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3
'부도' 대신 '승탑'으로 문화재 명칭 변경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에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스님들의 사리탑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부도(浮屠)'라는 명칭을
스님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경우는 '승탑'으로,
스님의 이름이 밝혀진 경우는 이름 뒤에 '탑'을 붙이는 것으로 변경했다고 1일 밝혔다.
이에 따라 국보 제4호 '고달사지부도'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으로,
보물 제154호 '구례연곡사소요대사부도'는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으로 바뀌는 등
석조문화재 415건(국보 62건, 보물 353건)의 지정 명칭이 변경됐다.
보물 제152호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
고려 전기의 승려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비몸돌이 없어져 현재는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입이 웅장하며, 수염을 가진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안상(眼象)과 꽃조각이 새겨져 있다.
받침돌 위에 놓여 있는 비의 머릿돌에는 여러 마리의 용이 서로 얽힌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긴밀하고 사실성이 두드러진다. 앞면의 가운데에는 탑이름이 새겨져 있어, 현각선사의 탑비임을 알수 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비는 고려 경종 4년(979)에 만들어졌다.
연곡사 소요대사탑 보물 154호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3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그 위로 탑신을 받치도록 두툼한 괴임을 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의 몸돌은 한 면에만 문짝 모양을 새기고,
다른 곳에는 8부신중상(八部神衆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큼지막하게 꽃장식을 얹어두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연곡사에는 이외에도 2기의 탑이 더 있는데,
그 탑들에 비해 조형성은 떨어지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운 작품이다.
탑신에 새겨진 기록을 통하여 조선시대 효종 원년(1650)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팔부신중
연곡사 동승탑비
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 鷰谷寺 東 僧塔) 국보 53호
이 승탑은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기단(基壇)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승탑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곡사 북 승탑 국보 54호
북 승탑은 그 중에서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동 승탑을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으로,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위에는 두 겹으로 된 16잎의 연꽃무늬를 각각 새겨두었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누어 연꽃과 돌난간을 아래위로 꾸몄다. 특히 윗단에는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속에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돋을새김해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 등을 꾸며놓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는데, 동 승탑과 마찬가지로 기와 끝에 막새기와의 모양을 새겨두었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네 마리의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긴 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승탑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북 승탑’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동 승탑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반면에 북 승탑은 그 후인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8각형 승탑을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가릉빈가(伽陵頻迦)상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보물 제151호
3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층에는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 층의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층마다 4단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다. 또한 윗면에는 경쾌한 곡선이 흐르고,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도 우아하다. 맨 윗기단이 매우 넓어졌으며, 이에 반하여 탑신부는 줄어든 느낌이 있지만,
맨 아래 기단부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체감비율도 온화하며 안정감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탑이다.
탑에 사용된 돌의 구성양식 등으로 미루어보아 건립연대는 통일신라 후기로 짐작된다.
석탑의 3층 지붕돌은 밑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1967년 해체하여 수리할 때에 복원되었다.
이 때 윗층 기단 안에서 동조여래입상 1구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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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들러본 연곡사.
얼마나 많은 당우들이 새로 들어 섰는지 도통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승탑에 이르는 길도 모조리 계단으로 바뀌었고, 석축도 새로 쌓고,
기단부의 형태도 뭔가 좀 바뀐듯하고
심지어는 승탑의 위치도 좀 바뀐 것 같은데 나만의 착각일까...?
차분히 좀 더 둘러봤어야 하는데 계속해서 비는 추적거리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흐르는 통에 그냥 대충 훑고 말았다.
결정적으론 사진발이 영 거시기 한지라
피아골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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