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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로 통찰하는 인간의 가치 <2,3講>

 

전라남도교욱청 장성공공도서관

사유와 성찰이 있는 인문학 학당

  

 

- 지혜의 샘 인문고전 읽기 -

 

고사성어로 통찰하는 인간의 가치

(2,3講)

 

 

2014. 4.30

 

- 2講 사성어 -

 

 

 

 

 

 김 영 수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대 한 . 중 관계사로 석사, 박사 과정 수료.

중국 소진학회 초빙이사, 중국 사마천학회 회원, 전 영산원불교대학교 교수.

20년 동안 중국을 다니며 중국사의 현장과 연구를 접목, 사마천과 사기史記 연구에 매달려 왔다.

 

 

 

 

 

고사성어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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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講 유방의 리더십 -

 

일본인 작가시바 료타로는 사마천을 숭배한 나머지 성을 사마씨로 바꿀 정도였다.

모든 조건에서 항우가 유방에 비해 유리했으면서도 패하게 된 것을

그는 유방에 대해 '虛의 리더십'이라 평 했다.

 

 

 

 

 

 

 

 

 

 

 

 

 

 

 

 

 

항우의 집착,

유방의 현실 인정 그리고 수령으로 추되된 유방

 

 

 

 

 

 

유방과 장량의 천적 관계

 

 

약법삼장(約法三章)도 장량의 머리에서 나왔으리라 본다.

패상으로 물러난 유방은 그곳에서 관중 땅의 부로(父老)들을 모아서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선언한다.

사회 전반에 걸친 일체를 통제하고 제약한 진의 가혹한 법률을 "사람을 죽이면 사형하고

 다치게 한 자는 처벌하며, 물건을 훔친 자는 처벌한다."는 세 가지 조항만을 남기고 모두 폐지하여

관중 땅에서 유방의 지지도는 단번에 제고됐고 유방이 왕이 되지 않는 것을 걱정할 정도였다.

이 '약법삼장'은 후일 '간편한 법률'을 가리키는 법률의 격언이 되었다

 

 

 

당시 상황은 40만대 10만으로 유방의 세력이 절대 약했다.

 

 

 

 

 

 

드라마 '초한지' 중 유방과 항우에 관한 부분.

 

 

기원전 206년 진나라의 멸망 이후 유방의 한(漢)나라와 항우의 초(超)나라가 대립한 끝에

 기원전 203년 12월 항우의 패배와 죽음으로 한나라의 천하통일로 끝나는 전쟁.

 

당대 중국의 모든 세력이 얽혀들어간 그야말로 대전(楚漢) 중의 대전이며, 진나라 멸망 후 당대 최강자였던 항우는

 여러차례의 괴물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배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유방은 평민 출신으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자리에 오르게 되는 초유의 사건에 직면하게 되었다.

워낙 항우와 유방의 존재감이 막대하여 그 두명이 중국 땅을 갈라놓고 붙은 문자 그대로의 2파전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항우와 유방 외에 여러 왕들과 독자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긴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군소 세력들도 모두 항우의 세력권 아래 있거나 유방에게 협력하거나 하는등,

양대 세력의 결전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중국 역사상의 분열기는 많긴 하지만

이렇게 완전하게 양대결전의 사례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다.

 

또한 항우와 유방은 출신 계급부터 해서, 정책에 대한 마인드, 특징적인 능력, 성격, 모든 것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다른 존재였다.  이 서로간의 강렬한 개성으로 인해 이 전쟁은 인기도 많은 편이며,

 삼국지연의 마찬가지로 초한지같은 소설이 존재한다.

또한 이러한 항우와 유방의 강렬한 개성, 그리고 건한삼(建漢三傑) 등의 존재로 인해 중국사의 여러 전쟁 중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대결이기도 하다. 다만, 정사 삼국지삼국지연의에서 나타나는 이야기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이제 많이들 알고 있는데 비하여, 실제 역사 기록상에 나타나는 초한 전쟁과

소설 초한지의 내용에 대한 차이점은 모르는 경우가 잦다.

 

-엔하위키 미러-


 

 

 

 

 

 

 

 

 

 

 

 

 

 

홍문지회(鴻門之會)

 

 중국 진나라(秦) 말기에 항우유방함양(咸陽) 쟁탈을 둘러싸고 홍문에서 회동한 일을 뜻한다.

진승(陳勝)이 죽은 후 항량(項梁)은 초(楚)의 회왕(懷王)의 손자로서 심(心)이라는 사람을 내세워 똑같은 회왕이라고 일컫고

반진(反秦) 세력을 집결시켰다. 기원전 208년 8월 항량이 전사하자, 초나라 군사의 중심이 된 사람은 항우유방이었다.

 

9월이 되어 항우는 북로(北路)에서, 유방은 남로(南路)에서 함양으로 진격하게 되었는데, 이때 회왕은 맨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간

사람을 관중왕(關中王)으로 삼을 것을 약속했다. 항우가 거록(鉅鹿)에서 진군(秦軍)을 쳐부수고, 또한 진 나라 장수 장한(章邯)을

항복시키는 등 하남(河南) 지방의 곳곳에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유방은 기원전 207년 10월에 한발 앞서서 무관(武關)을 돌파하여

함양을 점령하고 2세 황제 다음의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항복시켜 관중을 지배했다.

 

유방이 먼저 관중을 지배하자 격노한 항우는 총력을 기울여 단번에 함곡관(函谷關)을 돌파하고, 12월에 홍문(鴻門)에 진을 쳤다.

이 험악한 양자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유방이 사과하는 형식으로 열린 회견(會見)이 역사상 유명한 홍문지회(鴻門之會)이다.

항우 쪽에서는 이 기회에 유방을 죽일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항우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 기회를 잃었으며,

유방은 부하의 필사적인 활약으로 손쉽게 호랑이 굴을 벗어나 그 후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그 후 항우는 군사를 함양으로 진군시켜 진왕 자영을 죽이고 시황제의 여산릉(驪山陵)을 파헤쳐 진보재화(珍寶財貨)를 약탈하고,

 아방궁(阿房宮)에 불을 질렀다. 그 불은 3개월에 걸쳐 계속 타올랐다고 하며, 진도(秦都) 함양은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에 이르러 진(秦)은 시황제의 통일로부터 헤아려 3대(代),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 항우 

 

"한신, 소하, 장량 이 세 사람은 실로 인중호걸(人中豪傑)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세 사람을 능히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인 것이다.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范曾)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유방

 

"항우는 현능한 사람들은 시기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아 그 이익을 같이 누리지 않음으로 인해,

항우는 천하를 잃은 것인가 합니다." ─ 왕릉

 

"참으로 애통하구나! 어린아이와 함께 일을 도모했으니 일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항왕으로부터 천하를 뺏어갈 자는

필시 패공(沛公)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여기 있는 우리들은 그의 포로가 되고 말리라!"범증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했다. 이에 5년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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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가 유방의 가족과 아버지를 잡아다 끓는 기름에 튀기겠노라 협박하는 장면.

 

백수 건달 출신이었던 라이벌 유방과는 반대로, 항우의 할아버지는
(秦)의 이신(李信), 몽염(蒙恬), 왕전(王翦) 등  기라성 같은

 진나라의 명장을 상대로 대항한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項燕)이었고, 그 집안인 항 씨는 항(項)에 봉해져서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를 지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물론 항우가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조국이 멸망하고 난 후였다.

 

하지만 항우와 같이 살고 있던 작은아버지 항량(項梁)은 오(吳) 땅에서 상당한 명망을 가진 지방의 유지였고,

오나라 땅에서 유명한 사대부들은 모두 그 밑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의 인맥이었으니 생활에 큰 부족함은 없었을 것이다.

 

 

 

 천하통일에 힘쓴 공신들의 논공행상에서 유방은 소하를 일등공신으로 뽑는다.

 

군신들이 연회석 상에서 서로 공을 다투다가 심지어는 술에 취해 망동하며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다.

이때, 보다못한 유방은 자신이 직접 소하를 찬후(酇侯)에 봉하고, 공신들 중 최고의 대우를 하여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서 항의했다.

“우리들은 모두 몸에 갑옷을 두르고, 병장기를 손에 들고 전투에 친히 참가하기를 많게는 100여 회, 적게는 10여 회에 걸쳐 했습니다.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적군의 땅을 평정함으로 해서 모두가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소하는 우리와 같이 전투에 참가하여 힘들여 싸워 세운 공로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는 단지 필묵을 잡고 입으로만 전쟁을 하고 전투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소하의 공을 우리들 맨 위에 놓으시려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이 때 유방의 대답. "너희들은 사냥개를 알고 있는가?"

유방이 묻자 모두 당연히 알고 있다고 말했고, 유방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냥을 할 때 짐승을 추격하여 물어뜯어 잡는 것이 사냥개의 역할이다.  그러나 짐승의 종적을 추격하여 숨어 있는 곳을   

 사냥개에 알려는 주는 것은 사냥꾼의 임무이다.

 

지금 그대들이 한 일이라고는 간신히 짐승들을 잡아왔을 뿐이라 그 공로로 말하면 단지 사냥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소하는 짐승들의 소재를 파악하여 사냥개들에게 그 목표를 분명히 알려주어 잡아오게 하는 것이

그 공로는 마치 사냥꾼의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동안 여러분들은 혼자,

많아봐야 2-3명이 나를 따랐다. 그러나 소하는 자기들 종족들 수십 명으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여

천하를 횡행하며 전쟁을 치르게 했다. 어찌 그의 이러한 공적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화친으로써 항우는 동부로 물러나고 유방도 서부로 물러나려 했지만, 장량과 진평은 퇴각하는 항우의 군대를 공격하자고 진언했다

여기서 양군이 물러나면 초군은 기세를 회복하겠고 한은 이에 맞서지 못하리라고 간주한다〕. 유방은 이를 수용해 항우군의

후방을 덮치면서 한신과 팽월에게도 병사를 거느리고 항우 공격에 참가하라고 요청했는데 유방에게 은상을 약속받지 못한

이 사람들은 누구도 오려 하지 않았고 이 점을 장량에게 지적받은 유방은 과감히 한신과 팽월에게 큰 영지를 은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한다. 한신과 팽월의 군이 가세한 유방군은 단번에 세력이 커져 항우을 상대로 유리한 처지에 섰고 사태의 추이를 파악한

다른 제후들도 유방에게 재가담하면서 항우를 해하까지 결국 몰아붙였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항우와 초 병사들의 저항은 거세었고 한군은 연일 크게 희생했으므로, 장량과 한신은 무리하게 공격하는

대신 포위한 상태에서 보급을 차단하는 공격으로써 초군을 붕괴시켰다. 항우는 남은 소수 군사를 데리고 포위망을 돌파했지만,

초로 도망치는 상황을 차마 감내하지 못하고 도중에 한의 대군과 싸우다 자해했다〔해하의 싸움〕. 결국 항우를 쓰러뜨린

유방은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魯)의 항복도 받아내고 잔당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항우를 후하게 장사지냈다.

기원전 202년, 유방은 군신에게 추대받으면서 황제로서 결국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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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의 리더십. 上下가 바뀐 말이다.

 

 

 

항우의 실패요인은, 끝장을 볼 줄 아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전쟁마다 우의를 대동하고 다녔을 정도로 그는 로맨티스트였다.

 경극으로 많이 알려진 패왕별희(覇王別姬)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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