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탐매 (癸巳探梅) 6편
노사매(蘆沙梅) / 오강홍백매 / 매화동梅
2013. 3. 28
장성 고산서원(長城 高山書院)
- 전남 장성군 진원면 -
노사 기정진을 중심으로 이최선·기우만·조의곤·김록휴·조성가·정재규 등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기정진(1798∼1879)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이다. 순조 31년(1831) 과거에 급제한 후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이 서원은 기정진이 조선 고종 15년(1878)에 담대헌이라고
이름짓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1924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며, 1927년 ‘고산서원’ 이라고 쓴 현판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사당인 고산사를 비롯하여 강당, 동재인 거경재, 서재인 집의재, 내삼문, 외삼문과
장판각 등의 건물이 있다. 장판각에는 기정진의 문집과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노사매(蘆沙梅)
蘆沙기정진(奇正鎭)
7세에 이미 맷돌을 보고 시를 지었고, 9세에 경사(經史)에 통했다. 1831년(순조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강릉(康陵)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봉직하지 않았다. 이후 40세 때도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6일 만에 사직했다. 그뒤에도 평안도도사·무장현감·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 삼남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철종은 3정(三政)의 개선책을 듣기 위해 언책(言策)을 모집했다.
이때 〈임술의책 壬戌擬策〉을 작성하여 사대부 풍속의 폐단, 조정의 공경(公卿)·방백·수령·이속의 탐오함,
과거·사관(仕官)의 폐단, 부호들의 토지겸병의 폐단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군포의 혁파, 환곡의 면제,
민전 제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기했으나 제출하지는 않았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육조소 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 丙寅疏〉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했다. 그해 7월 동부승지·호조참의, 10월에는 동지돈녕부사·호조참판·
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때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사대부에게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는 2번째〈병인소〉를 올렸다. 1877년 장성 월송(月松:지금의 고산리)으로 거처를 옮겨
담대헌(澹對軒)에서 문인들과 지내다 죽었다.
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
장안만목이 불여장성일목이라...
순조임금 3년 중국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 조선에 인물이 있나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이
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용단호장 오경루하석양홍)이라는 글귀였다.
이 글에 댓귀(對句)를 맞추라는 것이었다. 글대로 해석을 한다면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깊은 밤중 누각에 석양빛이 붉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이글에 댓귀를 맞추라 하니 조선의 무식한 조정 대신들은 알 턱이 없다.
왕의 체면이 구겨지고 난감해질 지경에 이르자 조정 대신들은 회의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회의를 거듭한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이치에 얼토당토 않은 글에 댓귀를 맞추는 일은 글을 보낸 쪽의 진의를 알고서야 풀어낼 수 있는 문제다.
조정대신들이 회의를 거듭하며 고심을 하다가
전라도 장성에 신동이 났다하니 가서 물어보자는 의견으로 일단락이 지어졌다.
그 신동이 노사 기정진이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1798년(정조22년)에 태어났다.
노사의 조부 태량(泰良)이 황구훼목(黃鷗喙目)이라는 명당에 선영을 모셨는데
당시 지관이 말하기를
/한쪽 눈이 먼 손자를 얻으리라/ 는 예언.
이듬해 태량은 손자를 보게 되는데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태어난 아이는 두 눈이 멀쩡하지 않은가.
태량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태량은 도참설의 신봉자였으리라.
일이 이렇게 되고 보면 지관이 엉터리였다는 말이 된다.
아니, 지관이 엉터리일 뿐만 아니라 선영을 모신 명당이 의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노사가 6세에 이른 봄날 아침 노사의 어머니가 시렁에서 뭔가를 찾고 있을 때
시렁에 얹어놓았던 가락(물레에 장치하여 실을 감는 쇠꼬챙이)이 떨어지면서
마침 아랫목에 잠들어 있는 노사의 한쪽 눈에 정확하게 꽂혀버리는 게 아닌가.
뜻밖의 참변에 기겁을 한 노사의 어머니가 어린 노사를 부여안고 비명을 지르며 안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할 때 이를 본 태량은 오히려 무릎을 쳤다. 그의 조부는 무릎을 치며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즐거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노사 기정진은 그렇게 하여 외눈박이로 살아야할 제 몫의 운명을 찾았던 것이다.
중국의 사신이 제시하는 문제를 풀길이 없는 조정은 장성으로 칙사를 파견했다.
장성의 노사를 찾은 조정의 칙사는 일곱 살의 노사가 너무 어린 아이라는데 당황스러웠지만
그러나 왕명은 왕명이다. 어린아이에게 물어볼 수밖에-
헌데 용단호장 오경루하석양홍이라는 글을 본 어린 아이는 해를 가리키며
‘동해바다의 해’라고만 말하고 제 놀이를 계속한다. 노사의 말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칙사가 알 턱이 없다.
허나 그렇다 하여 눈치까지 없는 칙사는 아니었다.
조정의 문무백관이 5000여명에 이르건만 중국이 물어온 난제에 대해 누구 한사람 말문을 연 사람이 없었는데
신동이라고 소문난 노사가 그 난제에 드디어 토를 달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눈치 빠른 칙사는 어린 노사 앞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신동이시여! 지금 조정에서 위로는 임금을 비롯하여 문무백관들이 이 문제로 노심초사하고 있다오.
이 문제를 못 풀고 보면 나라의 체면은 말할 것도 없고 저 되놈들은 오히려 조선을 없이 여기고
조공을 올려 받치라고 트집을 잡을 것이 빤한 일이라오. 그러니-”
칙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놀이에 빠져있던 노사는 말없이 지필묵을 끌어당기더니
東海有魚 無頭無尾無脊(동해유어무두두미무척)
畵圓書方 九月山中春草綠(화원서방 구월산중춘초록)을 써 준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칙사는 할 일 없이 말채찍을 날려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노사가 써준 글은 중국의 사신이 내놓은 어처구니없는 문제와 오묘하게
어우러지며 하나의 미려한 운문(韻文)이 되었으니
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
畵圓書方 九月山中春草綠
龍短虎長은 해를 지칭 한 것으로 용을 뜻하는 辰방향에서 뜰 때는 겨울이라 해가 짧고
호랑이를 뜻하는 寅방향에서 뜰 때는 여름이라 해가 길다는 뜻으로 이 글에 노사가 내놓은 댓귀는
東海有魚 無頭無尾無脊畵圓書方 으로 이 말을 풀어보면 동해에 고기가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등뼈도 없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둥글고 글씨로 써보면 네모지다. 로 동해일출을 뜻하는 운문(韻文)이 된다.
다음 문장이 오경루하석양홍(五更樓下夕陽紅)인데 五更은 새벽 3시에서 5시를 말한다.
그 새벽에 석양이 붉다 했으니 이치에 틀리는 말 같지만
그 오경을 단순하게 중국에 있는 오경이라는 누각의 이름으로 풀면 그 누각의 석양을 칭송하는 말이 된다.
그래서 노사는 댓귀로 구월산중춘초록(九月山中春草綠) 즉 구월산에 봄풀은 푸르구나.
라는 문장으로 대거리를 했던 것이다. 어찌 기가 막힌 댓귀가 아니겠는가?
순조는 청나라 사신에게 어린아이가 써준 대로 답한다.
중국의 사신은
“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하며 깜짝 놀랐다.
가슴을 졸이며 일의 화해를 지켜보던 조정 대신들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
나라의 체면을 생각하여 허풍을 떨며 왈
“조정의 대신은 물론 삼척동자라도 다 알만한 문제요.” 했다한다.
그리하여 조선의 체면은 유지되었고 순조임금은 가로되
장안만목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이라 개탄했는데 이 말은 물론
“장안에 있는 만개의 눈이 장성고을 눈 하나 만 못하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이리하여 노사선생은 일목문장(一目文章)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노사선생 5세 되던 해에 맷돌 가는 것을 보고 지은 시 한 수 소개한다.
鐵柱地洛陽(철주지락양) : 아래 맷돌 가운데 있는 쇠꼬치는 땅위의 서울이고
木柄天北斗(목병천북두) : 맷돌위의 손잡이는 하늘의 북두칠성같이 도는구나.
吾看磨石間(오간마석간) : 내가 맷돌 가는 모습을 보니
天動地靜理(천동지정리) :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고요한 이치로다.
물론 이 글은 지동설이 도입되지 않았던 시절의 동양적 사고를 바탕에 둔 것이겠지만
5세의 나이에 이만큼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노사는 사마시에 장원급제하고 무려 40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고
오로지 고학으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납량사의 정자설 우기 이통설 외필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이다.
서경덕 이퇴계 이율곡 이진상 임성주와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힌다.
지금의 전남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에 있는 고산서원(高山書院)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죽어서 이 서원에 배향되었다. 노사 기정진이 외눈박이로 살아야할 운명이었던 것은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 바른 일만 보고 그른 일은 보지도 말라는 하늘의 계시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백여 고중영 선생님 글 중에서 -
수 년 전에 배어져 나가 버린 오리지널 노사매
현재는 맹아가 자라 올라 오고 있는 중이다.
오강백매(우측)
백여 년 이상의 수령으로 썩음부가 많고 수세 역시 좋지 못한 상태로 봐서
수 년 내로 고사 하지 않을까 여간 불안한게 아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고사목은 수양백매로 참으로 귀한 개체였는데
작년 (20012)에 그만 생을 다 하고 말았다.
오강 홍매
작은 5엽 홍매로 전체적으로 꽃송이가 많이 피어난다.
오강홍백매 두 그루 모두 나주시 금천면 오강리 000님 댁에 서 있다.
매화동 梅
동네 이름이 '매화동'이라면 그럴싸한 고매 한 그루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공공도서관 앞 집에서 찾아낸 백매.
헌데 분명 고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러진 가지 하며 나무의 휨새에서 제법 고태미가...
쥔장과 견공을 모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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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 6대가로 추앙되는 노사 기정진과 그의 제자들을 배향한 서원이자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의 진원지요, 근대 교육의 선각자들을 배출한 유서깊은 고산서원.
서원의 문은 오늘도 굳게 잠겨 있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제향을 올릴 때를 제외하곤 일 년 열두 달 늘 빗장을 걸어 두는 성 싶다.
여러번에 걸쳐 방문을 했건만 단 한 차례도 서원 내부 공간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기에 말이다.
마치 도선생처럼 담장 밖에서 힐끔거리며 서원 내부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내 꼴이란....
장성군청 앞 마당 큼지막한 빗돌에 새겨진 '문불여장성'이란 문구가 가엾기 한이 없다는 생각.
수 년 전 배어져 나간 노사매의 끌텅을 망원으로 끌어당기고 보니 '노사매' 꽃잎이 청아함으로 손을 흔든다.
// 세상 다 ~~ 그런걸쎄, 너무 속상 해 하지 마시게나.... //
나주 금천면의 오강수양매는 화창한 봄 날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주검 신세.
비록 생을 다 했지만 다행이도 아직까지는 쥔장의 톱날을 피하고 있었다.
바로 옆 신랑 백매도 거의 기진맥진 모양새를 보아하니 조만간 불귀의 객 신세를 면키 어려울 듯.
등잔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동네 이름이 명색 매화동임에도 고매 커녕 제데로 된 매화 한 그루를 찾아 볼 수 없었는데
새로 이전한 공공도서관을 들랑거리다가 주차장 담 넘어로 만나게 된 매화동 梅.
제법 고매 패러디를 하고 있는 모습을 한참을 지켜 보는데,
매화 옆에 진을 친 견공께서 담 너머 얼굴을 치우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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