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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EDVARD MUNCH <1편>

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

이리스 뮐러 베스테르만 著 · 홍주연 易

 

 

1944년 뭉크는 사망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모든 작품을 오슬로 시에 기증했고,

이 기증품들로 1963년 뭉크미술관이 설립되었다.

 

<생클루의 밤>, 1890년

캔버스에 유채, 64.5×54cn, 오슬로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르네상스 이후 거의 모든 화가가 자화상을 그렸다.

하지만 에드바르 뭉크만큼 집요하게 자신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던 화가는 많지 않으며,

그만큼 자화상을 통해 무자비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냈던 화가도 드믈다.

1980년대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70점이 넘는 회화와 20여 점의 판화,

100여 점의 수채화와 드로잉과 습작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기록했다.

 

이 작업은 매년, 때로는 매달, 심지어 매일 이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자기 분석에의 꾸준한 관심으로 뭉크는 렘브란트붜 고야, 반 고흐, 고갱에 이르는 화가들,

의심하고 질문하고 예언했던 위대한 자화상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머리말 중에서)

 

<자화상>, 1882년

마분지에 유채, 26.2×19.3cm

뭉크가 1880년대에 완성한 소형 자화상 세 점은 그가 평생 그리게 될 수많은 자화상의 시작이었다.

이 그림들은 뭉크의 예술적 발달에서 최초의 중요한 단계이며, 내면 성찰의 측면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보여준다. 1882년 초 열여덟 살에 그린 첫 번째 자화상이다.

 

<자화상>, 1882 - 83년, 캔버스에 유채

44×35.5cm, 시립미술관, 노르웨이

두 번째 자화상은 자연주의 양식으로 그려졌다. 여기에는 1880년대에 이미 노르웨이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던 프랑스 화가들의 '혁명적'인 예술관이 담겨 있다.

 

<자화상>, 1886년

켄버스에 유채, 33×24.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1880년대에 그린 세 번째 자화상이자 뭉크가 처음으로 서명을 남긴 1886년의 소형 자화상은

이전보다 세부 묘사에 신경을 덜 썼고, 화가가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 얼굴은

가상의 광원을 동원해 집중적으로 밝히고 있다.

 

左 <병든 아이>, 1885 - 86

캔버스에 유채, 119.5×118.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병든 아이>에서 나는 새로운 방향을 잡았다. 그것은 내 예술의 전환점이었다.

이후에 했던 작업들의 대부분은 그 그림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그림은 일찍 세상을 떠난 누나 소피에의 기억을 주제로 한 것이다.

소피에는 1877년 열다섯 살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右 <검은 옷을 입은 잉에르>, 1884

캔버스에 유채, 97×67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여동생의 초상화이다.

 

<살로메-패러플이즈>, 1894 - 98년

종이에 수채, 먹물, 연필, 46×32.6cm

 

<환상>은 뭉크에게 매우 의미가 큰 작품이었음이 분명한데, 1892년에서 1898년

사이 있었던 모든 중요한 전시에 이 작품을 내놓았던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뭉크는 덴마크인 친구이자 동료 화가인 요한 로데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쓴다.

 

나는 회화 연작을 준비 중이네. 클레이스 갤러리에 있는 내 그림 몇 장이 포함될 걸세.

해변에 있는 남녀라든가 붉은 하늘, 백조를 그린 그림인데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꺼번에 전시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거야.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지.

 

백조가 자연주의를 구현한 것이라면, 수면에서 멀어져가는

남자의 머리는 화가인 뭉크 자신을 의미한다.

 

<소녀와 죽음>, 1893년

켄버스에 템페라, 129×86cm

이 그림에서 여성은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존재로, 해골로 나타난 남성과

대조를 이룬다. 벌거벗은 소녀는 죽음의 공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천진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해골을 포옹하고 있다.

 

<여자 가면 아래의 자화상> 1893년

목판에 카세인 템페라, 70×44.5cm

이 자화상에서 화가는 감정이 없는 얼굴로 등장한다.

그의 머리 위에는 위쪽이 잘린 여자 가면이 마치 '다모클레스의 칼' 처럼 위협적으로 매달려 있다.

어둡고 강렬한 붉은색으로 덧칠한 배경과 화가의 사색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시선은 뚜렷한

대조를 룬다. 커다랗고 붉은 입과 검고 두터운 선으로 그려진 눈,

붉게 칠해진 볼은섹슈얼리티의 상징처럼 보인다.

 

<남자의 뇌 속>, 1897년

적색 목판화, 37.1×57cm

 

<소녀와 심장/헤어짐/살로메-패러프레이즈> 1895 - 96년경

종이에 수채, 먹물, 연필, 25×59cm

 

<흡혈귀>, 1894년

캔버스에 유채, 91×109cm

 

<팔뼈가 있는 자화상>, 1895년

석판화, 45.5×31.5cm

유화가 아닌 뭉크의 자화상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자주 전시되는 작품이다.

이 자화상은 죽은자들을 위한 묘비명을 연상시킨다. 팔뼈가 삶과 죽음의 덧없는

속성을 나타낸다면, 그 위에 매달려 있는 머리는 예술작품에 나타나는 불멸의

사상을 상징한다. 그 사상은 화가가 죽은 뒤에도 기억을 보존한다.

 

左 <팔뼈가 있는 자화상>, 1895년, 석판화 시험 인쇄본, 46×32cm

<팔뼈가 있는 자화상>의 초기 버전을 보면 뭉크가 처음에는

몸과 배경을 완전히 새카맣게 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中 펠릭스 발로통, <도스트예프스키 초상>, 1895년, 목판화, 16×12cm

도스토예프스키를 굉장히 존경했던 뭉크가 발로통의 목판화에서 영향을 받아,

자화상을 제작하면서 검은 배경에 머리와 팔뼈와 글이 새겨진 패널만

두드러지게 처리했을 가능성이 있다.

 

右 <팔뼈와 함께 있는 스타니슬라프 프지비셰프스키>, 1893-94년, 켐버스에 템페라, 75.5×60cm

이 주제에 관해서 뭉크는 친구인 폴란드 화가 스타니슬라프 프지비셰프스키의

미완성 초상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이것은 뭉크가 팔뼈를 등장시킨 더 이전의 작품이다.

 

<해변의 두 여인>, 1893년

목판에 카세인, 64×43cm

<여자 가면 아래의 자화상>을 완성한 직후 뭉크는 <해변의 두 여인>에서

백조와 여자 가면이 각각 상징하는 두 유형의 여성을 한 그림 안에 담으려고 시도했다.

 

<적과 백>, 1894년

켄버스에 유채, 93.5×129.5cm

백조와 여자 가면으로 상징되는 두 유형의 여성을 연결시키려 했음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는 여성은 섹슈얼리티의 상징으로 가면 같은 얼굴 대신 밝은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반면 백조는 흰 옷을 입고 긴 금발을 늘어뜨린 채 바다를 응시하는 여성으로 바뀌었다.

 

<여자 Ⅱ> 1895년

동판에 애쿼틴트와 드라이포인트, 28.7×33.5cm

 

<절망>, 1892년

캔버스에 유채, 70×44.5cm, 티엘스카 갤러리, 스웨덴 스톡홀름

그림 속 공간이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은

불안으로 가득한 인물의 심리상태를 반영한다.

<담배를 든 자화상>, 1895년

캔버스에 유채, 110.5×85.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뭉크의 손은 머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는 부분적으로는 피부색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머리 쪽으로 피어오르는

연기 기둥에 의해 강조된다. 연기는 머리와 손 사이 상호 협력의 상징이다.

손과 머리는 덧없고 막연해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화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다그니 유엘 프지비셰프스카>, 1893년

캔버스에 유채, 148.5×99.5cm

주위를 감싼 공간 속에서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머리만이 도드라진 그녀는 마치

아득하고 닿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존재처럼 보인다.

 

左 <담배를 사랑하는 매력적인 여인>

《바이킹들》1895년 10월 12일자에 실린 뭉크 전시회에 관한 케리커처.

右 <마돈나>, 1895/1902년, 다색 석판화, 60.5×44.4cm

 

<마돈나>, 1894 - 95년

캔버스에 유채, 90.5×70.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입센 초상>, 1896 - 97년

켄버스에 유채, 70×96cm, 개인 소장

 

 

左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프로그램 1896년, 석판화, 21×32cm

右 <페르 귄트> 프로그램 1896년, 석판화, 24.6×31.7cm

 

<소녀와 심장>, 1896년경

종이에 먹물, 50×64.5cm

뭉크는 예술과 심장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

 

<수금을 든 자화상>, 1896 - 97년

종이에 구아슈와 연필, 68.8×53cm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영웅처럼 보이는 화가의 벗은 상체가 핏빛 프레임에 둘러싸여 있다.

 

<이별>, 1896년경

판지에 유채, 97×128cm

 

<이별>, 1896년경

석판화에 채색, 48.8×58.5cm

 

<고통의 꽃>, 1898년, 목판화, 46×32.5cm

 

左 <고통의 꽃, 해바라기 모티프>, 1904 - 06년, 캔버스에 유채

右 <고통의 꽃>, 1898년, 잡지 《퀵본》 표지를 위한 스케치, 종이에 수채, 먹물, 색연필, 연필, 50×32.8cm

 

에드바르 뭉크와 툴라 라르센 1899년

 

<생의 춤>, 1899 - 1900년

캔버스에 유채, 125.5×190.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스칸디나비아의 짧은 여름밤을 비추는 보름달 아래에서 환한 밤의 에로틱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떠들썩하게 춤을 추고 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누고 있다. 반면 뭉크는 마비라도 된 듯이 굳어 있다.

초기 모티프들에 비해 형태를 철저하게 단순화시키고 굴곡진 윤곽선을

통해 하나의 넓은 표면으로 합침으로서 장식 효과를 높이고 있다.

 

<눈 속의 눈>. 1894년, 캔버스에 유채, 136×110cm

남녀간의 끌림을 표현한 이 작품속에 솟은 나무는 '인류의 타락'을 나타내는 도상으로,

현대의 아담과 이브를 결합시키는 석악과나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구도에서는 각각

그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를 분리시키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매혹 Ⅱ>,1896년, 석판화, 39.5×62.5cm

 

 

<빈 십자가>, 1899 - 1901년

종이에 먹물과 수채, 43.1×62.7cm

<빈 십자가>, 1899 - 1901년

종이에 잉크, 먹물, 수채, 45.2×49.9cm

 

<크리스티아니아-보헤미아 Ⅱ>, 1895년

종이에 먹물, 수채, 연필, 25×41.5cm

 

上 <제임스 앙소르, <자화상, 갈보리 언덕> 1886년

종이에 색연필, 17.2×22.2cm, 로니 판 데 페더 갤러리, 네덜란드 안트베르펜

下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89-90년

캔버스에 유채, 38×46cm,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파리

 

<골고다>, 1900년

캔버스에 유채, 80×120cm

<골고다>를 통해 뭉크는 앙소르나 폴 고갱과 같은 세기 전환기의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골고다>에서 뭉크는 사회에서 예술가가 갖는 사명과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 도상에 대한 주관적인 재해석을 통해 경제와 기술의 발전이 사회와 윤리의

방향을 바꿔놓고 있는 급진적 변화의 시대에 개인과 사회 간의 갈등을 고찰했다.

20세기 초, 세기의 전환기에 예술가 뭉크는 국외자로서의 자신뿐 아니라

더 넓은 시각에서 사회로부터 소외된 개인을 묘사한 것이다.

 

<수술대 위에서>

1902년부터 1908년까지 뭉크는 그토록 원하던 예술적 약진을 이뤘지만 동시에 정신적 위기를 맞이했다.

이 위기는 1908년 절정에 달해 결국 9월 말 뭉크는 신경쇠약에 이른다. 1998년부터 1902년까지 이어졌던

툴라 라르센과의 복잡한 연애가 충격적으로 끝을 맺고 나서, 뭉크는 1909년 말까지 이 사건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회화와 스케치, 편지 등을 통해 증오와 무력함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1902년 가을, 툴라와의 관계는 오스고르스트란에 있는 뭉크의 집에서 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두 연인의 갈등은 미래에 대한 서로 다른 기대가 원인이었다. 툵라는 뭉크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뭉크는 예술가로서 독립을 유지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툴라가 자살하겠다고 협박하자

도덕적 이유 때문에 그 쪽에서 관계를 깨뜨리기가 쉽지 않았다. 최상의 해결책은 그녀가 뭉크를

떠나는 것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뭉크는 마지막 만남의 자리에서 자신의 왼손에 리볼버쏘았다. '일종의 비상사태' 였다고 그는 나중에 회고했다. 그 결과 왼손 중지에 총알이 박혀병원에서 빼내야 했다. 관절을 잃은 그의 손가락은, 위기의 상황에서 탈출하려 했던 필사적 시도를 평생 떠올리게 만들었다.

 

 

<수술대 위에서>, 1902 - 03년경

캔버스에 유채, 109×149cm

 

<수술대 위에서> 삼면화를 위한 습작, 1907년경

종이에 색연필, 12.9×41cm

 

左 <사춘기>, 1893년, 캔버스에 유채, 150×112cm

右  오스고르스트란의 여름용 별장 정원에서의 뭉크

 

<지옥에서의 자화상>, 1903년

캔버스에 유채, 81.5×65.5cm

이 <자화상>은 <벌거벗은 자화상>이었는데 나중에 <지옥에서의 자화상>으로 바꾸었다.

여기서 뭉크는 또 다시 심리적 위험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지만, 이번에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훨씬 과감해졌다. 화가는 노란색에서 붉은색을 거쳐 황갈색에 이르는 추상적 색채의 배경 속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약하고 외롭게 서서, 도전하듯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한다.

머리를 감싼 짙은 초록빛 테두리 주위의 밝은 부분 때문에 그는 더욱 앞으로 돌출되어 보이지만,

반면에 그의 몸은 아래쪽으로 가라앉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뒤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그림의 왼쪽 절반을 차지하면서 불길한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옷을 벗고 이젤 앞에 서 있는 자화상>, 1902 - 04년

종이에 색분필, 목탄, 수채, 63.5×47.5cm

 

오스고르스트란의 여름용 별장 정원에 서 있는 뭉크 사진, 1903년

 

 

<여름밤(다리 위의 여인들)>,1903년 캔버스에 유채, 203×230cm, 티엘스카 갤러리, 스웨덴 스톡홀름

<여름날> (린데 프리즈 중에서), 1904/07-08년 캔버스에 유채, 90.5×199.5cm, 개인 소장

 

<해수욕하는 남자들>, 1906 - 07년

캔버스에 유채, 206×227.5cm, 아테네움 미술관, 핀란드 헬싱키

 

<린데 박사의 네 아들들>, 1903년

캔버스에 유채, 144×199.5cm, 뤼베크 예술사박물관, 독일

 

左 <붓을 든 자화상>, 1904년, 캔버스에 유채, 197×91.5cm

右 <막스 린데 박사>, 1904년, 캔버스에 유채, 226.5×101.5cm, 작센안할트 주립미술관, 독일

 

<툴라 라르센과 함께 있는 자화상>, 1905년

좌) 64×45.5cm / 우) 62×33cm

 

<스핑크스>, 1896년

석판화에 채색, 32×56cm

 

<실내에 있는 한 여자와 두 남자> 1905년경

종이에 목탄, 색연필, 수채, 108×151cm

 

左) <가계도>, 1894 - 95년경, 종이에 목탄과 수채, 631×151cm

右) <태아가 있는 자화상(바르네뮌데의 소년)>, 1907년경

캔버스에 유채, 79.5×58.3cm

 

左) <포옹, 자화상>, 1905년경, 캔버스에 유채, 78×63.5cm

右) <남자와 여자, 뺨을 맞대고>, 1905년, 다색 목판화, 40.2×54cm

 

<연인, 뺨을 맞대고>, 1905년

캔버스에 유채, 50×70.5cm

 

<살로메, 에바 무도치와 에드바르 뭉크의 초상>

1903년, 석판화, 39.5×30.5cm

 


左) <남자와 여자 뺨을 맞대고>, 1905년, 동판에 드라이포인트, 21×31cm

右) <자화상, 달빛>, 1904 - 06년, 목판화, 43.7×41cm

 

上) <푸른 하늘 앞에 있는 자화상>, 1904 - 06년, 캔버스에 유채, 60×80cm

下) <두 가지 색 배경의 자화상>, 1904년, 캔버스에 유채, 69×44cm, 개인 소장

 

<포도주 병이 있는 자화상>, 1906년

캔버스에 유채, 110.5×120.5cm

 

<챙 넓은 모자를 쓴 자화상>, 1906년경

캔버스에 유채, 80×64.5cm

 

<매혹>, 1895년, 마분지에 크레용과 먹물, 20×46cm

 

左) <내 영혼은...두 마리 야생 새와 같다>, 1913년경, 종이에 색연필, 64.7×50.1cm

右) <벽돌공과 기계공>, 1908년, 캔버스에 유채, 90×69.5cm

 

<파우스트의 분열된 자아>, 1932년

캔버스에 유채, 100×117cm

 

左) ,프리드리히 니체>, 1906년, 캔버스에 유채와 템페라, 201×130cm

右) <붉은 배경의 자화상>, 1906년, 캔버스에 유채, 119.5×70cm

 

<포도주 병이 있는 자화상>, 1930년경, 석판화, 41.8×50.5cm

 

<살인>, 1906년, 캔버스에 유채, 70×100cm

 

<정물, 살인녀>, 1906년, 캔버스에 유채, 110×200cm

 

<마라의 죽음>, 1907년, 캔버스에 유채, 150×200cm

 

<마라의 죽음 2>, 1907년, 캔버스에 유채, 153×149cm

 

<야콥슨 교수가 저명한 화가 뭉크에게 전기를 통하게 하여...> 1908년

종이에 펜과 잉크, 13.7×21.2cm

 

<다니엘 야콥슨 박사>, 1909년, 캔버스에 유채

204×111.5cm,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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