하듯 표현된 옷주름의 처리 등이 매우 육감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천의를 걸친 형식이나 목걸이, 허리띠, 치마를 입은 모습에서 삼국시대 보살상의 양식과는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이러한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에 새로 도입되어 유행하였던 보살상 양식으로,
이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 주는 예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삼존불의 양쪽 협시상(脇侍像)이나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의 서쪽 보살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보살상들은 조성 연대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계통의 원형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새로운 불상 양식의 근본적인 원류는 인도의 굽타 시대의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Victoria&Albert Museum)소장의 산치 출토 석보살상 등과 연결되고,
점차 중국 당나라 불상 양식으로 진전되어 통일신라시대에 영향을 주게 된다.
중국당(唐)나라 장안(長安)의 보경사(寶慶寺)의 벽을 장식하였던
여러 종류의 삼존불상의 협시보살상들과 비교가 되는데,
특히 이 상들은 703년과 704년에 해당하는 명문들이 있어 양식 비교연구에 적절한 예라고 생각된다.
당시대의 보살상은 사선으로 설친 영락인 사괘(斜卦) 등의 표현은 보이지 않으나
벌거벗은 나형(裸形)의 상체에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를 사선으로 묶은 낙액(珞腋)을 두르고,
허리에서 한번 접어 착용한 요포(腰布), 화려한 목걸이를 착용한 보살상의 모습은 보경사(寶慶寺)
등과 같은 당(唐)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포가 밀착되어 나타난 다리의 양감과 이상적인 사실주의적 모습은
8세기 동아시아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국제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다리 사이로 지그재그로 흘러내리는 옷주름은 당(唐) 신룡(神龍) 2년(706)에 조성된
보살입상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동시대 당(唐) 보살상과의 유사성이 확인된다.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如來立像
국보 제82호.
높이 1.74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 신계리 감산사지에 있었던 것을
1915년에 서울로 옮겨왔다. 전형적인 등신대 불상인데 광배 명문에 의하면 719년경에 당시 집사성 시랑을 지낸
김지성(金志誠)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이며 양식면에서는 8세기 전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불신·광배·대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불상은 불신과 대좌의 높이 비율이 3:1이고,
등신대의 불신에 적당한 광배로 전체적인 구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균형을 이룬 구도는 형태에서도 잘 나타나 머리와 불신의 높이 비율이 1:4로,
굴불사지석불상 중 아미타상이나 벽도산 아미타상(碧桃山阿彌陀像)과 함께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인 것이다.
비록 정면에서 보면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강건한 풍모의 석불입상이지만
부풀고 풍만한 얼굴에 눈·코·입은 세련되게 표현되어,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사암불입상(砂巖佛立像) 같은 이국적인 과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신라의 토속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떡 벌어진 가슴과 팽팽한 어깨, 당당하게 버티고 선 위엄 있는 자세 등은
감각적인 사실주의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얼굴이나 신체의 묘사에서 자비스러우면서도 당당한 부처님의 위엄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주형 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를 등지고 있는 이 불상은 당당하고 위엄 넘치며,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감싸여 있어서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다.
하지만 신체 각 부분의 탄력적인 모습과 함께 박진감이 넘치는 표현은 인체를 이상적인 불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불상은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전신으로 걸치고 U자형의 주름이 상체에 유려하게 흐르다가
다시 양쪽 다리로 각각 내려가서 옷주름을 이루고 있다. 두 다리의 U자형 옷주름과 함께 목의 옷깃을 한 번
뒤집는 반전수법(反轉手法)은 전형적인 우드야나(udyana, 優塡王像)식 착의법이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신라 불상에서는 이 불상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불의는 약간 두꺼우면서 악센트를 강하게 넣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불상 형태와 함께 불상 자체도 박진감 나도록 하는 요인이 된다.
불상 광배 뒷면에 새긴 21행 391자의 불상 조성기는 이 불상이 법상종 사찰의 강당에 모시던
아미타불임을 밝히고 있어 금당주존(金堂主尊) 미륵보살과 함께 당대 법상종의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완성된 이상적인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뿐만 아니라
명문에 의해 조성 연대와 발원자가 분명히 밝혀진 불상으로서
우리 나라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龜尾善山邑金銅如來立像
국보 제182호.
1976년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면 봉한2리 뒷산에서 사방공사를 하던 중에
금동보살입상 2구(국보 제183·184호)와 함께 출토되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불상들은 본래 발견되기 70여 년 전 어느 농부에 의하여 부근의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발견되어 보관되다가,
그 수년 뒤 현재의 발견 장소에 다시 묻은 것이라 한다.
원래의 발견지로 추정되는 대밭골의 뒷산은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많이 출토된 곳이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절터로 추정된다.
함께 발견된 3구는 모두 약간씩 다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중에서 이 여래입상이 가장 늦은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여래상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래입상은 대좌가 없어진 채 정면을 향한 직립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는 몸에 비하여 큰 편이며, 나발(螺髮)로 표현되어 있다.
머리 위에는 크고 뭉뚝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얼굴은 퉁퉁하게 살이 오른 네모진 모습인데, 예리한 각선으로 눈·코·입이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나타난다.
손 모습은 여원인(與願印)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인 듯한데 그 끝 부분이 손상되었다.
몸에는 양어깨를 가리는 통견(通肩)으로 된 법의를 걸쳤다.
배 부분에서 평형의 U자형 주름이 표현되었는데,
다리 부분에서 갈라져 각각의 주름을 이루며 발목까지 드리워진다.
두 다리 위의 주름은 서로 대칭을 이룬다.
법의가 몸에 밀착되어 불신의 형태가 뚜렷이 드러난다.
몸 뒤쪽에는 광배를 꽂았던 듯한 굵은 꼭지가 달려 있으며
머리와 등, 다리에는 주조할 때 생긴 구멍이 뚫려 있다.
몸의 형태나 세부 표현은 부드럽고 단순하며, 옷주름이 정리되어서 단정한 인상을 준다
. 이와 같은 양식적 요소들은 중국 당나라 초기의 조각 양식과 관계가 있다.
이 여래입상의 형식과 비슷한 신라의 불상으로는 719년의 명(銘)이 있는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慶州甘山寺石造阿彌陀如來立像, 국보 제82호)을 들 수 있
는데,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불입상 형식(佛立像形式)을 대표하고 있다.
이 여래입상은 위에서 언급한 법의 형식(法衣形式)의 금동불입상 중에서는 비교적 초기에 해당한다.
8세기 중엽에 이르면 법의와 불신이 조형적으로 통일감을 이루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 양식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아직 형태가 단순하고 자세가 굳었으며, 표현 수법에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점으로 보아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것으로 보인다.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국보 제200호. 정면을 향하여 가슴을 펴고 단엄한 자세로 직립하고 있다.
광배(光背)와 대좌는 없어졌다. 머리에는 보계(寶髻)가 높이 솟아 있으며,
이마 윗부분에는 좌우대칭으로 머리칼이 표현되었다. 머리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보관(寶冠)을 쓰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얼굴은 살이 올라 풍만한 편이다.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한 가는 눈과 오뚝한 콧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작은 입 등에는 보살의 자비로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신체 또한 얼굴과 마찬가지로 양감이 풍부하며 탄력성 있게 묘사되었다.
풍만한 가슴에서 가는 허리로 이어지는 신체의 윤곽이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자세는 근본적으로 엄격한 좌우대칭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팔과 천의(天衣)의 끝 부분에 변화를 줌으로써 좌우대칭의 딱딱한 분위기를 깨뜨린다.
상체는 나신(裸身)으로 천의 자락이 두 어깨에 걸쳐져 발 아래까지 부드럽게 늘어져 있으며,
왼쪽 천의의 일부분은 끊겨 없어졌다. 오른팔은 구부려 가슴에 대고 왼팔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뻗어
엄지와 중지로 무엇을 잡고 있는 듯 약간 꼬부렸다.
양팔에 아래위로 팔찌를 끼었을 뿐 신체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배 부분에는 가로줄을 그어 풍만함을 강조하였다. 허리에는 상의(裳衣: 치마)를 걸치고 있다.
상의의 주름은 좌우대칭으로, 윗부분은 양쪽에 각각 네다섯 줄의 U자형 주름이 표현되었다.
이어서 다리 아래쪽으로 내려와 길게 U자형 주름을 형성하였다.
불상의 뒷면 허리 부분에 광배를 꽂았던 큰 촉이 남아 있다.
거신광배(擧身光背)를 꽂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불상은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육체의 관능적인 미에 흐르지 않고 자비와 위엄을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서,
통일신라 초기 신라인들의 정신력과 완숙한 기법을 보여 준다.
조성 연대는 8세기 중엽부터 후반으로 추정된다.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국보 제129호. 폐사지(廢寺址)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할 뿐, 그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이 금동보살입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던 보살상의 양식과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현재의 상태는 대좌(臺座)와 보관(寶冠)이 없고, 왼손이 팔뚝에서부터 떨어져 나갔다.
도금의 흔적은 약간만 남아 있을 뿐이고 동질(銅質)의 바탕이 드러나 적갈색을 띠고 있다.
보살상은 몸에 비하여 머리는 약간 큰 편이고, 머리 윗부분에는 보계(寶髻)만이 남아 있다.
얼굴은 눈을 경계로 그 위쪽보다 아래쪽이 유난히 길어,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느낌을 주고 있다.
코는 길고 뾰족하며 귀도 길고 직선적이다.
상체는 나신이고, 두 가닥의 주름진 천의가 왼쪽 어깨에서 앞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허리에서 뒤쪽 등으로 돌아 각각 양팔 위로 흘러내리고
, 오른손이 그 중의 한 자락을 잡고 있다. 팔뚝과 손목에는 팔찌를 끼고 있다.
군의(裙衣)의 일부는 허리에서 접혀져서 다리 윗부분에 한 번 드리워지고,
나머지는 발목 위에까지 내려져 있다. 주름은 U자형의 도드라진 양각선으로 표현되었고,
두 다리 사이에는 굴곡진 형상으로 늘어졌다. 군의 자락 속에서 도톰한 다리의 윤곽이 드러나 보인다.
불상의 뒤쪽에는 목에 희미한 천의와 허리에 접혀진 군의의 윤곽이 보인다.
주조 과정에서 생긴 긴 타원형의 구멍이 머리와 몸의 상부와 하부에 각각 하나씩 뚫려 있다.
몸통 아래와 위에는 꼭지가 하나씩 있어, 광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비교적 균형이 잘 맞고 몸의 형태도 유연한 편이다.
하지만 주조 기법이나 조형상으로는 약간 딱딱한 느낌을 풍긴다.
이런 양식의 보살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719년으로 추정되는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慶州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 제81호)이나
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慶州掘佛寺址石造四面佛像, 보물 제121호)의
보살상은 재료는 다르지만 비슷한 유형이다.
이러한 보살상 형식은 중국의 당나라 조각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8세기 초기의 보살불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식이 나타난다.
이 금동보살상의 얼굴이나 몸체의 표현에서 보이는 약간의 경직성 등으로 미루어 보아
대체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慶州佛國寺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26호.
높이 177㎝.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금동불상으로 대좌(臺座)나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다.
머리는 큰 편이며 높은 육계(肉髻)나 나발(螺髮)의 머리카락은 기교 있게 만들었다.
얼굴은 길면서 근육이 부풀어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慶州栢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 국보 제28호)처럼 보이고
눈두덩과 두 뺨, 군살 진 아래턱 등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눈썹은 길게 반원으로 그려져 있고 이마와 눈두덩을 구별짓는 경계선같이 음각선이 한 줄 조각되었는데,
이러한 특징은 8세기부터 나타나지만 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던 것이다.
팽창된 눈두덩에 두 눈을 가늘면서도 길게 새겼는데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 반쯤 떠 있다.
코는 이마와 같은 높이로 연장되어 콧잔등의 반 정도가 평판적으로 표현되었고
이 코에 잇달아 인중을 뚜렷이 두드러지게 새겨 입까지 코의 연장처럼 묘사되었다.
이처럼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불안(佛顔)에서 진전되어, 느슨해진 이 불상의 경향은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상통한다.
당당하면서 장대한 편으로 떡 벌어진 어깨, 양감 있는 젖가슴, 잘쏙한 허리, 볼록한 아랫배,
얕으면서도 유난히 넓게 앉은 자세 등에서 이 불상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는 흔히 8세기 중엽경의 불상과 비교되며 9세기 후반기 불상들과도 친연성이 강하지만,
그보다는 한결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이 아래, 왼손이 위로 올라간 지권인(智拳印)으로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의 지권인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의(大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서 얇게 밀착되어 몸의 굴곡이 여실하게 드러나 보인다.
왼팔에서 내려진 옷자락은 지그재그형을 이루었는데,
이것은 가슴의 옷주름과 함께 축 늘어지고 해이해진 표현이다
. 다리의 옷주름도 무릎 부분의 아래에서 위로 세 가닥씩 올라가고
다리를 따라 빗긴 선이 서너 가닥씩 주름져 있고, 두 다리 사이의 앞섶도 지그재그형을 이룬다.
이외에 배 부근의 U자형 옷주름에도 끊어지는 수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에도 나타난다.
이 불상은 극락전에 봉안된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불국사사적기(佛國寺史蹟記)』 가운데 최치원(崔致遠)이 찬한
「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毘盧舍那文殊普賢像讚)」의 내용처럼
진성여왕이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의하여 조성한 불상으로 생각되어,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27호.
높이 166㎝. 비로전(毘盧殿)에 봉안된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이 불상은
장대한 인상을 준다. 형태는 한마디로 ‘긴장감이 이완된 장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떡 벌어진 어깨와 당당한 가슴, 늘씬한 몸매에 볼록한 아랫배 등은 건장한 남성적인 체구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긴장감과 활력이 줄어져서 어딘가 맥빠진 느낌을 준다.
얼굴의 근육도 팽창된 편이지만 근육의 이완이 역연하며,
가슴이나 어깨의 근육 역시 둥글고 부푼 모양이지만 긴장감이 해이해져 축 늘어져 있다.
이러한 특징은 선에서도 나타나, 옷주름선은 어깨나 팔을 제외하고는 부드럽고 유연한 편이나,
가령 가슴의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게 한 옷의 접힘 또는 팔에서 내려오는 지그재그형의 옷자락,
그리고 배와 다리의 옷주름선들이 축 늘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어깨와 팔, 무릎 부분의 옷접힘과 무릎 위로 내려온 형식적인 손과 팔, 무릎,
그리고 평평하게 처리한 콧잔등 등에서 직선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추상화의 경향이 엿보인다.
이 불상은 8세기에 제작된 석굴암 본존불의 특징과는 다른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불상으로서 당시 불상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경백률사 금동여래입상慶州栢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
국보 제28호. 높이 177㎝.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원래는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金剛山) 중턱에 위치한 신라의 명찰인 백률사에 봉안되었던 불상으로,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등신대(等身大)의 이 금동불상은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금동불상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서 크지 않은 편으로 인체 비례에 가깝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원형이다.
그리고 긴 눈썹, 가는 눈, 오뚝한 코, 작은 입 그리고 늘어진 뺨의 살, 턱에 묘사된 군살 등
비교적 우아한 용모를 하고 있다. 하지만 긴장과 탄력성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얼굴은 8세기 중엽경의 이상적 불안(佛顔)에서 진전된 것으로,
불상의 편년 설정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신체는 하체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묵중해지고 있다.
이것은 불쑥 나온 아랫배, 뒤로 젖혀진 상체와 함께 이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우람한 체구를 과시하고 있지만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되었다.
가슴은 비교적 넓고 양감(量感) 없이 밋밋한 편이다
. 어깨의 굴곡은 밀착된 불의(佛衣) 위로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굴곡은 허리에서도 나타난다.
대의(大衣)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두터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의 표현은 비교적 잘 드러나도록 처리되어 있다.
두 손은 보수된 것이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오른손은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은 가슴 부근에서 평행으로 두면서 약호(藥壺)를 살짝 들게 한 것 같다.
두 발은 하체의 체구처럼 우람하고 당당한 모양이다. 발가락과 발톱의 표현은 비교적 세세한 편이다.
통견(通肩)의 불의는 가슴에서 U자형으로 트여 있다. 옷주름은 비교적 간략하지만
U자형의 옷주름이 하체에 성글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씩 엇갈리면서 중심이 끊어지는 독특한 모양으로 처리되어 있다.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보물 제159호)불과 비슷한 것이다.
두 팔에서 내려진 옷자락과 발 위에 묘사된 옷자락은 묵중하여 중후하게 보인다.
말하자면 이 불상의 선묘 특징은 단순하면서도 중후한 묘법으로,
형태적 특징과 함께 이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불상의 우람한 신체는 얼굴의 특징과 함께
801년에 조성된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과 상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은 불의와 불의의 선묘적(線描的) 특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성 연대는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長興寶林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117호.
높이 273㎝. 지금은 광배(光背)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 부분에 8행의 불상 조상기가 음각되어 있다.
명문에는 858년(헌안왕 2) 7월 17일에 당시 무주(武州)와 장사(長沙: 지금의 장흥)의 부관(副官)으로 있던
김수종(金遂宗)이 발원하여 이 불상을 주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보조선사탑비(普照禪師塔碑)에는 859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성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 불상은 858년에 착수되어 859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머리 부분은 나발(螺髮) 등을 덧붙인 것이어서 그런지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大邱桐華寺毘盧庵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244호)과 비슷한 것이며,
당시의 불상 비례를 반영하고 있다. 육계(肉髻)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으로 비만하다.
편편한 콧잔등,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은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나타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의 표현,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권인(智拳印)을 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들어 위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즉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옷주름 선에서도 잘 나타난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양어깨를 감싸며,
가슴 앞에서 V자형으로 모아지고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평행의문선(平行衣文線)의 옷주름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도 힘없이 늘어져 탄력이 없이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다소 해이해진 형태와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의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63호)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奉化鷲棲寺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995호)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이 불상은 조성 연대가 확실한 불상으로,
당시 유사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되는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철불좌상이라 할 수 있다.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63호.
광배는 없고 대좌와 불신만이 남아 있다.
이 불상의 등에는 조성기가 새겨져 있어 865년(경문왕 5)에 만든 불상이라는 점과
강원도 철원군의 신도 조직인 1,500인의 거사(居士)들에 의하여 조성된 대중적인 불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육계(肉髻)의 표현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얼굴은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보다 훨씬 빈약하며,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보다도 좀 더 섬약하다.
코의 평탄적인 처리는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빈약하다.
눈이나 입 같은 세부적인 표현 또한 섬약하다.
어깨는 아주 움츠린 모습이 아니고 무릎에 비해 넓은 편이어서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다르다.
하지만 대체로 신체는 평판적이고 섬약한 편이며, 가슴·손·다리에는 양감이 표현되지 않았다.
불의는 통견의(通肩衣)로 가슴이 넓게 터졌으며, 승각기 같은 내의의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주목된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 또한 불상의 양식적 특징과 동일하다.
전체 형태는 이 시대에 유행한 팔각연화좌(八角蓮花座)이며,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는 단판앙련화문(單瓣仰蓮花文 : 홑잎의 연꽃잎이 위로 향하고 있는 무늬), 중대는 8각형,
하대는 단판복련화문으로 조성되었다. 긴 귀꽃과 중대 받침의 능형과 내곡(內曲)한 몰딩적 처리는
이 시대 대좌의 가장 대표적인 형식적 특징이다.
이 불상은 당대에 유행하던 철조불상으로, 섬세하고 평판적인 양식이나
형식적 특징에서 9세기 후기 불상의 한 형식을 정립한 불상이다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順天松廣寺木彫三尊佛龕
국보 제42호.
높이 13.9㎝의 불감으로 삼존불상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년)의 원불(願佛)로
중국당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한 아무런 기록도 없으며,
지눌의 활동연대가 고려시대이므로 그 전래 경위와 연관을 짓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송광사성보박물관에서 한때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이다.
불감은 세쪽이 경첩으로 이어진 구성으로 닫으면 포탄형(砲彈形)을 이룬다.
중앙의 감(龕)에는 본존인 불좌상과 그 좌우에 나한(羅漢)과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좌우 감에는 각각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조각되어 있다.
불감은 모두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가운데의 불감을 중심으로 좌우에 불감이 문비(門扉)처럼 달려서, 열면 너비가 17㎝가 되고
닫으면 팔각기둥 모양으로 되며, 윗부분은 둥근 반구형(半球形)을 이루는 포탄 형태의 불감이다.
중앙 감 불상은 머리의 나발(螺髮)이 뚜렷하다. 얼굴은 옆으로 약간 추켜올려진 눈,
뾰죽한 코, 붉은색이 남아 있는 입 등의 표현에서 약간의 위엄과 긴장감이 도는 표정을 볼 수 있다.
법의(法衣)는 두 어깨를 덮었는데 주름은 두 개의 줄로써 표현하여 마치 인도 및 서역풍의
조상(彫像)을 모방한 듯하다. 오른손을 들어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였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서 법의의 끝을 쥐고 있다.
법의는 대좌를 엎고 있는 상현좌(裳懸座)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상현좌는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하였으나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형태로 2단으로 이루어져
상단의 주름은 대칭되는 U자형 주름을 이루고 있으며, 하단의 주름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다.
불상의 좌우에는 두 나한이 서 있다. 오른쪽의 나이든 제자는 가섭(迦葉)으로 보주(寶珠)를 들었고,
왼쪽의 젊은 제자 아난(阿難)은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두 보살 협시는 나한의 밑쪽에 배치되어서
연화(蓮花)를 들고 서 있다. 가는 허리와 두 다리의 윤곽이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오른쪽 보살상의 앞에는 공양자(供養者) 같은 상이 있으나 왼쪽에는 없어졌다.
불상의 대좌는 법의의 주름으로 덮여 있다.
그 밑에 향로를 가운데 두고 고행인(苦行人) 혹은 공양인으로 추정되는 두 상이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서 의자에 앉아 있다.
그 옆으로 사자가 있으나 왼쪽의 사자는 파손되어 없어졌다.
감실의 천개(天蓋) 부분에는 장막(帳幕)이 둘러지고 여러 가지 구슬 장식이 있으며,
화염에 싸인 보주 장식이 약간 붉은색을 띠고 조각되었다.
대좌의 밑부분에는 고사리같이 생긴 수목(樹木)이 투각(透刻)되어 위의 연화대좌들을 받치고 있다.
좁은 공간에 여러 상들이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투각 기법과 고부조(高浮彫)로 표현된 상들은 입체감이 있고 공간성이 강조되어 있다.
오른쪽의 감실에는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사자가 받치고 있는 대좌 위에 앉아 있다.
오른손은 파손되어 없으나 왼손에는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이 있고
목걸이와 X자형으로 교차된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으로몸을 장식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왼쪽에는 연봉오리를 쥔 자그마한 보살상이 서 있다.
사자의 오른쪽에는 거의 나신(裸身)의 시자(侍者)가 두 다리를 굽힌 채 사자를 붙잡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왼쪽의 감실에는 코끼리좌에 앉아 있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역시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오른손은 들었으나 손가락을 앞으로 굽히고 있다. 반가(半跏)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반가의 자세를 취한 협시보살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중국당(唐)에서 조성된 것으로 전하는 일본 고야산(高野山)의 곤고후사[金剛峯寺]에 있는
박달나무[檀木] 불감, 당나라의 변상도 등에서 흔히 확인된다.
보현보살의 오른쪽에도 영락 장식을 한 작은 보살입상이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코끼리의 시자는 오른쪽에 발을 약간 굽히고 있다.
천개에는 좌우 불감 모두, 같은 모습으로 늘어진 구슬 장식 위에 비천상(飛天像) 셋이 투각되어 있다.
천의 자락은 위로 나부끼면서 좁은 공간이나마 운동성을 보이며 장엄(莊嚴)함의 효과를 높여 주고 있다.
가운데 비천 부분과 사자와 코끼리의 머리 부분은 불룩 튀어나오게 조각되어,
세 부분의 불감이 합치면 직각으로 만나서 꼭 닫히게 조성되었다.
이 불감의 두 협시보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본존은 석가모니불로 추정된다.
일본의 진언종(眞言宗)의 창시자인 공해(空海)가 806년경 중국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것이라고 전하는
일본 고야산(高野山)의 곤고후사[金剛峯寺]에 있는 박달나무 불감과 불감의 형태나 구조, 문양 장식
불상의 배치 등 양식이나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중앙 감의 본존은 옷의 착의법에서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2단으로 이루어진 상현좌의 상단의 U자형으로 대칭되는 옷주름과 하단의 여러 겹치는 주름 등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우측감의 문수보살에서 나타나는 2줄의 연주문으로 이루어진 X자형 영락,
Y자형으로 이루어진 목걸이 등 역시 곤고후사[金剛峯寺]의 좌우 감의 보살상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목조 불감은 매우 작으면서도 그 속에 조각된 상들은 원형 조각에 가까울 만큼 고부조이다.
또한 세부 묘사가 정확하고 정교하여 우수한 조각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
불감의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불상들의 표현이 이국적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전래하는 다른 불상들과 양식상 비슷하며
일본 고야산(高野山)의 곤고후사[金剛峯寺]와는 형태, 구성 및 재료가 동일하여
당나라 때 제작된 불감으로 추정된다.
당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나 국내에 남아 있는 불감류 가운데
이른 시기에 조성된 매우 희귀한 예로 불감을 닫으면 포탄형을 이루고 열면 세 부분으로 펼쳐지는
조선후기까지 이어지는 목조불감(木造佛龕) 형식의 이른 예를 잘 보여준다.
또한 포탄형식의 불감의 유입과 당나라 양식의 수용 문제를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익산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 유물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국보 제123-4호.
높이 17.4m. 국립전주박물관.
1965년 12월 오층석탑의 복원공사에서 1층 탑신부 중앙찰주 아래 기단부의 방형 심초석 윗면에 있는
'品' 자로 된 세 개의 방형구멍 가운데 동쪽 구멍에서 청동방울과 함께 발견되었다.
청양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 석조대좌靑陽長谷寺鐵造藥師如來坐像─石造臺座
국보 제58호.
전체 높이 232㎝, 불신 높이 91㎝. 철조불상이 채색된 나무 광배를 배경으로
거대한 흰색 석조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불
상은 대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며, 단정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아담한 육계·나발의 머리칼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의 일반적 경향과 흡사하다.
얼굴은 단정하며 눈·코·입도 단아하여 당시 선사(禪師)들의 모습을 나타낸 듯하다.
상체는 머리 부분과 비교할 때 알맞은 크기이고, 노출된 어깨와 젖가슴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움을
유지하고 있지만 다소 딱딱하다. 무릎을 넓게 벌리고 앉아 있지만 무릎 높이가 낮아 상체와 마찬가지로
양감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1989년에 불상 겉면의 회칠을 벗겨 내고 도금할 때 왼쪽 무릎 일부가
파손된 것을 확인하고 보수하였다.왼쪽 무릎 끝 부분 뒷면이 파손되었고 측면은 금이 간 상태였다.
수인은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리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왼손 손바닥 위에 약그릇[藥壺]이 놓여 있어서 흔히 약사불(藥師佛)로 통칭되어 왔다.
그러나 원래부터 약그릇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고 현재의 손 상태로 보아
보수 때 후보(後補)하였을 가능성이 짙다.
왼손은 장지와 약지 끝마디가 절단되었고 오른손은 손목의 접합부가 파손되어 철심을 박아 이었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불의(佛衣)를 입고 있다.
옷주름은 얕은 돌기선으로 간략한 선묘를 나타내고 있으며,
무릎에도 몇 가닥의 선이 무릎 중간에서 마무리되어 있어 당시의 일반적 경향을 잘 보여 준다.
대좌는 중첩된 탑형(塔形) 또는 수미산 형태를 보여주는 특징 있는 사각형 대좌이다.
사각형 대좌는 9세기 후반기에 유행된 형식이지만 이 대좌는 한결 장식적이다.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었다. 지대석은 매우 넓은 편으로,
사방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자리가 있어서 이 불상이 원래 목조불감(木造佛龕) 안에
봉안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대는 지대석 위에 놓이며 1면에 안상 4개씩 새겨져 있고,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의 복판연화문[複瓣蓮花文: 겹잎의 연꽃잎무늬]이
양감 있게 부조되었다.
각 면 5잎, 모서리에 각각 1개씩이며 여기에는 큼직한 귀꽃까지 조각되었다.
중심 연꽃 외에는 옆으로 비스듬하게 조각되어 10세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다시 체감되면서 중대받침들이 올라가는데,
각형받침 3, 몰딩받침 1, 이 위에 다시 역몰딩받침이 있고 중대가 놓여 있다.
중대는 높은 편인데, 각 면에 세로로 긴 안상이 두 개씩 새겨져 있어서
좀 더 가늘고 기다랗게 보인다.
상대는 너비가 중대받침의 하단과 같으며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이 앙련은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 홑잎의 연꽃잎무늬]이지만 안에 3중 꽃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하대의 복련과 조화를 이룬다.
광배는 원래 석조광배였을 것이나 파손되어 조선시대에 목조불감으로 대체한 것 같다.
주형 전신광배(舟形全身光背)로, 테두리에 불꽃무늬, 불신(佛身) 주위로 꽃무늬를 새기고 있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유행한 원형 광배를 모방하여 조선시대에 나무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철불좌상은 통일신라 말 고려 초 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불상으로 평가된다.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江陵寒松寺址石造菩薩坐像
국보 제124호. 높이 92.4㎝.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이 보살상은 강릉시 남항진동 한송사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한송사는 문수사(文殊寺)의 속명(俗名)이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돌려받았다.
이 보살상에 대한 기록은 이곡(李穀)의 시문집인 『가정집(稼亭集)』에 수록된
「동유기(東遊記)」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수와 보현의 두 석상은 땅에서 솟아 나온 것이라 한다.
동쪽에 사선비(四仙碑)가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 물에 빠뜨려 오직 귀부만 남았다
(人言文殊普賢二石像從地湧出者也 東有四仙碑爲胡宗朝(旦)所沈 唯龜趺在耳).”는 기록이 전한다.
이 글은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이 두 구로써 쌍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며,
강릉시립박물관 소장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1호)과 짝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밖에도 『동문선』에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와 공민왕과 우왕 때에 활약하던
정추(鄭樞) 등이 문수사를 노래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이지만 양식적으로는 석굴암 감실(龕室)의 보살상과 같은
통일신라 조각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 정교한 작품이다.
두드러진 특징은 머리에 높은 원통형 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한송사지 보살상 뿐 아니라 근처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4호)과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 지역에서 유행하던 형식으로 보인다.
세부 표현을 살펴보면,
얼굴은 둥글고 통통한 직사각형으로 눈을 반쯤 떴는데 눈초리가 길며
눈썹이 깊이 패었다. 코는 약간 매부리코이고 입술에는 붉은 채색의 흔적이 보인다.
고려 초기의 불상에서 흔히 보이듯이 귀는 양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다.
이마의 커다란 백호공(白毫孔) 속에 박혀 있던 수정이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손은 크고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오른손에는 연꽃을 쥐고 왼손은 검지만
곧게 편 독특한 수인을 취하고 있다. 목에는 굵은 삼도(三道)가 띠처럼 무겁게 새겨지고
수발(垂髮)이 양어깨 위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상체에는 두꺼운 천의(天衣)를 걸쳤는데 천의와 군의(裙衣)의
옷자락 무늬가 부드럽고 선명하며 주름은 넓고 편평하다.
특히 이 보살상은 다리를 편안히 놓는 서상(舒相)의 자세로 앉았다.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하고 왼쪽 다리를 밖에 두는 좌서상(左舒相)을 취하고 있어서
우서상(右舒相)을 취한 강릉시립박물관의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반대되는 자세이다.
또한 반타원형의 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이것은 원 대좌에 끼워 넣기 위한 대좌 촉으로 생각된다.
신복사지 석불좌상처럼 원래의 연화대좌는 따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살상의 명칭은 『동문선』에 기록된 바와 같이 문수보살일 수도 있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도상적(圖像的)인 문제와 함께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 초(10세기)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로서 주목된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浮石寺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불상 높이 2.78m, 광배 높이 3.8m.
무량수전 안에서 동남쪽을 향하여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놓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에 육계(肉髻)가 큼직하다. 얼굴은 풍만하며,
길게 올라간 눈초리, 날카로운 콧날, 두터운 입술 등의 상호(相好)에서는 근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건장한 신체의 결가부좌한 자세는 안정감과 엄숙한 느낌을 준다.
왼쪽 어깨와 팔을 덮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는 가슴과 배를 지나며
촘촘한 평행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모양의 옷주름은 양쪽 다리에도 표현되어 있다.
당당하면서도 장중한 신체, 안정감 있는 자세, 우견편단의 착의법, 옷주름의 표현 등은
석굴암본존불을 모본(模本)으로 삼은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33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비롯한 고려 초기 일련의 불상들과 같은 계통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이나 형식화로 흐른 옷주름 등은
초기 양식에서 점차 후기 양식으로 변모되어 가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에 특징적인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구전에서는 두 손이 파손되는 등 손상을 입어 조선시대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원래 모습이 항마촉지인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불상이 봉안된 전각의 명칭이 무량수전이고,
부석사 경내에 있는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 1054년)의 비문에 보처(補處: 주불의 좌우에 모신 보살)가 없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불상의 명칭은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불상 뒤에는 당초문(唐草文)과 불꽃무늬가 조각된 목조광배가 따로 조성되어 있는데,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안에 각기 3구와 4구씩의 화불(化佛)을 부착시켰던 흔적이 남아 있다.
광배 안에 새겨진 치밀한 당초문이나 광배 밖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불꽃무늬는
불상의 위엄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교한 고려시대 불교 미술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금동삼존불감
국보 제73호. 높이 18㎝. 간송미술관 소장.
불각(佛閣)의 형식을 취한 감(龕) 내부에 금동의 삼존불을 봉안한 것으로,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의 목조건축 양식과 조각 수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예이다.
불감의 형식은 난간을 돌린 기단 위에 따로 불당의 모형을 만들어 얹은 것이다.
불당의 네 귀퉁이에 배흘림기둥(엔타시스: 기둥의 중간 부분이 아래·윗부분보다 약간 부푼 형태)을 세우고
정면과 양측 면을 개방하여 안이 잘 보이도록 하였다.
기둥 위에는 2단의 공포(栱包)가 있고,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空間包)가 하나 놓여 있다.
지붕은 우진각 형식으로 기왓골이 표현되었다. 용마루 양쪽에는
치미(鴟尾: 대마루 양끝에 세운 매 머리 모양의 장식)가 있고, 네 귀마루에도 봉두(棒頭) 같은 장식이 있다.
불감 내의 삼존불은 본존불좌상을 두 협시보살입상이 시립(侍立)한 것으로, 표현 수법은 서로 같다.
본존은 높은 네모반듯한 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는데, 대좌 밑에 따로 연꽃잎을 끼워 놓았다.
머리는 나발(螺髮)로 얼굴을 약간 숙였다. 이목구비의 표현 수법은 치졸하다.
두꺼운 통견(通肩)의 법의는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묘사되었다.
손 모양은 오른손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왼손은 무릎 위에 대고 있다.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으로 되었으며, 투각(透刻)의 불꽃무늬로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다
좌우 보살상은 형식이나 표현 수법이 같다.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썼으며 구슬장식이 선각으로 표시되었다.
그 양쪽에서 늘어진 머리카락은 어깨를 덮고 있다.
천의(天衣)와 상의(裳衣)는 두꺼우며 옷주름이 투박하고 형식적으로 묘사되었다.
본존 쪽으로 향한 손은 두 보살 모두 시무외인을 취하고, 다른 손은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발은 매우 작으며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서 있다. 광배는 본존과 같은 형식이다.
불감 자체에는 아직도 도금색이 찬란하며, 지붕에는 녹청계의 색채가 남아 있는 등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이 불감이 보여 주는 불당의 형식은 매우 고식(古式)으로,
지붕 부분은 신라 말엽 또는 고려 초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건축 기단부의 단순하고 고졸한 형태, 단칸의 주심포(柱心包)집 모양이면서
공간포 하나씩을 배열한 다포계(多包系) 구조, 배흘림기둥이 있는 우진각 지붕, 용마루 양끝에 있는
중국 오대(五代)·북송풍(北宋風)의 치미 그리고 네 귀마루의 봉두형 장식 등이 고식을 보여 준다.
불감에 비하여 삼존불의 조각 수법은 매우 치졸하고 서툰 편이다.
본존불의 허리가 길고 하체는 짧으며, 옷주름이 불규칙한 점이라든지,
보살상의 특이한 보관과 목걸이의 형식 등은 중국 북송과 요시대(遼時代)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불감과 불상의 양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대체로 11∼12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黑石寺木造阿彌陀佛坐像幷腹藏遺物 - 불상
국보 제 282호
이 불상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대표적인 목조 아미타불 좌상으로 높이 72cm, 어깨 폭 29cm , 무릎 폭 50cm이다.
높은 상투모양의 머리에 얼굴은 계란형의 수척한 모습이며, 아담한 형태로 체구도 단정하다.
복장기(腹藏記)와 불상조성 권선문(勸善文)의 내용에 의해 이 불상은
조선 세조(世祖) 4년(1458) 왕실과 종친들의 시주로 조성된 삼존상(三尊像) 가운데 한 분이고,
원래 정암산 (井巖山) 법천사 (法泉寺)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복장유물은 불상 조성의 절대 연도를 알려주고 있어 조선 초기의 불교조각사,
서지학, 직물염직 분야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흑석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사찰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찰로 내려오다가
1945년 다시 지어졌으며, 이 불상은 그 이후에 이곳으로 옮겨 모셔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상 몸체 안에서 나온 발원문을 소개하자면.
서방정토 교주이신 아미타불은 이 사바세계에 특별히 중생들을 제도하여 구원해야 하는 인연이 있으니
아미타 부처님을 한 번이라도 부르면 극락세계의 구품연대 위로 맞이하여 인도해 주시며,
관음보살은소리를 듣고 괴로움을 구제하여 중생을 고뇌에서 속히 벗어나게 해주시는 분이고,
지장보살은 명부간에 상주하시며 중생을 고뇌에서 속히 벗어나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이 삼존의 위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비구(빈도)는 삼존상을 이루고자 하나 힘이 미약하여
비용 마련이 어려우니 이에 널리 모든 분들에게 무루의 뛰어난 선생을 행하여 수승한 인연을 짓기를 고합니다.
임금께서는 수명을 누리시고 나라는 복을 받고 만백성들은 아무런 근심 없기를 삼가 기원합니다.
1457년 2월 간선도인 거목.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平昌上院寺木造文殊童子坐像
국보 제221호.
높이 98㎝. 이 동자상 안에서 발견된 복장유물(腹藏遺物, 보물 제793호)에 의하면,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 부부가 1466년(세조 12)에 문수동자상을
문수사에 봉안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왕실 발원의 동자상임을 알 수 있다.
동자상임을 알려주는 양쪽으로 묶은 동자 머리를 제외하면,
자세라든가 착의법(着衣法) 등에서 보살상 형식을 따르고 있는 독특한 형식의 동자상이다.
왼쪽 다리는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둔 우서상(右舒相)의 자세를 취하였다.
또한 오른손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내려서 엄지와 약지를 거의 맞댈 듯이
수인(手印)을 표현하였는데, 매우 섬세하다.
동자와 같이 앳된 미소를 띤 양감 있는 얼굴이라든가, 부드럽게 굴곡진 허리, 균형 잡힌 안정된 신체,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비스듬히 묶은 천의(天衣), 신체의 윤곽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부드러운 옷주름 선 등에서 앞 시대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러나 얼굴을 약간 숙인 모습이나 가슴 아래에까지 올라오는 상의(裳衣: 치마)의 윗부분을 수평으로 처리한 점,
불룩한 가슴의 젖꼭지 표현 등에서 같은 시기에 조성된 수종사(水鐘寺) 팔각오층석탑 출토 금동석가불좌상
(1459∼1493년경)과의 친연성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왼쪽 어깨에 N자형으로 드리워진 천의 자락이 한 번 둥그렇게 말린 점이나,
목걸이 이외는 장식이 거의 없는 점은 1476년(성종 7)경에 제작된 강진 무위사(無爲寺)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의 협시보살상과 비슷하다
이 문수동자좌상은 연대와 발원자가 뚜렷하고 단독으로 봉안된 희귀한 예로서,
조선 초기의 조각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세조 때의 흥불정책(興佛政策)에 힘입어 왕실에서 조성한 수준 높은 목조상으로,
조선적인 불상미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Fields Of Gold - Bradley 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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