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포덕 158(2017)년 1월 21일(토)
장소 : 천도교부산시교구
신용구(申鏞九) 1883년 ~ 1967년 2월 10일.
천도교 지도자로 도호는 묵암(默菴)이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편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한학과 사상의학을 수학했다.
1900년에 한성부로 올라와 정치 단체에 가입하였다가 발각되어 1905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3년 동안
거주하기도 했다. 귀국 직후인 1914년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15년부터 천도교 창녕군 전교사가 되어 경남 일대에서 포교 활동을 벌였고, 1923년에는 진주교구 종리사로
임명되고 포교에 성과를 거두었다. 주관포덕사를 거쳐 종법사, 상무종법사, 주관도정 법정 등으로
계속 지도적 위치로 진출했다. 파벌로는 최린의 천도교 신파에 속해 있었다.
1937년에 천도교 중앙종리원 성도관정과 도령에 올랐다. 도령은 중앙종리원을 대표하는 직책이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천도교 도령을 지내면서 조선에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자 이를 지지하고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는 등 전쟁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과 국민총력천도교연맹에서도 중심 역할을 맡았다.
1940년 11월 천도교 대표 중진 교역자인 교령 이종린 등과 신궁참배단의 일원으로 이세신궁과 메이지신궁 등을 참배하였다.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61년 5월 18일에는 5·16군사정변을 지지해 군사혁명위원회를 방문하였고,
이 자리에서 “장(張) 정권의 무능, 무력과 부패상을 지적하고 군사혁명의거를 적극 지지하며 앞으로 모든 불의 부정과
사회악을 제거하고 혁명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가진 힘을 다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장로로 추대되었고,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천도교중앙총부 교령에 피선되었다.
결혼할 때도 평등 사상을 내세우며 걸어갔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종교 활동에 헌신하면서 영남 지역 천도교 포교 활동에 일생을 바친 인물로 평가된다.
천도교 출판사인 신인간사는 2001년에 신용구의 강화를 묶어 《글로 어찌 기록하며》를 펴냈다.
한때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대상자로 거론되었으나 2008년 5월 26일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로
선정한 처분을 취소하라는 결정이 내려진 바 있다.
시대적 상황과 그에 따른 교단 최고 지도자의 고뇌가 평가의 고려 대상이었으리라.
※ 위 묵암 신용구 선생에 관한 내용은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묵암선생추모자료집 등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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