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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역사의 법정

최초의 근대 법원이 내린 최초 판결

 

우리 근대사에서 사법제도를 살펴보려면 갑오개혁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갑오개혁을 통해 비로소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갑오 1차 개혁에서 군국기무처는

연좌제와 고문 등을 폐지하고, 법무아문을 신설해 1895년(고종 32) 4월 19일(음, 3월 25일) 법률 제 1호로

'재판소구성법'을 발포했다. 이 새로운 법을 통해 우리 법제 사상 처음으로 사법행정과 재판이 분리되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행정부에서 분리된 사법권 독립을 법률적으로 보장했다는 점에서 근대 사법제도를

지향하는 커다란 개혁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법의 날'로 지정된 4월 25일은 바로 근대 사법제도 도입의

계기가 된 재판소구성법이 처음 시행된 날이다.

 

 

 

 

 

동학농민혁명 심판 기록

 

이렇게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법원이 재판에서 다룬 첫 사건이 바로 동학농민혁명군을 이끈 녹두장군 혁명가

전봉준 등 5명에 대한 사형 판결이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을 이끈 전봉준, 손화중, 성두환, 김덕명, 최경선은 갑오개혁

때 설립한 의금사(옛 의금부)를 개칭한 법무아문 권설대판소로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된다. 전봉준의 재판 내용을

역사학자 이이화의 《전봉준, 혁명의 기록》을 통해 살펴 보자.

 

 

전봉준은 체포된 후 걸을 수 없어서 재판정에도 짚둥우리에 누운 채 들어갔다.

담당 법관 장박이 위압을 부려 좌우의 나졸을 호령해 전봉준을 일으켜 앉치려 들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이 묻고 대답하는 대화가 이루어졌다.

 

 

문: 일개 죄인이라, 감히 어찌 법관 앞에서 불공함이 심하는고?

 

답: 네 감히 어찌 나를 죄인이라 이르나뇨?

 

문: 소위 동학당은 조정에서 금하는 바라. 네 감히 도당을 불러 모아 난리를 지은자라.

반란군을 몰아 고을을 함락하고 군기 · 군량을 빼앗았으며 크고 작은 벼슬아치를 마음대로 죽이고 나라 정사를

참람하게 마음대로 처단했으며, 나라의 세금과 공공의 돈을 사사로이 받고 양반과 부자를 모조리 짓밟았으며, 종 문서를

불 질러 강상을 무너뜨렸으며 토지를 평균 분배하여 국법을 혼란케 했으며, 대군을 몰아 왕성을 핍박하고 정부를 부셔서

새 나라를 도모했나니 이에 대역 불궤(역적의 행동)의 법에 범한지라, 어찌 죄인이 아니라 이르나뇨?

 

답: 도 없는 나라에 도를 세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동학은 "사람이 하늘이라" 하니, 과격하다 하여 금한단 말이냐? 동학은 과거 잘못된 세상을 다시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나선 것이라, 민중에 해독되는 탐관오리를 벌하고 일반 인민이 평등적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복을

채우고 음탕하고 삿된 일에 소비하는 국세와 공전을 거두어 의거세 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

하여 규천이 있게 하고 공토로서 사토를 만들어 빈부가 있게함이 무엇이 잘못이며, 악한 정부를 고쳐 선한 정부를 만들고

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냐? 자국의 백성을 쳐 없애기 위하여 외적을 불러들였나니 네 죄가 가장 중재한지라,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여섯 차례 신문 끝에 1895년 3월 29일(음) 법무아문 권설재판소는

전봉준 등 5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고, 곧바로 교수형에 처했다.

죄명은 《대전회통》에 규정된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軍服騎馬作變官門者不待時斬'.

"군복 차림을 한 채 말을 타고 관아에 대항해 변란을 일으킨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한다"는 내용이다.

지금 법으로 말하면 군사반란죄 정도에 해당한다. 선고 법정에서 재판관 장박을 전봉준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문: 나는 법관의 몸으로 죄인과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목숨이 아까우냐?

 

답: 국법을 적용했다 하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문: 그렇다 우리나라에는 너희가 저지른 것과 같은 범죄에 대해 아직 분명한 규정은 없다.

문명한 여러 나라에서는 국사범으로 다루어 사형을 면할 수도 있을 텐데 어쩔 수 없구나.

너희는 스스로 생각해보라. 오늘의 죽음은 매우 유감스럽지만, 네가 전라도에서 한 번 일어나자

일청전생의 원인이 되었고 우리나라도 크게 개혁되었다. 너희가 탐관오리로 지적한 민영준 등도 국법에 처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흔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너희 죽음은 오늘의 공평한 정사를 촉진한 것이므로 명복을 빈다.

 

 

 

아래는 전봉준의 절명시다.

 

時來天地皆同力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치더니마는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매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길이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 사랑하는 올바른 의리 나 잘못 없었노라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한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

 

 

 

우매한 백성의 몰지각한 짓이라는 조선왕조의 조롱 속에 반란죄로 처벌받은 동학혁명군 재판은

어둡고 우둔한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근대정신이 사회에 전혀 정착되지 못한 상태에서

개혁의 지도자들에게 내린 판결이기 때문이다.

근대라는 개념을 말할 때는 과거의 전통과 구분되면서도 현대 또는 현재와 또 다른 시간적 관념이 전제되어 있다.

근대가 무엇이냐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서구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진행과

입헌적 민주주의를 이끌어간 국가 중심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근대 계몽사상과 혁명을 통해 확립한 자유와 평등,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인간의 이성과 그 능력을 믿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근대는 법 제정과 집행으로 인간 이성의 실현을 뒷받침 했다. 인간에 의한 자의적 지배가 아닌

법을 통한 지배, 즉 법치주의는 근대 입천주의 골격과 뿌리로 자리매김했다. 법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지켜내고,

지배 대상자의 동의를 얻어내 인민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민주주의의 정치를 구현하려는 것,

이것이 근대법의 핵심 요소였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원칙을 담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근대의 가치와 이념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프랑스 헌법에 명시되어 규범적 효력을 발휘했고,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이 이념과 가치는

오늘날에도 세계 대다수 국가의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내용이다.

 

조선에서 갑오개혁이 일어나 근대 법원이 출범할 당시는 대외적 영토 확장 · 팽창을 핵심 요소로 하는 제국주의가

온 지구촌을 휩쓸었다. 제국주의는 자기 나라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근대법으로 확립한

자유 · 평등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같은 가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근대 산업화를 먼저 시작한 열강은 자기 국민과

비국민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배제하는 전략으로 일관하면서 식민지재를 합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왕조는 스스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무능했다.

법 제도는 도입했으되 근대법 이념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고, 근대 법원이 그 역할을 수행할 수도 없었다.

최초의 근대 법원이 제1호 사건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지도자에 대해 내린 사형 판결이 그 결과다.

이 판결은 우리 법 역사에서 영원한 부채로 남았고, 이후 근현대 법과 법 적용을 두고 펼쳐질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서막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온 법과 정의에 대한 고민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군의

장렬한 희생과 죽음을 자리에 깔고 시작된 것이다. 

 

전봉준 등 동학농민혁명군은 조국이 외세로부터 독립되기를 열망하고 꿈꾸었지만,

자신들이 사랑한 그 조국으로부터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예수와 소크라테스, 전봉준에 대한 각 사형 판결처럼

역사에서 정의가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의가 승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당해야 할 존재는 오히려 '법'인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이들이 산하에 뿌려놓은

정의, 사랑, 평등의 씨앗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뜨겁게 가슴을 달군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 혁명의 기다림과 설렘은 역사의 유전자로 살아남았다.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왜 혁명인가

 

우리 근대 사법 체제의 첫 희생양이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호칭 변화 사건 자체만큼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기존 국사 교과서에도 1940~1960년대

까지는 '동학란' 으로 썼다가 1970년대에는 '동학혁명운동' '동학농민혁명운동' '동학혁명'으로 바뀌었고, 1980년

이후는 '동학운동' '동학농민운동'으로 이름 지어졌다.

그러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 공포되었고,

법률을 통해 공식적으로 동학농민혁명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은 법률 개폐가

없는 한 공식적 · 법적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는 이 사건이 명실상부 '근대 혁명'임을 확인해준다.

 

동학농민군의 봉기 과정과 내용을 '운동'이 아닌 '혁명'이라고 법률에서 규정한 이뉴는 무었인가.

동학농민군이 항쟁을 통해 종래의 세상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무엇인가 세우려 했기에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 人是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 事人如天' 사상을 전개했다.

이는 인간 존엄성과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고, 인간 평등 사상을 설파한 가르침이었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3월 21일 1차 봉기에서 동학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사상 위에

"널리 백성을 구제한다廣濟蒼生(광제창생)"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除暴救民(제폭구민)"

고 주창함으로써 반봉건제 타파 전쟁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1894년 9월 18일 2차 봉기에서는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다斥倭斥洋(척왜척양)" 며 반 외세

전쟁임을 밝혔다. 광제창생과 제폭구민 깃발 아래 조선왕조 군대에 맞서 싸운것은 인간 존엄성을 구현하고,

자유 · 평등과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해석한다.

척왜척양은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내용으로, 법적 관점에서

보자면 근대 민족국가 형성과 국가의 주권 수립 및 행사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프랑스 혁명의 아버지 루소가 정의한 국민주권주의가 시민혁명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탄생시킨 것처럼,

우리 역사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인민(또는 민인)과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주권 의지와 행동이 발아한 것이다. 우리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보면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 진주민란과 같은 민란이 켜켜이 쌓여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거대한 폭발을 한 것이다. 더 멀리

올라가보면 고려 무신 정권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 며 꿈꾸었던

노비 해방의 난, 고려 명종 때 신분제 타파를 외치며 일어난 망이 · 망소이의 난 등이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의연히 일어나"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포고했다. 즉 '민본주의'를 천하에 다시 밝힌 것이다. 당시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에서 민본은

'국가 통치의 근본'이 백성에게 있다는 의미에 불과하고, 백성은 어디까지나 왕의 신민일 뿐이고,

왕으로부터 자애로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신분이다.

 

*  고려시대에는 덕이 높고 공이 있는 사람에게 성씨를 하사해 백성이라 불렀기 때문에 주로 벼슬아치를 뜻했으나,

조선시대에는 관직이 없는 보통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문헌적 의미로는 1000가지 성을 가진 사람인데,

지금은 국민을 가리키는 말로 풀이된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내용은 동학농민군이 조선왕조를 인정하는 기틀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추구한 가치는 오늘날 헌법에서 "국가 통치의 정당성은 국민으로부터 비롯된다" 고

천명하고 있는 국민주권주의와는 다른 의미이다. 이는 시대적 한계이며, 동학농민혁명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동학농민혁명의 의미가 폄하될 수는 없다. 동학농민군의 운영 방식이나 개혁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혁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동학농민군은 1차 봉기 후 1894년 5월 7일 관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으면서 해산하고,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농민군 스스로, 주체적으로 설치한 집강소는 집강 아래 몇 명의 의사원議事員

을 두어 합의제 방식으로 운영한 주민자치 기구였다. 이는 우리 근대사에 주민자치의 근대적 본보기를 만들어

오늘날 국민주권주의와 지방자치를 이루는 뿌리가 되었다.

 

집강소는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횡포한 부호와 불량한 유민 및 양반 무리를 징벌하며 노비제도를 없애는 한편,

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무명잡세를 없애며 모든 채무를 소멸시키는 등 페정개혁안을 실행해나갔다. 집강소

농민군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누구든 가릴 것 없이 서로 '접장'이라고 불렀다. 지도자인 전봉준도 접장

이라 불렸고, 어린 아이나 부녀자를 부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또 이들은 서로 맞절을 했다. 농민군 두령들은

수하들을 버면 먼저 절을 했다. 맞절은 종과 상전, 백정과 양반, 여자와 남자, 어린아이와 어른, 평민과 벼슬아치

가릴 것 없이 신분의 차이를 없애는 방법이었다. 신분 해방을 추구한 그들은 서로 동등한 호칭을 사용하고

서로 같은 자세로 절하는 방식으로 평등 의식을 실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갑신정변이나 위정척사운동은 양반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면, 동학농민혁명은 피지배계글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 항쟁이었다. 또 근대 혁명의 핵심 가치가 자유와 평등,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구현하려던 사상과 실제 행동은

동학을 '근대 혁명' 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동학농민혁명은 승리하지 못했다. 군사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농민들이 낡은 옷을 입고 추위에 떨면서

화승총과 죽창을 들고 대포와 신식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이 흘린 피는 산과

강을 이루었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살육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기획한 집단 대량 학살이었다.

식민지 침략과 지배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에 우리 땅에서 자행한 대량 학살 예행연습이었다.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투쟁 모습을 떠올리면 프랑스 혁명군의 모습과 겹쳐진다.

자유 · 평등 정신과 압제로부터 해방 정신이 유럽을 흔들자 위기를 느낀 유럽 각국 군주들은 프랑스를 침략했다.

이에 수많은 프랑스인이 군사훈련도 받지 않고 식량과 무기도 부족한 채로 훗날 프랑스의 국가가 된 노래

<라마르세예즈>를 부르면서 진군하고 싸웠다. 동학농민군의 모습도 이와 같았다.

 

자유는 역사상 어느 곳에서나 숭고한 휘생의 피를 요구했다. 그냥 주어진 자유는 없었다.

자유와 평등의 제단에 기꺼이 희생한 그들은 지금 사라진 것 같지만 그들이 뿌려놓은

자유와 해방의 씨앗은 사라지지 않았다.

 

변화와 혁명은 봄 햇살을 불러오는 훈훈한 바람처럼 조용히 다가돌 수 없는 속성을 지닌 것 같다.

태풍과 번개를 동반해 항상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품에 안기는 존채처럼 보인다.

 

 

 

법이 말하는 혁명과 사회변혁 운동

 

법에서 말하는 '혁명'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프랑스혁명이나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바뀐 러시아혁명,

혹은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국가 건설처럼 기존이 통치 형태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쿠데

타는 일부 세력이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무력 등의 비합법적 수단을 동원해 정권을 빼앗는 정변을 말한다.

따라서 법적 개념으로 볼 때 동학농민혁명은 왕정 국가에서 벗어나 자유 · 평등 ·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다

좌절한, 실패의 혁명이다.

 

쿠데타는 불법 권력 찬탈을 상징하는 부정적 표현이지만, 혁명은 해방과 자유 · 평등을 상징하는 긍정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래서인지 혁명은 단어 그 자체로 매혹적이면서 잔인한 이름이다. 그 매혹에 이끌려 경제적 · 사회적

변혁에도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여 산업혁명, 정보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독재자들도 스스로가 혁명가로 불리고

평가받기을 원한다. 5 · 16 군사 쿠데타를  5 · 16 군사혁명, 유신이라는 궁정 쿠데타를 유신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만 보아도 단어가 얼마나 달코하고 매혹적인지 알 수 있다.

 

근현대 역사를 뒤흔든 4 · 19의거,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6년 10월경부터 시작해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인용함으로써 대통력직을 파면할 때까지 진행된 촛불항쟁을 모두 혁명으로 호칭하는

사람도 많다.  4 · 19의거 등은 법적 개념은 세월에 따라, 국민의 인식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혁명으로

불리거나 불릴 만한 사건은 사람에게 전율과 흥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하고 충격적 사건이었다.

 

제국주의 침략과 무능하고 부패한 왕조에 맞서 싸운 동학농민군,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의 아버지 · 어머니······. 그들은 새로운 세상과 혁명을 꿈꾼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실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자유와 폭압으로부터의 행방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얻었다.

 

혁명은 인간 역사에서 진화의 힘을 보여주는 마중물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이들이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과 오늘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과연 얼마만큼 차이가 날까? 동학농민혁명군이

외세 침략과 간섭을 배제하고 이룩하고자 했던 자주독립국가의 꿈은 오늘의 분단 현실과 미국, 일본, 중국 등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 것일까?

 

 

 

인용: 김희수 著 <역사의 법정에 선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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