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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편백설 -扁柏雪-

2011. 1. 7

 

 

화계 玉露차

 

고 중 영

 

첩첩 쌓인 것이 눈뿐이라

눈에 보이는 것이 눈 아니고는 없다.

눈 아닌 것에 눈 둘 곳이 없어

눈을 바라보다가

茶器에 찻물을 부으면

아!

邂逅처럼 풀리는 아련한 綠色

첫사랑이 저랬을까?

 

한켠에 밀어두었던 그리움이

뉘엿뉘엿 다가들고 있다.

 

 

 

 

 

 

 

설분(雪粉) 2

 

고 중 영

 

눈밖에 안보인다.

 

향기처럼 날아오더니

落花처럼 쌓여

가슴까지 탈속시켜버리는 눈을 맞다보면

쓸쓸하지만

저렇게 편하게 누울 세상이 있어

뿌리 없고 줄기가 없어도

스스로 피어올라 꿈도 깊게 쌓이는

하얀 저 꽃잎들

 

그대 순결인냥

마음인냥

범접할 수 없이 고결했음에

첫발을 내딛어

 

자취를 남긴 이가 떠나며

성찰하듯

성찰하듯

밟고 걸어도 좋다고

조근조근 이르신

담담한 교훈이여!

 

지금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있다

내 머리에 하얀 꽃잎들이

글썽이며 쌓이고 있다.

 

 

 

 

 

 

 

 

 

 

 

 

 

 

길 9

 

고 중 영

 

몸 안에 마음을 담아두고 때때로 꺼내본다.

꺼내서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휙- 집어던지기도 하고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넣었다가 다시 꺼내

어루고 달래며 다림질하듯 곱게 펴보기도 한다.

몸 안에 담아둔 마음이라서 그렇다. 

 

마음이 몸 밖에 있다면 그럴 수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마음이라는 게 가엾게 느낄 때도 있지만

그러니 또 어쩌자는 말인가.

 

아침에 눈을 뜨면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산길

내 눈은 그 마음을 데리고 하산하기 시작하여

아랫 길 모통이 까지 갔다가

목적지를 잃고 되돌아오지만

처음부터 무슨 작정이 있어 출발한 것이 길이라서

허전할리 없다.

언젠가는 이짓거리도 끝날 날이 있겠지.

 

저 아래 인적이 끊긴 산길을 오늘 아침에도

눈으로 걷는다.

걷다가 모통이에서 끝낼 행로가

또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고 나는 초겨울 나그네가 되어

그 길에 마음을 두고 돌아온다.

 

 

 

 

 

 

 

 

 

 

바람의 귀

 

고 중 영

 

낮에는 숨어있던 별들

엷은 옥색치마 바람으로 마실 나와

태어나는 일

태어나서 살아가는 일

살면서 어른스러워 지는 일

그렇게 살다가 쓰러지는 일

쓰러져 썩어가는 일

다시 살아지는 일

세상 이치를 언제 그렇게 다 꿰어 찼던지

입은 열었으되 

세상 깨울까봐 조심스러운 고요.

 

 

 

 

 

 

 

 

 

 

 

路上所見

 

姜世晃(강세황, 1712~1791)

 

 

凌波羅襪去翩翩

 

사뿐사뿐 걷는 아름다운 저 아가씨

 

 

一入重門更杳然

 

문 안으로 들어가니 눈 앞에 아른아른

 

 

惟有多情殘雪在

 

그래도 다정할 손 잔설이 남아있어

 

 

屐痕留印短墻邊

 

담장 옆에 찍힌 발자국이 고아라

 

 

凌波羅襪(능파나말) : 물결 위를 거니는 듯한 미인의 가벼운 걸음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