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佛千塔의 沈默
2015. 8. 31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
(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
위는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
(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위는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 나오는 기록으로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인데 그 말미에는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벌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확실한 내용은 밝혀내지 못했다고.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 운주사 홈피 내용 참조 -
1984년부터 네 차례에 걸친 전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운주사 본래의 절터는
현재 대웅전이 있는 곳이 아니라 훨씬 아래쪽, 지금 주차장이 있는 곳 위의 밭 근처였음이 밝혀졌다.
10~1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무리굽 청자조각과 순청자 접시조각, 금동여래입상 등이 출토됨으로써
운주사 창건 시기가 고려 초기까지 소급되게 되었고, 고려 중기의 상감청자조각과 14~15세기의 청자조각이
상당히 많이 발굴됨으로써 고려 시대 전반에 걸쳐 매우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엔 헬리캠이 날고 지상에서는 영상 카메라 작업이 한창 분주한 모습.
불상과 탑들은 그 양식으로 보아 대체로 12~13세기 고려 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시대에는 불상에 있어서 운주사 불상들과 유사한 형태의 지방화된 양식들이 대거 출현했으며
또 탑에 있어서도 기존의 틀을 벗어나 육각이나 팔각 또는 원형탑들이 건립되었다는 사실.
운주사 서쪽 산능선에 오르면 거대한 두 기의 와불(미완성석불)을 볼 수 있다.
멀리 화순 청풍 소재 천태산과 개천산이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을 들어서는데 왼편 산자락에 전엔 보지 못했던 불상군이 보인다.
골짜기를 나오면서 뭔가 싶어 다가가보았지만 괜한 헛걸음이었다.
그나마 딱 한 점의 해학에만 잠시 머무는 시선.
산문을 나서며 『답사여행의 길잡이』에 수록된 내용을 잠시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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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의 집단적인 ‘못난’ 불상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다. 그들은 높직이 앉아 예배를 받는 부처님과는 거리가 멀고 차라리 낮은 땅에 엎드려 간절히 구원을 바라는 중생의 모습으로 읽힌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이, 그들은 비슷비슷한 무표정으로 볕 나면 볕 쬐고 비 오면 비 맞으며 여러 백년을 지냈다. 그 긴 묵시와 끈질긴 기다림, 그리고 그치지 않은 기원은 오랜 세월의 볕과 비바람에도 결코 풍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렬하게 살아온다. 하나하나의 돌부처에서 발음되어 나오는 가느다란 기원의 말들은 반복과 병렬과 개개의 무표정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웅얼거림으로 증폭되어 골짜기를 채우고 있다. 거기에는 깊은 바닷물의 일렁임 같은 두툼한 리듬이 있다.
이 골짜기에 돌부처를 무리로 세워 자신들의 기원을 새겨 넣은 것은 어느 때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 기원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운주사를 둘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의문이다.
우선 ‘전설 따라 삼천리’과에 속하는 설명으로는 신라 때의 고승인 운주화상이 돌을 날라다 주는 신령스러운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는 설과 중국 설화에 나오는 선녀인 마고할미가 지었다는 설이 있다. 거의 한 솜씨로 만든 듯한 돌부처들의 모습으로 보아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고, 또 석공들의 연습장이었을 거라는 자포자기적인 추측까지 있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도선국사와 관련된 풍수비보설이다. 도선이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선복(船腹)에 무게가 실려야 하므로 선복에 해당하는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또는 영남 쪽에 산이 많고 호남에는 적으므로 배가 동쪽으로 기울어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술을 써서 하루 만에 천불천탑을 세웠다고도 한다. 그러나 운주사 유적들이 12~13세기의 양식을 보이는 데 비해 도선국사는 훨씬 전인 9세기에 살던 인물이니만큼 연대가 맞지 않는다. 이는 풍수설이 민간에까지 유행하던 후대에 덧붙여진 설일 것이다.
풍수비보설 못지 않게 널리 퍼져 있는 설은 미륵신앙과 관련된 것들이다. 주로 운주사 부처들의 파격적이고 민중적인 이미지에서 뒷받침을 얻은 것들로, 이곳을 반란을 일으킨 노비와 천민들이 미륵이 도래하는 용화세계를 기원하며 신분해방운동을 일으켰던 일종의 해방구로 추정하고 그들의 염원으로 천불천탑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운주사를 유명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은 천불천탑과 ‘와불’ 얘기로 말미를 장식함으로써 운주사를 일약 미륵신앙의 성지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운주사는 고려 시대에 창건된 절이고 장길산은 조선 숙종 때의 이야기이다.
운주사와 미륵사상이 융합된 것은 창건 시기보다 훨씬 후대인 조선 후기, 즉 미륵신앙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던 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천불천탑 불사에는 상당한 재력이 필요했을 것이니 천민들만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객관적 조건을 무시한 추정일 것이다. 천민들에 의한 미륵도량설은 특히 변혁에의 열망이 컸던 80년대에 여러 경로를 통해 널리 퍼졌다. 궁금함이 클 때 사람들은 전설이나 나름의 근거를 담은 해석을 만들어 내지만, 그 과정에서 이렇게 객관적 사실을 떠나 설명하는 사람 자신의 시대가 투영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운주사에서 밀교적 색채를 읽어 내기도 한다. 운주사에서 출토된 수막새 기와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진언이 범어로 양각되어 있는 것, 돌집 안에 있는 두 부처를 밀교적인 음양불로 볼 수 있다는 것, 돌부처들이 대부분 지권인을 하고 있는 것, 또 일천불을 조성하여 모시는 천불신앙이 밀교에서 널리 믿어졌다는 것 등이 그 근거이다.
또 하나, 천불천탑이 몽골 침략기에 조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13세기 고려 고종 연간은 최씨 무신정권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면서 몽골의 침략에 시달리던 때였다. 당시 고려는 매일이다시피 각종 기도 도량을 베풀고 몽골군이 불태워 버린 대장경을 다시 간행하는 등 불교를 중심으로 민심을 모아 몽골군을 물리치려 했다. 고종 25년(1238), 몽골군은 고려인들의 저항의식을 무너뜨리기 위해 신라 이래 호국과 퇴병멸적(退兵滅敵)을 기원하는 인왕백고(仁王百高) 도량
이었던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황룡사를 대신할 인왕도량을 급히 만들었으니 이것이 운주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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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덕룡산 불회사 근처에 거처를 마련한 태극권의 고수 여연 서재식 선생을 찾아
근처 식당에 좌정 낮 술까지 한 잔 걸치게 되었는 바, 동네 이름이 이른바 '중장터'라고.
덕룡산, 가지산 일대에 산재한 운주사, 불회사, 운흥사, 보림사 스님네들이 모여들어
왁자지껄 장을 펼쳤대서 붙은 명칭임이 분명.
근방에 茶와 관련된 지명이나 명칭이 수두룩 할 만큼이니
물어 보나마나 주 거래 품목으론 당연 이런 저런 茶가 으뜸이었으리라.
차의 성인으로 추앙되는 초의선사가 초발심한 곳이
지근거리에 자리한 운흥사임을 상기한다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식사 후 동네 바로 옆에 자리한 운주사에 들르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천불천탑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라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헌데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소 껄쩍지근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그것은 운주사 천불천탑에 관한 학술적 고증이 아직 시원치 않다는 사실 때문.
그동안 수 많은 운주사에 관한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결정적 무게가 실린 그 무언가가 아직은 아쉬운 형편이기에 하는 말이다.
사찰이 아니라 칠성신앙을 내재한 도가의 사원이었을 거라는 주장에서 부터
완도를 본거지로 한 해상왕 장보고의 원찰이었을 거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근자에도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 모두의 완벽한 학술적 고증은
아직도 미진한게 작금의 냉정한 현실이라는데...
대저, 운주사 천불천탑의 침묵은 오늘도 여전히 현재진행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