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탐매(丙申探梅) 7편
2016. 3. 11
두승산 자락 치재에서 조망한 정읍 시내 일원.
'치재제다' 방문
'치재제다'에서 생산하는 오암죽로차
팽주 : 五岩 박 성 경 치재제다 대표
두승산 북쪽 자락 매원과 차밭 방문
정화장군(맨 왼편)께서 관리를 맡으셨다는 茶梅園에서.
청매 군락.
두승산을 배경으로한 백매
드물게 홍매도 보이고.
상당기간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상태인 듯.
정화장군께서 머무신다는 태인으로의 출발에 앞서...
이평을 지나던 중 예전엔 보지 못했던 조형물이...
사발통문 형식을 조형물에....
동 진 강
동학농민혁명의 직접 도화선 '만석보유지' 현장으로.
만석보는 1892년(고종 29) 이평 평야 지역에 관개 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이 멀쩡한 저수지 아래쪽에,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부역을 시켜 새 보를 만들었다.
그 이후 새 보에 대한 수세라는 명목으로 한 마지기에 상답은 2두(斗), 하답은 1두씩을 받아 쌀 700석
가량을 착취했으며,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1894년 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만석보를 부수고 민란을 일으켜
갑오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지금은 둑을 쌓았던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지난1973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석보유지비를 세웠다.
백산면 쪽 들판
이평면 들녘(멀리 가운데 두승산)
동학농민혁명에 있어서 동학은 농민의 요구를 횡적으로 연결시킨
조직적 매개체의 역할 또는 단순한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사상적 계기 또는 농민운동의 지도원리로서의 동학 천도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데서 나온 것.
동학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 보위와 농민구제활동이 결합된 정치운동의 성격을 지니면서 역사적으로 전개시켜 나아간 것이다.
동진강에서 바라본 신태인 쪽.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다시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수 많은 민초의 생명과 맞바꾼 역사의 디딤돌 위에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그 거룩한 선열들의 기개를 과연 얼마나 기리고 추앙하고 있는 것인지...
태인향교
태인향교 뒷편 성황산 자락의 '성황매' 개화가 일부 시작되고 있었다.
그 좋던 수세가 부러져 나가고 잘려나가고,
복날의 용도가 분명한 견공들의 단체 악다구니에다.
나무 주위에 온갖 잡것들이 수북한지라 '탐매'라는 용어 자체를 입에 올리기가 난망한 지경.
성황매 근처 대숲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
한 그루가 분명한데도 희한하게도 열매가 두 가지(크고 작고) 형태로 열린다.
두승산 차매원 가꿈이 정화장군님 댁 방문(태인 매정마을)
명함 한 면엔 鄭 和 라 적혀있고,
또 다른 면엔 "직지문화연구소(直指文化硏究所) 대표 鄭 德 亨이라 적혀 있었는데
정작 당신 입으론 자신을 '정화장군'이라 호칭하고 있었다는 사실.
직지(直指)에 관해 오랜 시간을 쏟은 전력에다
중원 땅을 주유하며 티벳에서 백두에 이르는 거대 역사 담론 완성에다
차(茶)에 관해서도 여러 공부를 해 오신 듯.
정읍시의 초청으로 태인에 머물면서 차훈명상(茶熏冥想)의 보급을 비롯,
차문화와 관련된 여러 일을 추진 중이신 모양.
차훈득기(茶熏得氣)를 명상으로 연결,
몸과 마음을 강건히 하자는 차원이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할 뿐.
차훈(茶熏) 시범을 보이시는 정화장군님.
제일 먼저 눈 쪽에 차의 훈증을 쐬고 차례로 이목구비 전체로...
태인 정화 선생 댁에서 정읍 시내 모 찻방으로 이동.
다시 한 번 차훈(茶熏) 체험 현장.
Romance / Shostakovich / Rostropovich(C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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