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보
일반회화 Ink Painting
이제현 초상李齊賢肖像
국보 제110호
화폭 상단에 적힌 제문(題文)을 통하여 그 제작 시기 및 필자를 알 수 있다.
이제현이 33세 때인 1319년(충숙왕 6)에 충선왕을 시종하여 중국의 강호(江湖)를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충선왕은 진감여를 불러 이제현을 그리게 하였다.
당시의 원나라 석학인 탕병룡(湯炳龍)이 찬을 지었음도 아울러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제현은 귀국할 때에 이 영정을 가지고 오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33년 후 다시 원나라에 건너갔을 때
우연히 그 영정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감회를 40자의 시로 읊고 있다.
오른쪽 얼굴이 보이는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으로서 심의(深衣: 높은 선비의 웃옷)를 입고
공수자세(拱手姿勢)로 앉은 전신상[全身交椅坐像]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상부 공간에 제문과 찬문을 적어놓았다.
익재 초상화는 전해 오는 몇 폭의 고려시대의 초상화가 대부분 이모본(移模本)이어서
전신(傳神)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실정에서 주목되는 진적(眞蹟)이다.
또한 사신(寫神)이 정묘하여 원나라 제일의 명수라 칭하여지던 진감여의 초상화 묘법이 충분히 인정된다.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거의 좌안을 고집하고 배경이 거의 없이 나타나는 데 비하여 다채로운 화면 구성과 함께
우안을 보이고 있음은 고려시대 초상화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회화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회헌 영정安珦肖像
국보 제111호
비단에 채색, 세로 37㎝, 가로 29㎝. 경북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 소장.
이 영정은 흥주향교에 봉안되어 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1457년(세조 3) 부(府)가 폐해지자
일시 한도(漢都)의 종손가[知歸家]로 옮겨졌다. 그러나 1542년(중종 37) 평소 안향을 사숙해오던
주세붕(周世鵬)이 순흥 백운동에 안향의 사묘(祠廟)를 건립하고 8월경 영정을 이안하여 갔다.
다음해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뒤의 소수서원)이 세워지고, 영정은 여기 봉안되었다.
그 뒤 1559년(명종 14) 영정이 오래되어 갈라지고 찢어져 장차 아주 없어질 것을 염려한 예조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당시 고수(高手)로 이름났던 화원 이불해(李不害)가 이모본을 제작하게 되었다.
그 이모본이 일시 봉안된 일이 있었음이『소수서원화상개수지(紹修書院畵像改修識)』에 수록되어 있다.
허목(許穆)은 안향의 14대손 응창(應昌)이 다시 2본을 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사본은 상하 이분되어 상부 공간에는 찬문을 쓰고 화상은 화면의 하반부를 점유하고 있다.
인물은 홍포에 낮은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있으며, 흉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이다.
이 화상 자체는 낡은 화폭이지만 기품에 대한 기록을 고려하면 현재 전해지는 작품은
고려시대 본이 아니라 이불해의 모사본으로 생각된다.
단아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필법 자체는 단순하다. 부드럽고 엷은 주선(朱線)으로 안면의 윤곽을 나타냈다.
그리고 구륵(鉤勒: 윤곽을 선으로 그리고 그 안을 색으로 칠하는 화법)처리만으로 안모(顔貌)의 오관부(五官部)를
한정시키고 있다. 옷주름은 굵기의 변화가 없는 선조에 의하여 음영 없이 간략히 처리되었다.
그러나 안면에서 방사되는 시선의 방향과 공수(拱手) 자세에서 비롯된 어깨선은
이 초상화 전체에 강직한 인상을 부여한다.
송시열 상
국보 제239호. 작자 미상.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89.7㎝, 가로 67.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면 오른쪽 상단에 1651년에 송시열이 지은 제시(題詩)와 1778년(정조 2)의 정조 어제찬문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송시열의 자제(自題) 시기에 근거하여 이 그림을 1651년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는 〈우암연보 尤庵年譜〉에 기록된 송시열의 생시도사본상(生時圖寫本像) 중 하나인 1651년 상(像)에 대한
기술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림의 얼굴 모습이 45세가 아닌 노년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어제찬문이 씌어진 정조 연간초에 이모(移模)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위에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자제시를 옮겨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복건에 유복차림을 한 좌안7분면의 반신상이며 갈색선으로 얼굴의 윤곽과 주름살을 표현했을 뿐 음영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몇 개의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과 대조되는 개성적인 이목구비의 표현에서
그의 성품과 분위기가 잘 전달되어 전신(傳神)에 성공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일반사대부 초상으로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종손가(家)의 초상화, 옥천 용문영당본(龍門影堂本),
제천 황강영당본(黃江影堂本), 안재만 소장본 등이 전한다.
윤두서 자화상
국보 제240호. 종이 바탕에 담채. 세로 38.5㎝, 가로 20.5㎝.
보는 사람이 정시할 수조차 없으리만큼 화면 위에 박진감이 넘쳐 흐르는데, 자신과 마치 대결하듯
그린 이런 자화상은 전후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초상화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윗부분이 생략된
탕건,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 꼬리 부분이 치켜 올라간 눈썹, 잘 다듬어진 턱수염, 살찐 볼,
두툼한 입술에서 윤두서라는 인물의 성격과 옹골찬 기개를 읽을 수 있다.
화법은 당대의 기법을 응용하여, 안면은 깔끔한 구륵(鉤勒)보다는
오히려 무수한 붓질을 가하여 그 붓질이 몰리는 곳에 어두운 색조가 형성되게끔 하였다.
이 화상에서 점정(點睛)의 효과는 전신사조(傳神寫照: 정신을 화면에 전달함)의 효과를 십분 거두고 있다.
또한 그다지 많지 않은 연발수(蓮髮鬚) 형태의 수염이 안면을 화폭 위로 떠밀듯이 부각시킨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독특하게 얼굴 부분만 나타나 있어 더욱 강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윤두서가 처음 자화상을 그렸을 때는 반신상으로 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7년 편찬된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에는 유탄으로 도포 형상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이 행한 X-선 조사와 형광분석기를 이용한 안료 분석에서 원래는 귀까지 그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종이에 먹선으로만 그려져 있지만 본래 초본으로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완성작으로서 그려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윤두서의 친구 이하곤(李夏坤)은 『두타초(頭陀草)』에,
“윤효언이 스스로 그린 작은 초상화에 찬한다.”는 찬시를 남겼다. 이 작품에 대한 시로 추정된다.
금강전도金剛全圖
국보 제217호.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고, 화폭의 크기는 세로 130.7㎝, 가로 59㎝.
「금강전도(金剛全圖)」는 정선이 만 58세 때인 1734년(영조 10) 겨울 만폭동(萬瀑洞)을 중심으로
금강내산(金剛內山)의 전체 경관을 그린 것이다. 화면의 왼쪽 윗부분에 ‘금강전도(金剛全圖)’라는 제목과
‘겸재(謙齋)’라는 그의 호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겸재’라고 새긴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금강전도」는 원형(圓形) 구도로 윗부분에 비로봉(毗盧峰)이 우뚝 솟아 있다.
거기서 화면의 중심인 만폭동을 지나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끝 부분에 장안사(長安寺)의 비홍교(飛虹橋)가
배치되어 있다. 표훈사(表訓寺)와 정양사(正陽寺) 등이 그려진 그림의 왼쪽 부분은 무성한 숲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토산(土山)으로 묘사되어 맞은편의 예리한 암산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금강산의 여러 바위봉우리들이 바위 꼭대기에서 ‘ㅅ’자로 붓 자국을 내면서 수직으로
다시 꺾이는, 이른바 수직 준법(垂直皴法)으로 표현되어 있다. 산의 둘레에는 엷은 청색을 문질러 발라
원형 구도의 둥근 형태를 강조하면서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듯한 공간감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구도는 중국을 중앙으로 하여 세계를 둥글게 표현한 「천하도(天下圖)」같은
옛 지도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화면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제화시(題畵詩)와 함께 “甲寅冬題(갑인동제)”라는 관기(款記)가 적혀 있다.
“만이천봉 개골산, 누가 참 모습 그릴런가.
뭇 향기 동해 밖에 떠오르고, 쌓인 기운 세계에 서려 있네.
몇 송이 연꽃 해맑은 자태 드러내고, 솔과 잣나무 숲에 절간일랑 가려 있네.
비록 걸어서 이제 꼭 찾아간다 해도, 그려서 벽에 걸어 놓고 실컷 보느니만 못하겠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左 부분)
1751년작. 국보 제216호.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 세로 79.2㎝, 가로 138.2㎝. 호암미술관 소장.
화제와 관지(款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정선이 75세인 1751년(영조 27) 윤 5월 하순 비온 뒤의 인왕산 전경이다.
인왕산 아래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부근에서 살았던 정선이 비온 뒤 개고 있는 산의 모습을
화동 언덕(지금의 정독도서관)에서 바라보며 받은 인상과 감흥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右 부분)
구도는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암봉이 화면을 압도하듯 원경에 가득 배치되어 있어
대담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준다. 서서히 걷히는 안개 밖으로 돋보이는 산의 습곡은 짙고 옅은 먹색의
흑백대비로 표현했고, 크고 작은 수목들은 정선 특유의 활달한 편필(偏筆)로 묘사하여 변화를 주었으며,
특히 백색암봉의 양감을 강조하기 위해 구사된 묵찰법에 의한 힘찬 붓질은
화면에 무게감과 함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삼각산 봄구름 비 보며 넉넉하니,
만 그루 소나무의 푸른 빛 그윽한 집을 두른다.
주인옹은 반드시 깊은 장막에 앉아 홀로 하도(河圖)와 낙서(洛徐)를 완상하겠지."
겸재 만년의 최대 걸잘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한국 전통회화의 개성과 역량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군선도병풍筆群仙圖屛風
국보 제139호.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 세로 132.8㎝, 가로 575.8㎝.
김홍도가 31세 때인 1776년(영조 52) 봄에 그렸다. 원래 8폭의 연결 병풍 그림이었으나 현재 3개의 족자로 분리되어 있다.
서왕모(西王母)의 반도회(蟠桃會)에 초대받고 약수(弱水)를 건너는 파상(波上) 군선(群仙)들을 배경을 생략한 채 나타낸 것이다.
흰 당나귀를 거꾸로 탄 장과로(張果老), 딱따기를 치는 조국구(曹國舅), 낚싯대를 든 한상자(韓湘子),
그리고 왼쪽에 연꽃가지를 든 하선고(何仙姑)와 꽃바구니를 맨 마고(麻姑)라고 생각된다.
. 여기 묘사된 신선들의 명칭을 단정지어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들고 있는 기물(器物)이나 도상(圖像) 등으로 미루어 오른쪽의 신선들은 외뿔 소를 탄 노자(老子), 두건을 쓴 종리권(鍾離權),
두루마기에 붓을 든 문창(文昌)으로 보인다고. 이들 신선과 시자(侍者)들은 모두 세 무리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인물들의 시선을 한결같이 진행 방향인 왼쪽으로 돌리고, 그 방향으로 갈수록 인물의 수가 점차 줄어들게 하였다.
이로써 화면의 전개와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바람을 등 뒤에서 받아 나부끼는 듯한
옷자락도 모두 행진하는 방향으로 힘차게 나부끼고 있어 화면에 동감(動感)을 더해준다
인물의 윤곽을 굵은 먹 선으로 빠르고 활달하게 묘사한 뒤 얼굴과 손, 기물들은 가는 필선으로
정확하고 섬세하게 처리하여 표정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옷은 연한 청색을 주조로 엷게 음영만 나타냈고
얼굴은 담갈색으로 처리하였다. 표주박, 꽃, 당나귀의 안장, 천도(天桃)의 주둥이 등에는
담홍색을 약간 사용하여 화면에 변화를 주었다.
아무런 배경 없이 인물을 배치한 구성력이라든지
제각기 특이한 감정이 살아 넘치는 듯한 인물 묘사력, 그리고 얼굴에 보이는 살구씨 모양[杏仁形]의
둥근 눈매 등은 김홍도의 풍속인물화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장과로가 타고 있는 나귀의 다리가 길게 표현된 것은
그의 40대 무렵 신선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색 중 하나이다.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주사거배' 일부
국보 제135호. 종이 바탕에 담채. 세로 28.2㎝, 가로 35.2㎝. 간송미술관 소장.
1930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고미술상으로부터 구입한 후 새로 표구했으며,
이때 오세창(吳世昌)이 새로 표제와 발문을 썼다.
〈연당야유 蓮塘野遊〉·〈홍루대주 紅樓待酒〉 등 모두 30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폭마다 제시와 낙관이 있다.
'주사거배' 부분도
'홍루대주' 부분
대부분 기생과 한량을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행락이나 정념 또는 양반사회의 풍류를 소재로 그린 것으로,
경아전들에 의해 조성되었던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의 서울 시정의 유흥적·향락적 분위기를 짙게 반영하고 있다.
'홍루대주' 부분
'기방무사' 부분
등장인물들은 남녀 모두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선정적인 모습에
맵시와 멋이 넘치는 자태로 그려져 있어 도시적인 세련미와 함께 낭만적이고 색정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기방무사' 부분
'청금상련' 부분
각 인물들의 몸동작과 표정을 비롯한 배경 등을 뛰어난 소묘력으로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가늘고 유연한 필선과 한복의 아름다운 색감 등을 최대한 살린 색채의 효과적인 사용 등을 통하여
당시의 풍속상과 풍류생활의 멋과 운치를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청금상련' 부분
'쌍금대무'
18세기 후반의 김홍도 풍속화풍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어 있으나 소재의 선정이나 구성법,
인물들의 표현기법 등 전반에 걸쳐 신윤복의 독보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의 유운홍(劉運弘)과 유숙(劉淑) 등을 거쳐
1930년대 이용우(李用雨)의 인물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주유청강'
'상춘야홍'
'월하정인'
'야금모행' 부분
'야금모행' 부분
'소년전홍'
'계변가화'
'단오풍정' 부분
'단오풍정' 부분
'무녀신무'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
국보 제237호. 1803년 작.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 각폭 세로 60.3㎝, 가로 35.2㎝. 서정철 소장.
각폭의 최상단에 유한지가 쓴 표제가 있고, 그 아래 상반부에 이이의 〈고산구곡가〉와 송시열의 한역시 및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계 기호학파 제자들의 역화시가 김조순 등 안동김씨 일문의 문신들에 의해 적혀 있다.
그리고 각 화면의 여백에는 김가순(金可淳)의 제시가 있으며, 병풍의 첫 폭과 마지막 12폭에 최립(崔岦)의
〈고산석담기〉와 송시열의 6대손인 송환기(宋煥箕)의 발문이 붙어 있다.
그림은 〈구곡담총도〉를 김이혁(金履赫)이, 1곡인 〈관암도〉를 김홍도(金弘道)가,
2곡인 〈화암도〉를 김득신(金得臣)이, 3곡인 〈취병도〉를 이인문(李寅文)이,
4곡인 〈송장도〉를 윤제홍(尹濟弘)이, 5곡인 〈은병도〉를 오순(吳珣)이,
6곡인 〈조협도〉를 이재로(李在魯)가, 7곡인 〈풍암도〉를 문경집(文慶集)이,
8곡인 〈금탄도〉를 김이승(金履承)이, 9곡인 〈문산도〉를 이의곡(李義穀)이 그렸다.
이러한 고산구곡도는 이이의 후학들에 의해 조선 후기를 통하여 성행했는데,
현존하는 작품들 가운데 이 시화병이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그림들은 실경을 직접 사생한 것이 아니라
현부행(玄溥行)이 소장하고 있던 기존의 다른 고산구곡도를 참고해 제작되었으며,
각폭마다 구곡의 각기 다른 절경 속을 이이가 동자를 데리고 소요하는 장면이 사계절을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법과 남종화법을 토대로 그렸으며 그림마다 작가별 개성이 나타나 있다.
동궐도東闕圖
국보 제249-1호(고려대학교박물관), 국보 제249-2호(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동궐도는 크기, 구도, 화풍이 거의 동일한 두 작품이 고려대학교박물관과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1점씩 소장되어 있다.
원래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고려대본은 16권의 화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화첩은 5절 6면이다.
표지마다 “동궐도 인일(東闕圖 人一)”처럼 일련번호가 적힌 제첨이 붙어 있다.
애초에는 천지인(天地人)의 세 작품이 제작되었을 것이며,
근래에 병풍 형태로 바뀐 동아대본은 천(天) 또는 지(地)에 해당할 것이다.
전체를 연결시켰을 때 창경궁이 오른편에 창덕궁이 왼편에서 서로 맞붙어 있는 구도이다.
직선의 담장으로 구분된 수많은 건축물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이름을 적어놓았다.
산과 나무, 연못과 개울을 비롯하여 우물과 장독대, 돌조각과 괴석처럼 작은 물건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했고,
해시계와 측우기 같은 과학시설까지 상세하게 그려 넣었다.
넓은 공간에 복잡하게 자리 잡은 크고 작은 건물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오른쪽 위에서 비껴 내려다보는 평행사선부감법(平行斜線俯瞰法)을 적용했다.
일정한 기울기로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구도는 전체를 한눈에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자연스러운 공간을 연출한다.
가늘고 반듯한 필선을 사용하고 선명한 채색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인상을 준다.
궁궐을 둘러싸고 있는 산수는 남종화법(南宗畵法)을 따랐는데 반복되는 낮은 구릉을 부드러운 필치로 묘사하고
소나무와 활엽수를 섞어 배열하여 차분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장대한 규모와 치밀한 묘사로 미루어 볼 때
궁중에서 활동하던 솜씨 좋은 화원들이 제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동궐도 제작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누가 주문했고, 참여한 화가들은 누구이며, 제작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동궐도의 제작시기는 궁궐 속 건축물이 새로 건립되거나 화재가 발생했던 기록을 근거로
1828년에서 183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1828년에 세워진 창덕궁 연경당이 그려져 있고,
1830년에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환경전, 경춘전, 함허정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궐도의 용도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규모의 화면, 절첩식 형식으로 볼 때
전체를 한꺼번에 펼쳐놓고 감상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지도책처럼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보도록 만든 것이다.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국보 제180호.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23cm, 가로 61.2cm. 손창근 소장.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그림 끝에 작화 경위를 담은 작가 자신의 발문과 청대 16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문과 오세창·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옆으로 긴 화면에는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제목과
'우선시상'(우선 이상적에게 이것을 줌)·'완당'이라는 관서를 쓰고,
'정희'와 '완당'이라는 도인을 찍었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과 마른 붓질의 필획만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재와 구도도 지극히 간략하게 다루어졌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은
직업화가들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와는 반대되는
문인화의 특징으로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의 문기와 서화일치의 극치를 보여준다.
'세한도'는 이씨 문중을 떠난 후 130여년 동안 유전을 거듭하다가
1930년대 중엽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 ~ 1948)의 손에 들어간다.
일제 말, 후지쓰카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2~1981)의 집념에 힘입어 돌아온 이력.
'세한도'는 완당의 문인화 이념이 총 집약된 대표적인 작품이자 최대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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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지난 2007년 문화재청이 발간한
"한국의 국보" 도록 사진 일부와 다음 백과의 해설 내용을 축약한 것.
Shadow on The Sky - Band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