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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축제·전시·공연

하서와 고암 /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여름날의 목백일홍

 

 

선비 그리고 회화나무꽃

 

 

하서 김인후와 고암 양자징을 배향한 필암서원

오랜 기간의 공사 끝에 서원 앞에  들어선 유물전시관

 

 

 하서 초상


김인후(1510~1560)의 자는 후지(厚之)요, 호는 하서 혹은 담재이다. 본관은 울산.

1510년(중종 5)에 장성현 대맥동리(지금의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나

1560년(명종 15)에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부터 장성의 신동이요 천하 문장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크다가

18세 때에 기묘사화로 동복(지금의 전남 화순)에 귀양와 있던

신재 최산두(1483~ ?)를 찾아가 학문과 삶의 자세를 배운다.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4세 때에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 시절 인종을 가르치게 된다.

 

35세 때 인종은 중종을 이어서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갑작스럽게 승하한다.

하서는 인종의 승하를 계기로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장성을 돌아와 후학에 힘쓴다.


사후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과 옥과의 영귀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백련초해' 등이 있다.


하서 김인후는 소쇄처사 양산보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양씨가승집인 '소쇄원사실'의 기록에 따르면

"신재 최산두가 화순 동복 적벽에서 머물고 있을 때에

고향 장성에서 학문을 배우러 나아갔는데,

이때 하서는 반드시 소쇄원에서 쉬어갔다고한다.


또한 양산보와 도의지교를 맺어 자식들을 서로 혼인시켰는가 하면

소쇄원에 이르면 달이 넘도록 갈 것을 잊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산두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하서가 18세에 그를 만났다.

최산두가 살고 있는 동복에 가기 위해서는 소쇄원 인근을 통해 가야 했는데,

하서는 양산보를 잊지않고 반드시 소쇄원을 오며가며 들렸던 것이다.


결국 둘은 사돈 관계가 되어 도의와 우정을 과시하였다.

따라서 16세기 당시 소쇄원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은 주인인 양산보였겠지만,

소쇄원을 시로 표현하여 나타내 보여준 사람은 바로 하서 김인후였다.


소쇄원과 관련된 시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작품은 바로 '소쇄원 48영'이다.


 

 

당호는" 元眞閣 "

건물 앞에 내걸린 상량문

 

 

ㅁ자 형 내부

 

 

하서 김인후를 상징한다는 이름하여 "상징필"

 갈필로 보인다.

 

중종 26년(1531) 22세의 하서는 성균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31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중종 38년(1543)에 홍문관 박사(정7품) 겸 세자시강원(세자를

보도하는 직책) 설서(정7품)로 발탁, 인종과 사제의 연을 맺게된다.


경영검토관(왕에게 옳은 말과 글을 강론하는 직책)이 되어 중종에게

백성이 잘 살고 나라를 부강케하는 왕도정치를 할 것과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죽거나 귀향간 정암 조광조 등 어진 사람들을 용서하여 줄

것을 상소하고 조석으로 왕에게 강론하는 경연 석상에서 두 번이나

강력히 주청하였다.


기묘사화 후, 정치 사회적으로 누구도 말 하지 못했던 내용을 주청하니

중종은 크게 뉘우쳐 소학의 교육과 향악 보급을 허락하였으며

이어 인종 원년에는 기묘명현의 억울한 죄를 사 하고 모든 잘못된

폐습을 바로 잡게 된다.

 

 

 

선생의 서체

 

 

붓대는 옥으로 만들어졌고 벼루는 단계석이다

 

 

하서가 5세때 천자문을 이미 통달하고 지었다는 시

 

 

인종의 세자시절 세자시강원에서 글을 가르쳤던 하서 

너무나도 존경했던 스승 하서에게 묵죽도를 그려 하사했다는 인종

그 묵죽도가 필암서원에 소장되어있다.

 

그런 인종이었는데 즉위 아홉달만에 그만 숨을 거두게된다.

곧바로 낙향한 하서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한다.

 

인종이 서거한 7월 초하루가오면 어김없이 술병을 들고

근처 산에 올라 밤새도록 통음과 곡을 반복함을

평생 계속했다고.

 

 

책장과 앞닫이장

 

필암서원 서루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는 서장

(고종 년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고)

 

앞닫이는 1800년대 것으로 추정

 

 

 

 

선생의 유품

 

 

필암서원 집강안 (보물 제 587호)

 

1 책 19 장

 

 영조 28년에서 고종 24년간 필암서원의

소임을 맡아보았던 사람들의 명부

 

 

 

소쇄처사 양산보의 차남이자 하서의 사위요 제자였던 고암 양자징

48세가 되는 1570년까지소쇄원에서 줄곧 생활하면서

학구당 창건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소쇄원 내에 고암정사를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는데

현재는 건물은 사라지고 대숲으로 변해있음을

소쇄원도가 증언하고있다.

   

 

 

보불 제 587 - 13호 봉심록


인조 2년(1624)부터 숙종 27년(1701)까지

필암서원을 찾은 방문객들의 명단이다.

 

 

정조 20년, 1796년 10월 16일

선행의 시호를 文正으로 한다는 내용의 교지

 

 

시호를 문정으로 추증하고 정1품인

대광순후대부로 올린다는 내옹의 교지

 

 

정조 20년 1796년 9월 17일

이조판서에서 영의정으로 품계를 올려서 내린 교지

 

 

조선시대 서원의 교과서

 

 

축령산 숲길

 

 

 

나도 그들처럼      - 백무산 -

 

나는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비의 말을 새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측량이 되기 전에는

 

나는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석이 되기 전에는

 

나는 대지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동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계가 되기 전에는

 

이제 이들은 까닭없이 심오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측량된 다음 삶은 터무니없이

냔해해졌습니다

 

내가 계산되기 전엔 바람의 이웃이었습니다

내가 해석되기 전엔 물과 별의 동무였습니다

그들과 말 놓고 살았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소용돌이였습니다

 

[생명평화등불] 5~8월호. {통권 13호}에서 발췌

 

 

2008, 8, 12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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