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후둑 후둑 떨어지는 죽수서원 입구
말 대신 차에서 내리니, 하마비와 나란히 놓여진 신발 한 켤레가 보인다.
이 괴이하기만한 풍경에다 도대체 어떤 해석을 내려야 한단 말인가...?
백 날을 피어난다는 배롱나무는 서원의 필수목이라...
죽수서원 - 오소후 -
천둥의 신 라마수 태풍이 부는 날
초록비가 대숲을 흔들다 못 해 잔가지를 분지르고 있었다
하마비 앞에 검은 프린스를 매놓고
죽수서원을 오른다 빗물에 번질거리는 돌계단을 뒷발로 차며
궁금하다 오랫동안 찾던 사람 그런 사람
산 채로 집어 삼킬 노도에도 우정을 간직한 사람
친구의 시체 거두고 풍지박산난 학포 집안
태풍부는 오늘 같았으리
오 백년 전의 사람이면 어떠한가
학포 양팽손과 정암 조광조 사이 그런 사이
단 하나의 목숨을 죽은 친구에게 바친 사람
된바람도 아랑곳없이 누군가를 위해 내 목슴 내놓을 수 있을까
그럴만한 사람 의중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숲이 허공을 쓸며 휘이며 자꾸만 물어온다
저만큼 시냇물도 목놓아 운다 그날을 떠올리는가
바람아 불어라 고독한 사내의 혼을 위로하고 싶구나
하늘도 땅도 울고 나무도 내숲도 우는 오늘
꿈결엔듯 한 사내의 뜨거운 마음이 까닭없이 흘러든다
조광조와 양팽손을 배향하고있는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30호 화순군 능주면 소재 竹樹서원
선조 3년 1570년에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세우고 죽수(竹樹)라는 사액을 받음
서원 내 담장가에 서 있는 정암과 학포의 추모비
나란히 사마시에 응시하여 정암 조광조는 진사시에, 학포 양팽손은 생원시에 장원급제 했었다.
관직 생활도 정암이 앞서가면 학포가 그 뒤를 따르는 그야말로 각별한 사이였는데 끝내는 이렇게
하나의 비석에까지 나란히 새겨지게 되었구나....
1515년 중종이 친히 성균관에 납시어 치르게 된 이른바 '알성시'
"공자의 3년 정국구상을 논하라"는 시제에 '춘부'라 적은 담안지를 내놓아 장원급제를 한 정암.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 됨이 하나입니다.
하여,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고로, 임금과 백성은 하나입니다. 상고하건데
이상적인 군주는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공자를 단칼에 궤뚫어버린 정암의 논지에 중종이 시쳇말로 뻑 가버린 것이다.
그런 정암이었는데 그 후로 불과 4년 만에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게된 것이다.
겹백매와 겹홍매가 한 가지에 나란히 피어난 희귀한 모습의 竹樹梅
마치 정암과 학포의 우정이 겹쳐 피어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향기로운 매향 속에서 문득, 정암의 절명시가 떠오른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성리학에다 도학, 그리고 각종 경전에 이르기까지 완벽함으로 똘똘 뭉쳐진 정암
그 승승장구하던 신진사류를 단칼에 제거 시켜 버린 훈구세력의 칼날.
허지만,
저 아름다운 매화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아마도 정암은
설마, 설마
주상이 다시 불러주겠지 라고 생각 하지는 않았을까?
제대로 된 古梅, 그것도 혿꽃이 아닌 겹꽃으로 白과 紅이 혼재된 매화
이런 감동을 도대체 몇 년 만에 맛 보게 되는가....?
뻑뻑하지 않고 듬성듬성 피어난 겹매의 모습이 어찌나 청초하던지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매화에 심취한 분이라면 지금 당장 죽수서원으로 달려가시길...
정암이 부르짓던 '하늘의 도리'가 영벽정과 연주산사이의 지석강에 유장하게 흐르고...
영벽정을 중건하고 현판을 썼다는 한치조의 "영세불망비"
나무기둥이 엄청난 화강암 기둥으로, 강변은 콘크리트 호안으로....
그 옛날, 벗과 함께 술병을 들고 달밤에 찾아들던 정취를 다시 느껴볼 수 있을런지...?
'영벽정의 봄놀이' 와 '연주산의 풀피리'는 능주팔경 중 2경 이라고.
이양의 고치재를 출발 청풍과 능주를 지나 남평과 금천을 거쳐
영산강 본류에 합류하는 일백삼십리 지석강,
저 푸른 물 속엔 천연기념물 수달이 서식한다고.
"영벽정 중수운(重修韻)을 한 번 따라 읇어보자면..
산빛과 잠긴 물이 층난(層欄)에 비치니
강쾌한 기운 황연히 노반(露盤)을 받음 같구려
남국에 연운(煙雲)은 기관(奇觀)을 이룬 것이요
서호에 보인 경물을 붓으로 그렸어라
병을 던진 그날에 활기운이 장하고
술을 들고 바람 임하니 술맛이 너그러워라
현판에 시문은 옛적 그대로 있는가
선적을 추모하니 배나 기쁘도다
현대의 문명을 상징하는 철마가 굴을 뚫고 나와 지석강을 건너는 모습
영벽정의 분위기완 영 언밸런스 한 것 같으면서도 어찌보면 또 그럴 듯하기도 하고.
그나 저나, 그 옛날의 시인 묵객들이 지금의 풍경을 본다면 뭐라 읊었을까....?
하늘의 道는 鐵馬였다네....??
황룡이 하늘을 날고
청룡이 여의주를 찾는 도리 와 연꽃 문양의 천정 감상
亭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거창한 팔작지붕의 영벽정
저 아름다운 정자에 난데없이 내 걸린 플레카드가
눈에 거슬려 하는수 없이 건물을 잘라 담을 수 밖에..
죽수절제아문
옛 능성현(능주)의 동헌 녹의당의 정문으로 능주면사무소에 있다.
죽수, 죽수부리 등은 옛 능성현의 별칭인데, 능주에는 유달리 봉황이나 대나무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봉서루
봉서루에서의 달 감상(鳳棲翫月)을 능주 8경 중 으뜸으로 쳤다고....
일제 때 철거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능주면사무소 내에 복원 해 놓았다.
대나무를 먹고 살았다는 봉황.
그 대나무를 자신들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의 선비..?!
정암이 사사 당했던 곳에 복원한 애우당과 초가적려지를 찾아서
서른셋의 조광조가 장원급제를 할 때 썼다는 춘부(春賦)의 한 구절을 다시 떠올려 본다.
샘물이 흘러서 끝까지 가려고 함이여
흙탕물이 섞이어 맑을 수가 없도다
위로는 하늘의 밝은 명을 더럽힘이여
아래로는 사람으 윤리와 기강이 게으르도다
즐거이 아래로 흐르면서 깨닫지 못 함이여
수 많은 악이 쌓이는 바로다.
정암 조광조 유허비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전서는 민유중이 글씨는 송준길이썼으며
현종 8년 4월 능주 목사였던 민여로가 건립했다고.
@@@
때는,호시절이라 일컫는 봄.
조광조가 장원급제했던 과거의 시제가 '봄을노래함'이었다.
'천지명령'(天之明命)
하늘의 밝은 뜻이 지상에 구현되려면 도덕의 완성이 전제되어야 함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천인무간(天人無間)이요 천리불리인사(天理不離人事)라....
하늘과 사람이 다르지않고 간격이 없어야 한다는 개혁의 기치를 내 걸고
조선의 혁신과 이상세계의 구현을 위해 발버둥 쳤던 사상가 정암 조광조
그리도 핍진하게 춘부를 설파했떤 정암의 외침은
사후, 수 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영벽정 앞 지석강 푸른 강물에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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