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재(明齋) 윤증(尹拯) 고택(古宅)
◆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소재
◆ 2009. 8. 27 (목)
윤증 고택 사랑채 앞에서 바로 옆의 향교 에 이르기까지 조성되어있는 연못
네모난 형태에다 둥글고 작은 섬에는 배롱나무라...
마치 반도 남녘 어디쯤의 풍경을 보고 있는 듯.
명재 윤증은 노론과 소론이 분열된 후 소론의 초기 영수로서 추대되는 등
조선 당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
아홉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에서 어머니가 자결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한다.
훗날 아버지의 묘갈명 때문에 스승 송시열과는 회복할 수 없는 틈이 벌어져
결국 회니논쟁(懷尼論爭)으로까지 비화되게 된다.
하지만 그 흔한 과거시험 한 번도 보지 않은 윤증을 정계에 올리기 위해
역대 왕들은 계속해서 벼슬을 제수 한다.
만년에는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 등 최고의 관직까지 받았다.
그러나 윤증은 끝까지 벼슬을 사양 관직에 나가지 않은 것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또한 명재는 조선 역사상 사직 상소를 가장 많이 올린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송림이 들어찬 노성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고택은 옥녀탄금(玉女彈琴) 형 지세
사랑채(오른쪽)와 안채로 통하는 대문
이 집은 선생의 자제들과 제자들이 힘을 합하여 지은 것인데,
생전의 선생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다.
, 윤증 선생이 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소박한 삶을 지향했던 때문.
선생은 제사도 간단히 지낼것은 유훈 했으며
평소 때도 반찬이 두 가지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할 정도로 검박한 생활을 했다고.
각종 장 항아리 행렬
윤증 고택의 브랜드로 시판되는 장류
양반가라면 거의 백% 있게 마련인 솟을대문을 이 집에선 찾아 볼 수가 없다.
종손인 윤완식씨의 말에 따르면 고택 바로 옆으로 향교를 이전한 것과 솟을대문 없는것과 관련이 있다고 .
“원래 향교는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심하던 19세기 초
궐리사(공자의 영정을 모신 곳)를 노론의 주도로 윤증고택에서 멀지 않은 현 위치로 옮기더니,
20∼30년 후 향교도 윤증고택의 바로 옆으로 옮겨버렸다.
이것은 소론 영수 집안의 동태를 감시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노론의 속셈을 알아챈 웃어른께서 그럴 바에는 모든 것을 보여주자는 차원에서 솟을대문을 없애버렸다.”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정녕 그렇게 나온다면 모든 것을 다 보여주겠다’는
오만과 자부심에서 나온 것으로, 자존심만은 지키려는 노력의 발로다.
그만큼 윤씨 집안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없어진 솟을대문으로 사랑방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매우 시원하고 아름답다.
사랑채에서 바라다보는 마당 앞 둔덕 위에 있는 소나무가 아름답고,
향교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연못을 바라보는 경관도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경관은 솟을대문이 있었다면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랑채 앞 마당에는 나즈막한 돌들을 모아 석가산을 조성해 놓았다
사랑채 그리고 말표 흰 고무신
윤증고택에는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은유가 가득하다.
‘도원인가(桃源人家)’라는 당호로부터 사랑채 앞의 ‘석가산(石假山)’까지
작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넓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누마루에 걸린 현판 “離隱時舍(이은시사)” 는
“세속을 떠나 은둔하며 천시(天時)를 연구하는 집’ 이라는 뜻인데,
명재 윤증 선생 9대손 윤하중의 호(號)다.
윤하중은 구한말-일제초기에 살았는데 해시계를 만들고,
‘성력정수(星曆正數) 라는 책도 냈다.
책 안에 1년이 365일 5시간 50분인데 그 동안 365일 5시간 49분으로
계산하여 그 1분의 오차가 그 동안 쌓여 서기 원년부터 1936년 말까지
1일 8시간 16분의 착오가 생겼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대문 밖에서 안채가 직접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내외벽이 가로막고 선 형태다
윤증고택의 안채는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시원함과 아늑함이 있다.
이러한 느낌을 보여주는 안채가 그리 많지 않다.
윤증고택의 안채는 시원함을 주기 위하여 대청을 다섯 칸으로 간살잡이를 했다.
평면상으로 안방과 건넌방에서 한 칸씩 잡아먹어 실제 규모는 8칸이지만 10칸의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옛말에 부잣집을 6칸 대청집이라고 했다.
6칸 대청도 큰데 10칸 같은 8칸 대청이니 얼마나 넓게 느껴지겠는가.
이러한 개방된 분위기 때문에 대청에 앉아 있어도 답답함이 전혀 없다.
또한 뒤뜰의 장독대와 대나무 숲도 자연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시원함을 더해 준다.
윤증고택의 또 다른 맛은 다른 집과 달리 집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모든 곳이 새롭다. 정성을 들여 잘 가꾼 집임을 알 수 있다.
집을 돌아보는 쏠쏠한 맛이 있다. 구석구석 모두 정겨우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보다 큰 집도 이렇게 다채로운 맛을 보여주지 못한다.
윤증고택의 참 맛은 지금까지 사람이 아직 살고 있기 때문에 집 구석구석 손때가 묻어 있어 집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윤증고택 만의 매력이다
안채에서 재실로 이어지는 담장 안쪽에 서 있는 명재매(明齋梅)
윤증고택과 나란히 자리한 노성향교(魯城鄕校) 명륜당
향교 대문에서 바라본 홍살문
명재 윤증 (明齋 尹拯) 선생 초상
※ 최성호 교수의 "고택을 찾아서"와 다음 블로그"구룡초부" 참조
각종 언론매체나 여러 학인들의 자료을 통하여 널리 소개된 "윤증 고택"
자그만치 한 해 일만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한다고 하는데...
중부지방에 폭우가 쏱아진다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서논산 IC를 빠져나와
노성산 아래,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이라는고택을 찾아들었다.
윤증 선생의 어머니를 모셨다는 열녀 비각을 지나니
배롱나무 섬 하나가 들어선 녹조류에 뒤덮힌 네모난 연못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정원의 특징이랄 수 있는 직사각형의 못. 헌데 뭔가 부자연 스럽다는 느낌.
문제는연못을 둘러싼 석재의 부조화에 있었다.
화강암이 아닌 국적불명(?)의 시커멓고 커다란 색상의 석재가 억지스러운 때문.
향촌의 양반가에다,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처사의 삶을 고집한 것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명재(明齋) 윤증선생.
6. 25 전란 속 인민군들이 이 고가를 접수하여 본부로 삼았다는 얘기와
고택의 폭격 지시를 비켜가게한 비화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고택이 유지된 배경에 대하여
연필 잡은 이 모두다 나름대로 한 마디쯤은 사연을 엮어(?)낸다는 전설같은 고가.
비교적 근자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고가 옆의 서실書室)에 들어서
관리자께 종손을 좀 뵈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 하자니, 어딘가 출타 중이시라고.
비 내리는 고가 여기 저기를 기웃대면서, 선비의 처신과 청빈한 삶,
가문과 나라의 존립을 위해 꼿꼿하고 대쪽같은 삶을 살아갔을 명재와 우암을 비롯,
삶의 지평을 넓히려 몸부림쳤을 동 시대 지식인들의 면면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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