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면사무소 앞에 피어난 샛노란 유채꽃에서,
농심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갔던 갑오년, 그 날의 함성을 떠올려본다.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 (소성면 보화리 )
보물 제 914호
소성면 보화리 속칭 부처댕이에 있는 2기의 백제 석불입상.
오른쪽 어깨에 법의를 걸치지 않고 맨살을 내놓은 모습을 ‘우견편단’이라고 하는데
신라통일 이전에는 금동불이나 마애불에 이같은 수법이 사용되었으나,
화강암의 완전한 입상석불에 사용된 것이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통일신라 후에 이 수법을 사용한 것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대표적이다.
2기의 불상 가운데 오른쪽 불상은 머리 위에 육계가 놓여 있고,
두 눈은 깊이 패여 있으며, 코는 떨어져 나갔다.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왼손은 부처의 대자대비 큰 덕을 표시하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다.
쪽 불상은 오른쪽 불상보다 키가 작으나 얼굴이 둥글고 넓은 편이다.
오른손은 팔꿈치로부터 손까지 떨어져 나갔으나 왼손은 역시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우불은 전체 높이 2.56m, 좌불은 전체높이 2.27m다.
2기의 불상은 원래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주민들이 하나를 옮겨와 나란히 세운 것이라 한다.
198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문화재 자료에서 -
용흥리 해정사지 석탑 (고부면 용흥리 )
전북유형문화재 제 96 호
본래는 5 층으로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을 거라 추정
용흥리 석불입상 (고부면 용흥리)
전북유형문화재 제 97 호
고려조의 조각 양식과 기법을 따르고 있다는데 마멸이 심하다.
눌제지 (고부면 관청리)
마한 시대에 축조, 김제의 벽골제, 익산의 황등제와 함께 삼호라 일�는데
호남, 호서 등의 명칭이 바로 여기서 유래했으며 제방의 효시이기도 하다.
실학의 원조, 유형원도 "반계수록"에서 이 삼제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고.
장문리 5 층 석탑 (고부면 장문리)
정읍시 장문리 양지마을 석우저수지 부근에 있는 이 석탑은 백제양식의 고려탑이다.
탑은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작풍(作風)이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과 서로 통하고
백제탑 양식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지방적 특색을 보이고 있다.
이중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1층 탑신은 높고,
2층 이상의 탑신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옥개석은 5단의 층급 받침이 조각되었으며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고
네 귀의 추녀 끝이 위로 약간 쳐들려 있어 날씬한 아름다움이 있다.
전체적으로 1층부터 5층까지 체감율이 작아서 밋밋한 감을 주고 있다.
탑의 높이는 6.5m인데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군자정 (고부면 고부리)
전북유형문화재 제 133 호
고부의 인물을 키워내기 위해 조성했다는 등, 여러 애기들이 전 한다.
연 방죽 가운데 정자를 짓고, 돌다리를 놓아 외부와 연결 시켜 놓았다.
고부면사무소 바로 앞에 위치하고 현재는 노인당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
토막난 각종 비 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동학혁명 모의탑 (고부면 주산마을)
1893년 11월 전봉준 외 20 여명이 모여 사발통문을 작성, 국정개혁,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 걸자 많은 이 들이 죽산에 집결하여 고부성을 점령하게 되었고 마치
들블처럼 농민군의 함성이 퍼져나갔노라,
교과서는 가르치고 있는데....
드넓은 벌에 우뚝 솟아, 격변의 근세사를 낱낱이 지켜봤을 두승산.
고부 향교
정읍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향교와 서원이 있다던가..
당연히 양반과 지주 계급도 많았다는 애기가 될 터.
고부 향교 앞에 펼쳐진 각종 비의 경연장.
두승산 유선사가 빤히 올려다 보이는 향교 마당에서...
드넓은 배들평야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가 있었던 장소,
그 자리에 세워진 "만석보유지비"
만석보유지비 건립에 관한 에피소드 한가지 말씀드리지요.
건립될 당시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3공화국 시절이었답니다.
관에서 하는 일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엔 공무원들이 매우 경직되고 윗사람 눈치보기에
급급했던 때였지요. 마침 중앙에서 국토 도로변 정비사업 지시가 내려와 만석보유지비 건립계획이
수립되었는데 관에서 담당 공무원들이 나와 그 정확한 위치를
당시 동학혁명기념사업회 임원이신 최현식 선생께 고증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사 당일 날 가보니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이 아닌 국도 변에 가깝게 자리하여
작업을 하고 있어 만석보가 실제 위치하고 있었던 장소에 세워야 그 의미가 살지 않겠냐고 설득하여
본래의 자리로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에서는 윗 분들이 쉽게 확인 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야
한다며 인부들을 닥달하여 다시 도로 쪽에 가깝게 옮겨 놓아 실갱이를 벌인 뒤 최현식 선생과
공무원들이 서로 몇 걸음씩 양보하자 하여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랍니다.
그 뒤로 1987년 어느 틈 엔지 모르게 '만석보 정화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때 널리 유행했던 단어 중 하나가 '정화'란 단어이지요.
사회정화니, 00정화위원회니 하면서 정작 '정화'의 대상자들이 ‘
정화’를 외치는 꼴이 되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만석보 정화기념비' 비문 끝에는 전라북도 도지사 김00라는 이름까지 새겨 놓아
현대판 선정비를 세워 놓은 짝이 되어 뜻(?)있는 많은 분들이 ‘정화’라는 글자와 도지사 이름에
돌로 마구 짓이겨놓아 흉물이 되었답니다. 하긴 엄밀히 따지자면 당시 농민군의 적이 되었던
전라감사 격인 전북도지사가 비를 세운 격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해전 지금은 정년 퇴직하신 이평 면장님을 뵙고 흉물이 된 이 비를 철거하자고 말씀을 드렸답니다.
동학농민혁명 사업에 의욕이 넘치셨던 면장님은 좋은 생각이라면서 그러나 그 자리를 대신 할 무언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어 제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만석보 터에 오면 이곳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곳인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조차 없으니 그 것으로 대신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밋밋한 표지판 대신
시인이자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양성우 씨가 쓴 ‘만석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가 그 어떤 설명문보다 더 와 닿는 내용이니까 그 시비를 대신 세웠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면장님은 당시(1999년 1월) 전라북도 도지사인 유00에게 철거 신청을 했으나
전임 도지사가 해 놓은 걸 후임자가 없애면 전례가 된다면 철거신청을 반려했답니다.
한편 의욕 넘치시는 면장님은 이미 석공을 시켜 ‘만석보’ 시비 제작 작업을 마친 상태인지라
이제는 마땅히 놓을 곳이 없게 되 버린 실정이라 어쩔 수 없이 현 위치에 놓이게 되었답니다.
- 인터넷신문 정읍통문에 실린 조광환님의 글에서 발췌 -
제방의 기다란 오석엔 양성우의 시 "만석보"가 새겨져 있다.
* * *
"들리는가, 친구여 갑오년 흰눈 쌓인 고부들판에 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만석보 허무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대 지금도, 그 새벽 동진강머리 짙은 안개 속에
푸른 죽창 불끈 쥐고 횃불 흔들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굽은 논둑길로,"
그때 그 아비들은 말하지 못했다. 어둠을 어둠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들은 것도 들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날 저문 남으 땅, 황토언덕 위에 눈물뿐인 오목가슴 주먹으로 치며 달을보고 울었다.
그때, 그 아비들, 가을걷이 끝난 허허벌판에 반벙어리 다 죽은 허수아비로 굶주려도
굶주림을 말하지 못하고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
*
*
전봉준선생 고택지 (이평면 장내리)
사적 제 293호
전봉준의 태생지에 관하여 이런 저런 애기들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고종 15년에 지어졌다는
이 곳, 근처가 태생지로 굳어져가는 추세라고..
말목장터와 감나무 (이평면 두지리)
전북기념물 제 110호
1894년 1 월 배들평야 농민들이 이 장소에 모여, 봉기의 필요성에 대한
전봉준 장군의사자후에 공감, 조병갑의 응징에 나섰던 유서깊은 장소
오랫만에 찾아왔더니 많이 바뀌어있었다.
내력인 즉....
2003년 8월 25일 오후 3시 30분경 태풍 매미에 의해 밑동이 부러져
지금은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자연재해만이 아니기에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이 지역 유지들이 나서서 감나무 바로 옆에 삼강오륜의 덕을 밝히는
삼오정(三五亭)이라는 정자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양반 중심의 계급사회를 타파하고자 일어섰던 고부농민봉기의 현장인
감나무 옆에는 양반 문화의 상징인 삼오정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에 따라
현재 위치인 이평 복지회관 앞으로 옮기면서 이름도 말목정으로 고쳤답니다.
그런데 처음 말목정을 세울 때 시멘트 기초공사를 한답시고
감나무로 가는 물길을 차단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줄기·가지가 썩어왔고 게다가 계속 복토를 하는 바람에 결국 밑동 부분이
습기가 차면서 썩어 말라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태풍까지 더해 결국은 갑오년 고부농민봉기를 지켜보았던 유일한 증인(?)이
사라져버리고 만것이지요.
현재 부러진 감나무는 황토현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하고 있답니다.
- 정읍통문에서 발췌 -
전봉준 장군 단소
녹두장군 전봉준의 위국단심을 기리고저 동학혁명 60 주년 (54, 11, 15)에 천안 전씨 문중에서 설단.
단소 주위의 비석에 새겨진 시 한편을 소개 해 본다
모래밭에 놀매 그 뜻이 한가롭고
흰 날개 가는 다리는 홀로이 청추롭다
소소한 찬 비 내릴 때 꿈 속에 잠기고
고기잡이 돌아간 후면 언덕에 오른다
허다한 수석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닌데
얼마나 풍상을 겪었던가 머리는 희계 되었도다
비록 번거로이 마시고 쪼으나 분수를 알지니
강호의 물고기들이여 깊이 근심치 말지어다.
출처 : 동학사 1938년 오지영 저
군수 안후길수 만석보 혁파 선정비 (이평면 예동마을)
1898년(고종 광무 2년) 고부 군수였던 안길수가 만석보(신보)를 철거하니
농민들의 원성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를 칭송하는 선정비를 세우게 되었다고.
조경단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전북기념물 제 3 호, 전주 이씨 시조 '이 한'의 묘역
@ @ @
먼저, 녹두장군 전봉준 선생의 절명시부터 떠 올려보자.
時來天地皆同力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치더니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매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길이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고 의를 세움에 나 또한 잘못이 없건마는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한 붉은 마음을 누가 알까
정읍 땅에 들어서 갑오년, 그날의 함성을 되새겨보고,
내친김에, 위로 거슬러 올라 조선왕조를 탄생시켰다는 이씨 왕조의 시조묘를 찾았다.
오랑케를 정벌하라는 임무를 거부하고 역모와 반란이 분명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고려 왕조를 마감시키고 조선을 건국했으나 결국은 자기 아들의 반란으로 함흥땅이라.
어찌됐건 이후, 오백년이라는 사직을 이어왔으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라 했던가,,..?
일천팔백년대에 들어선 조선의 정치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폭압과 수탈이 횡행하고 있었다.
봉건질서는 와해 되어가고 실학이 태동하는 격변이 시작되었으니, 이는 왕조의 몰락이
확실하게 예견되는 시나리오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고 보는 게 적절한 시각이리라.
굳이, 동서고금의 사례를 통하지 않더라도, 절대 권력은 부폐 할 수 밖에 없었고,
독재는 또 다른 독재로 이어져, 결국은 기층민들의 고혈만 짜 내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반란에 빌붙어 영화를 누려왔던 자 들이 아직도 갖은 감언이설로 만중들을 현혹시켜가며
정치 생명을 이어가려 몸부림치는 한심한 모습이 눈만 뜨면 우리 앞에 장사진을 치고있다.
수탈과 분노는 비단 갑오년에만 있었을까?
시대는 바뀌었으되 여전한 현재진행형임에 틀림없을 터.
고부 들녁에 울려 퍼졌던 농민 봉기의 우렁찬 함성을 따라 이곳 저곳을 종횡무진했던 오늘의 여정.
성난 농민군의 함성은 작금에도 여전히 유효 해야 할 것이며
날이 갈수록 되려 선명하게 부각되어야만 하리라
'자연 > 산행·여행·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바다에 우뚝 솟은 사량도 지리망산 (0) | 2008.04.13 |
---|---|
식생植生)의 보고(寶庫) - 금오도 대부산 (0) | 2008.04.07 |
역사의 파도가 넘실대는 용암산 (0) | 2008.03.30 |
2008 전북 에베레스트 원정 발대식 (0) | 2008.03.28 |
구절산 - 철마산 (0) | 2008.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