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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축제·전시·공연

귀농귀촌 페스티벌

                                

 

 

 순창읍사무소 광장

 

 

 

 

 

귀농귀촌을 형상화 한 듯.

 

 

 

 

 

동학인들이 한 자리에...

 

 

 

 

 

축제준비위원장으로 맹활약 중이신 뚜란님

 

 

 

 

 

 

 

 

 

 

 

 

 

 

 

 

 

 

 

 

 

 

 

 

 

 

 

 

 

 

 

 

 

 

 

 

 

 

 

 

 

 

 

 

 

 

 

 

 

 

 

 

 

 

 

 

 

 

 

 

 

 

 

 

 

 

 

 

 

 

 

순창군의 수장께서 불러주시는 '호남가'

 

 

 

 

 

 

 

 

 

 

 

 

 

 

 

 

 

 

 

 

 

 

 

 순창 장덕사藏德寺  수월관음보살입상

 

 

 

 

 

 

마애미륵열반상

 

 

 

 

 

 

 

 

 

 

 

 마애설산수도상

 

 

 

 

 

마애반가지장보살상(동양최대)

 

 

 

 

 

 

태고종 장덕사 주지 청암 스님과 일포장님의 파안대소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 의 묘소

 

 

 

 18세기 조선의 방향을 제시한 大실학자

 

 
여암 신경준 초상화
 
조선의 실학자인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을 재발견한 사람은 국학자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였다. 위당은 1934년 전북 순창읍 남산마을의 신경준 고택을 찾아 "여암이 남긴 저술이 사람 키만큼 쌓였건만 귀한 줄 몰라 좀이 슬고 쥐가 갉아먹고 있다"며 안타까워 했다. 위당은 여암을 '나라를 구할 인재'라고 평가했다.

여암은, 신숙주의 동생으로 세조에 협력치 않고 순창에 내려온 신말주의 10대손이었다. 43세에 과거에 급제, 26년간 벼슬을 지낸 학자였다. 동국여지도·운해훈민정음·여지고(輿地考)·거제책(車制策)·병선책(兵船策) 등 25가지 이상의 저술로 실학과 국학의 토대를 세운 것으로 평가 받는다.

고동환 카이스트 교수는 '여암의 생애와 학문관'을 발표하면서 "신경준은 의리·명분을 뛰어넘어 과학과 실증의 학문을 추구하면서 수레·선박·화기(火器)·수차(水車) 등 실용 문물을 그림을 동원해 분석하고 활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고 교수는 "여암은 연암과 다산으로 대표되는 북학사상과 농본적 경세학(經世學)의 시대를 예비하면서 18세기 이후 조선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제시하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신경준은 '여암유고'에 시 145수를 남겼다. 박명희 전남대 교수는 '여암의 무실(務實)정신과 문학적 실천'을 주제로 두 번째 발표에 나서 이 시들을 분석하면서 그의 학문 요체를 박(博·넓음)과 실(實·실용)로 요약한다. 박 교수는 "신경준의 시는 생활에 밀착되거나 사실 관찰을 바탕으로 하며 한시 형식의 규범을 파괴하면서까지 실질을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신경준 선생 유지(遺址)에 1970년대 후반 들어선 한옥. 전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됐다.

 

 

 

이토 히데토 도쿄외국어대 교수는 '여암의 한자음-그 한국적 특징과 보편성'에서 "운해훈민정음은 현대언어학의 관점에서 볼 때 놀랄 만큼 과학적인 저술"이라고 평가한다. 이토 교수는 "여암은 중국 한자음을 훈민정음의 초·중·종성 이론으로 분석하면서 중국과 한국 한자음의 괴리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려 했다"며 "20세기 들어 통용된 방법으로 2세기 전 분석에 성공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말한다.

여암은 영조의 명으로 당시까지의 문물과 제도를 정리한 '동국문헌비고'(100권)를 편찬하며 지리분야인 여지고 17권을 정리했다. 양보경 성신여대 교수는 "여지고는 역사지리학에 경제·국방·자연·문화지리학을 종합하며 여암의 사상을 결집한 책으로 조선 후기 발전한 지리학의 중요 결과물이자 지표"라고 평가한다. 지식을 공유화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실천적 지리서로 공간 인식의 범위를 확대하고 사회·경제의 변화를 꾀했다는 것이다.

박권수 충북대 교수는 여암의 광범위한 과학기술 분야 저술에서 '세계의 모든 지식을 정리하여 배열하고자 하는 거대한 지적 욕구와 학문적 비전'을 찾아낸다. 그는 "여암의 저술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여암이 가졌던 불편함이 아니라, 전통시대로부터 근대적 학문, 혹은 근대적 과학기술의 내용을 발견하고자 억지로 노력했던 현대 역사학의 불편함일 뿐"이라고 변호한다.

여암은 전국을 유람하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과거 급제 전부터 역사, 문학, 국어, 지리, 과학기술 등 분야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60대 들어 좌승지와 강계·순천부사, 제주목사를 지낸 뒤 낙향해 저술 활동 중 별세했다.

/ 조선일보 기사 참조 /

 

 

 

 

 

 

 

 

 

 

 

 

묘비와 신도비가 나란히 선 여암 묘소

 

 

 

 

 

 

두 명의 부인과 합장

 

 

 

 

 

 

순창 장구목의 자라바위

 

 

 

 

 

 

많은 사연을 간직한 요강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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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화두로 자리잡은 '귀농과 귀촌'

각 지자체 마다 묘안을 짜내기에 여념이 없다는데.

 

전북 순창군이 주최한 '귀농귀촌 페스티벌'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도착하자마자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와 함께 뚝 떨어진 기온.

 

계사년의 사월을 일러  "패 죽이고 싶은 4월"이라 규정짓던 불방친구.

그이의 속 사정을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만한 험상궂은 날씨.

 

"귀농귀촌 페스티벌"?  당장  동사 일보 직전인데? ...

별 수 없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주구장창 마셔대어 이내 몸을 뎁히는 수 밖에.

 

머나먼 강원도에서 달려온 풍물패의 지신밟기를 필두로 본격적인 축제에 돌입.

 그 중에서도 순창군의 수장께서 뽑아주시는 북 장단에 어우러진 '호남가'는 화룡점정이라.

 

"아먼 그라제 그라고 말고~~~" 

호남 지자체의 수장이라면 모름지기 이처럼 단가 한 곡조 정도는 가볍게 뽑을 수 있어야...

 

이튿날 읍내에서 가까운 장덕사를 찾았다.

절 일대의 자연 암벽에 조성된 장대한 마애불을 친견키 위해.

 

백팔계단으로 이어지는 '열반의 길'을 따라 올라 마애불을 돌아보고 내려와

주지이신 청암 스님 뵙기를 청해 다담의 자리를 마련한다.

 

불교방송의 진행, 대학의 출강, 불교 문화재 등 다양한 분야에 참여하고 계신 듯.

이런 저런 도담 중 최고의 법설은 단연 스님의 호쾌한 웃음소리.

 

웃음이야말로 그 어떤 사상과 종교에 앞서는 특급 담론임을 설파하시는 바.

추임새는 이럴 때 소용되는 법. 당연 공감 이백% 다담이 아닐 수 없었다.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묘소.

오다가다 순창 어드메쯤 있다는 말은 들어왔으나 막상 찾아가기는 오늘이 첨.

 

설왕설래가 있긴 하지만 산꾼들의 세계에서는 우리나라 산줄기 1 대간 13정맥의

흐름도를 나타낸  산경표(山經表)를 집대성한 인물로 추앙되고 있기도 한 터.

 

이 나라 이 땅의 산과 자연을 삶의 원천으로 삼아온 나로서는

 한번쯤은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게 당연한 도리라는 생각에서다.

 

 

오랫만에 찾은 장구목 일대. 많은 것이 변한 모습이었다.

수 많은 중장비가 투입되어 산자락 여기저기를 파헤치는 모습이던데 뭘 하려는 것인지.?

 

  자연과 사람, 개발과 소득. 그리고 귀농과 귀촌.

 부디 장구목 일대의  수승한 풍광과 엇박으로 나가게 되지 않길 바랄뿐이다.

 

 

 

                                                                                           2013. 4. 27 ~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