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5cm, 국보 310호, 남화진 소장
오늘날 백자는 조선시대 공예를 대표하는 미술품으로 상찬받고 있지만 이를 제작한 사기장의 삶을
증언하는 기록은 아주 귀하다. 그런 중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1677~1724)의 《두타초頭陀草》에는
그가 분원에 20여 일간 머물며 사기장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읊은 여덟 수의 시가 있어 분원의 분위기와
여기서 일하는 사기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하곤은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등과 깊은 교유를
나누고 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높은 견식을 갖고 있던 당대의 안목이었다.
이하곤은 1709년(숙종 35) 문중에서 필요로 하는 묘지를 굽기 위하여, 이른바
묘지사번墓誌私燔으로 분원에 와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분원을 읊은 시의 제목을
"분원에서 20여 일 머물며 무료한 중에 두보의 시 기주가 형식을 따르며 우리말도 섞어 장난삼아
절구를 짓다[住分院二十餘日 無聊中效杜子美夔州歌體 雜用俚語 戱成絶句]"라고 하였다.
窰人居在此山隈。長役官門亦苦哉。自道前年踰嶺去。晉州白土載舡來。
사기장들은 산모롱이에 사는데 / 오랜 부역에 모두 괴롭다고 하네
길 따라 지난해 넘었던 고개에 이르니 / 진주 백토를 배에 실어 왔다고 하네
宣川土色白如雪。御器燔成此第一。監司奏罷蠲民役。進上年年多退物。
선천의 백토 색깔은 눈처럼 희어 / 어기 번조에 제일이라네
관찰사가 글을 올려 백성들의 부역은 줄였지만 / 해마다 퇴짜 맞는 진상품 그릇이 많다네
御供器皿三十種。本院人情四百駄。精粗色㨾不須論。直是無錢便罪過
여기로 진상할 그릇은 30종이고 / 사옹원에 바칠 양은 400바리나 된다네
정밀하고 거친 것, 색이나 모양을 논하지 말게나 / 다만 살 돈이 없음이 죄일 뿐이라네
回靑一字惜如銀。種種描成着色均。前歲龍樽供 大內。內司綿布賞工人。
회청 한 글자 한 글자를 은처럼 아껴 / 갖가지 모양으로 그려내니 색깔이 고르다네
지난해 궁궐에 용준을 만들어 바치니 / 내수사에서 면포를 사기장에게 상으로 주었다네
七十老翁身姓朴。就中稱爲善手匠。蟾蜍硯滴最奇品。八面唐壺眞好㨾。
칠십 노인 성은 박씨인데 / 사기장 중에서도 솜씨 좋은 장인으로 불린다네
그가 빚은 두꺼비 모양 연적은 가장 진기한 물품이고 / 팔면 중국풍 항아리는 정말 보기 좋구나
백자청화초화무늬각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24.7cm,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백자청화홍성민묘지와 합, 1710년, 묘지 높이 19.5cm, 해강도자미술관 소장
백자철화국화무늬항아리, 17세기 후반, 높이 15.5cm, 개인 소장
분원이 금사리로 옮겨온 이후 조선백자의 질은 획기적으로 좋아졌다.
이는 백자 제작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 공급이 원할해지면서 안정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고, 여기에 영조의 각별한 지원도 한몫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16세 때인 1709년(숙종 35)부터 1718년(숙종 44)까지 무려 9년간
사옹원의 도제거都提擧를 맡았다. 이때 영조가 사옹원 관리에게 밑그림을 그려주며 작은
항아리로 구워오라고 지시한 사실이 김시민金時敏(1681~1747)의 《동포집東圃集》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작은 그림 다섯 점은 우리 임금님(영조)이 왕이 되기 전, 잠저에 계실 적에 사옹원 (도)제거로
있으면서 그리신 것이다. 어떤 서리가 번조소燔造所(분원)로 간다고 알리자 문득 앉은 자리에서
유지油紙를 꺼내어 손바닥만 하게 여섯 조각으로 잘라 수묵으로 잠깐 사이에 그리신 것이다.
산수가 둘, 난초가 하나, 국화가 하나, 매화가 둘이다. 그리고 서리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이 그림
을 가지고 가서 작은 항아리로 구워오너라"라고 하시었고 서리는 하교대로 작은 항아리를 바쳤다고
한다. 이것은 그 그림을 번조소에서 얻은 것으로 내가 예전에 정성을 다해 다섯 폭을 구한 것이니
빠진 것은 매화 한 폭뿐이다. ··· 갑진년(1724) 10월. 김시민이 삼가 쓰다.
영조가 그린 이 밑그림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지만 금사리 가마 청화백자에 나타나는
난초, 국화, 매화무늬들을 상상할 때 위 <백자철화국화무늬항아리>와 같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좌) 영조사마도, 1770년, 비단에 담채, 140.0×88.2cm, 국립중앙도서관
우) 백자철화 '진상다병' 명병, 18세기 전반, 높이 39.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건희 기증품)
그 후 영조는 임금에 오르고 한참이 지난 1770년(영조 46), 자신이 사옹원 도제거에 임명된 때로부터
61년이 되었다며 사옹원에 행차했다. 이때의 일이 《승정원일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영조는 붓을
들어 오랜만에 사옹원을 찾은 소감을 쓴 다음 도제조, 제조, 부제조 등 사옹원 고위직 3명에게 말을 하
사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날의 일을 기록화로 그린 <영조사마도>가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조가 굳이 말을 하사한 이유는 그가 1710년(숙종 36) 사옹원에 근무할 때 잔치를 준비한 공로
로 숙종에게 말을 하사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진영, <영조사마도> 《문헌과 해석》 48호)
또 영조는 사옹원의 관리들이 백자를 가로채서 매매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백자 병에 철화 안료로
"진상다병進上茶甁"이라 쓰도록 하였다,(《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10월 21일자). 영조 대에 분원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재정 지원을 후하게 하라는 영조의 관심과 지원이 있었던 것이다.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53.3cm, 국보 107호,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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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백자철화포도원숭이무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30.8cm, 국보 93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백자청화초화무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29.4cm, 오사카시립동양미술관 소장
금사리 가마에서는 청화백자가 다시 본격적으로 부활하였다.
특히 금사리 가마의 청화백자는 맑은 청화로 청초한 난초나 운치 있는 대나무, 또는 조촐한 초화무늬가
담백하게 그려져 있어 선비문화의 문기文氣를 느끼게 해준다. 때문에 금사리 가마 청화백자의 문기 있는
아름다움은 검소함을 덕목으로 삼은 좃선 선비문화의 미학과 정서를 가장 잘 번영한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백자철화시명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36.8cm, 오사카시립동양미술관 소장
백자청화보상화넝쿨무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9cm, 개인 소장
좌) 백자청화초화죽무늬각병, 18세기 전반, 높이 27.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박병래 기증품)
우) 백자청화대나무무늬각병, 18세기 전반, 높이41cm, 국보 25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건희 기증품)
좌) 백자청화시명각병, 18세기 전반, 높이 26.1cm, 개인 소장
우) 백자청화초화무늬필통, 18세기 후반, 높이 16cm, 보물 1059호, 개인 소장
백자각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21.9cm,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백자심각제기, 8세기 전반, 높이 9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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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백자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52.8cm, 보물 2064호, 부산박물관 소장(현수명 기증품)
우) 백자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56cm, 개인 소장
백자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4cm, 국보 309호, 개인 소장
좌) 백자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9cm, 국보 262호, 우학문화재단 소장
우) 백자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보물 143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좌) 백자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7cm, 개인 소장
우) 백자 '연령군겻쥬방' 명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38cm, 개인 소장
좌) 백자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5cm,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우) 백자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7cm, 영국 영국박물관 소장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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