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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탐매

임진탐매(壬辰探梅) 제 8편

      임진탐매 壬辰探梅  제  8

 

 

                                                                                                                              2012. 4. 6

 

해보매

 

- 전남 함평군 해보초등학교 -

 

 

 

 

 

 

 

 

 

 

 

 

 

 

 

 

 

 

 

 

 

 

 

 

 

 

 

 

 

 

 

 

 

 

 

 

 

 

 

 

 

 

 

 

 

 

 

 

 

 

 

 

 

 

 

 

 

 

 

 

 

 

 

 

 

 

 

 

 

 

 

 

 

 

 

 

 

 

 

 

 

 

 

 

 

 

 

 

 

 

 

나산매

- 전남 함평군 나산면 나산교회 옆집 -

 

 

 

 

 

 

 

 

 

 

 

 

 

 

기각리매 (1)

- 전남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

 

 

 

 

 

 

 

 

 

 

 

 

 

기각리 매 (2)

 

 

 

 

 

 

 

 

기각리매 (2)번 둥치

 

 

 

 

 

 

 

관음매

- 전남 함평군 함평읍 관음사 -

 

 

 

 

 

 

 

 

 

 

 

 

 

 

 

 

 

 

 

 

 

 

 

 

 

 

 

 

 

 

 

 

 

 

 

 

 

 

 

 

 

 

 

 

 

 

 

 

 

 

 

 

 

 

 

 

 

 

 

 

 

 

 

 

 

 

귀령재(歸潁齋)

- 전남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

 

 

 

 

 

 

귀령재 동백

 

 

 

 

 

 

학명미술관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

 

 

 

 

 

 

학명미술관에서 바라본 월출산 경포대 일대

 

 

 

 

 

 

학명매....?

 

매화에 관한 모 책자에 "학명매"라 소개되어 있어 찾아가 보았다.

헌데,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내 눈엔 '자두나무'로만 보이던데.....

 

내 생전 매화나무 표피가 저렇게 매끈하게 생긴 것은 듣도 보지도 못했건만,

설마 고명하신 학자께서 매화와 자두를 분간치 못하실리는 없고,

이 시골뜨기의 눈에 백태가 끼지 않고서야 우째 이런 사변이....

 

근처 매화는 모조리 피어났건만 이 매화(?)나무는 매화 특유의

꽃 망울 조차 제데로 맺혀있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아무튼 얼마후 지나는 길에 다시 확인을 해 보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을 성 싶다.

 

 

 

 

 

 

 

월출산 경포대 입구에 복원한 이한영 생가

 

 


한국 최초의 상표, 백운옥판차(白雲玉板茶)

 

 

이한영씨는 1867년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0년께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상표를 상품에 붙여서 판매하신 분이다. 그가 상표를 붙여 개발 판매한 상품이 바로 '백운옥판차'였다.

그 무렵에 독특한 차를 만들어 팔았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사실인데 상표까지 창안해서 그 상품에 붙였다는

것은 그가 여간 비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근대상업사연구에 있어서도 이한영씨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의 고향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는 영암군 월출산 남쪽에 위치한 풍광이 아름다운 마을 이다. 이 일대에는

옛날부터 자생차 나무가 많다. 또 여기에는 백제 때에 창건된 월남사라는 절이 있었고 이 월남사의

유물로서는 보물 제 298호인 월남사지 모전탑이 남아있다.

이 모전석탑은 이한영 씨가 살던 집 바로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한영씨의 선대는 월출산 무릉도원으로

불리는 백운동에서 살았는데 이 백운동 일대도 예부터 차나무가 많은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이한영씨는 4~5월 두달 동안 백운동 일대에서 찻잎사귀는 따내어 돈차(錢茶)를 만들어 장날에 내다팔기도 했다.

호남지방에서 돈차라고 부르는게 바로 이 전다(錢茶)이다. 이한영씨 말고도 이 고장 주민들은 옛날부터

차를 만들어 팔아왔다. 그런데 이한영씨는 손수 만든 대나무 광주리 상자에다가 이 돈차를 담아 '백운옥판차'

라는 상표를 붙여서 상품다운 상품으로 내다 팔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상품의 근대화를 그가 비로소 이룩했던 것이다. 이 전다는 본래 단차 혹은 전다(石+專茶)에서

비롯된 것이데, 우리나라에서의 전다(돈차)제조는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있는 무위사가 그 시초였다.

무위사는 사찰 창건기에 의하면 백제 때 중국에서 건너온 중국스님이 창건한 고찰로 되 있다.

무위사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의 승려가 많이 내왕했다.

그들은 평소에 마시는 차를 후대하고 다녔는데 이 차는 갖고 다니기 편리한 전다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송나라 서긍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지은 풍속견문록으로서 <고려도경>이란 책이 있는데, 이 책에 단차(團茶)가

중국에서 전해됐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한영 씨기 만들어낸 백운옥판차는 중국 단차에 속하는 것으로서,

백운동 일대와 옥판동에서 찻잎을 땄기 때문에 백운옥판차라는 상표를 붙였던 것이다.
이 밖에 '금릉월산차'라는 돈차로 시판된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구전돼 왔을 뿐 그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중략)

이한영 씨가 한창 백운옥판차를 만들어 팔고 다녔을 무렵만 해도 월출산 남쪽 백운동 계곡 일대에는 차

나무가 무성하여 돈차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한다.
이관묵(이한영/작고 씨의 증손자)씨가 기억하고 있는 백운옥판차의 제조방법은 이렇다.

5월이 되면 청명한 날, 백운동 일대에서 따낸 찻잎을 팔러오는 사람에게서, 그걸 사들여 시루에 찐다.

그다음 찻잎사귀가 부드러워지면 절구에 찧는다. 찻잎사귀가 찐득찍득해지면 다식판에 넣어 일정한

형태로 만든다. 그 크기는 곳감의 반쪽만하다. 이렇게 다식판틀에 찍어 낸 것들을 대소쿠리에 담아서,

활짝 갠 날씨에는 햇볓에 말리고 흐린 날이면 온돌방에서 말린다.

이것들이 충분히 마르면 조그만 대나무함에 차근차근 담되, 한 개의 함에 50개 정도를 넣는다.

그러고서는 대나무 겉에 '백운옥판차'라는 글자와 차꽃을 인쇄한 상표를 붙여 팔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1938년께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시작했을 때부터는 일꾼을 구하기가 힘들었고 판로조차 잃게 돼

이한영 씨는 백운옥판차의 제조를 중단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본이 차를 직접 재배해서 팔게 됐고.

그래서 일본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커피가 유행되었다, 이관묵 씨의 말을 듣자면, 자기 조상들은 대대로 영암 월출산

남쪽 백운동에서 살다가 약 백 년 전에 농토를 따라 월남리로 이사 왔다고 한다.
그리고 차 이름을 '백운옥판차'라고 붙인 것은 백운동에서 찻잎을 땄고

옥판선지(玉板宣紙)로 포장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중략)

호남 지방 노인들의 말을 들으면 1920년대, 즉 제 1차 세계대전 후 호열자(콜레라)라는 무서운

돌림병이 번져 수십만이 죽었다고 한다. 그 당시 돈차를 끓여 마시면 호열자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돈차를

반가정에도 상비약으로 비치해 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호열자 예방주사가 실시되면서부터는 돈차도

그 빛을 잃게 되다. 아무튼 백운동에서 나왔던 돈차, 그러니까 백운옥판차는 편차(片茶)에 속하고,

편차는 병차(餠茶)에 속하고, 병차는 중국의 단차(단차(團茶=石+專茶))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이 차를 중국에서 많이 수입해서 궁중, 재상, 관가에서 끓여 마셨다.

 

백운옥판차의 유래 ('다도' 2004. 5.호에서 발췌)

 

 

 

 

 

 

茶泉 

 

- 혜심 -

 

 

소나무 뿌리에서
이끼를 덜어내자
샘물이
영천에서 솟구친다.

상쾌함은
쉽게 얻기 어렵나니
몸소
조주(趙州) 선(禪)에 들지어라.


 

『무의자시집』 권 하

 

 

 

 

 


 

 

 

 

 

 

 

 

 

 

 

 

 

 

 

 

 

 

 

 

 

 

 

 

 

 

복원한 생가 앞,  이한영 선생의 후손이 운영하는 찻집

 

 

 

 

 

 

점심도 거른판에 차라도 한 잔 마셔주어야...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홍매

 

 

 

 

 

 

겨우 몇 송이 피어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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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뒷편 언덕에 일렬로 늘어선 '해보매'

초등학교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듣고 화들짝 피어나서일까?

백매 특유의 밝은 색감에다 각각의 개체 모두 대체로 건강한 모습이다.

 

나산교회 블럭 담장 너머 구석에 옹색한 모습으로 자리한 '나산매'

만만찮은 몸무게를 블럭 담장에 올려 간신히 찍긴 찍었는데

탐매의 대상으론 그리 썩 맘에 들지 않는다.

 

'기각리매'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백매다.

경사가 심한 언덕배기에 선 모습인데 수령이 제법 되어 보인다.

대문은 있는데 집 터가 비어있는 것으로봐서 건물은 철거한 듯.

 

부지런히 달려간 관음사의 '관음매'

몇 장 눌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다가온 혜지스님.

여전히 고운 얼굴, 사진 한 장 찍자는 말에 손사래를 치신다.

 

이젠 제법 탐매꾼들이 다녀가는 모양이다.

매화나무를 위해 바로 옆 은행나무 가지까지 잘라냈다는 스님.

나무의 건강상태 등에 대해 이것 저것 물으시고, 매화를 담은 사진 한 장

있었으면 하시는 것으로 봐서 '관음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듯.

 

아름다운 마을 모평헌에 들렀더니 형수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진도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 부리나케 달려간  월출산 월남사지.

담장이고 밭둑이고 할것없이  백매의 향연이 눈부시다.

 

경포대 초입, 새로 들어선 찻집과 함께 전엔 못 보던 건물이 보인다.

초의선사의 다맥을 이은 것으로 잘 알려진 '백운옥판차'의 주인공

이한영 선생의 생가를 복원해 놓은 모습.

 

찻집 문을 여니 이한영 선생의 후손되시는 종부께서 맞아주신다.

점심도 거른판이니 다식에 차라도 한 잔 마셔주어야 할게 아닌가!

대충 차 한 잔 입에 털어 넣자마자 태평양 다원을 가로질러 무위사로.

 

'무위홍매'의 상태가 해가 갈수록 어째 점점 심상찮다는 느낌.

한 쪽 가지에선 몇 송이 만개햇지만 반대쪽은 꽃망울 조차 시원찮은 모습.

뭔가 조치를 취해만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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