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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한국의 국보 / 조각(삼국시대)

한국의 국보

 

조각彫刻 Sculpture

 삼국시대 Three Kingdoms Period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


국보 제119호.

 1963년 7월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된 이 불상은 작은 금동불상 가운데서 꽤 당당하고 큼직한 불상이다.

이 점은 두터운 옷 속에 싸여 신체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하는 점이라든지 옆으로 힘차게 뻗친 새깃 같은 옷자락과 세찬 파도처럼

 물결친 옷주름의 강렬성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손·발·얼굴 등이 신체에 비해서 유난히 크다.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동시에 짓고 있는 큼직한 손,

여기에 왼손의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구부린 힘차고 절도 있는 손짓을 취하고 있는 것도 이와 잘 조화되고

 있는 점이다. 신체에서 묘사된 이러한 격렬함은 좁고 날카로운 대좌(臺座)의 연꽃무늬에서도 그리고 광배의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불꽃무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런 거칠고 격렬한 조각 수법은 중국 북방 양식과 직결되겠지만 고구려 역시 중국 북방민족,

특히 북위(北魏)를 세운 선비족(鮮卑族)과는 상당한 친연성이 있기 때문에 동일한 문화권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아마도 앞 시대의 인도적(印度的)인 양식이 크게 후퇴되고

 새로운 북방적 특징이 대두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은 불의(佛衣)에서도 나타난다. 인도 간다라식 불의는 사라지고 가슴이 U자로 벌어졌으며

 여기에 비스듬히 승각기(僧脚岐)가 표현되고 띠와 띠 매듭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연가명불상은

북위 불상과는 달리 띠 매듭인, 이른바 신(紳)을 길게 내리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고구려적인 특징이 아닌가 한다.


이런 특징은 발목 위의 하의(下衣)와 대의(大衣) 자락이 장식적이 아니라 단순, 명쾌한 점에서도 보이며

특히 얼굴의 묘사에서는 보다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 얼굴은 기본적으로 중국 용문(龍門) 석굴의 불상 양식과

 어느 정도 비교된다. 하지만 그처럼 귀족적 분위기는 없고 팽팽한 얼굴 근육은 긴장감이 넘치며

뚜렷한 코에 악센트를 주면서 눈과 입 주위로 고졸(古拙)한 미소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심오한 정신성을 강렬하게 발산하면서 섣불리 근접할 수 없는 위엄 있는 미소를 얼굴 가득 표현한 것은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과 비슷하게 청순하고 발랄한 당대의 불교적 내면세계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 걸작품이라 하겠다.

광배 뒤의 명문에 보이다시피 이 불상은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조성하여 세상에 유포시키고자 만든 것으로,

연가(延嘉) 7년의 명(銘)을 가지고 있다. 명문(銘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弟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千劫佛流布第廾九回現歲 佛比丘擣穎所供養

(연가7년 기미년에 고려국 낙랑 동사의 주지 경(敬)과 그 제자승 연(演)을 비롯한 사도(師徒) 40명이

 함께 현겁의 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기로 하였으니 그 제29번째의 불상은 비구 도영(擣穎)이 공양하는 바이다)”.








천불 가운데 29번째인 이 불상이 당시 신라 혹은 가야 지방이던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은

동시에 만들어진 다른 불상들이 주위 여러 나라에 흩어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력과 불력(佛力)의 유포 그리고 통일의 의지를 주위 모든 나라에 천명한 의의가 있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강인하고 격렬한 불상 양식은 고구려적인 새로운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불상이라 하겠다.







금동계미명삼존불

국보 제72호.

높다란 원통형 연화좌 위에 광배와 삼존불을 한 틀로 주조한 일광삼존(一光三尊)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커다란 무늬의 광배를 배경으로, 상대적으로 작은 본존불입상을 중앙에 배치하고 더 작은 협시보살상을 좌우에 두었다.

 그리고 몇 겹의 둥근 원광(圓光)과 소용돌이무늬의 배경 아래 지고한 불(佛)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본존불의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크고 높은 육계(肉髻)를 표현하였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정신성이 강하

고졸한 미소가 번져 있다.

약간 좁은 듯하지만 둥글고 강인하게 처리된 어깨와 가슴을 가지고 있다. 또한 두꺼운 옷 속에 드러난

역강한 원통형 체구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좌우로 넓게 퍼진 새 깃 같은 옷자락과 오른쪽으로 휘어져 내린

 U자형의 옷주름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불상 양식 또는 6세기 중엽경의 조각 양식을 보여 준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광배의 양쪽 끝에 매달린 것처럼 서 있다. 세 가닥으로 올라간 보관(寶冠), 본존불과

비슷한 얼굴 형태, 원통형의 체구, X자형의 옷주름 등 6세기 불상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삼존불의 양식은 고구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국보 제119호)과 매우 비슷하다.

앞으로 약간 숙인 얼굴에 번지는 청순하고 고졸한 미소, 강인한 원통형의 체구, 큼직하고 활력에 찬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의 손 모양, 오른쪽으로 휘어지면서 물결치는 옷주름, 향로를 뒤집은 듯한

 연화대좌, 소용돌이치는 불꽃무늬의 광배 등은 서로의 관련성을 강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과는 약간 다른 미의식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① 삼존 형식을 한 틀로 주조한 이른바 ‘일광삼존식’ 구도를 보여 주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형식은 중국의 경우도 6세기부터 유행한 것이므로,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보다 일보 진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이 불상의 얼굴은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보다 살이 조금 더 붙고 근육도 팽팽한 편이다.

그리고 미소 또한 좀더 명랑해졌다.

 ③ 어깨와 가슴이 다소 당당해진 점 또한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의 고졸성보다 발달된 것이다.

좌우로 퍼진 새 깃 같은 옷자락은 약간 누그러졌다.

 ④ 광배에 본존의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고 여기에 이중원광(二重圓光)과 당초무늬 등을 표현하여 보다 장식성이 강해졌다.

⑤ 대좌의 연꽃이 3중으로 되어 있고, 연꽃 주위에 점을 찍는 등 장식성이 강해졌다.


중국의 경우에는 520년경 내지 530년경의 불상, 즉 정광삼년명(定光三年銘, 522년) 금동불입상이나

정광육년명삼존불입상과 같은 이른바 남북절충식〔華化樣式〕의 불상들과 비견된다.

그러므로 20∼30년 뒤에 이런 양식이 고구려에 유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상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기교 면에서도 세련되어 있다. 즉, 이 상은 다소 새로운 양식을 받아들인 조각가가 정성 들여 만든 뛰어난 금동불상이라 하겠다.

이 불상은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고 제작 연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러나 우선은 고구려의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양식에 중국의 남북절충식 양식을 가미한 고구려식 불상으로 보고자 한다

. 따라서 광배 뒤에 새겨진 ‘계미(癸未)’라는 기년명은 563년으로 추정되며, 이 해가 이 불상의 제작 연도로 생각된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과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국보 제85호) 사이에 제작된 세련된 작품으로서,

6세기 중엽경의 조각 양식을 대변해 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금동신묘명삼존불金銅辛卯銘三尊佛立像


국보 제85호. 높이 15.5㎝.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 봉산리에서 출토된 이 불상은 커다란 주형 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에 본존인 무량수불

(無量壽佛)과 두 보살상이 조각된 형식이다. 광배 뒷면에는 5명의 도반(道伴: 함께 도를 닦는 벗)들이

그들의 스승과 부모를 위해서 아미타불상을 조성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적혀 있다.


광배의 중심부에 주존을 배치하고, 그 좌우로 두 보살상을 주존에 비해 현저히 작게 주조하였다.

그리고 두 보살은 광배의 좌우 끝에 겨우 매달린 듯이 처리함으로써 본존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구도법을 쓰고 있다.

 이 점은 두 보살의 위로 본존을 둘러싼 작은 화불(化佛)을 삼각형으로 배치하여 관불자의 시선이 본존불에 집중되도록

 처리한 것과, 두신광과 광배의 선묘(線描: 선으로만 그림)를 겹겹의 테두리로 표현한 것 등에서 보다 뚜렷이 나타난다.






본존의 머리는 신체에 비해서 큼직한 편인데 육계 또한 높직하며 얼굴은 살이 붙어 있다.

이런 두툼한 얼굴에 미소를 자연스럽게 띠게 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한층 더해 준다.

 이러한 특징은 체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즉, 강인한 기풍이 줄어들고 유연하면서도 세련된 면이

 꽤 나타나 있다. 통견의 법의 역시 누그러지면서 장식적이다.

 이는 오른쪽으로 휘어져 내린 U자형의 옷주름 좌우로 뻗치던 날카로운 옷깃이 거의 사라진 경향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대의와 군의의 끝단에 보이는 이중의 장식적 주름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말하자면 전체적인 불상 형태는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의 특이한 인상, 큼직한 얼굴과 손,

원통형 체구 등 연가(延嘉)7년명금동여래입상의 양식적 특징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더 부드러워지고 원만해진 새로운 면이 나타나고 있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고졸하면서 큼직한 얼굴, 원통형의 빈약한 체구, X자형 천의 등에서 보다시피

좀 더 고졸하고 도식적이라고 할 그런 인상이다.

이것은 소용돌이치는 불꽃무늬 속에 앉아 있는 화불의 고졸한 처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초화문이 새겨진 두신광배의 표현은 새로운 물결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신구 양식의 변화 과정을 더듬어 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이다.




금동보살삼존상金銅菩薩三尊立像

국보 제134호.

강원도 춘천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 불상은 하나의 광배에 삼존상을 배치한

일광배삼존불(一光背三尊佛)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불신·광배·대좌가 한데 붙은 일주조품(一鑄造品)이다.

본존인 보살상은 여원인(與願印)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을 취하였다.

 머리에는 삼면관(三面冠)을 썼으며, 양쪽 관에서 내려진 장식이 두 어깨까지 내려져 있다.

굴은 둥근 편이고, 눈·코·입은 선각(線刻)으로 표현되었으나 정교하지 않다.

가슴에는 대각선으로 걸쳐 입은 내의가 보인다. 천의(天衣)는 불상의 앞면에서 늘어졌다가 교차되어

 다시 양어깨에 올려져 있고, 그것이 다시 지느러미같이 좌우로 늘어져 흘러내리고 있다.

군의(裙衣)는 길게 늘어져서 약간의 주름이 선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리를 깎고 합장한 채 서 있는 협시(脇侍)의 나한상은 두꺼운 법의를 입고 있는 세부 묘사나

늘어진 주름의 특징이 뚜렷하지 않다. 광배는 가장자리에 테를 두른 주형(舟形)으로 되어 있으며,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세 줄의 음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두광 안에는 보살의 머리 둘레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두광과 신광의 바깥쪽에는 불꽃무늬[火焰紋]가 음각되었다.

그 모양은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金銅癸未銘三尊佛立像, 국보 제72호)의 광배 무늬와 닮았으며,

그보다 연대가 앞서는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 국보 제119호)

광배에서 보이는 형상에 비하여 더 부드러운 인상을 풍긴다.


대좌는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한 반구형으로 위쪽에는 약간 높인 둥근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있고, 그 위에 본존이 서 있다. 아래쪽에는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선각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의 대좌와 선각의 연화무늬는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금동 정지원명

석가여래삼존입상(金銅鄭智遠銘釋迦如來三尊立像, 보물 제196호)과 흡사하나, 보다 세련된 조각 기술을 보여준다.






이 보살삼존상의 양식은 중국의 북위시대(北魏時代) 불상 가운데 6세기 초의 불상과 연결되고,

 X자형으로 교차된 천의와 좌우로 지느러미처럼 내린 천의 자락, 보관의 형태 등에서 공통 요소를 보여준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불상은 대체로 북위 양식에 비하여 옷주름이나 세부의 표현이 많이 간략화되고

기법이 둔화되었으며, 전체적으로는 강직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 보살삼존상의 본존보살상과 비교가 되는 예로는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의 금동보살입상

(부여 규암면 신리 출토)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

(扶餘軍守里金銅菩薩立像, 보물 제330호)을 들 수 있다.





금동미륵반가상


국보 제118호.

높이 17.5㎝. 1940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병기창(兵器廠)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것을

김동현이 8·15해방 후 서울로 가지고 왔다. 오른손과 팔 부분이 없어지고 곳곳에 화상의 흔적이 있으나

 전체모습을 살펴보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다. 출토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현존 유일의 고구려 반가사유상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상이다.







머리에는 삼산관(三山冠)을 썼으며 약간 숙인 모습에 고졸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귀가 매우 길어 어깨에 닿아 있다. 상체는 나신으로 장신구도 없으며, 얼굴에 비해 몸이 작고 팔과 몸체가

거의 원기둥에 가까운 단순한 모습이다. 왼손은 오른쪽 발목을 잡고 있고, 오른손의 팔꿈치 이하 부분이 없어도

 손을 볼에 댄 사유형(思惟形) 보살임이 쉽게 짐작된다. 상의(裳衣)는 둥근 통형(筒形)의 대좌를 덮었는데

다리 부분에는 몇 줄의 선으로 옷주름을 표시하고, 대좌 앞으로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자락이 상하 2단의

굴곡진 주름을 이루고 있다. 대좌는 복련으로 장식된 연화대좌이고,

오른쪽 발을 받친 족좌(足座)에는 앙련(仰蓮)이 새겨져 있다.


머리 뒤에 두광을 꽂았던 꼭지가 남아 있고 몸옆에는 허리로부터 늘어진 비대(紕帶)가 보인다.

 이 반가상은중국 동위(東魏:534~550)나 북제 초기 반가사유상의 양식적 요소를 반영하므로

대략 6세기 후반 또는 말경의 고구려상으로 생각된다. 같은 형식이면서 좀더 발전된 양식을

보여주는 상으로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83호)과

경상북도 봉화 출토인 석조반가사유보살상 하반신을 들 수 있으며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의 양식발전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

국보 제83호.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더불어 그 크기와 조각 수법에 있어서

삼국시대 금동 불상을 대표하는 걸작품이다.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20년대 이후에

 발견되어 오랫동안 덕수궁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머리에는 삼면이 각각 둥근 산 모양을

이루는 관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三山冠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삼국시대에는 많은 반가사유보살상이 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평안남도 평양시 평천리 출토의

고구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삼성미술관 리움, 국보 제118호)이나 충청남도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의 왼쪽 협시인 백제의 반가사유상, 그리고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조각된 신라의 반가사유상은

삼국의 각 지역에서 비교적 초기 작품에 속하는 예들이다.


특히 이 상은 그 보관 형태나 군의(裙衣)의 주름 처리 방식 등에서

 평천리 출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나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반가사유상과 양식적 계보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하고도 균형 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 기술을 보여 준다.

더욱이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보살상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해 준다.









체로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은 중국 동위(東魏)부터 북제(北齊)에 유행된

반가사유상의 형식과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은 북제의 상들보다도 더욱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있어

조각적으로 발달된 단계의 표현을 보여 준다.





이 상의 제작 국가에 대하여는 백제와 신라라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그러나 1966년에 경상북도 봉화에서 발견된 석조여래좌상의 하반신 부분(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이 알려진 이후,

두 상의 형태나 옷주름 처리 등에서 유사성이 지적되었다. 또한 일본 교토[京都] 고류사[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은 이 상과 모습이 매우 비슷하여 오랫동안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고류사의 창시자인 진하승(秦何勝)이 신라와 문화적인 교류가 있었다든가 혹은 신라에서 전해진 상이

이 절에 모셔졌다든가 하는 일본의 기록은 이 상이 백제보다는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제작 연대는 대체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류사 불상은 불상의 모습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보수되기 이전의 얼굴 표현이 경주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보살두에서 보이는

한국적인 얼굴 인상과 매우 가까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양평 신화리 금동여래입상楊平新花里金銅如來立像

국보 제186호.

 높이 3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76년 4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신화리에서 경지 정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불상이다. 발견 장소는 예전부터 신라·고려시대의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왔던 곳이다.

 그리고 장대석·석조유구도 찾아볼 수 있어 삼국시대 이래의 폐사지로 추측된다.


이 불상의 모습은 두광과 대좌를 상실한 채 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

두 손 역시 소실되었으나 여원인(與願印)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아 도금이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머리에는 나발(螺髮)이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대체로 긴 편으로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다.

목은 매우 길고 굵으며 삼도(三道)의 표현이 생략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목을 뒤로 젖히고

얼굴을 높이 들어 머리가 우뚝 솟아 있는 느낌을 준다. 불상의 몸체는 어깨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서

완만하고 단순한 형태를 유지하여 전체적으로 부풀어 오른 듯한 원통형의 모습을 보여준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가슴과 배를 많이 드러내면서 U자형의 주름을 이루며,

그 가장자리는 굵고 도드라지게 처리되어 있다. 드러난 가슴에는 세 가닥의 선이 음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 이는 대의(大衣) 속에 대각선으로 걸친 내의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다리 위로 드리워진 몇 개의 U자형 옷 주름은 약간의 부조와 음각선으로 처리되었다.

팔에도 또한 몇 개의 주름이 음각으로 표현되었다. 대의 밑에 보이는 군의(裙衣)의 옷자락은

몇 줄로 겹쳐져서 굵은 곡선을 그리며 늘어진다. 주름진 형태가 특이하며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조형감을 준다.






이 불상의 양식은 약간 딱딱하면서도 묵직하고 단순한 원통형의 몸,

간결한 U자형의 주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중국의 북제(北齊)·북주(北周)에서 수(隋)대에 걸친

불상 조각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출토 지역의 특정상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불상은 황규동 소장의 금동보살입상보다는 훨씬 진보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강원도 횡성 출토의 금동여래입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보이는 부드러운 조형성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당당한 자세와 단순화된 조각 수법이 특징이다.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三陽洞金銅觀音菩薩立像

국보 제127호.

 높이 20.7㎝. 1967년 서울특별시 강북구 삼양동에서 발견되었다. 광배를 잃고

군의(裙衣)와 천의(天衣) 자락 일부에 손상을 입었으나, 도금 상태가 양호한 거의 완전한 형태의 금동불이다.

살이 올라 통통해진 얼굴과 신체, U자형으로 늘어진 이중의 천의,

끝이 누그러진 군의 자락 등에서 조성 시기는 7세기 초로 추정된다.


얼굴은 살이 올라 통통한 둥근 얼굴이다. 지그시 감은 긴 눈은 부은 듯 융기되었다.

눈썹에서 이어진 콧날은 유난히 날카롭게 강조된 반면, 턱선은 거의 사라져 둥글게 표현되었고

입은 아주 작고 엷은 미소가 서려 있다. 얼굴의 부드러운 모델링과

여성적인 모습은 불(佛)의 미묘상(微妙相)을 표출한 것이다.


머리 위의 보관(寶冠)은 삼각형의 삼면관(三面冠)이다. 중앙의 앙련좌(仰蓮座) 위에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보관의 화불은 관음보살의 도상적(圖像的)인 특징의 하나이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정병(淨甁)과 함께 이 보살상이 관음보살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보살상은 삼국시대 말기에 단독상으로서 크게 유행하였던 관음신앙의 단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귀는 평판적인 넓은 타원형이다. 목의 삼도(三道)는 보이지 않는다.

상체는 어깨가 좁아 위축된 모습이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통통한 타원형을 이루었다.

따라서 신체는 후굴(後屈)의 자세를 이루고 있다. 양어깨 너머로 드리워진 수발

(垂髮: 뒤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은 나뭇잎 형태로 마무리되었고 그 끝에 얕은 꽃무늬가 표현되었다.

가슴에는 널찍한 꽃 모양의 목걸이를 걸쳤다.


가슴 사이로 비스듬히 걸친 내의(內衣) 자락이 보인다.

천의는 배와 무릎 근처에서 이중으로 걸쳐 U자형으로 늘어져 있다.

 이러한 이중의 U자형 천의 자락은 전시대의 보살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요소로서,

 중국의 북제(北齊)·북주(北周) 혹은 수나라 초의 조각 양식이 반영된 것이다.


불상의 뒷면은 편평한데, 상체에는 양어깨를 덮고 있는 숄형의 천의가 돌려져 있다.

하체의 군의 자락은 몇 줄의 선으로 간략화되어 있다.

머리 정상에는 두광배(頭光背)를 꽂았던 광배의 촉 자국이 뚜렷하게 보인다.








군의는 두껍게 입혀서 다리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옷주름은 몇 가닥의 판상의문(板狀衣文)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오른손은 허리 근처에서 입체적인 정병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위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V자형으로 곧게 편 특징적인 모습이다.

대좌는 고식(古式)의 단판복련좌(單瓣覆蓮座)이다.

꽃잎은 끝과 판심(瓣心)이 뾰족해 보살상의 부드러운 모델링에 비하여 예리함이 강조되어 있다.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


국보 제128호.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상으로서 백제 불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으며 보관 위로 육계(肉髻)가 높이 솟아 있다.

얼굴은 몸에 비해 다소 큰 편으로 네모반듯한 모양에 가깝다. 두 눈을 꼭 감고 입을 다물었지만

미소가 없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귀 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은

어깨 아래에서 몇 가닥으로 갈라져 팔 위로 길게 늘어졌다.


목은 약간 짧은 듯한데

삼도(三道)는 표현되지 않았다. 몸은 가늘고 세장(細長)한 편으로

어깨가 좁아 약간 위축된 느낌을 준다.







천의는 얇고 몸에 밀착되어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천의의 한 자락은 왼손에 걸쳐 다리 옆을 따라 흘러내리고, 다른 한 자락은 오른손을 내려 잡고 있다.

다리 위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무릎 위에서 굵은 주름을 이루었고 무릎 아래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다.

영락(瓔珞) 장식은 어깨에 넓게 걸쳐 있으며 몸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오다 배 부근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어 다리 위에 장식되었다.

왼손에는 큼직한 정병(淨甁)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대좌는 안상(眼象)이 투각(透刻: 뚫새김)된 육각형의 복련좌(覆蓮座) 위에

 앙련좌(仰蓮座)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잎이 넓고 부드러운 연꽃의 모습은 백제시대 특유의 연화문 양식을 잘 보여 준다.

현재 광배는 남아 있지 않지만, 불상의 뒷면에는 광배를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세장한 몸의 형태를 비롯하여 삼면보관, 배 부근에서 X자형으로 교차된 영락 장식 등의 양식적 특색은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발견된 금동관세음보살입상과 많은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불상에 비해 몸의 형태가 다소 경직되었으며 얼굴에 미소가 사라져 좀 더 근엄해 보인다.

 불상 전체에 녹이 많이 슬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금색이 찬연하며 백제 불상 특유의 유연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부여 귀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扶餘窺岩里金銅觀音菩薩立像


국보 제293호.

 이 금동관음보살입상은 1907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출토되었다.

당시 일본 헌병대의 손을 거쳐 전 소장자인 니와세[庭瀨博章]가 가지고 있던 것이다.

원래는 뚜껑이 덮인 무쇠 솥에서 또 하나의 관세음보살상과 함께 발견되었으나

현재 이것은 이치다[市田次郎]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복판(覆瓣: 아래로 향한 꽃잎)으로 된 둥근 연화대좌 위에

똑바로 선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쓰고 있는데,

앞면에는 화불이 조각되어 있고 정상에는 보계(寶髻)가 높직하며 양쪽으로 관대가 튀어나와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얼굴이 약간 크고 둥글며 몸은 가늘고 긴 편이나 신체적인 비례는 잘 맞는다.


두 뺨이 통통하고 눈은 가늘게 약간 옆으로 올려져서 표현되었으며, 자그마한 입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귀는 작은 편이고 양쪽에서 내려온 머리칼이 어깨까지 닿아 있다.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쳤고 가슴에 대각선으로 둘려 있는 상의는 두 줄의 선각으로 표시되어 있다.


양어깨로부터 늘어진 구슬장식[瓔珞]은 허리 부분에서 자그마한 연화장식을 중심으로 교차되었다.

군의(裙衣)는 허리에서 한 번 접혀서 내려와 발등까지 덮였는데,

양다리 위에는 가는 음각선으로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옆으로 들어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구슬[寶珠]을 잡았으며,

왼손은 내려서 양어깨에서 부드럽게 늘어뜨린 천의(天衣) 자락을 살짝 잡고 있다.

두 팔뚝과 팔목에는 팔찌를 낀 표시가 간단한 선으로 표현되었다.


뒷면에는 밋밋한 면에 X자형으로 구슬장식을 앞의 것과 연결되어 걸쳤고,

일부 옷의 주름을 간단히 표현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대좌는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 위에

 원형의 대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표현된 복판연화문은 짧은 판단(瓣端)의 활달한 팔엽연화이다.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얼굴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미소나 비례에 맞는 몸의 형태,

부드럽고 생기 있는 조각적인 표현에서 기술의 진보와 세련성을 보여 주고 있어

 백제 말기의 발전된 조각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몸의 자세가 꼿꼿이 선 굳은 느낌이 남아 있고

옷주름이 단순한 음각선으로 처리되었으며,

구슬장식이 단순하며 그 표현에는 약간의 투박한 감이 없지 않다.

또한 신체의 형상이나 세부 표현이 섬세하지 않다.

하지만 전체적인 조형성으로 보면 탄력감이 있고 통일된 형태감을 주고 있다.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公州儀堂金銅菩薩立像

국보 제247호.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형적인 백제 양식의 연화좌 위에 서 있다.

얼굴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졌고 무릎은 살짝 굽힌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불신(佛身)의 균형은

 비교적 안정감이 있으나 세장한 편이다.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쓴 불상은 눈·코·입 등이 큼직하고 시원스러우며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이마 앞에서 양옆으로 갈라진 보발(寶髮)은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몸에 밀착된 천의(天衣)는 양어깨로부터 내려와

배 아래 부근에서 X자로 교차되었는데,

이 천의 주름과 그 아래 양다리에 표현된 옷자락의 주름은

깊고 힘차게 조각되어 있어 평온한 얼굴 표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어깨 부근 천의의 표현은 마치 갑옷처럼 되어 있지만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에서처럼 형식화되지는 않았다.

이 보살상의 세장해진 신체, 배꼽 부근에서 교차된 영락(瓔珞) 등은

중국의 북제 말, 수나라 초의 보살상에서 유행하던 형식이므로, 이 보살상의 연대를 7세기로 추정해볼 수 있다.




금동보살입상龜尾善山邑金銅菩薩立像


국보 제183호.

1976년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면 봉한2동 뒷산에서 사방공사를 하던 중,

금동여래입상 1구(국보 제182호), 금동보살입상 1구(국보 제184호)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들 세 구의 불상은 원래부터 삼존 형식을 이루면서 같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그 정면에 화불(化佛)이 새겨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얼굴은 둥근 편이며, 미소를 띠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올려 작은 연꽃봉오리를 가볍게 받쳤다.

왼손은 내려서 지물(持物)을 들고 있었던 듯하나 현재 지물은 없다.

 목에는 목걸이를 걸고, 어깨에서 구슬 목걸이[瓔珞] 장식이 늘어져 있다.

배 부분의 둥근 꽃무늬[花文樣] 장식으로 교차 연결되다가 무릎 옆으로 늘어진다.












이 보살상은 삼국시대 말기 금동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연화대좌 위에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세로 서 있다.

 조각 수법도 매우 섬세하고 우수하며, 몸의 균형도 잘 맞고, 비교적 날씬한 형태이다.










몸에는 얇은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다. 천의는 오른팔에 한 번 걸쳐지고

무릎 앞에 둥글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다시 왼팔 위로 걸쳐져 그 끝을 대좌 위로 내려뜨렸다.

 그러나 늘어진 부분의 천의는 파손되어 있다.


군의(裙衣)는 발밑까지 드리워지고, 음각선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대좌는 칠각형이며, 그 위에 두 겹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뒷면에도 앞면처럼 구슬목걸이 장식이 교차되었고, 옷주름도 정성껏 표현되었다.

 광배가 달리던 꼭지가 남아 있다.








구미 선산읍 금보살입상龜尾善山邑金銅菩薩立像


국보 제184호.

1976년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면 봉한2동 산에서 사방공사를 하던 중,

다른 금동보살입상 1구(국보 제183호),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 1구와 함께 출토되었다.

속전(俗傳)에 의하면, 70여 년 전 어느 농부가 부근의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발견하여 보관하다가,

수년 뒤에 출토 지점에 다시 묻은 것이라 한다. 원 발견지로 추정되는 대밭골 뒷산은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많이 출토된 곳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사이에 이룩된 절터로 추정된다.

 이때 함께 발견된 세 불상은 각각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함께 발견된 세 불상 중 이 금동보살입상이 가장 화려하다.

이 불상은 꼿꼿이 선 자세로 정면을 똑바로 향하고 있다.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썼고,

그 정면의 원형 테두리 안에는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시기의 우리나라 보살상으로서는 매우 보기 드물게 번잡한 장신구들을 지니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목에는 복잡한 목걸이가 걸리고, 어깨로부터 늘어진 구슬 목걸이[瓔珞]가

 배 부분의 원형 장식을 중심으로 교차되어 드리워졌다.

이 구슬 목걸이 장식의 원형 연결 부분마다 다른 구슬목걸이들이 걸쳐 있다.






얼굴은 약간 길고 네모지며 볼에 살이 많이 붙어 있다.

미소를 약간 띠고 있으나 엄숙한 표정이다.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드리워졌다.

목은 길고 굵으며 삼도(三道)가 나타나 있다.

 어깨는 넓은 편이어서 근엄하고 약간 딱딱한 느낌을 준다.






상체에는 팔 쪽으로 천의(天衣)가 걸쳐져 있으며, 가슴 근육이 사실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내려서 구슬 목걸이 장식을 가볍게 잡았다. 왼손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나

정병(淨甁)이나 연화를 들고 있었던 듯하다. 뒷면에도 복잡한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유실되었지만 광배 꼭지가 뒷머리에, 두발 밑에는 촉이 달려 있다.


양식적으로 보면, 국의 북주(北周, 557∼581년)에서 수나라(581∼618년)시대로 이어져

발달한 양식과 연결된다. 그래서 제작 시기가 대략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불상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불상 전체가 어딘지 근엄하다.

그리고 당당하면서도 경직된 얼굴 모습, 매우 번잡하고 화려한 이례적인 장신구 표현 등은

이 시기의 우리나라 금동불상으로는 매우 특이한 것이다.


아무래도 중국적 요소가 약간 강하게 작용한 것 같다.

이 불상에 나타난 복잡한 장신구는

8세기에 제작된 석굴암의 십일면관음보살상의 형식과 유사하여 매우 흥미롭다.









New Beginning - Blue 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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