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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동학 천도의 세계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

 

천도교 시원포 (天道敎 侍源布)

90년의 발자취

 

 

 

 

 

 

 

시원포는 포덕 65년(1924)11월에 평양을 중심으로 설립된 연원 조직으로, 해방 후에는 북한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남북 분열 저지 운동, 영우회 의거를 주도한 핵심 조직이었습니다. 북한

정권에 의해 시원포 연원 지도자들이 체포 순도당하는 등 많은 희생을 겪어야 했습니다.

 

 

6·25전생으로 천도교 조직이 혼란을 겪게 되었으나, 포덕 91년(1950) 월남한 양이제 사모님이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북한 지역에서 활동하다 남하한 시원포 100여 호를 수습하고, 그 다음

해부터 수운대신사께서 수도하던 용담정에서 1,000일 기도를 마친 후 용담, 경주 지역에 살고

계시던 많은 대신사님의 유족들도 시원포에 합류하였고, 북한에서 활동하다 남하한 대구, 송탄,

성남, 금화 지역의 많은 천도교인들이 시원포에 합류하여 규모가 큰 연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현재 대신사님 후손들이 대부분 시원포에 참여하여 스승님의 유적지 성지 보존을 위해 많은 성금을

내시어 유지 보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대신사님의 일가족 묘소의 벌초 및

유지 보수도 맡아 관리에 정성을 다하면서, 대신사님의 심법을 펼치는 포덕 사업에도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남한으로 오셔서 대규모 포덕을 일구신 양이제 사모님(후에 천도교 종법사로 추대되심)께서 "북한

에서 월남한 교인들을 수습하여 천도교의 발상지인 용담에서 용담교인들과 함께 용담연원을 이루었으니

정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이 기쁘다, 우리 도는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인류 평등의 대의와 보국안민, 남북통일의 염원을 실천하기 위해 희

생하신 시원포의 선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천도교인이 되어 무극대도 발전과 교회중흥에 앞장서겠다

는 것을 우리 시원포 일동은 맹세합니다.

 

 

 

시원포 90년사 편찬위원장 청암 이국진

 

 

 

 

 

 

 

 

사진으로 보는 천도교와 시원포

 

 

 

 

 

 

 

 

 

 

 

 

 

 

 

 

 

 

 

 

 

 

 

 

 

 

 

 

 

 

 

 

 

 

 

 

 

 

 

 

 

 

 

 

 

 

 

 

 

 

 

 

 

 

 

 

 

 

 

 

 

 

 

 

 

 

 

 

 

원을 이루었으니 정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이 기쁘다. 우리 도는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해주지 않으며, 부자일신 있지마는 운수는 각각이다. 모든 교인이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쉼이

도를 실천하면 한울인이 반드시 감응하리라고 본다. 아직도 미숙한 부분이 많지만 앞으로 통일

이 되면 좀 더 자료가 발굴되어 시원포 연혁사를 보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2) 포 연혁사 작성을 위해 『천도교창건사』, 『천도교창건록』, 『천도교회월보』, 『신인간』, 『원주직대장』,

『연원록』, 『천도교여성회70년사』, 『천도교청년회80년사』, 『3.1재현운동지』, 『천도교종령집』, 『동학의원류』

『천도교월보』 등을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시원포 사람들의 발자취

수 많은 내용 중 한 분의 발자취만 옮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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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명색 역사를 가르친다는 어떤이가

"룸살롱의 원조인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고 종로서에 전화를 했다..."  등의 망발을 늘어놓아 사회적 지탄을 받을 바 있었다.

강의 내용 중 심지어는 주옥경 사모를 술집 마담으로 비하시키기도 했던 모양.

 

 

 

하여  "시원포 90년사" 에 실린 사모의 사진과, 김종록 저 "근대를 산책하다"를 참조하여

혁명가의 삶을 살다 간 주옥경 종법사와  천도교가 독립운동과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던 내용등에 대한 이해를 돕기로 한다.

 

 

 

 

 

 

 

 

 

 

 

기녀에서 교조의 사모,여성운동가로 자신을 혁명한 수의당 주옥경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일흔을 넘긴 가냘픈 할머니가 단상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독립선언서를 거침없이 낭독했다. 1971년 중앙청 동쪽 광장(광화문) 삼일절 기념식장에는 박정희 대통령, 이효상(李孝祥, 1906~1989) 국회의장, 민복기(閔復基, 1913~2007) 대법원장 등 3부 요인과 외교사절, 독립 유공자, 2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민족 대표 33인 유족회 주옥경(朱鈺卿) 회장은 의암 손병희의 미망인으로 28세 때 홀로 되어 죽을 때까지 수절한 여성운동가였다. 수의당(守義堂)이라는 도호는 바로 의암을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도교의 여성운동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와 궤를 같이한다. 오랫동안 천도교 내수단(內修團)을 이끈 주옥경 여사는 일본에서 유학한 엘리트로서 청빈하며 겸손한 일생을 살았다. 손병희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자 수의당 주옥경은 형무소 앞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세 들어 지극정성으로 옥바라지를 했다. 꼬박꼬박 하루 세끼 사식을 만들어넣는 한편 교파를 가리지 않고 차입 비용을 부담했다.

 

손병희는 옥중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병보석이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치료할 기회를 놓치고 수감된 지 19개월 20일 만에야 풀려났다. 주옥경은 한시도 쉬지 않고 병간호를 해서 가족들과 신도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잠시 차도를 보이던 손병희는 1922년 5월 19일 영면하고 만다. 이후로 주옥경은 87세로 죽을 때까지 60년을 수절하면서 고결한 여성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교계 안팎에서 두루 칭송했다.

 

그녀는 종로 명월관의 기생 출신이다. 평양 근교 숙천(肅川)에서 출생한 그녀는 8세 때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간다. 주산월(朱山月)이 그녀의 기명이다. 그녀는 몸을 파는 이, 삼패(二, 三牌) 기녀가 아니라 기악과 서화에 능한 일패(一牌) 등급의 예단(藝壇, 연예인)으로서 「매일신보」 기자로부터 서화의 천재라고 평가받았다. 주산월은 평양에서 서울로 오자마자 기둥서방이 없는 기생인 이른바 무부기(無夫妓) 조합을 만들고 행수(行首, 우두머리)가 된다. 그해 명월관을 출입하던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 신도가 된 그녀는 22세 때에 손병희의 부인으로 들어간다. 두 사람은 33세의 나이 차가 났다. 이후로 그녀는 가정과 교단에 헌신한다.

 

스승처럼 모시던 손병희가 순국하자 주옥경은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와 여성운동에 투신한다. 소파 방정환의 미망인 손용화를 비롯해 손병희의 딸들은 주옥경을 깍듯이 어머니로 모셨다고 한다. 여성운동가 주옥경은 손병희와의 짧았던 행복을 추억하며 긴 고독의 세월을 학처럼 고고하게 살았다. 의암의 명예에 누를 끼칠까 봐 삼가온 일생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1961년보다 한 해 앞서 여종 하나를 딸로 삼고 또 다른 하나를 며느리로 들였다. 해월 최시형은 모든 어린이와 여성을 하늘로 모시고 섬겼다. 의암 손병희는 기생을 부인으로 삼았고 그 부인은 여성운동가로 거듭나 마침내 종법사(宗法師)가 되었다. 사람이 하늘임을 몸소 실천하고 증명해 보인 혁명가들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왼편)과 수운회관

 

(1918년 12월 착공 1921년 2월에 준공)

 

 

안국역 근처 운현궁(雲峴宮) 맞은편 천도교 수운회관.

앞뜰 동남쪽 모퉁이에 선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정문 왼편 문설주에 박힌 작은 동판이 잡지사 ‘개벽사(開闢社)’ 터였음을 알리고 있지만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대개는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다.

 

『개벽』은 이상화(李相和, 1901~1943)의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게재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잡지다. 현진건(玄鎭健, 1900~1943), 김동인(金東仁, 1900~1951), 염상섭(廉想涉, 1897~1963), 김소월 등이 작품을 발표했던 이 민족 정론지(正論誌)는 통권 72호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다. 그사이 무려 35회나 압수되고 수시로 삭제되거나 벌금을 물고 판매 금지를 당한다.

 

수운회관을 오른편에 두고 안쪽으로 들어가 만나는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이 천도교 중앙대교당이다. 탑신 모양의 청동 지붕에 검푸른 녹이 내렸다. 준공 당시에는 명동대성당,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서울 시내 3대 건물이었다. 3·1운동을 주도한 독립 운동가이자 동학을 천도교로 재편한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애초 조선총독부 청사보다 더 크고 위용 넘치는 교당을 짓고자 했지만 일제는 허가하지 않았고 결국 지금의 규모로 축소해서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건물 안팎에 박달나무 꽃과 무궁화 장식을 했다. 일본인이 설계했지만 민족혼을 되찾고자 한 손병희와 천도교도들의 의지가 담긴 표상이다. 교회당 내부는 기둥 하나 없는 장방형이다. 한국 민족종교의 대명사 천도교의 중앙대교당은 종교를 넘어 암울했던 식민지 시절 민족문화의 산실이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1운동의 유산이다. 우리는 3·1운동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바로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역사의 이면은 그렇게 단순치가 않다.

 

1912년 6월 19일, 손병희는 우이동 계곡에 봉황각(鳳凰閣)을 세운다. 그 전해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이 천도교에 입교하고 둘은 독립 일꾼을 양성하자고 결의한다. 이곳에서 3년간 483명의 교역자가 배출된다. 3·1운동 때 전국에서 이들이 주동이 되어 미리 보급한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찍어내고 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조직력과 함께 자금이 필요했다. 손병희는 교회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300만 신도들로부터 호당 10원씩 모금을 시작했다. 일제는 집요한 방해 공작을 폈지만 500만 원(현시세 약 2,000억 원)을 모았고 그 가운데 대지 구입비와 건축비는 36만 원이었다. 윤치오(尹致晤) 소유의 대지 1,500평이 3만 원,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나중에 우이동 봉황각 앞으로 옮김) 건물 두 동의 건축비가 33만 원이었다. 남은 돈이 3·1운동 자금으로 쓰였음은 물론이다. 기독교 대표 측이 최린(崔麟, 1878~1958)에게 독립운동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말하자 손병희는 5,000원을 쾌히 내주게 했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소유의 보성사(종로 수송동 연합뉴스 뒤)에서 인쇄했다.

 

 

 

 

 

 

 

 

 인수봉을 배경으로한 봉황각(鳳凰閣)

 

봉황과 같은 큰 인물을 길러내겠다는 의암 선생의 뜻을 담고 있다.현판의 서체는 각각 중국의 안진경, 회소, 마불의 필적을 한암(閒菴) 오세창(吳世昌) 선생이 모사하였다.왼편의 내실은 봉황각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해방 이후에는 손병희 선생의 부인인 의당 주옥경 사모님이 거주했다.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고,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을 것이외다.”

 

해방이 되어 귀국한 김구는 독립 자금을 대주었던 교단에 감사하는 연설을 바로 이곳에서 했다. 천도교는 고난의 연대에 민족과 명운을 함께했다. 창도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와 그 뒤를 이은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순교했고 3대 교조 의암 손병희는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다 병을 얻어 순국했다. 동학혁명 때 30만 교도가 죽었고 3·1운동으로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 일제의 천도교 탄압과 지도부 분열 책동, 자산 몰수는 혹독했다. 그 와중에도 민족종교의 리더답게 독립에 역점을 두고 출판 활동과 어린이, 여성, 농민 운동에 진력했다. 『개벽』 『부인』 『신여성』 『어린이』 『별건곤(別乾坤)』 『학생』 『농민』 등이 수천, 수만 부씩 발행되었다.

 

1923년 5월 1일에는 손병희의 사위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이 중심이 되어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선포한다.

당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어린이와 여성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해월 최시형의 혁명적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이처럼 교계 안팎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교세의 번창에 있었다. 수운회관 앞마당 남동쪽 모퉁이에는 월간지 『어린이』를 발간하는 등 어린이 행사를 처음으로 시작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있다. 억압받던 시대, 최대의 피해자가 어린이일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는 나라의 새 일꾼으로 개벽을 이끌 주체라는 걸 발 빠르게 선언한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벽의 주체인 어린이는 그야말로 ‘개벽쟁이’들이다. 옷을 입지 않은 알몸을 가리키는 ‘꾀복쟁이’라는 말은 바로 이 ‘개벽쟁이’를 가리킨다는 걸 동학도의 후예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배고프고 헐벗던 시절에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바지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고추를 드러내놓고 달음박질치며 자라났다. ‘개벽쟁이’는 장차 평화로운 세상을 여는 꿈나무들이기도 하다.

 

1926년 조선 종교 현황(동아일보)을 보면 불교인이 20만 명, 기독교인이 35만 명이었던 데 반해 천도교인은 200만 명이나 되었다. 200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불교인 약 1,100만 명, 기독교인 약 1,400만 명이고 천도교인은 5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불교나 기독교가 50배, 40배 폭발적으로 성장한 사이 천도교는 소수 종교로 쇠퇴 일로를 걸었다.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천도교에 우호적이었다. ‘수운회관’ 글씨도 그가 썼다. 그 덕에 교세가 되살아나다 1986년 최덕신 교령, 1997년 오익제 교령의 잇단 월북으로 교세는 급격히 위축되고 만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천도교가 최대의 종교다.

 

 

 

 

 

 

 

 

 

 

 

 

 

 

 

               

천도교는 민족종교의 리더로서 해방운동과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였다.

 

 

5·16혁명 직후 외무부장관을 지낸 최덕신은 임시정부 법무부 장관 출신 최동오(崔東旿, 1892~1963)의 아들이다.

최동오는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1926)과 친구 사이로 만주 화성의숙(華成義塾) 교장 시절 김일성을 거둬 교육시킨 인연이 있었다.

미국에서 살다가 월북한 최덕신은 김일성으로부터 최고의 예우를 받다가 아버지 최동오가 잠든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이런저런 내외의 악재와 가치관의 변화로 교세가 위축돼 있지만 시운(時運)이 오고 있어요. 천도교 사상이 바로 블루오션입니다. 오늘날 종교의 세속화, 물질화나 환경 문제는 인류의 패러다임을 전환케 합니다. 사람을 하늘처럼 떠받들어 모시고 뭇 생명을 한울님 대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만물이 저마다 지복(至福)을 누리게 됩니다.”

 

수운회관에서 만난 김동환 교령은 우렁찬 어조로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실천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3·1운동 정신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단다. 사상과 종파를 떠나, 온 겨레가 한 목소리를 냈던 3·1운동 정신은 자신과 자기가 속한 단체의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떳떳한 도리의 실천에 있다고 했다. 김 교령은 임기를 마치고 떠나고 현재는 임운길 교령이 교단을 이끌고 있다.

 

수운회관 터는 양명하다. 고풍스러운 중앙대교당과 우직해 보이는 수운회관 건물 사이 넓은 뜰에서 한국 자생종교의 미래를 생각해본다. 옛것을 본받아 새롭게 융창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개화기 때 외래 종교가 들어와 번창해온 세월 동안 민족종교는 쇠퇴 일로를 걸어왔다. 일제의 탄압만을 그 이유로 들 수는 없을 것 같다. 혹시 우리 한국인들의 정신적 사대주의가 작용한 건 아닐까. 또한 종교의 본령보다 세련된 스타일을 중시하는 풍토에 발맞추지 못한 건 아닐까.

 

의암 손병희는 죽어서 영결식 때에야 비로소 완공된 중앙대교당 건물을 보았다. 일제는 그때 모은 교인들의 피 같은 성금 128만 6,000원을 압수해갔다. 금값으로 환산하면 500억 원 가량 된다. 그러나 일제의 수탈은 물질에 그쳤을 뿐 한겨레의 얼은 끝내 훔쳐가지 못했다. 심령 안에 깃든 하늘을 어느 누가 빼앗아갈 수 있겠는가.

 

수운회관을 나서며 ‘국가는 인류를 교화시키는 가장 위대한 도덕적 제도’라고 했던 독일 역사학자 슈몰러(Gustav von Schmoller, 1838~1917)를 떠올렸다.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겼던 시절, 천도교(동학)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교세가 움츠러들어 거의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천도를 말하는 종교도 유행을 타는 것인가. 어쩌면 천도교가 시대정신에 맞게 변화와 발전을 하지 못하고 정체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연례행사로 치르는 삼일절 기념식 말고 현대인의 가슴을 파고드는 정신개벽이 필요한 것이다. 심령의 울림은 시절이 사나울수록 더 깊고 큰 법이다.

 

 

때에 맞게 쓰지 못하는 도는 도가 아니다.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족종교가 이 땅을 넘어 온 인류를 위해 용시용활(用時用活)할 때는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