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 / 퇴계(退溪)종택 / 농암(聾巖)종택
2012. 9. 4
도산서원의 왕버들과 안동호
도산梅가 늘어선 길을 따라 서원 안으로...
전교당 典敎堂
서원의 중심 건물로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으며 석봉 한호의 친필인 陶山書院 사액현판이 걸려있다.
이 전교당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은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며,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상덕사尙德祠 부정문
불우리로 보인다.
- 도산서원 연혁 -
- 1557년(명종 12) 승려 법련(法蓮)에게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건립케 함
- 1561년(명종 16) 승려 정일(淨一)이 도산서당 완공
- 1570년(선조 3) 퇴계선생 70세를 일기로 역책
- 1572년(선조 5) 상덕사(尙德祠)에 위패 봉안 결정
- 1574년(선조 7)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짓고 서원 설립(진교당, 동.서재)
- 1575년(선조 8) 서원 낙성,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사액됨
- 1576년(선조 9) 도산서원 완공, 위패 봉안, 시호 문순(文純)
-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從祀)
-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을 종향(從享)
- 1792년(정조 16) 정조 임금이 치제(致祭)를 내림, 도산별과(陶山別科)시행
- 1796년(정조 20) 시사단(試士壇)을 세움
- 1819년(순조 19) 장서고(藏書庫)인 동광명실(東光明室) 건립
-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보호됨
- 1930년(경오년) 서광명실(西光明室) 증건(增建)
- 1932년(임신년) 하고직사(下庫直舍) 이건
- 1969년 도산서원 일대를 사적 170호로 지정, 문화체육부 복원.정리사업 시행
- 1970년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 건립
- 1973년 시사단,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 33호로 지정
-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 설치, 관리운영조례 제정 공포
- 2003년 장판각(藏板閣) 목판 2,790장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
퇴계의 관풍루(觀豊樓) 자필.
어제발문(御製跋文)
정조가 1794년 "사문수간"을 열람하고 소감으로 발문을 지어 하사한 것.
퇴계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칭송한 내용이다.
사문수간(師問手簡)
퇴계의 제자 월천 조목이 선생으로부터 받은 서간 106통, 시 16편, 잡서 7편을
손수 작첩한 것으로 모두 8권이다.
성학십도(聖學十圖)
유교철학의 주요체계 10가지를 도식(圖式)으로 나타낸 것으로, 68세(1568) 때 작성 선조대왕께 올렸다.
선조는 이 성학십도를 병풍(屛風)으로 만들어 좌우에 두고 보았다고 한다.
퇴계선생수적(退溪先生手蹟)
선생의 초고(草藁) 조각 등을 모은 것으로 이 가운데는 54세 때의 일기 일부도 들어있다.
퇴계의 매화詩
『매화시梅花詩』는 퇴계 이황(李滉 ; 1501∼1570)이 1542년(중종 37)부터 1570년(선조 3)까지 28년 동안 매화에 관하여 지은 시를 모아 엮은 것이다. 1책 23장으로 매화시 62수가 실려있다. 1542년에 지은 칠언절구 옥당억매(玉堂憶梅)를 비롯하여 절구(絶句)와 율시(律詩),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을 합한 2수가 실려 있다.《매화시첩》은 우리나라 문학사상 최초의 단일 소재의 자작, 친필로 된 단행본 시집이다.
퇴계선생의 매화시는 72제 107수에 달하며 그 중 62제 91수가 《매화시첩》에 수록되어 있다.
제작시기로 보면 42세 때인 중종 37년(1542)에서 시작해 70세로 타계한 해까지를 망라한다.
도산서원 장판각(藏板閣)에 《매화시첩(梅花詩帖)》목판 원판이 소장되어있다.
제일 앞 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옥당억매(玉堂憶梅)」시는 퇴계선생이 42세에 홍문관(옥당이라고도 함) 부교리로 재임시 숙직면서 지은 고결단아한 시이다.
一樹庭梅雪滿枝 風塵湖海夢差池
일수정매설만지 풍진호해몽차지
玉堂坐對春宵月 鴻雁聲中有所思
옥당좌대춘소월 홍안성중유소사
뜰에 있는 매화나무 한그루 가지에 눈이 가득한데
바람과 먼지가 호수와 바다를 이루어 꿈마져 어지럽구나
옥당에 앉아 봄 밤의 달을 마주하니
기러기 우는 소리에 생각나는 바가 있도다.
흑단연 黑丹硯
크기: 높이 2.3cm 세로 25cm 가로 15.7cm
단계산 흑색의 돌로 만든 벼루로 선생께서 사용하시던 유품이다.
등경
세로 13, 가로 16.5, 높이 54.5
등잔을 얹어 놓던 등장거리로 선생께서 사용하던 유품.
맨 앞은 선생이 짚던 푸른 명아주대로 만든 청려장이다.
오른쪽은 선생이 앉던 매화등 梅花凳이고, 가운데는 병(壺)을 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청․홍의 죽시(竹矢)를 병 가운데 구멍이나 귀구멍에 던져 넣는 기구이다.
일명 ‘정심투호(正心投壺)’라고도 한다.
맨 왼쪽은 선생이 사용하던 서기 書丌로 크기: 높이 27.5cm 세로 68cm 가로 38.6cm 오색(烏色) 목조 책상이다.
안석 案席
가는 왕골로 짠 기대는 방석으로 선생께서 사용하던 유품이다.
완석 莞席
왕골로 짠 자리 3개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 중 한 개의 배면에는 ‘이첨지댁 퇴계(李僉知宅 退溪)’라는 자필 글씨가 있다.
시사단(試士壇)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과거시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로 도산서원 앞에 있다.
정조(재위 1776∼1800)는 이황의 학덕과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조판서 이만수에게 도산별과를 새로 만들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거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영의정 채제공의 글로
비문을 새기고 시사단을 세웠다. 그 뒤 순조 24년(1824)에 고쳐 세우고, 1974년 안동댐 건설로 현 위치에서
지상 10m의 축대를 쌓아 그 위로 비각과 비를 옮겨지었다. 비각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 사이 벽 가운데를 가로질러 댄 나무인 중방 아래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판벽을 둘렀고, 추녀 4곳에 얇은 기둥을 받쳐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퇴계종택
퇴계종택 전경. ‘ㅁ자’형 본채와 별채인 추월한수정, 그 뒤쪽의 사당 등 세 영역으로 구성돼 있다.
원래는 퇴계 사후 손녀 두 명이 이 집터에 자리 잡았다. 당시 풍습에 따라 남녀 차별 없이 서열 순으로
재산이 분배됐기 때문이다. 1715년 도산서원 원장으로 있던 권두경이 “퇴계 종가가 살아야 할 자리”라며
각 문중을 불러 회의를 한 끝에 재산 ‘빅딜’이 이뤄져 종택을 짓게 됐다.
1896년과 1907년 일본군에 의해 불탔으나 1929년 13대 종손 이충호가 문중과 유림의 지원으로 다시 지었다.
사랑채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1715년 종택을 지을 당시 권두경의 주도로 영남 유림에서 정자 겸 별채로 세운 것이다.
현판들은 권두경이 명명한 것으로 퇴계의 학덕을 기리는 내용이다. ‘추월한수’는 퇴계의 맑은 성품을 가리키며,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은 도학의 근원이 된 곳이란 뜻이다. 1929년 종택을 다시 지을 때도 전국의
450여 문중에서 성금을 내 복원했다고. 이때 현판도 다시 써 걸었다.
사당 앞을 지키는 퇴계 종가梅
안채
농암 종택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 612번지
월탄 김창석 선생이 1710년 경에 그린 분강촌의 모습-아래 분강촌 부근의 농암종택,
분강서원, 애일당, 병암 그리고 강 건너 강사의 모습이 보인다.
강사는 임강사라는 사찰로 농암이 최후를 보냈으며,
퇴계의 예방을 받고 마지막 절필시를 쓴 곳이기도 하다.
(농암종택 홈피에서 옮겨온 내용)
![]() 농암선생영정-1537년 경상도관찰사 집무모습(보물 872호)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1467-1555) 자字는 비중'□仲, 호號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안동시 도산 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홍귀달洪貴達 선생께 수학하고, 32세에 문과 급제했다. 36세에 사관으로 사초史草를 바르 게 쓸 수 있도록 직언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얻었고, 38세 때는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연산군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니, 친구들은 선생의 이런 강직함을 보고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다. 사관史官으로서 유일하 게 사지死地를 벗어난 경우이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어 형조참판, 호조참판,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으나, 그때마다 외직을 자청하여 영천, 안동, 경주, 대 구, 경상도관찰사 등의 8개 고을살이도 했다. 경직京職을 절대적으로 선호한 당시의 정치풍토로 볼 때, 외직의 자청은 남다른 효심孝心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생에 보다 가깝게 가고자 하는 일관된 신념이었다. 동료들의 신망과 존경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동부사 시절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에는 80세 이상의 남녀귀천을 한자리에 함께 초청하는 파격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이 런 측면은 집안에서도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인도 문벌 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 다”는 퇴계선생의 행장行狀 기록과 일치한다. 주민이 전출의 길을 가로막는 사건들에서, 선생이 당대에 계층을 초월하고 누렸던 인기 는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선생은 휴머니즘이 가득한 목민관으로, 대시인大詩人이며 대효자大孝子였다. 화산양로연은 고향에서 마련한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로 이어졌고, 여기서도 선생은 70세 노구의 몸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90세 부모와 노인들을 즐겁게 했다. 선생의 효도 와 경로는 98세 아버지가 돌아시는 순간까지 전 생애 걸쳐 계속되었다. 이런 경로모습에 동료친구들이 일제히 축하시를 보냈고, 지 금 그 친필시 40편이 그대로 종택에 보존되어 있으니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보물 1202호)이 바로 그 책이다. ‘애일당구로 회’는 아들, 손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고, 이후 400여 년을 이어오는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선생은 국왕과 동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표연히 귀거래했다. 선생을 위한 전별연餞別宴은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 으로, 국왕은 금포金袍와 금서대金犀帶를 하사했고, 관료들은 일제히 전별 시詩를 지어 선물했다. 한강까지 이어진 행차를 보고 도성사 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이런 모습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고 했고, 퇴계는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라 고 했다. 김중청金中淸은 이 은퇴에 대해 “회재晦齋(李彦迪), 충재沖齋(權□)께서 전송대열 에 서고, 모재慕齋(金安國), 퇴계退溪(李滉)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疏廣, 소수疏受의 은퇴에 어찌 비교되겠는 가. 이는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우리 농암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이다”라고 찬양했다. 『실 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규정했다. 선생은 ‘돌아오는 배 안’에서 노래 한곡 지었다. ‘효빈가效嚬歌’라 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 뿐이오 간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찌할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바위 ‘농암聾巖’에 올라 다시 노래 한수를 읊었다. 그 노래가 ‘농암가’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 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하여라 은퇴 후 선생은 농부로 자임自任하고 일게 서생書生과 다름없는 담백하고 물욕 없는 생활을 하여 ‘유선儒仙’으로 추앙받았다. 그 리고 천성적인 시인으로, 분강의 강가를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거닐면서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낭만적 풍경’을 연출했 다. 이 감흥과 미의식이 그대로 문학과 예술이 되었다. 이런 강호생활은 분강, 애일당을 예방한 동료, 후배들에 의해 ‘영남가단嶺南歌壇’이 형성되는 모태가 되었다 . 특히 퇴계는 동향의 후배로써 인간적, 문학적으로 남다른 교류를 했으며, ‘어부가’의 발문에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 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강호의 그 진락眞樂을 얻었다”라고 찬양했다. 관료적문학이 성행할 때,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 지미江湖之美’라는 새로운 문학세계의 지평을 열며, ‘어부장가’, ‘어부단가’를 비롯하여 이미 소개한 ‘효빈가’, ‘농암가’와 ‘생 일가’ 등의 시가작품을 남겨, 한국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쳐 ‘강호문학의 창도자’로 평가받았다. ‘어부단가’ 5장 가운데 그 2장’은 이러하다. 굽어보면 천 길 강물 돌아보니 만 겹 청산, 열 길 티끌 세상에 얼마나 가렸는가. 강호에 달 밝아 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 이형상 李衡祥의 ‘창보사’ 등에 이어지 고, 드디어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 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 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안동지역에서는 17세기 김응조金應祖, 18세기 권두경權斗經, 19세기 이휘영李彙寧 등의 문집 기록에 “분강에서 농암의 ‘어부 가’를 다 함께 불렀다”고 하여, 학술적 계승이 아닌 현장연출로서 수백 년의 집단적 전승이 있었음을 밝혀놓았다. 그래서 국문학사 에 송순宋純-정철鄭澈로 이어지는 ‘호남가단湖南歌壇’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다. 만년에 기로소耆老所에 입소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명종으로부터 “경은 진실로 천하대로天下大老요 당세원구當世元龜라. 염퇴이양恬退□養이 이미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넘었으며 정관선기靜觀先幾했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은퇴 후 거듭되는 상 경上京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으니, 나라에서 1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내려 예우禮遇했다. 그래서 조선전기에 보 기 드문 ‘재야정승在野政丞’이 되었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직책을 띠고 있었다. 89세에 몰沒하니 나라에서는 ‘孝’와 ‘절개’의 정신을 기려 ‘효절孝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 500년, ‘대로大老’라 고 불려 진 인물은 흔하지 않으며, ‘효절’이란 시호 역시 선생이 유일하다. 선생은 전 생애에 걸쳐 명예를 포기하여 더 큰 명예 를 얻은 삶을 몸소 보여주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고 있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분강서원’에 재향되었다. 문화관광부의 ‘2001년도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국가적 차원의 추모행사 가 있었으며, 2007년 11월부터 2008년 1월 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때때옷의 선비 농암 이현보'라는 주제로 '농암선생특별 전'이 개최된 바 있다. 농암영정은 1537년 경상감사 집무모습을 대구 동화사 승려 옥준玉峻이 그렸다. 특징으로는 손을 표현한 점이다. 조선시대 사 대부의 어느 영정에도 없는 독특한 표현양식이다. 아마 스님이 그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농암종택에는 이 영정 외에 1872년 추 사 김정희가 추천한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63호)이 그린 별본 영정이 있고, 그 제작 과정이 적힌 『영정개모일 기影幀改摹日記』(보물 1202호)가 있다. 선생의 모습에 대해 연산군은 “검열檢閱은 얼굴이 검붉고 볼에 털이 난 자였다”고 했고, 사관은 “강직하고 공명정대한 공무수행 에 모두들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으니, 이는 외모는 검으나 심성心性이 냉엄冷嚴하다는 뜻”이라 했다. 1997년, 삼성갤러리 의 ‘몽유도원도와 조선전기국보전’에 전시된 바 있다. |
(농암종택 홈피에서 발췌한 내용)
사랑채와 안채 전경
'적선(積善)'이라는 선조 어필이 걸려 있는 사랑채 내부
긍구당(肯構堂)
긍구당은 대략 63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건물로, 영천이씨 안동 입향조(諱, 李軒)가 지었다.
농암선생은 이분의 현손으로 역시 이 집에서 태어났다. 농암 당시 퇴락하여 중수하고 ‘긍구당肯構堂’이라는
편액을 붙였다.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잇는다”는 뜻으로, 이후 종택의 당호堂號가 되었고 중심 건물이 되었다.
모든 문사가 이집에서 논의 되었다. 글씨는 당시 명필인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선생이 썼다.
그 후 여러 번 중수를 했지만 구조와 방의 크기 등을 보면 최초의 모습에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마루에는 농암 88세 생일에 축하시를 쓴 인친척의 시가 농암의 시와 더불어 판각되어 있다.
사돈 탁청정 김유, 족질 퇴계, 손서 금계 황준량, 예안현감 이봉수, 그리고 다섯 아들들이 시를 지었다.
농암은 이 마루에서 85세인 1551년 7월 29일 생일을 맞이하여 ‘금서띠(金犀帶)’ 두른 굽은 허리로 자제들로부터
수연을 받고 그 회포를 국문시조 ‘생일가生日歌’ 한 수로 표현한 바 있다.
그 시조는 다음과 같다.
공명이 끝이 있을까 수요는 하늘에 달린 것
금서띠 굽은 허리 여든 넘어 봄 맞음 그 몇 해이던가
해마다 오는 날 이 또한 임금의 은혜 일세
사랑채와 안채, 별당으로 구획된 공간을 나서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 명예를 버려 농암에게는 ‘강호지락江湖之樂’이 왔고, 퇴계에게는 ‘임천지락林泉之樂’이 왔다.
‘강호의 즐거움’과 ‘임천의 즐거움’이 곧 인생의 행복이었고 그런 생애가 문학을 낳았다.
문학은 ‘강호지미江湖之美’로 나타났다. 거기 ‘인간지락人間之樂’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 글은 퇴계가 제자 이담(靜存齋 李湛)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인데, 퇴계의 ‘임천지락’은 ‘농암이 붙여주었다’고 한다.
“자네의 말은 완연히 이 예안禮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고 있는 나의 모습을 충고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농암선생께서 황滉에게 ‘강호의 즐거움(林泉之樂)’을 붙여준 까닭이 여기에 있네.
비록 그대가 정성으로 황의 이러한 취향을 삼가라는 뜻이 있음을 알겠으나, 자네의 그 말을 음미할수록 나에겐
호연한 즐거움의 정취가 더해질 뿐이라네.”
퇴계는 농암의 정계은퇴와 귀거래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지극히 존경했다. 퇴계는 농암을 일월日月로 비유하며,
농암이 거니는 경관은 ‘진경眞境’이며, 농암의 강호유상江湖遊賞은 ‘진락眞樂’이며, 농암은 진정 강호를 이해한
‘진은眞隱’이라 했다. 퇴계의 극찬은 예우차원의 수식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한 인생이기도 했다. 국문학사에서 농암을
‘강호가도의 창도자’라는 도남 조윤재 박사의 언급은 우연이 아니다. 퇴계의 문학은 여기서 다시 이기철학이 스며들어
철학적 사유가 곧 시적 변용이 되는 피안의 ‘경敬’의 세계에 도달하고 있다. ‘강호지낙’의 낭만적 미의식과 이기철학의
학문적 사색이 깊이를 더해갔으니, 거기 우리고유의 진정한 문화의 도, ‘풍류風流’가 있었다.//
(농암종택 홈피에서 발췌한 내용)
명농당(明農堂)
농암은 행복한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준 인물이다. 행복은 명예를 버리는데서 왔다.
농암은 지방근무를 거듭 자청했다. 그래서 여덟 고을을 살았다. 경관京官을 절대적으로 선호하고,
고을살이를 기피하여 국법까지 마련했던 사실로 보면, 농암의 처신은 매우 희귀한 예에 속한다.
외직 근무 30여년에 ‘청백리’에 녹선 된 사람 역시 농암이 유일하다.농암은 ‘호조참판’에서 사표를 냈다.
‘참판’은 영감이고, ‘판서’는 ‘대감’이다. 요즘 말로 “택호를 바꾸어야 할 자리”에서 그만두었다
.
인기와 여망을 감안하면 대감은 물론 정승도 가능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벼슬’은
어버이의 봉양수단 로, 명예를 버리니 더욱 명예가 왔다.정도이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즉시 귀거래 했다. 『실록』에 ‘염퇴恬退’라 한 연유가 거기에 있었다.
‘염퇴’는 거짓은퇴인 ‘도명盜名’과 극단적 현실도피인 ‘은둔隱遁’과 대비되는 바람직한 귀거래였다.
당시에는 ‘도명지사盜名之士’만 있을 뿐 진정한 ‘염퇴지사’는 없었다. 농암이 바로 ‘염퇴지사’였다.
그래서 은퇴 후 관료들이 거듭해서 불러올리도록 왕께 진언했고, 올라가지 않자 종1품 ‘숭정대부’의
직첩을 내려 보내기까지 했다. 그래서 ‘재야정승’이 되었다.
조선전기 은퇴한 관료에게 품계를 올려가며 계속해서 직첩을 내린 일은 매우 드문 일로,
명예를 버리니 더욱 명예가 왔다.
(농암종택 홈피에서 발췌)
분강서원(汾江書院)
농암을 추모하기 위해 건물로 숭덕사, 흥교당, 성정재, 동재 극복재, 서재 경서재 등이 있다.
농암 신도비
조선 명종 20년 2월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대제학 홍섬(大提學 洪暹)이 짓고 글씨는 여성군 송인(礪城君 宋寅)이 썼다.
애일당(愛日堂)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뒤쪽 양 옆에 1칸짜리 방을 두었고,
앞 쪽 4칸은 모두 대청마루를 깔았다. 75년 안동댐 건설로 도산면 분천리로 옮겼다가
2005년 다시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농암 : 농암이 자호롤 인취한 바위
한속담(寒粟潭)
농암은 애일당 앞을 흐르는 강을 ‘분강汾江’이라 이름 짓고,
정승벼슬도 이곳 풍경과 바꿀 수 없다고 했으며.
모재 김안국은 “마치 도원경에 들어온 것 같다”고 했다.
멀리 왼편으로 청량산이 눈에 들어온다.
분강촌 가을 하경
(농암종택 홈피에서 발췌한 사진)
농암종택으로 가는길에 위치한 고산정 풍경
안동호를 거슬러 오르면 도산서원, 퇴계종택, 퇴계묘소, 이육사 문학관,
애일당이 있는 농암종택, 학소대, 고산정, 청량산에 이르기까지....
봉화로 넘어가는 길목 처처에는 준수한 풍경들이 그야말로 숨가쁘게 펼쳐진다.
퇴계는 이 길을 따라 청량산에 공부하러 가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했다.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이 강물에 비친 절경을 감상하노라면
염퇴지사(恬退之士) 농암이 노래한 강호(江湖)에 묻혀 사는 즐거움도 감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지향한다는 안동.
그 중에서도 낙동강 상류에는 양반네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가늠 해 볼 수 있는
알짜배기 사상로가 청류를 따라 처처에 산재 해 있다는 사실.
나그네는 지금 이 길을 따라 낙동강의 시원 태백산을 향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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