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탐매

용문매(龍門梅)는 사라지고...

2015. 8. 1


경남 남해 호구산(虎口山) 용문사(龍門寺)



천황각




남해 용문사 목조사천왕상

 목조사천왕상으로 밟고 있는 악귀는 사천왕상의 육신과는 따로 만들어 배치되었으며

 악귀가 아닌 세속 관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목조 분할 제작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각 이음 부분에 나무심을 끼우거나 철심을 박아 고정시키는 수법을 적용.



 663년(신라 문무왕 3년) 개창.  남해 일원에선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구유(구시통) 경남유형문화재 제427호 / 조선시대

나무 둘레 3m, 길이 6.7m



주련 모음















용문사 대웅전

 보물 제1849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좌우 퇴칸에 비해 중앙 어칸이 넓고 매 칸마다 2구의 공간포가 놓여 있다.

공포 구성은 외3출목, 내4출목이며, 첨차의 길이가 대체로 짧다.

처마는 겹처마로 부연(浮椽)이 길어 전체적으로 지붕이 위로 휘어져 들려 보인다.

 전형적인 조선 후기 다포계 건물로 화려한 단청 및 번잡한 공포 형태임을 알 수 있다.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대웅전 내부 건양2년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 1897년)을 배경으로 봉안되어 있다.

17세기에 활약했던 조각승 현진(玄眞)의 작품인 법주사(法住寺) 대웅전의 소조 삼신불좌상(三身佛坐像, 1626년)이나

부여 무량사(無量寺)의 소조 아미타삼존불좌상(1633년)과 양식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1610년을 전후한 초기작인 함양 상련대(上蓮臺) 원통보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1612년),

구례 천은사(泉隱寺)의 목조 관음·세지보살좌상(1614년)과 유사한 점이 많아, 현진의 작품으로 추정한다고.



 목조지장시왕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6호)

조선시대의 목조불상 25구이다. 명부전 내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도명존자, 오른쪽에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그 좌우로 시왕상 10구와 판관 2구, 귀왕 2구, 명부사자 2구, 인왕상 2구 등 모두 21구의 존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용문사의 백지묵서발원문에 의해, 목조지장시왕상은 1678년(현종 4) 지현(智玄)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복염천에 남해 호구산 용문사를 찾은 까닭은 단 한가지,

바로 '용문매(龍門梅)'의 안위를 살피기 위한 것.

헌데 아무리 눈을 씻고 둘러봐도 매화나무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사진 상 왼편 '정료대' 너머 여자분이 가르키는 지점에 있어야 할 '용문매'가 보이지 않는 것.



오른편 '적묵당' 화단 앞 반바지 차림의 남자 등 뒷편  약간 흰색으로 보이는 마당 부분에 서서

봄날, 용문사를 찾는 이들에게 황홀한 매향을 선물하곤 했던 '용문매'에 대한 추억!






추억속의 '용문매'

200년 수령의 용문매가 작년에 고사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종무소를 방문하여 알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수 년 전부터 나무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토록 빨리 가게 될 줄은....

"나무용문매타부~~~울!!!"


매향이 사라진 용문사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저 그런 나무 한 그루 사라진 걸 두고 무슨 유난을 떠는가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매화, 그 중에서도 우리 고매(故梅)의 가치와 소중함에 비견되는 대상을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호구산 자락의 차밭과 용문사, 앵강만(鶯江)의 청자빛 바다가 어우러진 모습.

바다 건너는 설흘산과 용봉산을 잇는 라인이다.

(용문사 홈피 사진)



용문사 승탑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5호 )









대부분 조선 후기의 석종형 부도 형태로서, 각 부도마다 승려들의 당호가 음각되어 있다.

청하당대사증심(靑河堂大師證心), 세담당일행대사(洗淡堂一行大師), 취영당초영대사(翠影堂草英大師),

효월당한묵대사(曉月堂閒黙大師), 송곡당대사(松谷堂大師), 해진당천해대사족록비(解塵堂天海大師族錄碑),

은암당원준대사(隱岩堂元俊大師) 부도 등.



용문사 언저리 바위마다 새겨놓은 성명 삼자.




용문사 뒷편 호구산 자락에 자리한 염불암








내려다 본 백련암.




지난 2010년 1월 호구산에서 조망한 앵강만.




호구산 돗틀바위와 강진해(2010년 1월)




남해 가천 다랭이 마을.






 서불과차(徐市過此)

세로 50㎝, 가로 100㎝. 경상남도기념물 제6호.


금산(錦山) 부소암(扶蘇巖)으로 오르는 길목에 가로 7m, 세로 4m 거북형태의 바위에 새겨진 화상문.

 중국 진시황(秦始皇) 때 삼신산(三神山)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시종인 서불(徐市)이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 금산을 찾아 한동안 수렵 등으로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이 화상문자(畵像文字)를 새겼다고 등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거북바위에 새겨져 있는 화상문이 서불이 새긴 것으로 알려진 까닭은

 위창 오세창 선생의 아버지 오경석이 위 암각의 탁본을 1860년에 중국으로 가져가 금석학 전문가에게

감식을 의뢰한 바 ‘서불과차(徐市過此,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라고 해석했다는 것.


현재까지 완벽한 해독은 없으나, 서불 자신의 이름을 새겨둔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서불기배일출(徐市起拜日出)’이라는 여섯자로 읽기도 한다.


 이 각자가 있는 양하리 계곡에 이와 비슷한 고문자가 새겨진 바위가 또 발견되었고,

그 부근 밭언덕 받침돌에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새모양의 선화(線畫), 양하리 벽련마을 뒷산마루

 바위에서도 고문자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 석각 또한 선사시대의 각화(刻畫) 내지 화상문자로 본다는

의견이 대세. 남해지방 고대문화의 전래 및 형성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라는 평이다..



 아래는 백과사전 '미스터리와 인물 진실편'에 나오는

서불이 한국에 왔다는 설과 오지 않았다는 설 두 가지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서불은 한국에 왔다.-


불로초를 찾아 출항하는 서불

불로초를 찾아 출항하는 서불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여러 사료에 등장한다. 『사기』 「회남 형산 열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서불로 하여금 바다에 들어가 신선(神仙)에게 기이한 물건을 구하게 하니, 그는 돌아와 거짓으로 말하기를

 “신이 바닷속의 대신(大神)을 만났는데 ‘네가 서황(진시황)의 사자이냐?’ 묻기에 신(臣)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묻기에 ‘수명을 연장시키는 약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그 신(神)은

 ‘너는 진왕(秦王)의 예(禮)가 박하여 그 약을 볼 수는 있으나 얻어 취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바로 신(臣)을 데리고 동남 쪽에 있는 봉래산으로 갔습니다.

영지초(靈芝草)로 이루어진 궁궐이 보이고 사자(使者)가 있었는데 구릿빛에 용의 형상이었으며

그 광채가 하늘까지 비추었습니다. 그래서 신(臣)이 재배하고 ‘마땅히 어떤 예물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묻자

 해신(海神)은 ‘양갓집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백공(百工, 장인)들의 제품을 바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시황이 크게 기뻐하며 동남동녀 3천 명을 보내고 갖가지 오곡과 백공들의 제품을

가져가게 하였습니다. 서불은 평원(平原)과 넓은 곳을 얻어 그곳에 머물러 왕이 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서불에 관한 이야기는 『한서』 「교사지」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삼신산이 발해 안에 있다고 적었고

『괄지지』에는 단주가 동해에 있다고 적었다. 『후한서』 「동이 왜지(倭地)」 조에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회계(會稽)의 바다 밖에 동제인(東鯷人)이 있는데 20여 나라로 나누어져 있다. 또 이주(夷洲)와 단주(亶州)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진시황이 방사(方士) 서복을 파견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봉래산의 신선초

(神仙草)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서불이 주살(誅殺)될 것이 두려워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이 주(洲)

 머물러 대대로 이어져 전해 내려오다 수만 가구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회계(會稽)의 저잣거리에 나온다.

회계의 동야 현 사람이 바다를 건너다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단주에 다다른 적이 있다고 한다.

그곳은 아득히 멀어 왕래할 수 없다



- 서불은 한국에 오지 않았다 -


"서불이 한국에 왔다"를 보면 서불이 불로초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동해와 발해가 한국과 연계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시된 사료를 면밀히 검토한 일부 학자들은 서복의 한국 방문설을 간단하게 부정한다.

한마디로 서불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고조선답사회의 김세환은 서불이 처음 신선을

찾아간 곳은 발해였으며 돌아와서 진시황에게 거짓으로 보고하고 동남동녀 3천 명을 데리고 간 곳이 동해라는

 데는 인식을 같이한다. 그런데 당시 발해와 동해가 한국인이 생각하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고 설명한다.

『후한서』 「왜지(倭地)」 조에 이주와 단주가 있는데 서복이 마침내 이 주에 머물렀다 했다.

 문제는 『임해수토지』에 “이주는 절강성 임해의 동남 2천 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는 사실이다.

임해에서 동남 2천 리 되는 곳에 지금의 대만이 있다. 서복이 바다를 건너간 이주와 단주는 한반도의 남해나

 제주도가 아니라는 설명인데 이를 부연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부르는 동해는 장강 하구에서 대만해협까지다. 그러므로 이주(夷洲)는 지금의 대만이고,

일본의 이칭(異稱)에 단주가 없으므로 단주는 유구 군도(硫球群島)의 충승(沖繩) 본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위 견해에 따르면 한국 남해 양하리에 있는 암각문을 ‘서불과차’라 읽는 자체가 서불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갔다는 선입견에서 나온 착각이며 오류라는 설명이다. 특히 서불이 간 곳도 일본이 아니라 왜지(倭地)임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진시황 때는 왜국은 있었으나 일본국은 없었기 때문이다. 남방 왜인은 주나라

 때에도 북상한 바 있고, 대만과 유구 군도는 그들의 북상 이동 경로이기도 하였다.

남해 양하리의 암각문 서체도 서불이 한국에 오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진시황이 통일하기 전 각국의

글이 달라 소통에 문제가 있자 대전(大篆)을 소전(小篆)으로 자형을 통일시켰다. 서복이 동남동녀를 데리고

바다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은 해는 기원전 210년이었으므로 서불이 소전을 습득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만약 서불이 한반도의 남해에 왔다고 한다면 그는 의당 소전으로 새겼을 터인데 남해의

암각문은 소전의 서체가 아니므로 서불이 한국의 남해나 제주도에 온 적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가 되면서 제후국마다 서로 다른 글자체를 쓰다가 진시황이 나라를 통일하면서

 진나라에서 사용하던 대전체를 바탕으로 문자를 통일했는데 이것이 소전체다.

   

중국인들이 삼신산이 발해에 있다고 믿은 이유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산둥반도 끝자락에 있는 펑라이 시에 펑라이각이 있는데 이곳은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넜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 중국 신선 사상의 근원지라고 알려진다. 학자들은 이곳 산둥반도가 신선 사상의 근원지가 된 이유를

그동안 부단히 찾았는데 근래 그 증거를 제시했다.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학자들이 제시한 증거는 신기루 현상이다.

 1988년 한 시간 넘게 지속된 신기루 현상이 포착되었는데 마치 커다란 궁궐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기루는 해수면의 기온 차로 생기는 착시 현상인데, 옛날 신선을 신봉하던 중국인들에게는 이 신기루가 바로

신선들의 세상으로 비쳤다는 것이다. 진시황도 이곳 펑라이각에 세 차례나 올랐으니 신기루를 보고 신선이

 바다 안에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 일로 불로초를 더욱 갈망하여 서불로 하여금 삼신산을 갔다 오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즉 신기루를 삼신산으로 착각했다는 설명이다. 이 지적은 현재 제주도의 서불전시관,

남해 상주리 석각 등의 내용과는 매우 상충하지만 전문가들의 지적이 날카롭다는 선에서 이해하기 바란다.



펑라이각에서 포착된 신기루 현상


 펑라이각에서 포착된 신기루 현상

바다 건너에 마치 커다란 궁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허베이 성 친황다오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하이관(山海關)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친황다오라는 이름은

서복을 출발시킨 항구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산하이관의 진시황에 대한 역사는 친황다오의 둥산공원에서

보이는데 둥산공원은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려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둥산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진시황제의 거대한 마차 군단이 보이는데 마차 군단은 진시황제가 탄 마차를 선두로 문무백관들이 마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조각한 대형 조각상이다. 명나라 헌종이 세운 ‘진황구선입해처(秦皇求仙入海處)’라는 비석이 있다.

 바닷가에는 신선에게 장생불사를 기원하던 진시황의 조각상을 세워놓았는데 높이 6미터, 무게가 80톤이나 된다.



중국 허베이 성 친황다오에 있는 제스 산       

중국 허베이 성 친황다오에 있는 제스 산      

친황다오에서 북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제스 산(碣石山)도 진시황이 신선놀음하는 주 무대로

등장하는데 제스 산은 한국과 크게 연계된다. 제스 산은 산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져 얼핏 보면 산 전체가 한

뭉치로 보이는데 이 지역이 한국 학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는 이유는 고조선의 중국 남쪽 하한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제스 산에 고조선의 ‘신시’가 있었다는 주장도 한다. 이곳은 진시황이 연나라 출신

노생을 파견하여 신선으로 알려진 선문과 고서를 찾아보라고 했을 정도로 신선에 관한 전설이 많은 곳이다.

 진시황 때의 것은 아니지만 제스 산 입구에는 비석이 남아있는데, 산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먼발치에서 그

비석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스 산은 약 1,800년 전 조조가 주둔했다고도 알려지는데 중국에서도 워낙

기(氣)가 센 곳으로 알려져 기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제스 산의 궁궐터        

제스 산의 궁궐터      

산둥 성에는 진시황이 타이산(泰山)에서 봉선 의식을 치른 랑야타이(琅琊臺)가 있다.

진시황제는 이곳에 행궁을 짓고 석 달 동안 머물렀는데 서복이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러 나간 동기를 기록한 ‘서불의 출항 기념비’가 랑야타이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랑야타이의 서복 출항지        

랑야타이의 서복 출항지      

진시황이 세 차례나 왕림했던 펑라이각도 산둥반도 끝자락에 있는 펑라이 시 바닷가 위에 있다.

봄과 가을에 이들 랑야타이나 펑라이각에서 내려다보이는 동쪽 바다 위에 신기루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 신기루를 보고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을 무조건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신선처럼 살 수 있다는 걸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Maxwell - Serenade

 


'자연 > 탐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유탐매(丁酉探梅) 2편   (0) 2017.01.27
정유탐매(丁酉探梅) 1편  (0) 2017.01.25
병신탐매(丙申探梅) 16편   (0) 2016.03.30
병신탐매(丙申探梅) 15편   (0) 2016.03.28
병신탐매(丙申探梅) 14편   (0) 2016.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