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중앙대교당 (天道敎中央大敎堂)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호.
대지 1,215평 위에 건평 280.68평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천도교의 제3세 대도주(大道主)인
의암성사 손병희(孫秉熙)가 건립을 계획하고 일본인 나카무라[中村興資平]가 설계했으며,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시공하고 일본인 후루타니[古谷虎市]가 총감독을 맡아 건물을 완성했다.
1918년 12월 1일에 개기식(開基式)을 하고 1921년 2월 28일 완공되었는데,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22만 원이 들었다. 전체평면은 이집트식 십자형으로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벽체를 구성하고 맞배지붕은 철근 앵글로 되어 있다. 건물의 정면은
좌우대칭이며 중앙 현관부에는 반원 아치형으로 된 입구가 있고, 양쪽에는 벽기둥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에는 화강석으로 된 장식면이 있다. 정면 중앙에 탑이 있는데 탑 중앙부에는 큰 반원
아치형 창과 작은 반원 아치형 창 3개가 있으며, 탑의 지붕은 바로크풍으로 되어 있다. 완공 후
현재까지 6차례에 걸쳐 중수했는데 1956년 3차 중수 때는 6·25전쟁중 소실된 부분을 보수했으며,
1976년 6차 중수 때는 마루바닥을 콘크리트로 교체하고 난방과 전기공사를 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독특한 의장수법을 지닌 건물로 한국 천도교의 총본산이다
- 브리태니커 참조 -
/엔하위키 참조/
덕성여대에서 바라본 수운회관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
수운회관 9층에 자리한 천도교 '新人間'사 방문
남북 천도교 개천절 행사 안건 논의
운현궁 (雲峴宮)사적 제257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기거했던 사가(私家). 고종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며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지내왔던 곳으로 후에 흥선대원군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당시의 한양 공덕리)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고종의 형이자 대원군의 장남인 흥친왕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원군이 섭정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일부 왕족이나 양반에 의해 알려진 곳이기도 하였지만 1863년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고 대원군이
섭정하게 되면서 조선 임금의 생가(生家)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이름은 조선시대 천문을 맡아보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앞의 고개(峴)라는 의미에서 '운현'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자란 집은 운현궁의 북동쪽 뒷편에 있었는데 1966년에 그 집은 헐리고 그 자리에 중앙문화센터가 들어서 있다.
물론 고종이 실제 태어난 집 역시 운현궁이 한창 넓었을 때는 운현궁 구역에 들어갔기 때문에 고종은
어찌 되었든 운현궁에서 태어난 것은 맞다.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막강했을 때는 그 권세에 비례해서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쓰이는 '운현궁 양관'을 포함해 운현초등학교나 일본문화원까지
포함하여 굉장히 넓은 지역이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운현궁의 크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네 개의 대문을 설치하여 궁궐처럼 엄숙하게 하였다.이렇게 크기가 커서 운현궁에는 대원군의 직계
가족 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큰형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도 이곳에서 살았으며 천하장안으로 대표되는
종자들이나 그 식솔들까지 살아서 광복 무렵까지도 백여명이 넘는 대식구가 살았다고 한다.
맡아왔다가 후에 공덕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장남인 이재면에게 물려주기도 하였다.
한때 고종과 대원군이 창덕궁과 운현궁을 왕래할 수 있는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으로 사용했던 공근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영로당' 이라는 안채도 있었으나 지금은 운현궁과는 독립된 곳으로 개인
소유의 건물로 바뀌었다.
노안당
운현궁의 사랑채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기법이 특징.
흥선 대원군이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은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 하였다.
'노안당'은 공자가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 라고 한 논어의 글을 인용한 것으로
아들이 왕이되어 노년을 편안하게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과
노인들을 편하게 모셔야 된다는 치국(治國)의 이념을 갖고 있다고.
노안당의 현판은 대원군의 스승인 추사의 글씨인데,
이것은 고종 즉위 전에 사망한 김정희가 직접 써 준 게 아니고
대원군이 운현궁을 증축할 때 스승의 글씨를 집자해서 현판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운현궁 전각에는 노(老)자 들어간 전각이 많다.
실제로 말년의 대원군은 자신의 호인 '석파(石城)'를 대신해 '노석(老石)'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노안당 안쪽에 걸려있는 추사의 '무량수각' 인데 원본은 아닌 듯.
노락당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1866년(고종3)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 수없을 받던 곳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결혼식이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초익공 양식의 사대부가 건축미를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문양(불발기창호)과 지붕의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에게 '노락당기'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이 높아
하늘과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 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것을 잘 나타낸 표현이다.
/안내 팜플릿에서 발췌한 내용/
이로당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후의 가례가 치러진 이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게 되어 1869년(고종6)에 새로운 안채로 이로당을 짓게 되었는데
정면 8칸, 측면 7칸으로 되어있다.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물로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ㅁ자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들이 우리의 예절을 배우는 모습.
후원
이로당 뒷편으로 '양관'이 보인다.
유물전시관의 대원군 초상화
노락당 상량문
수직사
뒤편으로 보이는 '양관'을 한 번 가 보기로...
구한말의 슬픈 유산 '양관'
일제가 왕족의 회유를 위해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에게 지어준 건물이다.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사당을 철거한 자리에 세운 것으로 1907년 일인 가타야마 도꾸마가
당시 유행하던 프렌치 르네상스 양식으로 잔뜩 기교를 부렸다고.
운현궁에서 만난 일본인 처자 마유와 히또미
2013.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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