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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荀峯)

                   구담봉(龜潭峯) ~ 옥순봉(玉荀峯)  -  <월악산 국립공원 내>

                                                                                                                                                                                          

 뚱딴지의 유혹

 

 

 가을의 전령사 억새

 

 

 

 

 

탁한 초록빛 물색의 충주호

 

 

 

 

단양 8경 중 제5경 구담봉이 눈 앞에...

 

 

 

 

  쇠줄 한 가닥에 의지하여 구담봉을 오르는 산객들

 

 

 

장화나루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 

계속해서 물길은 도담삼봉으로 이어지게 된다.

 

 

구담선녀의 포커스

 

 

 

 

 

금수산 일대  산행의 추억...

 

 

구담봉을 돌아나와 옥순봉으로

 

 

 

 

 충주호반을 가르는 유람선의 물꼬리

 

 

김명민과 한지민을 주인공으로  "조선 탐정"이라는 영화를 찍는다는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촬영 현장을 지켜보는 산객들

 

 

 옥순봉에서의 산벗 커플

 

 

 당겨본 금수산 정상 일대(뒷편)

 

 

 300m로 당겨본 새바위

 

 

 옥순봉에서 조망한 구담봉 전경

 

 

옥순대교가 보이는 풍경

요 아래 어디쯤 퇴계를 사랑한 두향의 묘가 있다던데....

 

 


 ※ 아래 내용은" UGN 경북뉴스"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소복 입은 여인이 바닥에 엎드린 채 구슬프게 곡하고 있다.

1570년(선조 2) 마침내 대석학이며 성현의 반열에 올랐던 이황이 70세 나이로 타계하자

그를 연모했던 기생 두향이 목 놓아 울고 있다.

 

 

 ▷ 상사별곡(38cm×55cm)                                                                                Oil on canson pape

 

 

두향과의 만남은 퇴계가 중앙의 권력다툼을 피해 처음으로 외직을 청하면서 이뤄졌다.

 당초 퇴계는 청송부사를 원했으나 여러 사정 때문에 단양으로 오게 되었다.

두향은 단양군에 소속된 관기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18세.

 신관 사또인 퇴계의 수발을 그녀가 들게 됨으로써 인연이 맺어졌다.

이 시기 퇴계는 심리적으로 많이 미편했다.

부임한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둘째 아들 채가 죽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경남 의령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서 농사일을 감독하고 있었던 채는 당시 나이가 21살이었고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정혼한 여자가 있었다. 

퇴계는 채의 죽음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렸기 때문에 참척의 고통이 상당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몸이 찢어질 듯 아프다.”

“지탱하기 힘들다.”

“원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죽음만을 가다린다.”

“단양군에 와서 좋은 일이라곤 없고 자식을 잃어 병만 더욱 심하다.”

 

그 절망의 끝에서 퇴계가 의지한 건 단양의 산수와 두향의 따뜻한 품이었을 것이다.

그도 대학자 이전의 한 인간이었다.

지친 심신을 달래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까지 두향이 곁에서 많은 내조를 했던 것은 아닐까?    

그 같은 정황을 파악하기에는 지금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아마 사실일 것이지만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아무래도 마뜩찮은 주위의 여건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퇴계가 10개월 간의 단양군수직에서 물러나 이웃의 풍기군수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두 사람 간에 주고받은 서신의 흔적은 전혀 없다.

원래부터 두 사람간의 사신이 존재하지 않았는지 있었는데 유실되었는지도 우리로써는 지금 알 길이 없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두향이 퇴계가 떠나간 뒤 수절했다는 것이고,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뒤따라 자진했다는 이야기가 풍문을 타고 5백 년 동안 전해져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두향의 묘가 지금 단양에 현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단양에서는 매년 5월 단오날 마을축제로 ‘두향제’를 열고 있다.

두향의 원래 무덤은 강선대 바로 위에 있었다.

이것이 1985년 이 일대에 댐이 축조되면서 무덤이 수장될 위기에 처하자

동네 사람들의 들고 일어나 현재의 강선대 산중턱으로 이장하였다.

무덤에 관한 기록은 그래도 어지간히 남아 있는 편이다. 두향의 무덤은 퇴계의 제자였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 집안에서 한일합방 전까지 돌보았다고 한다.

그 연유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8년(1575년 12월1일)전 내자시정 이지번이 사망하였다............

금상(선조)초년에 청풍군수를 제수하여 옛날 은거하던 곳에서 가깝게 살도록 했는데

이황이 강요하여 취임한 뒤 애쓰지 않고도 깨끗하게 잘 다스렸다.

떠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으며, 후인들은 모두 그의 풍절을 숭상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지번을 청풍군수에 제수하도록 힘쓴 사람이 이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산해는 바로 이황과 절친했던 이지번의 아들이다.

두향무덤의 표지석에도 두향과 퇴계, 이지번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두향이 단양팔경을 지정하기 위해서 청풍군수인 성함 이지번 선생에게 청풍 경계인 옥순봉을 양보 받도록

이황에게 청원하여 단양팔경을 지정하게 하였다.”

매우 재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단양팔경의 완성이 두향의 요청 때문이었다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인간퇴계를 두향이라는 오아시스를 통해서 만나는 격이다.

그 만큼 이 내용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자아낸다. 

단양팔경은 도담삼봉, 석문,사인암,상하선암,중하선암 하하선암, 구담봉, 옥순봉을 말한다.

그러나 퇴계가 옥순봉을 단양팔경으로 지정하기 전까지는 단양칠경만 있었다.

그와 관련된 일화 한 토막.

옥순봉은 원래 단양에 속한 것이 아니고, 행정구역상 이웃 청풍 괴곡리에 편입되어 있었다.

단양과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퇴계는 직접 청풍부사를 찾아가 옥순봉을 단양에 양보하여 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하여 돌아오는 길에 경계에다 단구동문이라 각명해놓고 돌아왔다.

 단구는 단양의 옛 지명인데 ‘신선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훗날의 청풍부사가 남의 지역에 함부로 군계를 정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옥순봉을 찾았다가

퇴계의 글씨인 것을 알고 옥순봉을 단양에 양보하여 단양팔경이 완성되었다.

 

그 훗날의 부사가 바로 이지번이다.

그러나 단양군에서 설치한 두향 표지석의 알림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두향이 퇴계에게 단양팔경의 완성을 위해 이웃의 청풍군수인 이지번에게 양보를 요청하라고 주문한 사실은

시기적으로 두 사람의 활동상황이 일치하지가 않는다.

이지번의 청풍군수 재임은 선초 1년인 1569년이고 퇴계는 1548년 48세 때 단양군수를 지냈다.

이지번의 청풍군 재임시절이라면 퇴계가 임종하기 한 해 전의 일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표지석의 의미를 퇴계가 단양군수 시절 두향의 요청에 의해 옥순봉을 단양팔경에 편입하려 했던 일이

21년 만에 청풍군수 이지번에 의해 그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단양군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표지석의 내용을 역사적 근거에 맞게 새롭게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향이 강선대 아래 몸을 누운지 그를 찾는 문인 학자들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단양군수였던 수촌 임방(1640~1724)은 두향지묘라는 시를 남겼다.

무연고의 묘가 5백 년 동안 유실되지 않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이 같은 이들의 발걸음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點孤墳是杜秋

외로운 무덤하나 두향이라네

降仙臺下楚江頭

 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芳魂償得風流價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絶勝眞娘葬虎丘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

 

조선 영조 때의 문인학자 월암 이광려(李匡呂)도 두향 사후 150년이 지나 그를 흠모하는 시를 남겼다. 

퇴계의 후손들도 두향의 무덤을 외면하지 않았다.

10대손 중 한성부윤을 지낸 이휘재란 분과 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한 이휘영은 형제간이다.

아우인 이휘재의 운산집에 보면 형 이휘영이 퇴계 사후 3백년이 지나 두향의 묘소에 참배했다고 적고 있다.

 

 

 

/ 매년 10월이면 지금도 퇴계 가문 사람들이 두향묘를 찾아 제를 올리고 있다고 들었다.

또한, 세간에 전해지는두향과 퇴계의 로멘스는 상당 부분  흥미 위주로 짜집기되어 있다고.

 객관적인 사실을 찾다가  위의 기사를 보고 일리 있다는 판단 아래 옮겨오게 되었음을 밝힌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 작 玉荀峯圖 (보물 782호)


김홍도 만년의 대표작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중의 한 폭으로, 단양팔경(丹陽八景) 중 하나인 옥순봉(玉筍峯)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병진년(1796)은 김홍도가 정조(正 祖)의 초상화을 잘 그린 공로로 충청도 연풍의 현감(縣監)에 임명받아 1795년까지 재직한 직후이다. 이 시기에 김홍도는 사생(寫生)을 바탕으로 한 진경산수화에서 한차원 더 나아가 서정성이 두드러진 이상화된 현실세계를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돼지감자꽃(뚱딴지)을 찾은 나방

 

 

 

 음력 팔월 열여드레 저물녁의 하늘

 

 

 

 

 

 

 

201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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