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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월봉 달빛사랑방

제 22회 월봉달빛사랑방

무연(無然) 스님과 함께하는

 

월봉달빛사랑방

 

 

 

 

 

- 제22회 -

 

 

주제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가?  <2>

 

 

 

                                                                                                                                          2013. 5.1

 

월봉서원 교육관

"달빛사랑방"을 갈무리하는 노을이 내리고...

 

 

 

 

 

 

강의에 앞선 담소의 시간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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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는 대표적으로 경(經) 율(律) 논(論) 3 장으로 나눈다.

그 중에서 '논부'를 통틀어 '아비달마(阿毘達磨)'라 한다.

불교 심리학 용어로 '마음의 심리학' '마음의 해부학' 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불교만이 '환생'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힌두교를 비롯, 놀랍게도 초기 기독교에서도 환생을 주장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 중 신비주의의 원형인 그노시스 gnosis 파에서는 환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553년 콘스탄티노프 종교회의에서 그노시스파의 '환생'을 부정하게 된다.

 

"영혼이 금생에도 존재한다는 미신적인 조류나 영혼이 환생한다는 의견을 지지하는자는 파문한다."라고.

 

환생의 진위는 여러분 각자의 가치관과 판단에 맡길 뿐이다.

결코 환생만이 백점짜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러가지 환생에 관한 자료를 모아보면 환생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인생을 그저 백 년 정도의 짧은 생으로 본다면 굳이 환생에 집착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 심리학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나라는 존재가 켤코 이 한 생에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생으로 끝나버리는 정도의 것은 대통으로 바라보는 시각 만큼 좁다는 뜻이다.

 

불교적인 입장에서 추적 해 보면, 내가 가는 금생의 지금 이 모습이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생 과정에 대한 공부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영적진화'를 위해서다.

 

달라이라마는 말 한다. "누구나 죽는다.  우리 모두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고.

죽어서 가져가는 유일한 것은 오로지 '진화된 영혼'에 대한 것 뿐이다. 

 금생의 나 보다 다음 생의 나는 어떻게 더 진지하고 고등한 영혼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진화되어 있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 해 보라는 뜻이다.

 

부처나 예수를 비롯한 성자들은 결코 한 생만으로 성자의 반열에 오른게 아니라.

한결같이 진화된 영혼을 가지고 성자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수는 깊이 연구 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부처는 그런 존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예수도 그럴것이라 추론하는게 합리적이지 않겠느냐고 보는 것이다.

공자, 노자, 맹자, 열자, 모두가 한 생만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게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1. 변화의 법칙  / 2. 생성과 연속의 법칙  /  3. 작용 반작용의 법칙 

 

 

나를 포함 모든 것은 머물러 고정된 것은 없다.

24 시간 우리의 심리를 보면 끝없는 환생과 죽음의 법칙이 적용된다.

죽음은 또 다른 환생이다. 죽음에 대해 정리된 사람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거개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단편적인 사고만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을 끓이면 증기가 올라온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릇 속의 물은 다 사라져 버린다.

물이라는 물체가 에너지라는 조건을 만나 입자에서 기체로, 다시 조건을 만나 기체가 물로 환원된다.

물일 때의 입자나 기체 때의 분자는 모두 같다. 다만 입자의 위치만 바뀌었은 뿐이다.

다시 말해 이 우주는 물질과 에너지의 끝 없는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몸은 물질이니까 화장을 해 버리면 한 줌 밖에 안된다. 

그렇다면 나머니 육신만큼 우주의 질량이 가벼워 졌느냐?  단지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다.

  인간의 죽음을 결코 음산하고 두렵게 볼 필요는 없다. 에너지가 또 다른 질량으로 환원되는 것처럼

또 다른 에너지의 생성 과정으로 순환하는 과정일 뿐이다.

 

 수행을 해야하는 당위성은 다시 몸을 받지 않는 과정으로의 재생을 되짚어 보는 것이다.

사실 몸을 받게 된다는 것은 굉장히 불편한 것이다. 몸이 없는 사념체의 세계가 바로 천상계다.

육도(六道)가운데 중도의 道를 가장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계라고 했다.

가장 그럴싸 해 보인는 천상계는 정작 고통이 없기에 道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을 수 없다.

 

 

 

타나 kama tanha (갈망)

바왕가찌타 Bhavañga Citta (무의식)

 우파따나 upādāna (움켜쥠)

 

 

위 세 단어의 주인공은 Bhavañga Citta  즉 무의식이다.

불교심리학에 들어가 보면  식(識)에 대하여 많은 공부를 하게 되는데.

바로 이 무의식이 갈망의 메뉴얼을 건드리게 됨을 알 수 있다.

갈망의 메뉴얼은 또 움켜쥐고자 하는 욕망을 건드리게 되고 그러면서 존재를 움켜쥐게 되는 것이다.

 

갈망이 움켜쥠을 통해서 내가 태어날 자궁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움켜쥠의 갈망을 절대로 통제 할 수가 없다. 

즉 움겨잡게 되는 것 자체가 바로  Bhavañga Citta  즉 무의식인 것이다.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욕망, 그 절박감이라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

 

이런 과정을 죽음과 삶 사이의 과정 즉 바르도 Bardo 과정이라 한다.

내가 죽어 다음 몸을 받기까지의 단계를 말 하는 것이다. Bardo 단계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치카이 바르도Hchikhahi Bardo 

죽음 순간의 바르도로  나의 존재를 내가 보고 있다. 즉 무의식이 명료한 상태.

명상과 수행이 잘 되어있는 사람은 이 단계가 필요치 않다.

 

 

2. 초에니 바르도Chosnyid Bardo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바르도로 몸이 사라졌음을 인식하는 단계.

 몸을 다시 갖고 싶다는 갈망이 시작된다.

 

3. 시드파 바르도Sridpahi Bardo 

환생의 길을 찾는 바르도로 갈망에 의하여 자궁을 움켜쥐게 되는 과정.

 

 

언젠가 대구 비슬산에서 여름을 보낸 일이 있었다.

몸이 극도로 좋지않은 상태로 계곡의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돌아보니 구름이 사라지고 없었다.

헌데 구름이 사라졌음에도 無로 인식되지 않는 것. 즉자적인 有로 보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불교의 핵심이자 어쩌면 양자물리학의 핵심일 수도 있는 내용이다.

 

순간  "아!  이제야 비로소 내가 '반야심경'의 내용을 알 수 있겠구나..."

고통의 극심함 속에서 묘한 깨달음의 씨앗이 발아됨을 비로소 알게된 것이다. 

흙에 묻은 씨앗은 물과 햇빛이 없으면 발아가 안된다. 씨앗의 입장에선 물과 햇빛은 일종의 고통인 셈.

내 안에 있는 고통의 경계와 파장을 어떻게 넘느냐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핵심이다.

 

적어도 내일 먹을 것이 없어야 오늘 공부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강좌를 쉬려고 하는 나의 의중인 즉,

 내 안의 스승이 또아리를 틀면서 "네가 안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완벽하다고 생각하는가.?"

이점이 바로 진정한 나의 속내이자 갈등이기도 하다.

나는 단지 여러분의 시행착오를 줄여드리기 위하여 이 자리에 섰던 것이다.

여러분을 지식인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 아닌 도반으로 함께 하고자 작정 했던 것이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내게 한 적이 있었다.

"스님은 책을 왜 안쓰세요?"  "스님은 왜 숨어 사세요?" 그 말에 대한 나의 대답인 즉,

"나는 앞으로 적어도 몇 生은 더 하고 스승이 되고싶다." 

내 안의 스승이 있지만 더 영적으로 진화된 스승이 있다면 다음 생엔 그 스승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다.

 

진정한 도인은 촌무지렁이의 얼굴일 터. 자의식이 사라진 자리가 바로 부처인 것이다.

천상계의 유류복(有溜福)이라는 말이 있다. 복이 새 나가는 천상계의 마지막 단계를 말한다.

그러면 육도 중 맨 아랫쪽으로 내려가게 된다.

 

수행은 결코 한 생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출가의 연속을 말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저울질 해야될 것은 바로 자신이다.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타나'의 뿌리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이게 결코 쉽지 않다. 다행이도 나 자신은  안된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사실이다.

 위 세가지 바르도를 49일로 쪼갠 것이 바로 "사자의 서"이다.

 

무의식의 압축파일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 순간의 결정엔 경계가 없다.

심찰라(心刹那) 즉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번개치는 순간에 무의식이 튀어나온다.

일반적 시간개념이 아니라 찰나에 수 십억 번의 생각이 파도치는 정도의 개념이다.

자신의 반복된 습관이 무의식에 배어든다. 늘 자각하는 것이 바로 위빠싸나 수행의 흐름이다.

 

자신의 행동 패턴을 늘 모니터링 해야 한다.

꿈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정도의 훈련이 쌓이다 보면

점차 의식의 콘트롤에서 멀어지게 된다.

 

 

 

 

 

※ - 안내 - ※

 

무연 스님의 강좌는 약 3개월 간의 방학을 거쳐 오는 9월에 재 개강 예정입니다.

그동안 수고해 주신 무연 스님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아울러 모든 도반 여러분께도 진심어린 고마움을 전 합니다.

강건 청정한 모습으로 다시 뵈옵게 되기를...

 

 

 

- 茶泉 배상 -

 

 

 

 

파카니니 / Sonata for Violin & Guitar, O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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