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축제·전시·공연

추사 명선(茗禪) 진안변(眞贋辨)


 

 

 

한동안 지상에 오르내렸던 추사 글씨의 진적(眞蹟) 여부에 관한 논쟁.

피서 차 도서관에 갔다가  한양대 정민 교수 저 『조선의 차 문화』 를 뽑아 들었는데,

내용 중  435 ~ 455 쪽에 걸쳐 "추사(秋史)  명선(茗禪)  진안변(眞贋辨)"이 수록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궁금하던 차, 공부삼아 그 내용을 이 자리에 옮겨 본다.

 

 

 

 

신필의 장한 기운

추사 명선(茗禪)  진안변(眞贋辨)

 

「명선(茗禪)」은 추사가 초의 스님에게 차를 받고 고마움을 담아 써준 대작이다. 차를 매개로 이어진 추사와 초의의 인연이 아름답고, 차를 선(禪)의 경지로 끌어올린 정신의 경계가 우뚝하다. 우리 차 문화사에서 간과치 못할 뜻깊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 호방한 필치로 진작에 추사 대표작의 첫 손을 꼽아왔다. 몇 해 전 이 글씨가 위작이란 주장이 제기되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가짜의 범람 앞에서 우리 문화계는 심각한 각성과 다각적인 자기 점검을 강화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가짜에 대한 혐오가 지나쳐 진짜를 가짜로 내모는 경향까지 나타나는 현실은 더욱 우려할 만하다.

이제 「명선」 관련 쟁점을 검토하고, 자료를 통해 논자의 생각을 제시하겠다.

 

 

 

 

 

                                                   위작 논란에 휘말린 추사의 대표작 「명선」.

 

 

「명선」 위작설의 경과와 논거

 

「명선」위작 논란은 2004년 강우방 교수의 문제 제기로 쟁점화되었다. 뒤이어 이영재와 이용수는 『추사진묵(秋史眞墨)』이란책에서 이 작품을 아예 이재 권돈인의 작품으로 단정했다. 이후 추사의 「명선」을 둘러싼 안작(贋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명선」을 추사작이 아닌 위작 또는 타인작으로 꼽는 관점의 논거를 검토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강우방의 논지는 이렇다.

 

미술품의 진위 문제는 영혼의 문제이다. 훌륭한 작품에는 반드시 예술가의 영혼이나 시대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서 그것에 대응하는 정신적 성숙함과 예술적 감성을 갖춘 인격의 소유자가  바라볼 때 반드시 접신(接神)의 현상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즉,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영적(靈的)인 떨림이 있다. 그것은 문자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체험과 감응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진위를 증명해보라고 하는 자체가 진위를 구별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런 접신과 영적인 떨림이 주는 신비 체험을 「명선」에서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여타 걸작들이 보여주는 "정신이 번쩍 들만큼 추상같아서, 그 획 하나하나는 영기(靈氣)로 빛나며 생명력으로 꿈틀거렸으며 획들의 구성에 빈틈이 없었" 던, 그리하여 영혼의 떨림만이 있었던 감동을 이 작품에서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단언했다. "짜임새 없는 구도, 힘없는 획, 게다가 객기가 많은 획" 등으로 휘갑된 어딘가 천박한 작품들의 목록 가운데 그는 「명선」을 포함시켰다. 강우방은 필획의 분석이나 앞뒤 맥락 없이,'영적인 떨림'과 '접신 현상'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을 근거로 제시했다. 어느 날 문득 접신 체험을 하고 보니 가짜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접신 체험은 '정신적 성숙함과  예술적 감성을 갖춘 인격의 수유자'에게만 열린다. 내 접신 체험에 동의하면 성숙함과 감성을 갖춘 인격의 소유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천박한 오류를 답습하는 속류로 전락하게 되는 대단히 폭력적인 논리다. 진짜라고 말하면 천박한 안목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소통 구조는 독선적이다.

 

 

 

 

 

 

거의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는 네 종류의 병거사 친필.

 

 

 

이영재와 이영수는 추사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 중 '염(髥)', '우염(又髥)', '병거사(病居士)', '나가산인(那伽山人)' 등의 관서는 모두 추사가 아닌 이재 권돈인의 아호이므로 「명선」을 쓴 사람 또한 권돈인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여타 호는 따로 말할 것이 없고, 「명선」에 쓰인 '병거사'의 경우,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첩『나가묵연(那迦墨緣)』 17통 편지 중 제12서에 「명선」과 똑같은 필치로 쓴 추사 친필의 '병거사' 서명이 있고,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다른 친필 편지첩인 『벽해타운(碧海朶雲)』의 제1신에도 동일한 필체의 서명이 또렸하다. 또한 탁본첩인 『석각화유마송(石恪畵維摩頌)』의 끝에도 '병거사'의 서명이 완연하다. 이영재 등이 주장한 '병거사'가 권돈인이라는 설은 이들 자료만으로도 근거를 잃는다. 필자는 『문헌과 해석』37호에 다산의 걸명 시문과 편지를 모아 이를 풀이한 「차를 청하는 글 - 다산의 걸명시문」발표했다. 이 글에서 다산의 제자 황상의 문집 『치원유고』에 실려있는 초의에게 보낸 「걸명시」를 처음 소개하면서, 시 속에 담긴 '명선' 관련 기록을 언급했었다. 요컨데 황상의 시에 근거하여 '명선' 이 추사가 초의에게 준 호였음을 언급하고, 그렇다면 이 글씨는 다른 사람이 쓴 것일 수 없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위 논문은 「명선」의 진위 여부를 논하는 데 논점이 있지 않았으므로 자료 소개 차원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가고 말았는데, 이 문제가 언론을 통해 집중 부각되면서 다시「명선」의 진위를  둘러싼 논란이 재현되었다.

 

강우방은 이에 대해 다시 반론의 글을 발표했다. 황상의 시에서 명선이 추사가 초의에게 준 호임을 밝힌 사실과 추사의 작품인「명선」의 진위 여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명선」의 모든 획은 일 점 일 획도 추사의 획이 아니고, 글씨의 구성도 짜임새가 없고 헐거워 구성의 천재로 일컫는 추사의 안목이 아니라고 했다. 방제도 굵고 가는 획이 너무 차가나서 달리 본 적이 없는 모양새고, 결구도 치밀하거나 견고치 않다고 했다. 더욱이 후한의 비석이면 예서임이 당연한데, 굳이 작품 말미에 예서로 쓴다고 밝힌 것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고 지적했다. 곳곳에 획의 마무리가 흐려지고 있으며 예서의 법도에 어긋난다고도 했다. 또 『추사진묵』에서 권돈인설을 제기했던 이용수는「함부로 추사를 논하지 마라」라는 글에서 「명선」의 획이 전체적으로 약하고, 특히 협서가 수준 이하임을 강조했다. 더욱이 '병거사'의 관서는 도저히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 했다. 그러면서 황상의 시를 통해 추사가 초의에게 '명선'이라는 호를 준 것이 사실이라면, 이 글씨는 권돈인의 작품도 아닌 추사의 위작이 될 뿐이라고 했다.

 

 

 

「명선」의 위작 논란에 단서를 제시해 주는 「백석신군비」(우)와 그 탁본(좌). ⓒ차의세계

 

 

이후 월간 『차의 세계』2007년 9월호에 최석환이 중국 하북성 원씨현(元氏縣) 봉룡산(封龍山) 천불동(千佛洞) 옆 한비당(漢碑堂)보관된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 원석을 찾아내서 쓴 「백석신군비 원석 발견으로 햇빛 본 추사의 명선」이란 글이 발표되자,  다시 강우방은 즉각 글을 발표했다. 그는「백석신군비」 글씨를 추사의 글씨와 비교해보니 더더욱 명백하게 추사의 「명선」이 가짜임을 알겠다 하며, 비석 탁본의 글씨와 추사 글씨의 필체를 비교하고는 우리 미술에 대한 모독이요, 우리 문화의 위기라고 극론하였다. 앞서 본 두 사람의 글은 모두 논자의 논문을 미쳐 읽지 않은 채 신문 기사만 보고 쓴 글이어서 당시에는 따로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다만 한 번쯤은 명백히 짚고 넘어 가야 할 문제여서, 앞서 '다반향초'에 관한 논의에 이어, 여기서 「명선」과 관련된 필자의 입장을 정리해두고자 한다.

 

 

「명선」에 얽힌 초의와 추사의 인연

 

추사가 「명선」이란 글씨를 초의에게 주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다.

최초 언급은 논자가 앞선 논문에서 공개한 다산의 제자 황상이 초의 스님에게 보낸 「걸명시」에 보인다.

 

 

 

 

 

 

陸羽善茶但聞名                  육우가 차 잘함은 이름만 들려오고

建安勝負獨傳聲                 건안차의 승부는 소문만 전해지네.           

乘雷拜水徒聒耳                 승뢰니 배수니 한갖 귀만 시끄러워           

不如草師搴衆英                  초의 스님 무리 중에 우뚝함만 못하도다.   

竹葉同炒用新意                 댓닢을 함께 볶아 새 방법을 사용하니

 

 

 

北苑以後集大成                 북원의 이후로 집대성을 하였다네. 

禪佳號學士贈                     명선이란 좋은 이름 학사께서 주시었고

추사가 명선(茗禪)이란 호를 주었다. (秋史贈茗禪之號)                      

草衣茶名聽先生                 초의차란 그 이름을 선생에게 들었었지.    

我溪不及南零者                  아계가 남령에 미치진 못했어도 

猶能可居箭泉下                    오히려 전천 아래 능히 둘만 하였다네. 

請君莫惜紫茸香魚眼松風     청하노니 자용향과 어안송풍 아끼지 말고 

塵肚俗腸三廻四廻瀉           티끌세상 찌든 속을 세 번 네 번 씻겨주소.

 

 

이 시는 앞서 「찌든 속을 씻겨주오」에서도 한 차례 읽은 바 있다. 초의에게 차를 청하면서 댓잎을 함께 볶아 만든 초의차의 우수한 맛을 칭찬한 내용이다. 제7구에서 '명선'이란 호를 추사가 초의에게 주었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추사가「명선」방제의 글씨에서 추사가 친절하게 밝힌 그대로 초의가 보내준 훌룡한 차를 받고 그 답례로 써준 것임이 자명해진다. 명선이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이름이라면 엉뚱하게 권돈인이 고맙다고 초의에게 글씨를 써서 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 밖에 추사의 「명선」과 관련된 황상의 글 한 편이 더 있다. 박동춘 소장이 필사본 미정고인 「초의행 병소서」가 그것이다. 「초의행」은 황상이 1849년 40여 만에 대둔사 일지암으로 초의를 찾아가 재회한 후의 소감을 쓴 장시다. 조선 후기 차 문화의 성지라 할 일지암대한 귀중한 정보가 담겨 있고, 「명선」과 관련된 언급도 보인다. 전문은 앞서 글에서 소개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소서(小序) 부분만 싣기로 한다.

 

내가 어려서 다산 선생께 학습하였다. 초의는 이때 옷을 잠시 ㅁㅁ(원문 1자 결)하고 있었다. 참구하여 찾다가 선생님께 왔다. 내가 한 번 만나보고는 그만두고 돌아가 백적산 가야 들에서 밭을 갈며 자취를 감추고 빛을 숨긴지가 어언 40여 해가 된다. 혹 진주에서 온 사람 중에 그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에 짖지 않았다. 금년 기유년(1849)에 열상에서 돌아와 대둔사의 초암으로 초의를 찾아갔다. 눈처럼 흰 머리털과 주름진 살갗이었으나 처음 대하는 못 보던 사람 같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보니 과연 초의임에 틀림없었다. 추사 선생께서 주신 손수 쓴 글씨를 보기를 청했다.「죽로지실」과 「명선」같은 글씨의 필획은 양귀비나 조비연의 자태여서 자질이 둔한 부류가 감히 따져 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등불을 밝혀놓고 새벽까지 얘기하다 뒷기약을 남기고서 돌아왔다. 「초의가」를 지어서 부쳐 보낸다.

 

황상은 다산의 유배 초기인 강진 동문 밖 주막 시절에 다산을 찾아가 배웠던 제자다. 그와 다산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미 여러차례 다른 글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황상은 20대 초반에 다산초당으로 찾아온 초의를 한 번 만난 적이 있고, 이후 무려 40여 년간 그를 보지 못했다. 1849년 당시 62세였던 황상은 추사 형제의 거처를 왕래하며 지냈다. 황상은 특히 추사 형제에게서 시를 높이 인정받아, 형제가 황상의 시집에 서문을 자청해서 써주었을 정도였다. 서울에서 초의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황상은 새삼 옛날 생각이 나서 고향에 내려온 후 40 여 년 만에 불쑥 대둔사 일지암으로 초의를 아갔다. 아마도 서울 쪽의 편지 심부름 부탁도 있었을 것이다. 좌정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황상은 대뜸 초의에게 추사가 써준 글씨들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초의가 추사의 글씨를 많이 소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초의가 황상에게 보여준 글씨가 다름 아닌 「죽로지실」과 「명선」 두 폭이었다. 황상은 글씨의 필획이 양귀비나 조비연의 자태인 듯 아름다워서 자신처럼 자질이 둔한 부류가 감히 따져 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어 시에서는, 선사가 추사의 글씨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왕희지가 견지에 썼다는 「난정서」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했다. 음양의 체세가 글자 밖에 넘나서 용과 뱀이 꿈틀대고 벌레가 꾸물대는 듯하다고 적었다. 만약 소동파가 지금 세상에 살아 있었다면, 추사의 이 글씨백금과 보옥으로 맞바꾸었으리라고 칭찬했다. 이 두 글을 통해 우리는 '명선'이 추사가 초의를 위해 지어준 별호임과, 1849년 당시까지「명선」이 추사의 또 다른 대표작 「죽로지실」과 함께 일지암에 보관되고 있었음을 새롭게 확인할 있다. 결국 「명선」은 추사가 초의에게 써준 것이 분명하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명선」가짜라면, 누군가 일지암에 있던 진적(眞蹟)을 보고 베껴 쓴 것이라야 옳다.

 

 

 

 

추사가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청대 「금석색(金石索)에 수록된

「백석신군비」 본문(부분), 탄(憚)과 예(禮)자가 보인다.

 

 

「명선」의 필획, 과연 추사의 것이 아닌가?

 

이제 이 논란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강우방의 지적대로 중국에서 「백석신군비」가 발견된 것이다, 황상이 「명선」을 직접 보았다는 사실은 현재 추사의 「명선」이 진적일 개연성을 높여줄 수는 있어도, 그것이 위작이 아니란 절대적인 증거는 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필체 검증과 같은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서만 확정할 수 있다.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면 본문의 '명선' 두 글자뿐 아니라, 방제의 글씨 또한 추사의 것이 아니어야 한다.

 먼저 추사가 「명선」에 쓴 내용을 읽어본다.

 

초의가 자신이 만든 차를 부쳐 왔는데, 몽정차나 노아차에 못지않았다. 이를 써서 보답한다.

「백석신군비」의 필의를 써서 병거사가 예서로 쓴다.

 

귀한 차를 받고 보답의 뜻으로 써준다고 밝히고, 글씨체는 「백석신군비」의 필의(筆意)로 썼다고 명시했다. '명선' 두 글자는 후한의 비석으로 알려진 의 서체를 본떠 쓴 것이다. 「백석신군비」는 어떤 비석인가? 흔히 「백석산비」로도 불리는 이 비석은 하북성 원씨현에 있는 백석산 백석신군사(白石神君祠)에 세워졌던 것이다. 한나라 영제(靈帝) 광화(光和) 6년(183)의 일이다. 이 비석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한대의 비석이 아닌  후대 것으로 의심되기도 한는 등 논란이 적지 않았다. 글자의 짜임새가 방정(方整)하고 글자 형태는 일반 예서에 비해 조금 길쭉하다. 송나라 때 홍적(洪適)은 『예석(隸釋)』에서 이 비석의 글씨가 균형은 정제되어 있으나 필획에 한나라 때 글씨가 보여주는 기골(氣骨)이 없다고 하면서, 비석에 광화 연간의 연기(年記)가 있지만 후대 사람이 옛글을 다시 새긴 것 같다고 깎아 말했다.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은「양한금석기(兩漢金錫記)에서 "이 비석의 서법은 오로지 방정함을 위주로 하여, 한나라 예서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가지런한 것이다. 하지만 풍골의 굳셈은「교관비(校官碑)」의 예법(隸法) 보다 더 윗길인 듯하다."고 극찬했다. 옹방강의 제자를 자처했던 추사이고 보면, 추사가 옹방강이 극찬한 「백석신군비」 예서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실제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글씨를 보고 "필의가 극히 좋아서 경군(景君) . 백석(白石) 양비(兩碑)의 체도(體度)가 있는데, 혹 합하의 팔목 아래서 스스로 재량하여 쓰신 것입니까, 아니면 우연히 신기하게 서로 합치된 것입니까? 라고 한 대목이 있다. 권돈인이 예서로 쓴 비문 글씨가「익주태수경군비(益州太守景君碑)」와 「백석신군비」의 법도를 갖추고 있음을 극찬한 내용이다. 추사가 「백석신군비」의 서체를 익히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추사는 「백석신군비」 탁본을 어떻게 구했을까? 1830년 10월 29일 중국의 유희해(劉喜海, ?-1852)가 김명희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추사가 써보내준 「소단림(小丹林)」 제액의 보답으로 「백석신군비」 탁본을 섭지선 편에 보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유희해는 추사의 도움을 받아 뒤에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펴냈던 인물이다. 추사는 옹방강의 글을 보아 익히 알고 있던 「백석신군비」의 탁본을 45세 때인 1830년에 유희해가 보낸 원탁(原拓)으로 구해 익혔다. 추사 당대에 옹방강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백석신군비」는 상당히 각광을 받아 널리 쓰여졌던 듯하다. 자하 신위의 문집에 실린 「제한예범득십수(題漢隸凡得十首)」에도 「백석신군비」원탁의 글씨는 상태가 좋지 않아, 추사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이 흔히 구해 임모(臨摹)의 교본으로 삼았던 청판본 『금석색(金石索)』에 수록된  「백석신군비」탁본에서 채자하여

 

 

 

 



 

  '명선' 두 글자를 위쪽 그림과 같이 조합하였다.

'초(艹)'와 '명(名)'을 아래위로 합자하고, 예(禮)'와 '천(燀)' 두 글자의 좌우 반을 합쳐 만든 것이다. 균형을 위해 명(名)은 85퍼센트의 장평을 주어 축소하고,  그 위에 초두를 얹었다.「백석신군비」전체 높이가 2.4미터, 폭은 81센티미터 × 115.2센티미터의 대작이다. 한 글자의 크기만 해도 가로세로 각각 50센티미터가 넘는다. 두 글자 모두 원석에 없는 글자여서 조합해서 만들어야 한다. 집자한 글자의 분위기는 일견해서도 추사의 글자와 흡사하다. 초두[艹]부분은 원본과 달리 각 획의 끝을 꺾어 올려 초(艸)의 형태로 썼다. 공간의 조밀도를 균등하게 하려는 배려에서다. 실제 한나라 때 예서비 중에 「한성양영대비(漢成陽靈臺碑)」같은 비석에는 초두를 초(艸)의 형태로 쓴 것이 적지 않다. 이 비석은『금석색』에 「백석신군비」바로 앞에 실려 있다. 화면을 채운 방정한 글씨를 강조하기 위해 단(單)의 입구(口) 두 개도 마늘모[厶 ]로 하지 않고 입구(口)로 꽉 채웠다. 상당히 큰 붓으로 힘껏 눌러 쓴 글씨다.「백석신군비」의 방정한 필의에 충실하면서도 공간 분할과 여배 처리에 변화와 함께 통일성을 부여했다.

 

강우방은 '명선' 두 글자의 탁본과 추사 글씨의 세부 획을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뭉툭하고 옹색하기 짝이 없는 위작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그는「백석신군비」를 처음 본다고 했다. 이것은 참 놀라운 발언이다.지금껏「백석신군비」조차 보지 않고 추사의 「명선」이 가짜라고 단정 지은 셈이다. 그는 또  「백석신군비」 직접 보니 과연 좋은 글씨라고 했다. 막상 그가 최석환의 글을 통해 보았다는「백석신군비」의 글씨는 조잡하게 합자된 '명선'두 글자뿐이었다. 잡지에 실린 '명(茗)'자의 합자를 보면 온전하게 써진 '명(名)' 자 위에 초두[艹]를 어정쩡하게 얹어놓은 우수꽝스런 형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무모하게도 이 우스꽝스런 합자(合字)의 결구와 추사 글씨의 필획을 하나하나 대비했다. 2센티미터도 못 되는 원탁의 작은 글자와 50센티미터에 가까운 추사의 큰 글자를 세부 획의 같고 다름을 가지고 선조(線條)의 동이(同異)로 판단하는 것은 실로 무모한 비교법이다. 아주 작은 글씨로 쓴 비석 글씨, 그것도 탁본 상태에 따라 필획에 큰 차이를 나타내는 원탁의 글씨를 큰 붓을 꽉 눌러 쓴 대자의 필획과 1대 1로 비교하는 것은 상식 밖이다. 참고로 「백석신군비」안에도 서로 느낌이 다른 '명(名)'자가 세 차례 등장한다. 또 그는 '석(夕)'자의 맨 아래 뻗친 획이 끝이 뭉툭하게 끝났는데, 이미 써놓은 방제로 인해 공간이 없어 갑자기 멈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짜니까 먼저 방제를 써놓고 나서 명선 두 글자를 썼다고 주장한 것이다. 글씨를 조금만 살펴 보면 금새 알 수 있는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우선 오른쪽 방제에서 아래쪽 '서차위보(書此爲報)'에서 '위보(爲報) 두 글자가 '선(禪)'의 마지막 획에 밀려 바깥쪽으로 밀려나 있다. 또 왼쪽은 '용백석신군비의(用白石神君碑意)' 일곱 글자와 '병거사예(病居士隸)' 네 글자 사이에 상당한 여백이 있다. '명선' 두 글자를 먼저 쓴 다음 필획이 방제의 줄을 침범한 것을 반영한 데서 나타난 현상이다. 방제를 먼저 쓴 것이 아니다.

 

 

 

     

      

 「명선」의 방제 글씨를 추사의 검증된 진적에서 채자해 정리한 표.




「백석신군비」의 전반적 분위기를 보지 않고, 추사의 일반 예서풍의 잣대만으로 본다면, 확실히 명선 두 글자는 추사의 여느 글씨풍과 다르다. 하지만 「백석신군비」의 필의에 충실해서 두 글자의 결구를 보면, 추사가 굳이 비석의 필의로 쓴 사실을 전면에 내세운 까닭을 알 수 있다. 추사의 「명선」두 글자는 글자의 크기와 공간 배치를 고려할 때,「백석신군비」의 필의를 충실히 살리면서도 단단하고 야무진 짜임새를 지닌 글씨다.  특히 '명(茗)' 자의 결구는 탁월하다. 가로세로 공간 여백의 포치를 조금만 눈여겨 본다면, 추사의 솜씨를 알 것이다. 추사의 예서 글자 중 크기가 가장 큰 글씨를 이 같은 짜임 안에 소화하기란  결코 추사의 신필이 아니고서는 가능치 않다.

 다음은 앙옆에 쓴 추사의 방제 부분의 필체 문제다.

방제의 글씨에 대해 강우방은 "굵고 가는 획이 너무 차가 나서 그의 진적에서 본 적도 없거니와 우선 결구가 치밀하지 못하고 견고하지 못하다." 고 했다. 이용수는 "특히 그 협서의 수준은 두말할 것도 없이 수준 이하이다. 추사 선생은 협서나 특히 관서는 행서 적어도 해생서로 하신다. 하지만 이 명선의 협서는 해생서로 보기 어려운감이 있다. 특히 '병거사예'라 쓴 관서는 도저히 추사의 글이라 볼 수 없다. '거(居)' 자의 뭉개진획을 보라 이것이 어찌 서성(書聖) 추사의 글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논자는 방제에 쓰인 낱낱의 글자를 추사의 이미 검증된 진적 가운데서 하나하나 채자하여 제시한 표와 같이 정리하였다. 표의 왼편 첫 칸이 「명선」의 방제에 쓴 추사의 글씨이고, 옆의 세 가지는 추사의 여러 칠필 서첩에서 따온 것이다. 추사의 진적임이 분명한 간찰첩에서만 채자했다. 결론부터 말해 어느 낱글자의 일 점 일 획도 추사의 다른 글자와 차이가 없다.

 

 

 

 「명선」의 방제 글씨를 추사의 검증된 진적에서 채자해 정리한 표.

 

 

 

거의 모든 획에서 일관된 운필 습관과 결구 특성이 드러난다. 추사 아닌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라면 모든 글자에서 이런 정도의 일치가 일어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기(寄) . 제(製) . 명(茗) . 불(不) . 보(報) . (白) . 석(石) . 신(神) . 의(意) . 로(露) 등 거의 모든 글자에서 본문 글자와 다른 서첩에 보이는 글자의 운필이 부절(符節)을 맞춘 듯이 같다. 신(神)의 첫 점획이 내려 긋는 획 안쪽에 작게 자리 잡은 것이나, 마치 무성의하게 뭉개 쓴 듯한 '의(意)' 자의 획이 다른 서첩에서도 한결같게 나타나는 점 등은 특별히 더 그렇다.「명선」의 방제 필획을 보면 알겠지만 획이 섬세하지 않고 필획도 자주 뭉개지거나 붓끝이 뭉특하게 끝나는 획이 많다. 왜 그랬을까?  '명선'을 쓴 큰 붓을 바꾸지 않은 채 같은 붓으로 작은 글씨를 마저 썼기 때문이다. 큰 붓을 힘껏 눌러 비질하듯 쓸어서 큰 글씨를 쓰고 난 후, 그 붓끝을 모아 작은 글씨를 썼다. 활달한 행서보다 해서에 가까운 필획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막상 작품의 크리고 보면 옆의 방제 글자도 그리 작은 것이 아니다. 자연스런 흥취에 따라 내달아 한 호흡에 쓴 것이지 이것저것 따져 머뭇거리며 쓴 붓질이 아니다. 그 결과 모든 필획에 추사의 평소 운필 습관이 그대로 녹아들었다. 여타의 가는 붓으로 쓴 작은 편지 글씨와 비교해 보더라도 일 점 일 획의 차착(差錯)이없다. 이 어찌 놀라운 붓이 아닌가? 앞서도 보았듯 이용수가 그토록

보기 싫다고 한 '병거사'의 뭉개진 획만 하더라도 추사의 다른 글에서 쓴 '병거사'의결구와견주어 보면 오히려 너무나 똑같은 데 놀라게 된다.더욱이 다른 사람이 위작을 했다면, 1849년 당시 일지암에 소장되어 있던 그 「명선」을 보고 훙내 내서 쓴 것일 텐데,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에서 그 큰 수고와 잔 글씨의 세부까지 연구해서 위작을 만든단 말인가?  또 아무리 연구한다 해도 방제의 모든  필획이 추사의 여타 글씨의 필획과 모든 글자에서 이러한 일치를 보일 수는 없다. 추사 말고 예를 들어 권돈인의 글시를 이런 방식으로 집자해본들 비슷한 글자를 결코 하나도 얻을 수없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가짜일 수 있는가?  이것이 가짜라면 일지암에 있던 추사의 진적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다는것인가?

 

이제 논의를 정리한다.

첫째, '명선' 두 글자는「백석신군비」원석에 없다. 추사는 필의를  따와 조립하면서

초두[艹]를 초[艸]의 형태로  변형하고, 아래 '명(名)'을 절묘하게 공간 분할하여 전체적으로 공간 배치의 묘를 살렸다.

 '선(禪)' 자도 입구(口)를 세모꽃 아닌 네모꼴로 바꾸어 방정한 여백 처리를 강조했다.

둘재, 두 글자 모두 일반 예서와 달리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긴 느낌을 주는 것은

「백석신군비」서체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셋째, 방제를 먼저 쓰고 본문을 쓴 것이 아니라, 본문 두 글자를 먼저 쓴 뒤에 여백에 맞추어 방제를 썼다.

본문 필획에 밀려난 오른쪽 끝의 두 글자와, 침범한 필획에 끊긴 방제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넷째, 방제의 낱낱 글자들은 다른 서첩의 낱글자를 채자해 비교해본 결과 모든 글자에서 일 점 일 회의 차이도 없다.

추사의 평소 운필 습관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위작자가 아무리 마음먹고 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붓놀림이다.

다섯째, 방제의 작은 글자의 획이 거칠거나 끝이 뭉툭한 것은 본문을 쓴 큰 붓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방제를 쓴 데

따른 현상이다. 거칠고 투박해도 평소의 운필 습관과 결구 특성이 오롯이 반영되어 있다.

 

「명선」은 중국에서 구해온 최고급 화선지에, 초의의 귀한 차를 얻어 고마운 마음과 넘쳐나는 흥취를 주체하지 못해 작심하고 종이 위를 춤추듯 왔다 갔다 하며 쓴 신필(神筆)이다. 전체 작품이 뿜어내는 기운은 곧장 보는 이를 무찔러 들어온다. 이 신필을 진짜라 하는 것이 어찌 우리 미술에 대한 모독이요, 우리 문화의 위기라 하는가? 2007년 9월 12일자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추사가 실로 위태롭다」와 같은 날 쓴 「추사의 글씨에 대한 나의 생각」에서 강우방은 자신의 주장에 대해 학계가 묵묵부답하는 것이 위선적 행위며, 심히 개탄스런 현실이라고 탄식했다.

 하지만 막상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결코 반론하지 못할 것이라고도 했다.

 

 학계의 침묵은 앞서 말했듯 그의 문제 제기가 너무도 비학문적이고 폭력적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정신의 성숙성과 예술적 감성을 갖춘 인격의 바탕에서 접신해보니 가짜가 명백한데, 그 진위를 증명해보라는 말은 허망할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대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상대할 수 없는 주장이다.

 

 

 

추사의 「명선」은 진적이다.

그것도 그만그만한 작품이 아니라, 걸작의 반열에 놓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대표작의 하나다.

「명선」은 최고급 종이에, 흥취를 주체하지 못해 작심하고 쓴 신필이다. 전체 작품이 뿜어내는 장한 기운은

곧장 보는 이를 압도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우리차 문화사가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다.

우리 문화사의 보배로운 유물을 아무 근거 없이 가짜로 내모니 어찌 아니 민망한가?

 

`

 

추사 김정희 초상

 

 

 

 

초의 스님 초상

 

 

 

'문화 > 축제·전시·공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겁 그리고 찰나 1  (0) 2016.08.24
모네가 사랑한 정원  (0) 2016.08.22
숲 속의 노래 그리고 詩  (0) 2016.08.15
木山 공예관  (0) 2016.07.19
김규석 목공예, 마음으로 새긴 우리무늬  (0) 2016.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