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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월봉 달빛사랑방

제20회 월봉달빛사랑방

 

 

 

무연(無然) 스님과 함께하는

 

월봉달빛사랑방

 

 

- 제20회 -

 

 

주제 명상 2, 언어(言語) 내려놓기

 

 

 

 

2013. 2. 1

 

 

오늘은 3.1 독립만세를 외친지 94주년이 되는 날.

의미 있는 날이어서인지 몰라도 서울, 부산을 비롯 월봉서원에서 비교적 먼 거리에 주거하시는

 다양한 이력을 지니신 분들이 많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처음 참여 해 주신 분들을 위해

그동안 이어져 왔던 주제와 강좌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들려 주시는 무연 스님.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강좌 내용의 핵심은 자기 통찰을 통한 '심층적 평화'였다.

지난 시간 강의 키워드였던 trance(가수면 상태)는 중생을 가여워 하는 부처의 시각이다.

 

네게 있어 다음 생의 가장 큰 원력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금생에서도 나는 훌륭한 스승 아래 공부했다는 사실이다.

그 스승 아래서 얻은 가장 큰 성과 하나를 들자면

 

"어제 내가 알았던 것이 오늘 깨어 보니 내가 몰랐던 것이었구나"를 알게 된 것이다.

 

강기욱 선생님께서 내게 전활 해서 첫 마디는 늘 '존경하옵는 스승님'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나를 스승님이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윤 즉, 스승이라는 명사에 대해 나는 '자아동일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스승의 대상이 나라고 자각하는 순간 바로 '자아동일시'에 빠지는 것이다.

예의 '존경하옵는 스승'이라는 말의 중요성은 부메랑이 되어 곧장 강기욱 선생님께 돌아 간다는 사실.

왜냐면 누군가를 스승이라 섬기겠다는 마음은 바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스승이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는 가수면 상태의 중생을 연민으로 바라 보는데 세속의 칠정과는 전혀 상관 없는

아주 평화로운 연민이다. 자아동일시에서 벗어난 연민이라는 말이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이 우주는 시간, 공간, 질량, 에너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의 無를 사전적으로 다가가면 전혀 이해 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이 flat 된 상태를 말 하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이 과연 물리적 실제일까?  물리학에선 변화를 측정하는 방법이라 정의하고 있는데

時와 空이 빠지면 바로 무한집합이다.

 

공부와 참선을 통해 탈 개념적인 앎을 느끼면서 정확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지만,

 제도권 안에서는 이런 단어를 쓸 수가 없고 또한 그 사실을 결코 말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국 불교나 기독교는 기복(祈福)이 맨 앞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유럽 그 중에서도 북유럽은 기독교가 거의 소멸되어 가고 있다.

잘 발달된 사회보장 제도 때문에 더 이상 기복신앙(祈福信仰)에 기댈 이유와 필요성이 상실되었기 때문.

 

無란 무엇인가? 바로 자아가 flat 된 상태라는 뜻. 불교는 심리학이다. 유물론을 말 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질량의 그림자이다. 즉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같다는 얘기다.

이 정도의 물이 있다고 치자. 한여름 뙤약볕에 물을 놔 두면 약 3시간이 지나면 증발되고 말 것이다.

물의 질량만큼의 3 시간이 그림자 처럼 따라 온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같은 개념의 다른 단어일 뿐이다.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위 개념은 결국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얘기다.  

부처는 말 한다. //벗들이여! 스승인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한번쯤 의심 해 보라.//

부처가 느꼈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따라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가져 보라는 뜻이다.

 자기 스스로 검증하고 체험하라는 말이다.

이 우주에 어떤 질량도 없다면 과연 시간이 존재할 것인가? 

심리라는 자아에다 플렛이라는 단어를 연좌적으로 붙여 설명하는 것이다.

자아가 사라졌다면 무한 집합적인 전일자적인 그 무언가가 사라진 것이다.

 

명상가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오쇼라즈니슈는 말한다.

//예수그리스도와 신을 따르는 자 들이여 결코 신을 찾지 말라. 너희들이 찾아야 할 것은 신성(神性)이니라.//

 

 크리스탈 장인이 만든 기막힌 솜씨의 잔 하나를 그려 보겠다. (위 8번 째 사진 참조)

  네모 안에 그려진 크리스탈 잔은  네모가 그려지기 전 까지는 분명 그냥 크리스탈 잔이었다.

하지만 네모가 그려지는 순간 잔은 사라지고 사람 얼굴이 드러난다. 

유와 무는 단지 조건에 의해 드러나고 사라질 뿐이지 유, 무가

 결코 분리되어 존재하는 대립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있음과 없음, 없음과 있음에 대한 경계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대칭성의 구조와 심리에 관한 논리인 것이다.

 위 그림에 '중도해탈'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 중도라는 대칭성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대칭성의 논리는 유, 무를 같이 품고 있는 것이다.

 

이전의 강의를 통해 "나를 잊어야 나를 잃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앞의 나는 자아(自我)이고, 뒤의 나는 신성(神性)과 같은 의미의 무한 집합의 진화인 것이다.

자아는 인지교란(認知攪亂)이 일어날 때 존재한다 라고 설명하고 싶다.

 교란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만이 자아로 부터 개입을 하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다시 trance로  돌아가 보면 우리들의 마음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즉, 자기의 경험과 시각과 판단으로  재단을 해서 어떤 것에 관하여 인지를 한다는 말이다.

그 주체는 바로 무의식이다. 

무의식의 가수면 상태가 자아동일시라는 나를 잊어야 하는 자아를 존재케 하더라는 사실.

그것이 바로 부분집합인데 그 심리 상태에서는 부처도 신성도 절대 만날 수 없다.

신성을 찾는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탈 개념적 단계를 밟지 않으면 신성 바라 보기는 거의 불가능 하다.

문제는 이 무의식이 바로 언어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의 내부로 들어 가 보면

그 단어를 쓰는 심리상태는 이원성이다.  다시 말 하자면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다.

더 위험한 것은 이 언어가 집단 사회화 된다는 것이다. 언어에 의해서 집단 무의식화 된다는 말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심리 상태를 한 마디로 표현 한다면 거대한 정신병동으로 보인다.

개인의 교양 부제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 무의식이 정신병자를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첫번째 기저에 바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언어는 사고를 만들고 사고는 자기 자신을 이끄는 것이다.

정보, 언어 무의식 등이 한국사회를 엄청나게 병들게 하고 있는 현실이다.

 

생각 내려놓기는 상당히 광범위 하다. 그렇다면 언어 내려놓기는 어떨까?

언어는 문자 내에서만 소통을 다소 자제하면 되는 것이다. 무의식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눌 수 있지만,

 여려 경험과 선택을 통해 축적된 것이 결국 무의식의 조건인 것이다.

 

부처가 깨닫고 보니까 죽음만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더라는 사실.

 삶 만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삶 속에 이미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있다는 것.

여기에 이르면 모든 존재에 관한 생성 소멸에 관해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즉 어떤 상황에 닥쳐도 평화롭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심층적 평화'로 가기 위해 지금 이 많은 말 들을 하고 있음이다.

 

우리는 왜 불안한가? 왜 상실감을 느끼는?, 왜 절망하는가? 왜 화가 나는가?, 왜 즐거운가?

이런 것들에 대한 심리적 분석을 통해 본질을 파악해 보면 결국은 그 칠정이 나를 불안케 하는 것이다.

문제는, 나를 잊어야 하는데 나를 잊지 못했기에 결국은 희로애락애오욕의 칠정을 내가 만든 것이다.

내가 만든 칠정에 내가 당하는 것이자 노예가 되고 만 꼴이다. 거기에 무슨 심층적 평화가 있겠는가.

심층적 평화에 필요하다면 불교든 기독교든 이슬람적이든 그 어떤 것도 끌어 올 생각이다.

자아는 심리적 질량이다. 심리도 결국 자아가 만들어 내는 심리가 질량화 된다.

일례로 '마음이 무겁다' '가볍다'라는 것도 심리적 질량이다. 심리 자체가 바로 질량인 것이다.

질량이 형성되면 거기엔 반드시 시간과 공간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

 

지금까지 해 온 전체적인 강좌의 틀은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심층적 평화' 를 확보 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 모든 공부는 다음 생에 대한 보험을 드는 것이요, 또한 금생의 보험이기도 하다. 

 

 

 

 

 

 

 

 

 

 

Paganini - Cantabile And Wal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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