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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불갑추색(佛甲秋色)

       불갑산 / 내산서원 / 용천사

 

                                                                                                                       2010. 11. 11

남한땅에서 마지막으로 포획되었다는 불갑산 호랑이 상

 

 

 

 

 

 

을도 아니요, 병도 아닌, 불(不) 중에서도 갑(甲)이라...!

 

 

 

불갑사 저수지 제방위에서

 

 

 

 

 

 

 

만추의 불갑산

 

 

 

 

 

 

 

동백골을 따라...

 

 

 

해불암길로...

 

 

 

참식나무 군락지

 

 

 

해불암 당도

 

 

 

 

 

 

 

느티, 단풍, 사철 세 그루 나무가 겹쳐지는

이른바  '불갑추색

삼중주'

 

 

 

숨 돌릴 틈도 없이 헐떡이며 올라선 연실봉

 

 

 

연실봉에 올라 곧장 하산길로...

 

 

 

하산길 신갈나무 군락

 

 

 

구수재

 

 

 

단풍별이 총총한 동백골의 하늘

 

 

 

 

 

 

 

 

되돌아온 불갑사 저수지

 

 

 

 

 

 

 

불갑사 대웅전

- 보물 830호 -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세웠다는 설과

무왕 때 행은 스님이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법당인 대웅전은 18세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기와 가운데 ‘건륭 29년(乾隆二十九年)’이라고 쓴 것이 발견되어

조선 영조 40년(1764)에 고친 것으로 짐작한다. 그 뒤 융희 3년(1909)에 수리하였다. 

다포 양식으로

지붕 위부분에서 작은 석탑과 보리수를 조각한 장식을 볼 수 있으며,

가운데 칸 좌우의 기둥 위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또한 가운데 칸에 달린 문은 연꽃과 국화 모양으로 꾸며 뛰어난 창살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건물 안쪽의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고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다

 

 

 

 

 

 

 

 

 

굴뚝의 해학

 

 

 

대웅전 옆 면의 벽화

 

 

 

 

 

 

 

서옹선사의 서체

 

 

 

 

 

 

 

불갑사 승탑 라이브러리

 

 

 

물에 잠기는 만추

 

 

 

 

 


 

 

 

 

 

 

수은 강항선생 像

 

강항 (姜沆 1567∼1618 :명종 22∼광해군 10)

 

 

 

조선시대의 학자.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사숙재(私淑齋)

 

명종 22년 정묘(1567)에 영광군 불갑면 출생.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강희맹의 5대 손이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주서·교서관박사를 거쳐 96년 공조좌랑에 이어

 

 

형조좌랑이 되었다. 성우계의 문하생으로 그의 학문적 계보는 이퇴계의 직계이다.

 

 

 

경서와 사기에 능했으며,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조 30년 1597년 휴가로 고향에 머물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 군량미 수송임무를 수행했고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향 영광마저 함락당하여

 

 

가족과 함께 해로를 통해 탈출하려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었다.

 

 

이곳에서 일본의 승려 요시히도(好仁)와 교류하며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 몰래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98년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醒窩

 

아카마쓰〔赤松廣通〕 등의 일본학자와 교류하여 그들에게 성리학을 전수하였고

 

특히 후지와라는 그에게서 배운 것을 토대로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강항선생은 일본에서 나중에 일본주자학의 창시자가 되는 후지와라 세이가란 스님에게

 

조선의 주자학과 과거제도 등을 가르쳐 주고 많은 책들을 펴냈다.

 

일본의 주자학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두 일본학자의 도움으로 1600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였고, 귀국 후에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오직 학문에 몰두하였다. 1602년 대구교수(大邱敎授),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나라에 죄가 많다 하여 사양하고 고향에서의 여생을 후진양성으로 마쳤으니

 

그의 고고한 인품을 알 수 있다.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

 

 

그 발문을 썼고,

 

<곡례전경(曲禮全經)>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등 16종의 글을 수록한 《강항휘초》를 남겨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으며, 《역대명의전략(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썼다.

 

저서로 《운제록(雲堤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

 

《문선찬주(文選纂註)》《수은집(睡隱集)》이 있다.

 

 

 

수은집』은 모두 6권 4책으로 이의 편찬은

 

 

그가 떠난지 40 년이 지난 효종 9년(1658)에 제자 윤순거에 의해 이뤄졌다.

 

현재 한글로 번역된 『간양록』은 그 저서 중 일부로 본시 『진거록』이라 한 것을

 

전한시 중랑장소무를 연유로 해서 편찬시 『간양록』이라 고쳤다 한다.

 

영광 불갑의 내산서원(內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내산서원(內山書院)

 

(전라남도 기념물 제28호)

 

인조 13년(1653) 용계사(龍溪詞)하는 이름으로 창건하여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을 배향해오다가

이후 윤순거(尹舜擧;1596~1668)를 추가로 배향하였고,

대원군때 훼철되었다가 1974년 복원시에 내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수은 강항의 사후 18년되는 인조 13년(1635)에 윤순거 등 다수의 문하생들이

선생의 유덕을 영원히 후세에 기리고자 관찰사와 의논하고 향리에서 협의하여

사우(祠宇)건립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때 최초의 건립지는 강항의태생지인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이었다.

창건 이듬해인 1636년에 화재로 인해 화를 입자 사우의 이건이 추진되었다.

김지수(金地粹;1585~1636), 임담(林潭), 김방급(金方伋) 등의 주도하에

마을 이름에 따라 용계사라 하였고, 판액은 송시열(宋時烈)이 썼다고 전한다.

이 편액은 사우 훼철후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오다가 한국전쟁때 소실되었다.

 

창건 이후 강항만 배향해 왔던 용계사는

숙종 8년(1682) 선생의 제자인 동토 윤순거를 추배하게 된다.

동토를 추배하게 된 동기는

윤순거가 강항의 수제자였고 향사(鄕士)들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용계사의 창건이나 강항의 저서인 [수은집(睡隱集)(1658년)]편찬 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숙종 28년(1702)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던 용계사는

이후 고종 5년(1868)에 내려진 대원재지에 복원하고 내산서원이라 개칭하였다.

 

 

 

간양록

 

일본에서 보고 들은 풍속·지리·군사정세 등을 기록하고 있다.

1권 1책. 목판본. 1668년(헌종 9) 간행되었다.

강항은 원래 이 책을 〈건거록 巾車錄〉이라고 했다.

건거'란 죄인이 타는 수레를 뜻하는 말로 포로가 된 자기는 죄인이라는 뜻에서 썼다.

뒤에 제자들이 〈간양록〉이라고 고쳤는데,

이것은 한(漢)의 소무(蘇武)가 흉노의 포로가 되어 양을 치는 수모를 겪었다는 데에서 따온 것.

당시 강항은 형조좌랑의 자리에 있었는데, 고향에 갔다가 왜군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 고난을 겪었으나, 유학자로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이황의 성리학을 일본에 전하게 되었다.

3년간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대응할 수 있게 한다는

의도에서 기록했고 귀국 후 책으로 엮었다.

 

내용은 적국에서 임금에게 올리는〈적중봉소 賊中封疏〉,

일본의 지도를 그린 〈왜국팔도육십육주도 倭國八道六十六州圖〉,

포로들에게 주는 글인〈고부인격 告浮人檄〉,

자기 체험을 기록한 〈섭란사적 涉亂事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에 잡혀간 포로들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했고 그때 느낀 점을 한시로 적기도 했으며

전란에 대비할 국내정책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에 불에 타서 현재는 희귀본이 되었으며,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모악산 남쪽 산자락에 위치한 용천사의 추색

 

 

 

 

 

 

 

 

 

 

 

 

 

 

 

 

 

 

 

 

 

 

 


 

 

 

 

해불암 오름길

땅에는 상사화 이파리가 두텁게 깔렸고,

하늘에는 앙증맞은 애기 단풍별이 총총이다.

 

비가 올거라는 예보.

허벅지가 뻐근하도록 부지런히 교차시키다 보니 어느새 연실봉.

 

뭐 그다지 뵈는 게 있어야,? 언제 비가 내릴지도 모르겠고...

 

무릎에 스냅을 넣어 구수재로 내려선 후

급 우회전, 동백골을 거쳐 불갑사 마당엘 들어선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시커먼 하늘.

강항선생의 내산서원을 돌아나와 용천사를 향한다.

 

대충 절 언저리의 단풍을 둘러보고 돌아서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제서야 가을비가 차창에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