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뫼
- 고 중 영 -
고운님 저고리 속 흰살은 저리 부어
비단결 소복한 은애(隱愛)로 쌓여도
그립다,
목 안에 머금어 지엄(至嚴)이니
바람조차 심히 송구스러워 밟고 지나간 발자국 하나 남기는 법 없고
뛰놀던 메아리도 목청을 눕힌 여기서는
미미한 나부낌도 눈이 부시어
사람, 사람이 여태 저지른 짓 맑게 씻기니
참선에 든 고요만 저리 돋보일 뿐
묶였던 세상 일들이 비로소 끈을 놓네.
백결선생의 거문고 소리 돌아와
봉우리, 계곡, 능선 가리지 않고
스스로 열어 길을 닦느니
고운님 저고리 속 살 아파하실라
설피마자 벗어던진 햇살이
맨발인 채
조심 조심 서편으로 가고 있는 중이네
하현달
- 고 중 영 -
열여섯 내 누이의 가슴에 얹힌
챗 끼 같던 조바심이
도톰해진 젖꼭지를 꼿발로 딛고
수틀 닮은 하늘에 높이 올랐다.
가녀린 몸 서서히 달아오르고
물들어 예쁜 초경 흔적을
곁눈질로 훔쳐보던 바람 한 점이
엷은 구름 바삐 끌어 가려 주지만
난실하니 들켜버린 저 수줍음을-.
겨울나기
- 고 중 영 -
황촛불 타고 있는 방에
그림자 등지고 외로 앉았습니다.
밖에 내리는 눈은
생각이 지나쳤던지
마음마져 벗어놓고 와
白雪입니다.
그 一念의 눈부심을
심스레 집어 茶器에 달이느니
그대여!
말없음은 실로 이토록 향기롭습니다.
다 버리고서야
본래 청정을 되찾은 하늘에서
한파에 찔린 별들
경련을 이르키고
"찔린다"를 뢴트겐에 담는 시간의 셔터소리에
어둠은 한층 침중해지며
무거운 밤을 겹겹이 껴입습니다.
茶 입맛 섭섭할만큼 식었습니다
첫눈에 대한 소고(素考)
-고 중 영 -
바다로 간 목마를 생각하며
라이너 릴케를 생각하며
첫눈이 어둠을 타고 내리는 날
잊었던 너를 생각하며
네가 두고 간
무공해 꽃잎같은 미소를
커피에 타거나,
어느날
이마를 조아리는 산촌의
서근새 허벅해진 초가지붕 아래
불현듯 만나야할 사람을 만난듯
첫눈을 만나 홀로 지샌다면,
가슴 저 밑바닥을 밟고 오르는
목메인 발자국소리 들으며
손수건같이 편안한
혼자만의 슬픔에 젖을수 있을까?
첫눈 내리는 날
참으로.
이천십년 일월 십일의 詩
- 고 중 영 -
오늘은 오늘 같은 詩를 써야겠네.
매봉 할매 길쌈을 잦았다는 칠성봉우리야
소복소복 내린 함박눈으로 덮어놓고
꾸설쿠 끌리는 소리 쏘삭거림이
밤낮으로 귓밥을 씹는 자귀나무 아래
귀 못 듣는 떠꺼머리총각 데려다 세워놓고
뽕잎 따러갔다가 여시에 홀린 할매가
칠산 일곱 뫼 재우쳐 끌려가며
다급하게 내뱉은 휘파람이
세찬 바람 되어 몰아온다는
쓰잘데기 없는 옛날 얘기나 혼자 되 뇌일 때
혹
사무친 대목에서는 머뭇거리겠네.
깔깔해지는 혀 마른침으로 축이며
박힌 돌에 걸린 명치 피멍이 살짝 맺힌 단들
신음소리 우겨 깊이깊이 찔러둔
들독재 미련스런 떠꺼머리 숫총각이
메봉이의 삼단 머리채 냄새 사무치면
아름드리 바윗돌 불끈 불끈 들어 올렸더라는
별로 오래지 않은 口傳
몇날 며칠 중뿔나게 벼루든 그 얘기를
오늘은 꼭 마자 써야겠네
바나실 축제
- 고 중 영 -
태초같은 여인이 홀로 비파를 뜯습니다.
수려한 손가락 끝에서 바늘이 돋아
지탄(指嘆)의 깊이를 찔러가는 시침
여인은 오래 전에 바스라진 슬픔을 모아
저렇듯 소중하게 깁고 있을까요
기워질수록 더 아련해지는 본견의 표정
한때는 꿈이었을
한때는 갈채였을-
눈 깊이가 모자라서 마저 보지 못하고
마음 모자라 밀려난 시대의 변방에서
운명을 절삭하던 가위질에
가슴 다친 여인의 옷고름에는
두 줄기 선홍의 피가 흐르고
한 땀 한 땀 눈물겨워 오는 심상의 발효
아아
태초같은 여인이 옷 한 벌 깁고 있습니다.
태초같은 여인이 시 한 편 깁고 있습니다.
*바나실- 바늘과 실의 옛말. 즉 바느질
눈
- 고 중 영 -
툇마루에 서서 바라보는
내리막 길에
하얀 꽃으로 피어나는 당신입니다.
가슴에 품었던 외로움을
입김 호호 불어
지상에 뿌리며 글썽이는 당신은
도무지 어찌할 수없는 슬픔입니다.
끝내 하지못한 말씀에 목이 잠겨
침묵으로 안겨오는 당신은
이내 떠나야 하는 고별입니다.
눈썹만 적셔놓는 눈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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