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6 15:09
미추왕릉이 자리한 대릉원 안쪽에서 바라본 석양
저 앞에 보이는 문을 나서면 집안 제실로 통 하고 굳이 입장료까지 내면서 대릉원에 들어올 필요가 없었는데.....
이미 어둑해지는 대릉원 , 미추왕릉과 천마총에 이르는 솔숲 길을 따라 들어갑니다
경주엔 유독 철모르는 꽃들이 많이 피어나 있었습니다.
대릉원 길 건너 고분군의 해넘이
대릉원 내부에도 짙은 어둠이 찾아옵니다.
첨성대의 야경 |
첨성대 앞 쪽의 고분군 |
괘릉 사적 제26호 |
‘원성왕릉’으로 추정한다지만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경주에 산재한 여러 능 중에서도 가장 분위기가 짜임새 있고
볼거리가 많다고 해도 절대 빈 말이 아니리는 생각이다.
울창한 송림을 헤치며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소나무 그림자가 이리 저리로 검은 선을
그리며 능을 호위하고 있는 형국은 마치 궁녀들의 춤을 연상케 해 주었다
.
괘릉’의 트레이드마크라 여겨지는 서역인 석상의 불끈 쥔 주먹엔 한층 더 힘이 있어 보이고
곱슬머리와 수염은 풍성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그 당시에 이미 서역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확실한 징표가 아닐까?
다부진 인상입니다.
문신석과 무신석의 기막힌 역할 분담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의 전경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습니다.
봉분의 아래쪽엔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을 둘렀고 많은 돌기둥으로 난간을 둘렀다. |
문인석의 옷주름에서 그 시대의 빠숑을 읽어내는 재미도... |
너무나 재미있는 돌사자의 시선 처리
‘괘릉’을 지키는 네 마리의 돌사자는 각자 재미있는 표정으로 각각 자기가 지키는 구역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
모두가 해학적이요 개성 만점입니다.
신라 최고의 명장 김유신의 묘 (사적 제21호) ‘김춘추’와 더불어 중대 신라를 열었고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과 돌난간으로 둘러 싸여 장중함과 위엄을 더 하는 모습 속에, 뜯어진 옷고름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김춘추’와 ‘김유신’이 사돈간이 되었다는 고사를 떠올려 보며 분위기를 잡고 있었는데 난데없는 동네 저녁 운동 꾼들이 나타나 무덤 주위를 도는 바람에 ‘김유신’과의 담화에 그만 심대한 지장을 받고 말았다. |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나지막한 낭산에 오를라치면 울울창창한 송림이 마치 바람을 따라 춤을 추는 형국 속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초석을 닦았다는 ‘진평왕’의 큰 딸 ‘선덕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능’ 자체는 대충 훑어보고 ‘낭산’의 솔숲을 한참이나 걸으며 분위기를 느끼고 있을 때, 오늘의 안내자로 나선 울산의 류재원 선생께서 들려주시는 ‘황당 비사’ 직장에 근무하는 동료 한 분이 바로 이 낭산 아래가 집이라고 해서 ‘선덕여왕릉’에 대해 이것 저 것 물었단다. “저요?” “아직 한번도 낭산의 선덕왕릉에 가 본적이 없는데요”......@#$%^&*** 이 곳 ‘선덕여왕릉’에서도 어김없이 동네 운동꾼 여인네들을 만날 수 있었다. 소나무를 끌어안고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겠다고 몸부림을 쳐 대고 있는 품새를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여걸 ‘선덕여왕’ 후손의 모습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진평왕릉 (사적 제180호) 신라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랜 세월, 장장 53년간이나 재위하면서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진평왕과 그에 얽힌 애기들은 너무나 많이 구전된다. 그리 크지 않은 자연석 하나가 박혀있는 소박한 무덤이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내로라하는 답사 전문가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을 만큼의 마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
저렇게 반들반들 길이 나 있는데 올라가지 말라고? 궁금해서 살 수가 있나.. |
하여, 실례를 무릎쓰고 봉분에 올라보니.... 자신의 딸인 선덕여왕이 누워있는 낭산이 지척이고 더 멀리로는 경주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오던뎁쇼 ! |
삼릉
삼릉계곡이 시작되는 입구 언저리에 자리한 이 세 봉분은
신라 박씨왕의 마지막 왕인 제8대 아달아왕, 신덕왕, 경명왕릉으로 알려져 있는데
들리는 애기로는 아직까지도 여러 성받이들이 서로 자기 선조의 무덤이라 주장하고 있다고.
서악리 귀부 (보물 제70호) 김인문의 묘 앞에 비신과 이수가 없이 귀부만 남아있는데 아마 김인문의 비가 세워져 있었을 거라는 추정을 해 볼 뿐이라고. |
김인문의 묘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삼국통일 시기
당나라와의 화평교섭에 지대한 활약을 했으며 아버지 무열왕릉 비문도 직접 쓴 인물.
다른 하나의 묘는 무열왕의 9대손 김양의 묘로 알려져 있다.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제25호) 비신은 없어졌고 이수와 귀부만 남은 모습이다. 크기로나 조각 솜씨로나 국내의 여러 귀부와 이수 중에서 가장 크고 뛰어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오래 보고 있으려니 금방이라도 힘차게 기어갈 듯한 느낌이 강하게 오는 것이 여간 생동감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신라 예술의 진수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리라. |
여섯 마리 용이 꿈틀대며 여의주를 탐하는 조각 한 가운데 ‘태종무열대왕지비’라 새겨져 있는데 이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썼다고 한다 |
무열왕릉 (사적 제20호) 사돈지간인 김유신과 함께 중대 신라 왕실을 실질적으로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김춘추. 선도산 아래 자리한 왕릉에 들어서면 무열왕의 그 큰 기세에 걸맞게 낙낙장송의 도열이 가히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보여준다. 무식한 내 눈에도 산세의 비범함과 명당의 교과서가 이런 것임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이니 더 물어서 무어하랴. 간간히 호석이 묻혀있는 모습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정연한 질서 같은 게 느낌으로 전해 온다고 해야 할까.....? |
무열왕릉에 걸맞는 소나무 배열
왕릉 옆에선 세월이 낚이고.....
서악리 고분군 (사적 제142호) 무열왕릉 뒤로 네 기의 능이 줄지어있는 모습인데 아마도 무열왕의 선조 묘가 아닐까 추정한다고, |
최고의 명당에 한번 앉아본 소감이 어떠십니까? |
절로 춤이 나온다굽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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