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의 경세가
의암 손병희 평전
지은이 / 김 삼 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 강의.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서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한 김삼웅이 '의암 손병희 평전: 격동기의 경세가'를 펴냈다.
동학혁명, 천도교 창설, 3·1독립혁명이라는 세 가지 역사적 변혁의 중심에 서 있던 손병희. 게다가 그는 110여 년 전인 당시에 이미 보국안민의 계책으로 삼전론을 정립하였으며 교육구국 운동에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교육·문화의 도전론(道戰論), 정치·외교의 언전론(言戰論), 경제·산업의 재전론(財戰論)을 정립한 절세의 경륜가였다.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 보성전문학교와 동덕여학교를 경영해 인재 양성에 전력을 다하고 국민의 인지 계발에 미치는 언론의 영향을 깨닫고는 『만세보』와 『천도교월보』를 창간했으며, 3·1혁명 당시 독립선언서가 인쇄된 보성사를 차려 출판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즉 그의 삶은 단순한 종교지도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생애 전체가 우리 시대의 사표이자 겨레의 스승으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는 삶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싹튼, 아주 중요한 역사적 변혁의 중심에는 모두 손병희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3·1혁명일 것이다.
3·1혁명은 일제에 대항해 민중이 한 목소리로 자주독립을 외친 투쟁임은 물론,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국시대’의 서막이 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만세 시위’가 아닌 ‘혁명’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런 혁명이 손병희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성사가 가능했을까 할 만큼 그는 인격·신앙심·리더십·인력동원과 자금지원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 권위와 명예를 중시하는 종교계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 첫 서명자를 의암 선생으로 추대할 정도로 헌신적이었고 출중한 인격을 가졌다. 이 책에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때의 비화도 담겨 있는데, 낌새를 맡고 들어온 조선인 형사가 손병희의 독립정신과 인격에 감화되어 끝내 입을 다물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우리는 선생의 고결한 인품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를 바꾼 3·1혁명의 핵심에 의암이 있었고 천도교가 중심이 되었음에도 이 부문에 조명이 덜 되었으며, 평가에 있어서도 인색한 면이 없지 않다. 또한 동학혁명 과정에서 그리고 천도교 역사에서 손병희의 역할이 묻힌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시기 손병희와 천도교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 재평가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공적을 되찾자는 것이 아니라, 3·1혁명이야말로 우리나라 민주공화제의 출발점이며, 국민통합과 남북평화통일을 위해서 민족공동체의 키워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정의’를 바로잡자는 의미이다.
책 속으로
어느 날 친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찾아온다. 아버지가 관가의 돈 100냥을 축내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손병희는 친구에게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자기 집에 100냥의 돈이 있으니 몰래 가져가라는 것이다. 친구는 일러 준대로 하였다.
덕분에 친구의 아버지는 풀려나지만 손병희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결국 손병희가 사실을 털어놓자 아버지는 친구가 어려울 때 돕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며 오히려 칭찬을 하였다.
- PP. 25~26
손병희가 북접의 중군통령으로 임명되어 직립 동학혁명의 최전선에 참여한 것은 그의 생애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동학에 입도하여 수행과 포교 그리고 교조신원운동의 중견간부에서 이제 비록 훈련받지 않은 오합지졸이지만 보국안민·척왜척양의 기치를 든 혁명군의 리더로 바뀌었다. 중국 청대의 홍수전洪秀全 등 역사상 종교지도자가 혁명가로 변신한 경우는 적지 않았다.
- PP. 86~87
손병희는 민족적인 거사를 앞두고 기금을 준비하였다. 자금이 없으면 ‘운동’은 불가능하다. 특히 많은 사람을 동원하고 타종교의 협력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기금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손병희는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많은 돈을 지원하였다.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할 때 3만 원을 비롯하여 3·1혁명 준비과정에 기독교 측에 5천 원 등 독립운동 자금의 ‘뒷돈’은 대부분 천도교의 몫이었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의 증언이다.
- P. 236
천도교는 동학의 창도 이래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기치를 내걸었다. 백성이 학정에 시달릴 때 보국안민의 동학혁명으로 봉기하고, 민족이 외적의 압제에 짓밟히자 광제창생의 3·1혁명을 주도한 것은 교헌(敎憲)의 정신에 충실한 종교운동이자 곧 민족해방운동이었다.
- P. 258
손병희의 마지막 가는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는 그가 형집행정지자로 석방된 죄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영결식을 성대하게 치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영결식장에 다수의 시민이 모이면 만세시위라도 벌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 P. 321
- '노컷뉴스' 에서 발췌한 내용 -
의암 손병희 선생의 서체
의암 손병희 선생 묘소
1장
격변기에 서자로 출생
무과 계통의 양반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청주목에서 아전을 지내는 중인계층이었다.
밀양손씨가 대주리에 정착한 지 5대에 이르러 손병희가 태어났다.(1861년 철종 12년)
의암이 태어나기 한 해 전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고 1862년에는 임술민란의 시발인 진주민란이 일어났다.
안동김씨 등의 세도정치로 국정이 극도로 문란해지고 봉건 지배층의 억압과 착취가 심해지면서
민중저항이 전국 각지에서 폭발하고, 천주교의 국내 포교와 보급이 일어난 데 이어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최제우가 민족적 위기를 느끼면서 동학을 창도하였다.
최제우의 동학과 2세 교조 최시형은 손병희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후일 동학의 3세 교조가 되었다.
손병희의 아버지 손두홍은 첫 부인 전주이씨가 첫 아들을 낳고 33세에 사망하자
경주최씨와 재혼하여 손병희를 출산하였다.
그래서 엄격한 의미로 첩의 자식인 서자가 아니라 재가녀의 자식인 셈이다.
역사상의 비범한 인물이 태어날 때이면 신이新異한 탄생신화 또는 설화가 전하듯이, 손병희 어머니도 그랬다.
어머니가 마을 아낙네들과 뒷산 망월산으로 달마중을 갔는데 어머니가 제일 먼저 달이 아닌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소리쳤는데, 해가 어머니 품 안으로 들어왔다는 태몽을 꾸고 손병희를 낳았다고 전한다.
15세가 되던 1875년 12월 24일 현풍곽씨의 딸과 결혼하였다. 신부는 3년연상이었다.
어느 날 문중에서 제사를 지낼 시 성년이 되었기에 당연히 제례에 참석하려는 그에게 문중의 어른들이,
감히 서자가 묘역에 올라왔다면서 쫓아내려 했다. 손병희는 물러 서지 않았다.
'나도 손씨 가문의 뼈를 받아서 태어났는데, 조상에게 참배도 하지 못하게 하면,
부득이 나한데 뼈를 주신 조상의 뼈라도 파가서 별도로 산소를 모시고 참배를 하겠다'면서
곡괭이를 들어 산소의 한쪽을 파헤치려고 했다, 이를 지켜본 문중 어른들은 결국 참배를 허락하면서,
당돌하고 그렇지만 논리가 정연한 손병희의 언행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2장
암담한 시대, 동학에 입도하다
정부는 1864년 3월 동학 교주 최제우를 혹세무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대구감영에서 처형하였다.
최제우는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이름을 '제우'라 짓고 동학을 창도하여
포교 4년 만에 신도가 3천여 명에 이르는 등 점차 세력이 커졌다.
이에 불안을 느낀 정부가 체포하여 죽인 것이다.
손병희는 20리 떨어진 마을에 사는 한 동학도를 찾아갔다.
"동학은 용담龍潭 최수운 선생이 천명하였으나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 최해월 선생이 대도주가 되어 포교중입니다.
동학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 백성이 되어
장래 참주인을 모시고 계룡산에 신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손병희는 7년 연상의 조카 손천민과 동학접주 서택순의 안내로1882년 10월 5일 동학에 입도하였다.
21세 때의 일이다. 서택순의 집례로 김삼일을 전교인으로 하여 입도식을 마쳤다.
이후 손병희는 일생동안 자신이 동학에 입도한 사실을 후회하지 않고 진정한 동학의 길을 변함없이 걸어갔다.
- '의암 손병희 평전'에서 발췌 -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초상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응구(應九), 그 뒤 규동(奎東)으로 고쳤으며, 일본 망명 때에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썼다.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성사(聖師), 천도교 제3세교주, 교종(敎宗) 의암성사 또는 후천황씨(後天皇氏)
라고도 불렀다. 충청북도 청원 출신. 두흥(斗興)의 큰아들로 어머니는 둘째부인 최씨이며, 방정환(方定煥)은 사위이다.
서자(庶子)로 어린 시절부터 자기와 같은 약하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이 자라났다. 가난 속에서도 호방한 기질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의리도 남달리 뛰어났다.12세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관청에 공금을 내려고 가다가 눈길에 쓰러진 사람의 구휼비로 지급하는가 하면, 옥에 갇힌 친구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친구에게 자기 집의 돈 있는 곳을 알려줘 그 돈으로 친구 아버지를 풀려나게 한 적도 있었다.22세 때인 1882년(고종 19) 큰조카인 천민(天民)의 노력으로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도하였다. 입도 3년만에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이 사이에 동학의 교세는 날로 확산되었다.1892년에는 최시형 등 간부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했고, 동학대표 40여 명은 서울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며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었다.그들은 다시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帳內)에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척양’ 등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최시형의 참모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 무렵 정부의 부정부패는 심화되었으며,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대항해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남접(南接) 산하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일대 항쟁을 전개하였다.이 과정에서 남·북접의 관계가 미묘해지자 최시형은 타협 조절을 대도소(大都所)에 맡겼다. 손병희는 두령으로서 대도소장 김연국(金演局) 등과 함께 남접에 대한 성토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지영(吳知泳)의 중재로 1894년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타협해 갈등은 해소되었다.그 뒤 김연국의 뒤를 이어 북접통령(北接統領)이 되어 통령기(統領旗)를 받고 공주전투 등 항일구국전선에 나섰다. 또한 북접 산하 동학교도를 지휘, 통솔해 논산에서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패배해 남접과 헤어졌다.이 후부터 최시형과 함께 충주 부근에 이르렀으나 12월 14일 개별적으로 행동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그 뒤에 최시형과 손병희 등 주요 간부들은 관군의 추격을 받았으나 생존한 북접 간부들의 노력으로 교세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특히 탄압의 손길이 적게 미쳤던 함경도와 평안도지방으로 피신해 그곳의 교세 확장, 포교에 힘썼다.최시형에게 성실한 생활태도와 지략의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897년 12월 24일 실질적인 제3세 교주로서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에는 마침내 교주가 되었다.
교주가 된 뒤에는 먼저 두령이 참석한 데서 설법식(設法式)을 거행하고 이후 여러 지방을 돌며 동학의 재건에 진력하였다. 공주전투에서 패배한 뒤 포교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세계사정을 살피고 동학재건 구상을 위해 미국 시찰을 계획하였다.1901년에는 동생 병흠(秉欽)·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대판(大阪)에 머물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책동이 두려워 그 해에 상해(上海)로 가서 수 개월을 지내며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좌절되고,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일본에 이미 망명해 있던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조희연(趙羲淵)·이진호(李軫鎬)·박영효(朴泳孝) 등과 만났으나, 가명을 썼으므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망명생활 중 본국과 연락하면서 교세의 재건에 힘쓰면서 교도들에게 새로운 문명학술을 배우게 하고자 일본유학을 알선해 유학생이 상당히 나왔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에게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게 하여 조직체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교도의 교양을 위해 <삼전론 三戰論>을 발표하고 의정대신과 법부대신에게 글을 보내어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다.진보회는 지방회원이 11만명에 달하는 큰 단체로 발전했지만, 그동안 태천(泰川)의 관치사건(串侈事件) 등으로 많은 회원이 참살, 익사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발전, 390여 개의 지회조직을 비롯해 30여 만명이 단발(短髮)을 실천하는 등 생활개선에 앞장서 관민을 놀라게 하였다.그러나 이 단체가 동학교도인 것을 알게 되자 정부에서도 1894년 동학농민봉기 당시를 생각해 일본측과 교섭, 이를 탄압하므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이토(伊藤博文) 등이 친일세력을 기르기 위해 조직한 유신회(維新會)의 송병준(宋秉畯)과 합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진보회가 확대되자 손병희의 지령을 배반한 이용구와 합병함으로써 진보회의 혁신운동은 실패하였다.나아가 친일화함으로써 정부개혁과 일본과의 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승국의 일원으로 행동하려던 본래의 목적은 실패로 끝나고, 갑진혁신운동도 실패를 면하지 못하였다.이용구의 동학 배반과 친일추구화를 나중에야 알고서 이용구 일파를 동학교에서 축출하는 한편, 동학의 이용을 막기 위해 정교분리(政敎分離)와 사후대책을 강구하였다.먼저 동학포교 46년 12월 1일 ≪동경대전 東經大全≫의 ‘도즉천도(道則天道)’를 인용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동학의 참신한 정신을 되살리며 본래의 종교운동으로 되돌아갔다.
이 때 동학의 본지(本旨)인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이와 같이 혼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란한 때문이라면서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안정시켜야 된다고 역설하였다.이어서 우리 도(道)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도라, 후천개벽은 인심개벽(人心開闢)에서 시작되는 것이요, 인심개벽은 정신개벽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정신개벽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천도(天道)를 잘 행하는 데 있는 것이라 하였다.이어서 이용구 등 친일 배교분자(背敎分子)들의 매국행위를 보고 1906년 1월에 일본에서 귀국해, 2월 16일에 <천도교대헌 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의 다동(茶洞)에 설치하였다.이미 천도교를 선포할 때 오세창 등을 6임소(任所)에 임명했고, 자신은 대도주(大道主)의 직무를 겸무하며, 교도를 설교하고 일요일을 시일(侍日)이라 정해 시일식(侍日式)을 거행하였다.
귀국 후 천도교의 조직과 교세 확장에 힘쓰며 친일 배교한 이용구 일파까지도 회유 시켜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용구는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진회에 속한 천도교인들의 포섭공작을 펴면서 손병희를 중상모략하며 천도교의 파괴를 꾀하였다.이에 일제를 배경으로 하는 일진회와 맞서는 것이 여러모로 불리함을 깨닫고, 1906년 9월 17일 자신이 가장 신임하고 재정문제까지 맡아 처리하던 이용구 이하 62명에 대해 동학으로부터 출교처분(黜敎處分)을 내렸다.이들은 손병희의 망명기간 중 재정권을 거의 위임받아 처리했기 때문에 동산·부동산이 그들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타격이 컸다. 이에 정교 분리를 내세워 오직 종교활동만을 전개하기로 하고, 당면한 재정난은 교도들이 한줌의 쌀을 내는 성미법(誠米法)의 제정을 통해 타개책을 모색하였다.1911년 4월 일제가 성미의 염출마저 금지시키는 탄압을 받았으나, 교도의 자발적인 특별의연금으로 보충시켜나갔다. 1914년 3월에는 무기명성미제가 실시되어 재정상태는 호전되었으며, 이는 3·1운동 때 운동자금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한편, 천도교에서 쫓겨난 이용구·송병준 등 친일파는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어 일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폈다. 이에 비해 천도교는 교세도 약화되었고 재정도 궁핍하였다.이에 1907년 손병희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도주의 직을 김연국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김연국은 대도주의 직을 지닌 채 평소 비난하던 시천교의 대례사(大禮師)로 취임하였다. 이렇게 되자 손병희는 1908년 1월,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의 직을 맡게 하였다.손병희는 일본망명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임을 깨달았다. 귀국 후 먼저 보성학교를 비롯해 합동소학교(蛤洞小學校)·광명소학교(光明小學校)·석촌동소학교(石村洞小學校) 등에 정기적인 보조와 일시적인 보조를 하여 학교폐쇄를 면하게 하였고, 또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에도 관계하였다.
또한 여자교육기관인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을 돕고 보성학원을 인수, 경영하였다. 1914년 말에는 동덕여자의숙의 경영권도 인수하였다. 이 밖에도 지방에는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校)·일신보통학교(日新普通學校), 청주의 종학학교(宗學學校) 등 7, 8개교에 관계하였다.또한 최석창(崔錫彰)·민건식(閔建植) 등의 도움을 받아 출판기관으로 주식회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시설은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경무총감부에 계류되었다.1910년 초 사동(寺洞) 중앙교당 옆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해 ≪천도교월보≫ 제1호를 내고 뒤이어 보성사와 병합해 보성사로 하고 시설을 확충하였다.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운영난이 심각했지만 잘 극복하였다.1910년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가 일진회의 활동을 금지, 해산시키자 시천교도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또한 일제는 천도교의 교세 확장을 막기 위해 손병희를 헌병대에 소환하고, 천도교의 재원인 성미법을 폐지하려고 하였다.그러나 손병희는 포교에 더욱 힘쓰고 교당 건립에 진력해 4월 5일의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 8월 14일의 지일기념일(地日紀念日), 그리고 12월 24일의 인일기념일(人日紀念日)의 3대 행사에는 시일식을 마치고 축연을 베푸는 등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그리고 드디어 대안동(大安洞) 중앙교당이 성립되었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혹독해져 갔지만, 우리의 민족의식은 더욱 높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천도교측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6년에 이미 천도교도 중 민중봉기를 건의한 신도가 있었고, 1917년에도 같은 건의가 있었다.
1918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국제정세가 한국독립에 유리해졌다. 이에 권동진·오세창과, 1919년 일본 동경(東京)의 2·8독립선언에 접한 최린(崔麟)·권동진·오세창이 협의하면서 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로 하였다.손병희는 천도교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그 해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고, 일원화해야 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구체적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오세창·최린·정광조(鄭廣朝)에게 일임하였다.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였다.
논저로는 <수수명실록 授受明實錄>·<도결 道訣>·<명리전 明理傳>·<천도태원설 天道太元說>·<대종정의설 大宗正義說>·<교(敎)의 신인시대(神人時代)>·<무체법경 無體法經>·<성심신삼단 性心身三端>·<신통고 神通考>·<견성해 見性解>·<삼성과 三性科>·<삼심관 三心觀>·<극락설 極樂說>·<성범설 聖凡說>·<진심불염 眞心不染>·<후경 後經>·<십삼관법 十三觀法>·<몽중문답가>·<무하사>·<권도문>·<삼전론>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義菴孫秉熙先生傳記(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編, 1967)
三·一運動 50周年記念論集(東亞日報社, 1969)
韓國思想 12-崔水雲硏究-(韓國思想硏究會, 1974)
의암 병상일지
1962년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공로훈장 중장
Arirang - George Win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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