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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검정에 담긴 모순의 미학 (2)

 

 

 

 

검정이 금욕적이고 도덕적이라는 생각은 역설적으로 검정이 이 시기에 새로이 유행하는 색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유럽의 왕실은 이런 취향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예술가들은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검정을 이상적인 색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가 되었다. 산업혁명과 낭만주의는 검정과 개념상 무관해 보이지만

오히려 더 렬한 귀족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이제 검정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근대 도시에서 활동하는 부르주아의 색이

되었다. 화가들은 어둡고 신비한 작품을 잘 표현해 줄 우군을 찾아냈다. 사실주의를 표방한 그림에서 검정은

삶의 애환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상징주의 그림에서는 꿈과 신화의 세계, 잠재의식의

세계를 말하는 데 검정이 사용되었고, 여성의 관능성을 강조하는 그림에서 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시 던져 보자. 무엇이 진정 '우리의 검정' 인가?

빛의 스펙트럼으로 만들어진 모든 색을 흡수하는 검정. 우리를 통째로 삼켜 버리는 어떤 절대적인 개념.

한편으론 이 점이 우리를 그토록 불안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

 

검정은 우리의 가장 원초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을 반영한다. 어릴 적 홀로 어두운 방에서 느꼈던 두려움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 낯선 이에게 품는 감정 같은 것 말이다. 또한 검정은 모태에서 느꼈을 안도감을 떠올리게 한다.

시대를 넘어 언제든 사랑받는 검정 드레스처럼, 선명하고 유혹적이며 어떤 자리에서도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는

색이다. 검정의 확실한 가치는 기하학적 형태와 구성을 중시하던 근현대 예술에도 적용된다.

 

여기서 검정은 다양한 시각적 힘뿐만 아니라 정서적 중량감도 지니게 된다.

검정은 무無의 상태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

개인적인 것부터 보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넘버 26A, 흑과 백

잭슨 폴록, 1948, 캔버스에 유채, 205×122cm, 파리, 퐁피두 현대 미술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잭슨 폴록은 캔버스에 물감을 직접 붓거나 떨어뜨리는 드리핑dripping 기법에 몰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예술가들이 개발한 이 기법은 안료의 질감과 화가의 행동을 매우 중요시한다.

 

 

드리핑 기법으로 그림을 그릴 때, 폴록은 자신이 '격투기장arena' 이라 부르는 바닥의 캔버스 위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몸 전체를 움직이고 회전하며, 신들린 듯한 춤 동작을 펼치면서 붓이나 막대기 등을 이용해 물감을 붓거나

떨어뜨린다. 이 급진적 기법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멕시코의 벽화 운동과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의 영향

을 받은 것이다. 또 다른 원천은 화가 자신이 이미 밝혔듯이 서부 인디언 나바호족이 모래를 땅에 뿌려 그림을 그리

는 관습에서 찾을 수 있다. 폴록의 드리핑은 신체와 예술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했으며, 화가의 의미를 '그리는'

사람에서 캔버스 위에서 '행동하는' 사람으로 확장했다.

 

이 그림은 올 오버 페인팅으로, 복잡한 검은색 물감 자국이 형태와 배경의 구별 없이 흰색 화면 전체를 균일하게 

채우고 있다. 그림을 어떤 순서로 그렸는지 알 수 없으며 화면을 지배하는 특정 요소도 없다. 그림 전체가

리듬감 있고 역동적이며, 아울러 고통스럽고 폭력적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폴록의 작업은 일정한 기준이나 원칙 없이 즉흥적으로 행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요행의 산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잘 알았다.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오랫동안 숙고했으며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여러 번 다시 시도했다.

 

폴록의 작품을 향한 회의적인 시선도 많았다. 미술 평론가 에밀리 제나우어는

"그의 그림들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같다. 나는 그것을 빗질하고 싶어진다" 라고 썼다.

 

 

 

 

무제

피에르 술라주, 1973, 종이 캔버스에 비닐계 안료, 153×108.cm, 마르세유, 캉타니 미술관

 

 

피에르 술라주는 1940년대 중반부터 자신만의 추상회화 작품을 창안했다.

호두 껍데기에서 추출한 천연염료를 사용해 제작한 <브루 드 누아>가 대표적이다.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금세 주목을 받는다. 한스 아르퉁이나 프랑시스 피카비아 같은 대가들은

전후 세대의 미학과 확연히 구분되는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냈다.

 

 

 

술라주의 작품에는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킬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성찰하고 탐구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그도 이 점을 인정했다. 그는 동양의 서예나 선禪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다. 간결한 화면 구성은 화가가 남긴

붓의 필치나 행위의 궤적은 물론이고 도구의 경제성도 잘 보여 준다. 표면적으로 평온해 보이는 그의 그림은

단일 색조로 표현된 붓의 격렬한 움직임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는 검은색과 흰색의 사용에서 비롯된다.

뚜렷하고 분명하에 드러나는 흰 종이와 밑칠 흔적이 비록 그림 전체를 압도하지는 않지만 마치 강렬한 빛이

고 들어노는 것처럼 보여 우리의 시선을 끈다. 여기에 밝게 빛나는 검정이 어우러진다.

 

술라주는 넓고 두꺼운 붓과 건물 도장용 솔을 사용했다. 이런 도구를 사용하면 화폭을 검은 띠 모양으로 넓게

채울 수 있고 그림에 장중한 느낌을 더한다. 이를 통해 그의 작품은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창작 행위의 산물인

강한 힘을 얻게 된다. 화가는 통상 내면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초대 한다. 술라주는 이 작품을

제작하고 6년 후인 1979년부터 화폭 전체를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작품을 실패로 보았으나

다음날 아침 이렇게 '우트르누아르Outenoir' 가 탄생했다. 그의 검은색은 빛과 만나 무수한 형상과

색을 만들어 낸다. 흰색의 도움 없이도 말이다.

 

 

 

 

 

나는 전쟁을 기다린다

밴, 1981, 캔버스에 아크릴, 162×130cm, 퐁피두 현대 미술관

 

 

전위적 미술 운동인 신사실주의의 멤버이기도 한 밴은 "예술은 시로워야 하고 신선한 충격을 줘야 한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또한 존 케이지가 주창한 플력서스Fluxus의 일원이었으며,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그 운동을 발전시켰다.

 

 

 

손 글씨는 그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인데, 화가는 이를 통해 삶에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금언들을

아포리즘 형태로 분명하게 드러낸다. 예컨대 그가 제시한 "나는 전쟁을 기다린다" 라는 말을 살펴보자.

언뜻 볼 때 이 말은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전쟁은 피할 수 없으며 임박하고 있다" 라고

해석될 수 있다. 화가가 관람객의 경박이나 경시에 어떻게 맞서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검정 바탕 위에 쓰인그의  글씨는 하나의 사인 역할을 하며, 대중문화의 한복판에 있음을 드러낸다.

자기 주변을 살피는 데 급급해  정작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충분히 바라보지 않는

현대인의 단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림보로의 하강

애니시 커푸어, 1992, 콘크리트와 벽토, 포르투, 세랄베스 현대 미술관

 

 

당신은 작은 콘크리트 건물 앞에 있다. 여기에는 문이 달려 있어 열고 들어오라며 손짓하는 듯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엇이 보이는가? 하얀색으로 칠한 방 한가운데 바닥에는 검은색 원반형 물체가 놓여 있다.

아니,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것은 약 2.5m 깊이의 구멍이다. 커푸어는 주로 착시 현상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면서 공간의 의미를 묻고, 우리의 공간 인식에 질문을 던진다. 화가는 <림보로의 하강>을 준비하면서

안드레아 만테냐의 고전 회화인 1475년 작 <림보로 내려가는 그리스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에 고성소에 내려와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구했다는

성경 이야기를 묘사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한 화가 커푸어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주제였을 것이다.

 

커푸어의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이 작품은 폐쇄적이고, 어쩌면 억압적일지 모를 공간에 설치되어 있다.

누구나 그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검은 안료로 칠해진 이 신비한 구멍을 통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둠에 공포를 느끼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어둠 속에서 평화로운 안식을 찾기 때문이다.

 

2014년부터 커푸어는 <림보로의 하강>을 위해, 빛을 거의 완전히 흡수해 실제로 빛을 비춰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반타블랙' 이라는 검은 페인트로 움푹한 구덩이를 칠했다. 여기에 속은 관람객이 발을 헛디디기도 했으나

반타블랙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검은 구멍 속에는 우리의 욕망과 공포,

희로애락의 감정이 숨겨져 있다. 이것은 무한이고 부재이며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다.

 

정신의 변방에서 우리가 나누는 모든 이야기들의 우물 ·····.

 

 

 

 

 

적회식 큰 잔

에레트리아 회화, 기원전 440년, 도자기, 파리, 루브르 박물관

 

 

적회식赤繪式과 흑회식黑繪式

기원전 550년경부터 아테네인은 '적회식' 이라고 불리는 기법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도자기를 장식했다.

이 기법은 그리스 국경을 넘어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섬세한 데생과

과감하고 간결한 형태 표현은 모든 경쟁자들 단숨에 압도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검정은 중요한 색조였다. 당시의 색채 이론이 검정과 하양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색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기화에서도 어두운 색을 중시하여 흑색과 적색을 이용한 두 가지 기법이

발전했다. 가장 먼저 창안된 것은 '흑회식' 인데, 가마에 구울 그릇의 표면 위에 인물을 검게 그린 후 그 세부는

철필로 새기는 방식이다. '적회식' 은 인물 부분을 점토의  붉은 색깔 그대로 남긴 채 배경만 검게 칠한 뒤

그 세부를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그린다.

 

적회식으로 만들어진 위의 큰 잔의 중앙에는 그리스풍의 띠모양 장식으로 둘러싸인 원형 초상이 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그려져 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사람은 앉아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펼쳐 읽고

맞은편에 서 있는 젊은 사람읁 서판書板을 들고 있다. 도기에 새겨진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의 이름은 각각

무사이오스와 리노스이며, 시인이자 음악가이다. 주로 신화 속 장면을 조형한 그때까지의 도기화의

경향과 달리 이 장면에는 예술 창작을 논하는 두 사람의 일상이 담겨 있다.

 

화가는 적회식으로 좀 더 자유롭고, 사실적이며, 과감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인간의 얼굴은 세밀하게 그려졌고, 신체는 생기와 탄력을 얻었으며,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의 주름뿐만 아니라 인물의 감정까지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회화 양식의 급속한 변화는 조각 분야에서의 기술 발전으로 이어졌다.

 

 

 

 

 

검은 방

보스코트레카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빌라, 기원전 10년경, 프레스코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로마 제국의 귀족이나 부유층이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해안가에 별장을 소유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나폴리에서 남동쪽으로 약 2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보스코트레카세 근처에 위치한 아그리파 로스투무스의 빌라는

소유자의 이름을 딴 곳이었다. 그리리파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측근이자 황제의 딸 율리아의 남편이었다.

 

그가 기원전 12년에 사망하자, 그의 빌라는 갓 태어난 아들의 소유가 된다. 아직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인 율리아가 집의 개축 문제를 맡게 되었는데, 그녀는 특히 실내 벽화 장식에 심혈을 기울였다.

새롭게 장식된 방들 가운데 '검은 방' 으로 불리는 곳은 신비롭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화려하고 육중한 디자인 대신에 소박하고 정제된 모티프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원근법이나 입체감의 효과도 없다.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모노크롬 블랙의 

사용으로, 전대미문의 현대적 방식으로 추상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빌라는 당시 새롭게 유행하던 칸델라브라 장식을 벽화에서 선보인다.

가느다란 기둥, 크고 작은 출입문 세 개, 그리고 식물 모양을 한 금속 재질의 거대한 촛대 장식이 특징인데,

꼭대기 장식은 보석으로 치장했다. 여기에 아폴론을 상징하는 백조를 그려 넣었고 당시에 병합된

이집트 문화를 반영하는 동양의 모티프도 새겨 넣었다.

 

빌라의 내부를 장식한 검은색 프레스코화는 바닥의 흑백 모자이크 장식과 어우러져

실내 공간에 정갈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불어 넣었다.

어둠이 내리자 환하게 불을 밝힌 검은 방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마법의 세계에 온 듯할 것이다.

 

 

 

 

 

코뿔소

알브레히트 뒤러, 1515, 목판화, 21.4×29.8cm, 런던, 영국 박물관

 

 

1515년 5월 20일, 포르투갈 리스본에 코뿔소 한 마리가 도착했다.

인도 구자라트 술탄국의 왕 무자파르 샤 2세가 포르투갈의 왕 마누엘 1세에게 보낸 외교용 선물이다.

로마 제국 시절 이후 유럽에서 목격된 적이 없던 코뿔소는

이때부터 왕실 동물원에 모습을 드러내며 많은 사람을 매료한다.

 

 

 

독일 출신의 인쇄업자 발렌팀 페르난데스는 리스본에서 코뿔소를 본 뒤 이를 상세히 묘사한 다음,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와 스트라본의 설명을 덧붙여 뉘른베르크 길드 소속의 친구에게 보냈다.

당대 최고의 판화가이자 예술 이론가였던 알브레히트뒤러도 이 편지와 스케치를 볼 기회가 있었다.

뒤러는 동물을 자세하게 드로잉한 후 목판화로 제작하였다.

 

뒤러의 코뿔소는 실물과 아주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국의 문화와 지식에 매료된 인문주의자의 상상력이

낳은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코끼리의 꼬리를 지니고 등에는 전설의 동물 일각수처럼 작은 뿔이 솟아 있으며,

표피는 단단한 철제 갑옷으로 뒤덮인 듯한 모습이다. 비록 실제 코뿔소를 정확히 재연하고 있지 않지만

뒤러의 목판화는 입체적이고 생생한 묘사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 주었다.

 

뒤러는 판화를 예술의 지위에 올려놓았고, 1450년경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은 판화의 보급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세상을 흑백으로 보게 된다. 뒤러가 그린 코뿔소 그림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았고, 수년간  5천 장의 복사본이 판매되었다. 아울러 그가 그린 그림은 18세기 중반까지

자연사 자료집에서 교범이 되는 목판화로 사용된다.

 

리스본의 코뿔소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누엘 1세는 코뿔소를 메디치 가문의 교황 레오 10세에게 선물하기로 한다.

1515년 12월, 코뿔소는 다른 귀중품들과 함께 로마로 가는 배에 실렸다. 하지만 항해 도중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만났고 갑판에 쇠사슬로 묶인 코뿔소는 익사하고 만다. 이 사고로 코뿔소는 더욱 유명해졌지만,

한편으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잔인한 욕심을 상기시킨다.

 

 

 

 

 

현세의 덧없음

타치아노, 1515, 캔버스에 유채, 97×81.2cm,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베네치아에서는 색채를, 피렌체에서는 데생을 중시했다.

베네치아파와 피렌치파가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이전보다 더 융합적인 구성이 생기고,

붓터치는 훨신 자유로워진다.

 

 

 

조르조네는 16세기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자연의 경치를 주인공으로 삼은 풍경화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명명한

스푸마토 기법을 약간 변화시켜 물체의 윤곽선을 자연스럽게 번지듯 그렸으며 명암도 섬세하고 부드럽게 표현했다.

티치아노는 거장 조르조네의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가미하였다.

그는 모델의 심리를 탁월하게 그렸는데, 이런 점이 그의 그림에 전례 없는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는 어두운 색조로 칠한 배경과 밝고 선명한 색조의 인물이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림 속 인물이 여성인 경우에는 특히 유백색 피부가 돋보인다. 어둠은 여인의 얼굴과 피부를 돋보이게 할 뿐더러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해 알고 싶으면 고개를 숙여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특히 모델이 들고 있는 거울 속 풍경을 유심히 살펴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온갖 진귀한 보석과 반짝이는

금화가 있고, 그 뒤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그녀는 주인의 금은보화를 정리하고 있는 하녀일까?

 

티치아노는 '허영' 의 알레고리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화가가 여기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육체적 허영이

아니라 물질적 허영이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그림 속 여인을 매우 당당하고 차분하며 관능적으로 만들었다.

티치아노의 그림은 두 개의 장면을 대비시킨다. 한쪽에는 이상적인 개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이 처한

불완적한 현실이 있다. 밝은 빛 속에는 보란듯이 모습을 드러내는 한 인물이 있고, 어둠의 그림자 속에는 

우리가 가장 부끄러워하는(아닐 수도 있지만) 비밀이 몸을 숨기고 있다.

 

 

 

 

현세의 덧없음 (부분)

 

 

 

 

 

가을의 징팅산

석도, 1671, 종이에 수묵, 86×41.7cm, 파리, 기메 박물관

 

 

석도(법명 도제道濟)는 수묵화를 치유와 명상의 예술로 승화시켜 후세에 전한 화가 ·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명나라 종실 정강왕의 후예로, 황실 내분으로 친족이 죽자 궁에서 도망쳐 일찍 출가했다.

이후 전국 각지의 절을다니며 방랑했는데 이것이 그의 정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특히 그림에 담고자 했던 건 일생 동안 다닌 산천의 아름다움과 광대함이다.

이 그림의 구성은 산과 물이 각각 층을 이루는 전통 수묵화의 방식을 따른다.

이런 단계적 구성으로 자연을 보는 관점이 명확해진다. 예를 들면 아래에서 위로 향해

그리고 마침내 무한한 하늘로 올라간다.

 

석도는 먹색을 기본으로 하고 그 외의 색채를 보조적으로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촘촘하게 선을 그어 그늘을 나타내거나, 강인한 필력과 명료한 윤곽선으로 장면의 관조적 심미성과

신비로움을 돋보이게 했다. 그림 속 풍경은 저절로 그렇게 생겨난 듯 자연스럽지만,

붓놀림이 아예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석도는 야생의 자연이 거칠고 투박하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이 혼란한 세상에서 쉬어 갈 수 있도록 공空을 그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 아니, 무모하리만치 희게 쓿은 멥쌀 같은 종이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내버려 둔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석도는 '돌의 물결' 이라는 뜻이다. 산수를 아우르기에 이보다 적합한 이름이 있을까?

화가는 이렇게 말했다. "한때 산천이 나의 화폭과 화법을 빌려 아에게서 태를 벗더니

이제 내가 태를 벗고 내가 진정한 정신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1705년 석도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림에 임하는

이치와 자연의 관계를 기술한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畫語錄》을 저술한다.

이 책은 그의 예술 철학과 미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것으로

중국화론에서 불후의 저작이기도 하다.

 

 

 

 

 

카네이션

앙리 판탱라투르, 1877, 캔버스에 유채, 220×27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싱싱한 꽃들로 굼실대는 한 아름의 꽃다발을 '정물靜物'이라 이르니 모순적이다.

그런데 판탱라투르의 정물화에는 카네이션이 그려져 있다. 흔히 죽음을 연상케 한다고 하는 꽃 말이다.

카네이션은 오랫동안 몰리에르와 연관된 전설 때문에 병적인 평판에 시달렸다. 프랑스 극작가 겸 배우인

몰리에르는 <상상으로 앓는 환자>를 공연하던 중 무대에서 쓰러졌고, 그날 밤 집에서 사망하였다.

 

그때 무대 위에서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꽃이 카네이션이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카네이션을 살아 있는 사람

보다는 죽은 사람에게 바쳤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카네이션은 열정이나 행운, 사랑, 심지어 노동을 상징하는

평판 좋은 꽃이었다. 따리고 보면 질병이나 불길함과는 전혀 구관한 꽃인 것이다.

 

그림 속 꽃들은 말라서 생기를 잃은 모습이다.

다양한 카네이션들은 어두운 배경과 대조를 이루는데, 그림의 안쪽을 암흑처럼

어둡게 묘사해서 꽃들이 상대적으로 더 밝아 보인다.

 

 

 

 

 

빅토르 위고의 초상

레옹 보나, 1879년, 캔버스에 유채, 137×109.1cm, 건지 섬, 빅토르 위고 박물관

 

 

1870년, 한 시대를 풍미한 현자 빅토르 위고는 당시 유명했던 정치적 망명을 겪고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제2제정을 수립하자 이를 비판하고

망명길에 올라 19년을 벨기에와 영국 해협의 섬들에서 지냈다.

레옹 보나가 그린 위고의 초상화에는 작가인 동시에 임기 3년 차인 상원 의원의 모습이 담겨 있다.

 

 

 

보나의 작품은 그가 기획한 '위대한 인물' 연작 중 하나다.

그는 위고 뿐만 아니라 쥘 페리, 레옹 강베타, 루이 파스퇴르, 소小 뒤마와 같은 유명인들도 그렸다.

특히 위고 초상화는 대중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는다. 작품이 이렇게 큰 관심을 받게 된 것은 화가가 모든 장식적

요소를 걷어내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 정치인이자 천재 시인으로서의 위고, 특히 한 인간으로서의 위고에

초점을 두고 그린 데에 그 이유가 있다.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일종의  '심리적 초상화' 였다.

단지 위고가 화폭을 차지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영광스럽기 이를 데 없다.

 

검정이 무대로 진입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검정은 그림 전체를 뒤덮고 있지만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여기서의 검정은 영향력 있는 인물의 우아함을 상징한다.

당시 부르주아들은 검은색 의복을 걸쳤다. 그림 속 검정은 또한 화가의 스페인에서 발견한 색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프라도 미술관에서 티치아노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직접 보고

그들이 사용한 검정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림 속 검정은 흰색과 대조를 이루며 하얀 부분을 더욱 선명하게 해 준다.

이를 통해 위고의 하얀 손은 작가의 상징으로, 하얀 얼굴은 주의 깊은

사상가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정적인 자세 그 이면에는 어떤 소동이나 흥분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다.

덥수룩한 머리털에 손가락으로 왼쪽 옆머리를 짚고 있는 모습은 영감을 받아 '유레카' 를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천재 작가 위고는 무엇을 생각해 낸 것일까. 보나는 위고의 모습을 마치 사진을 찍듯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그를 추상적 아이콘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림 속 인물은 뭇사람들의 상상 속에 있는 위고이며

바로 식별이 가능한 환영幻影, 즉 그의 화신化身이다.

 

 

 

 

 

쿠르브부아, 달빛 아래 공장들

조르주 쇠라, 1882-1883, 연필 소묘, 24×31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조르주 쇠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해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지만,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그는 특히 점묘법으로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쇠라는 연필, 목탄 따위를 사용해 사물의 형태와 명암을 강조하는 소묘로 미술에 입문했다.

일찍부터 삽화에 재능을 보여 왔지만 국립 미술학교의 아카데믹한 노선과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한다. 그는 소묘를 하며 고유한 색채 이론, 특히 색채 대비와 보색 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검정과 하양을 같이 놓았을 때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또한 색조의

미묘한 차이로 드러나는 깊이와 정취를 위해 화가의 제스처뿐만 아니라 도구도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

 

쇠라는 소묘용 연필의 일종인 콩테를 주로 사용했다.

농담濃淡이 뚜렷하고 고착성이 있어, 종이의 고르지 않고 우툴두툴한 표면에 녹아 섞이면서 비어 있는

흰색 면을 움푹 패어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빛과 그림자의 대조로 선이나 윤곽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쿠르브부아: 달빛 아래 공장들>에서 화가는 우리의 시선을 어딘지 알 수 없는 구역으로 데려간다.

얼기설기 늘어져 있는 그곳은 검은색이 지배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적인 달이 밤의 신비를 간파하고

하늘에 또렷이 모습을 드러낸다. 달빛 아래에서 검정의 농도는 더욱 짙어 보인다. 화가가 콩테를 사용해

애지중지 만들어 낸 '어두운 빛' 을 이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쇠라의 그림은 19세기 산업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산업혁명과 그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세상은 사람들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을 이름 없는 사람들로 전락시켰다

그림자 취급을 받는 사람들로 말이다.

 

 

 

 

 

고독

페르낭 크노프, 1891, 색연필로 장식한 사진, 30.5×11cm, 브뤼셀 벨기에 왕립 미술관

 

 

 

'수수께끼 같고, 신비롭고, 해독할 수 없는 ···' 

페르낭 크노프가 예술을 설명할 때 종종 썼던 단어들이다. 그는 영국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상징주의적 화가였고, 신화를 회화에 관한 성찰의 중심에 끌어들여 작품을 제작했다.

 

 

 

크노프가 표방하는 신화들은 이상화된 여성을 찬양한 것이다. 화가는 거의 강박적으로 자신의 여성 모델들을

몽환적 세계로 집어넣고, 그 속에 고대의 신비주의적 모티프도 함께 뒤섞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주로 그림으로

기억하지만그는 사진에도 열중했던 예술가다. 특히 그는 자신의 누이이자 연인이었던 마르그리트의 제스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크노프는 사진작가인 아르센 알렉상드르와 공동 작업을 했고, 그에게 자기 작품의 복제를

요청했다. 또한 인화된 사진에 연필이나 수채화로 장식하는 것을 즐겼다. 이미지를 자신의 기준에 맞게 조절하고

그 결과물 역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했던 듯하다.

 

<고독>은 코노프 자신이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그의 모노크롬 미학과 금속성 광택의 공정을 잘 보여 준다.

화가는 남녀 양성의 면모를 지닌 당당하고 호전적인 여성을 그림에 담았는데, 마치 짧은 머리칼에 전투용 검을 든

잔 자르크 같다. 그녀가 걸친 검정 드레스는 갑옷을 닮았지만 19세기 말의 옷이 전형적으로 이런 형태였다.

그녀의 앞쪽으로는 수정으로 만든 공이 세워져 있는데 그 속에 '흐르는 시간' 을 상징하는 시든 꽃이 들어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가 한층 두드러진다. 이런 몽환적 분위기는 작품의 어두운 색조로 더욱 강화된다.

 

현실과 꿈, 물질과 비물질이 만나는 어떤 지점에 잠겨 있는 듯하다.

모방과 창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진의 공간을 잘 드러내는 은유라 할 수 있다.

화가는 자신의 뮤즈를 액자 속에 잘 가두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듯이.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했던 그는 이상적 여인의 환상이자 금지된 사랑의 대상인

자신의 누이를 끊임없이 그림으로 그렸다.

 

 

 

 

 

적막

토머스 알렉산더 해리슨, 1893, 캔버스에 유채, 105×171.2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토머스 알렉산더 해리슨은 미술을 전공하고 미국 정부의 태평양 연안 탐사대에서 삽화가로 활동했다.

1879년 파리에 정착해 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자신의 탐사 경험과

브르타뉴 체류에서 관찰한 바를 그림에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적막>은 호숫가에서 바라본 고요하고 쓸쓸한 밤 풍경을 그리고 있다. 옅게 빛나는 달빛에 환해진 보트 위로

벌거벗은 인물이 서 있다. 사방이 침묵과 정지를 부탁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 인물은 무분별한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컴컴한 밤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위 풍경과 하나가 되어 있다.

흡사 유령처럼 보이는 이 인물은 모두 같은 색조의 수련이 여기저기 떠 있는 어두운 물속으로 금방이라도

뛰어들 듯하다. 어쩌면 뛰어들지 않고, 달빛에 자신의 몸을 맡긴 채 애무하도록 내버려둘 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헷갈려 보면 볼수록 미궁으로 빠져들기만 한다.

야심한 시간에 굳이 호수에서 몸을 씻으려 하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또 그 앞에 펼쳐진 광막한 공간에서도 눈길을 멈추게 된다.

초록 색조를 띈 그 공간은 호수의 색조와 상응한다. 여기서 밤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일充溢과 일체一體의 분위기를 전파한다.

리고 우리는 이 평온한 순간을 온전히 누리고 있을 신비의 인물을 부러워한다.

 

 

 

 

 

멕시코 가면

20세기, 나무에 채색, 15×12.6cm, 마르세유,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인디언 미술관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기 이전, 원주민들에게 가면은 의례와 제식에서 중요한 도구였다.

장례 의식 이외에도 개별 문명의 역사에서 중요 행사, 공연, 춤 등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가면은 멕시코 문화의 주요한 구성 요소다. 스페인 군대가 아즈텍 왕국을 정복한 후에도, 원주민들이

치르는 제식은 식민자들이 덧붙인 새로운 모티프를 받아들이면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이 멕시코 가면은 두 문화가 대화를 나눈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의 의례를 금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지역의 전통을

이용했다. 당시 큰 성공을 거두었던 공연 중에는 기독교인과 무어인의 전투를 재현한 것이 있다.

이 가면은 20세기 초까지 계속 이어진 그 공연에서 사용된 것이 아닐까? 가면에 칠한 검정으로 이렇게 추론해 볼 수 있다.

아니면 스페인 사람들이  17세기에 끌고 왔던 아프리카 오예들을 묘사하기 위해 검정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새롭게 접한 노예의 얼굴들을 상징한 '니그리토Negrito' 라는이름의 가면이 이 시기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공연에서 춤을 출 때 사용된 이 가면은 얼굴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눈과 입은 빨간색으로 강조되었는데,

주로 백인 출연자가 착용했다

 

공연에 사용된 멕시코 가면들 가운데 몇몇은 오른쪽 가면처럼 이마를 흰색으로 칠했다.

가면을 쓴 출연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가면을 쓴 사람이

백인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것일까? 비록 멕시코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은 스페인으로부터

같은 지배를 받았지만, 종족 간의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파란 눈의 여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918, 캔버스에 유채, 81×54cm,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모딜리아니는 독특한 초상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몬드 형태의 길게 늘어진 눈, 그의 보이지 않는 눈동자,

기다랗고 가는 목에 휘어진 코, 타원형의 얼굴과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한다.

<파란 눈의 여인>에 등장하는 여인도 예외는 아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리보르노에서 출생한 모딜리아니는 피렌체와 베네치아 등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르네상스 미술에 심취했고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보티첼이릐 <비너스의 탄생>에서 수줍어하는 몸짓을 이 그림에 가져왔다.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관능적인 가슴을 한 손으로 가리는 데 반해 모딜리아니의 신비로운 여인은 정숙한 자세로

추위라도 타는 듯 외투를 여미고 있다. 모딜리아니는 여인의 목을 기다랗게 그렸는데,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이런

형태는 마니에리스모manicrismo 미술 양식을 참조한 것이다. 또한 모딜리아니는 친구 콩스탕탱 부랑쿠시의

간단하고 절제된 조각 작품과 당시 유행하던 아프리카 가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파란 눈의 여인>에서 검정은 여인의 몸 전체를 포위하듯 감싸는 외투로 표현되어 있다.

그녀의 외투는 우아하지만부정할 수 없는 슬픔이 가득 배어 있다. 엄숙하고 우수에 찬, 반투명에 가까운

파란 눈동자는 슬픔을 더욱 부각한다. 눈동자는 텅 비어 공허하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외투가 만들어 낸 깊은 구렁. 검은색의 절망적인 구멍과도 같다.

 

사람들은 그림의 모델이 화가의 마지막 애인인 잔 에뷔테른인지, 그렇다면 그녀가 그림 속에서

상복을 입고 있는 건지 궁금해했다. 1920년 1월 24일, 모딜이아니는 심한 결핵성 뇌막염으로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 화가의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에뷔테른도 이튿날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흑과 백

만 레이, 1926, 사진, 9×12cm, 개인 소장

 

 

만 레이는 신화적 사진인 <흑과 백>을 1926년 5월 1일 《보그》지 프랑스 판에 처음 공개했다.

처음에는 패션 이미지 사진으로 소개되었으나 이후 사진 미학의 전형으로,

아울러 1920년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본보기로 여겨졌다.

 

 

 

1920년대 서유럽의 모더니즘 화가들은 아프리카 예술에 열광했다.

앙드레 드랭은 관련 작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의 입체주의 작품에

자양분으로 삼았다. 이런 흐름에서 배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파리의 재즈클럽 '르 발 네그르' 다.

그곳ㅇ레서 미국의 무용수이자 가수인 조세핀 베이커가 찰스턴 춤으로 파리 전체를 사로잡았다. 

만 레이는 <흑과 백>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명확히 드러내면서

이 시대의 문화적 취향을 압축해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 만 레이는 자신의 뮤즈인 '몽파르나스의 키키' 의 얼굴과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바울레 부족의

가면을 맞대어 놓음으로써 이미지의 대조성을 극대화한다. 테이블 위에 수평으로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완벽한 타원형 얼굴' 은 브랑쿠시의 <잠이 든 뮤즈>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키키는 자신을 닮았지만

정반대되는 분위기의 검은색 가면을 왼손으로 잡고 있다. 둘은 얼굴 윤곽선이 조화롭고 우아하며 눈이 기다랗다는

점에서 서로 흡사해 쌍둥이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이 작품에서 만 레이는 키키를 정적靜寂의 원형으로,

거의 조각품 같은 인물로 바꿔 놓았다.

 

만 레이가 참여한 예술 운동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던 초현실주의다.

<흑과 백>에서 잠이 든 모델은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꿈속으로 빠져든 것일까?

현실을 상징하는 것은 가면일까, 아니면 키키일까?

만 레이는 이 작품을 통해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에서 대화를 시도한다.

아마도 그는 현대와 원시를 비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둘 중 현대는 누구이고 원시는 누구인가?

 

 

 

 

리듬 속에

파울 클레, 1930, 황마 캔버스에 유채, 69.6×50.5cm, 파리, 퐁피두 현대 미술관

 

 

1912년 파울 클레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아우그스트 마케 등이 결성한

'청기사파Der Blaue Reiter' 의 두 번째 전시회에 자신의 첫 작품들을 소개했다. 그해 파리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로베르 들로네의 추상화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1914년에는 튀니지를 여행하면서 색채에 매료되고,

이후 색에 관한 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클레의 명성은 더 높아졌고, 1920년에는 독일의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립한

바우하우스에서 회화 교수로 초청받아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그는 책 제본이나 유리 페인팅, 형태 이론을 가르쳤다.

클레는 다채로운 색채의 그림으로 유명했으나 검정과 하양을 바탕으로 한 기하학적 패턴에 대한 성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바우하우스에서 클레는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정리했고 이를 매개로 학생들과 소통했다.

 

<리듬 속에>는 체스보드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이다. 검은색, 흰색, 회색이 칠해진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이

황토색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세 가지 요소들은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구조 속에 서로 표개져 있으며, 이런 구성은

마치 음악의 운율처럼 역동적이고 조화로운 리듬감을 그림에 부여한다.

 

클레의 아버지는 성악가 출신의 음악 교사였고, 어머니 역시 음악학교 출신이었으며, 클레 자신도 일찍부터

성악, 피아노,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이런 영향으로 그의 작품에는 음악적 요소가 짙게 깔려 있다.

이 그림에서도 음악을 선과 색으로 구현하려는 그의 스타일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여기서 화가는 사각형의 형태에

변화를 주어 움직임과 울림을 만들어 내 일종의 멜로디를 작곡가처럼 새로운 선율을 창작한다.

아울러 <리듬 속에>는 보는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탄생에 새로운 동력이 되는데,

이는 후일 19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옵아트Op Art로 발전한다.

 

 

 

 

귀걸이

알렉산더 콜더, 1944, 철사로 된 스태빌-모빌, 219×292cm, 파리, 퐁피두 현대 미술관

 

 

1930년대 초, 콜더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이루어져 동력으로 움직이는

조각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후일 마르셀 뒤샹이 '모빌mobile' 이라고 이름 붙인 이 조각들은 전통적인 조각

작품과은 완전히 달랐다. 그가 사물의 움직임이나 메커니즘에 관심을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계 공학을

전공 했고 단기간이었지만 엔지니어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예술 작품을 움직이게 하고,

그것에 고정되지 않은 차원을 부여하고 싶었다.

 

콜더는 자신이 배운 것을 엄격하게 적용하려고 했다. 그는 무엇도다도 미학과 기술의 측면에서 형태의 조화로운

균형에 몰두했다. 작품은 규칙적으로 흔들려야 하지만, 그렇다고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콜더는 <귀걸이>에 검은색 한 가지만을 사용했다. 여기서 검정 색조는 작품 전체를 채우고 잇지만 무거운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볍고 섬세하며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건 아마도 '귀걸이' 뒤에 있는 사람 형상이

적절하게 균형을 맞춰 귀걸이를 흔드는 모습을 관람객들이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각 작품에 대한 화가의 생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콜더가 문제 삼은 것은 '불균형' 이다. 주요 구성 부분과 부속품, 전진과 후퇴, 대칭과 비대칭의 균형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였다. 동력이나 기류에 따라 움직이는 콜더의 추상 조각들은 우리가 땅에 발을

디딘 상태에서 공기의 흐름에 어떻게 정교하게 균형을 맞추어 우직여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피에타

베르나르 뷔페, 1946, 캔버스에 유채, 172×255cm, 파리, 퐁피두 현대 미술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파리 화단에서 한 젊은이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과 실존의 부조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베르나르 뷔페다.

이 재능 있는 화가는 예술적,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파리 마치 》지의 표지를 장식한다.

 

 

 

1946년, 뷔페는 <피에타>에서 예수의 '십자가형' 을 자신이 살던 시대의 사소 범속한 환경을 배경으로

재해석했다. 이 작품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어머니와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가 현대적 복장을 하고 있다. 또한 사닥다리 발판, 목이 길고 손잡이가 달린 병, 병을 세워 운반하는

바구니 등 일상의 소박한 물건들도 그림 속에 배치했다.

 

뷔페는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서민 동네를 그린다. 곳곳에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대다수는

무심했던 비정상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고통 앞에서 무기력하고 막막하다는

표정들이다. 뷔페는 이 비극적 동란에 자신의 개인사를 섞어 넣었다. <피에타>에는 화가 자신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평화의 기쁨을 누릴 때, 뷔페의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화가는 극도의 상실감 속에서 세상을 차갑고 날카롭게 직시하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 낸다.

 

<피에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뼈와 가죽만 남은 듯 삐쩍 말랐고 각이 진 얼굴에 검은색 윤곽선이 두드러진다.

이런 구성은 터치가 간결하고 검정, 초록, 회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조각 예술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윤곽선에는

배경에 물감을 얇게 칠한 후 그 부분을 다시 긁어 작업을 했던 뷔페의 특성이 더욱 돋보인다.

 

뷔페의 <피에타>는 무신론을 표방했다고 한다. 이는 인생의 불행, 슬픔, 죽음 따위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벌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삶 속에서

자신의 야만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말 없는 희생자라는 점도.

 

 

 

 

회로

리처드 세라, 1972, 강철로 된 조각, 240×730cm, 뉴욕, 현대 미술관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표 조각가 리처드 세라는 1960년대부터 철이라는 재료가 인간이나 공간과

맺는 관계에 천착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왔다. 가장 유명한 것은 강철로 만든 조각으로,

육중한 스케일로 관람객들을 압도하여 위협감마저 준다.

 

 

 

1970년대부터 세라는 예술과 건축을 결합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관람객들은 설치된 작품 한가운데서 길을 잃거나 갈피를 잡지 못했다. <회로>는

관람객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그런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세라는 <회로>를 만들기 위해 강철을 사용했다.

그는 강철의 잠재성, 무게, 압축률, 함유 성분, 부동성 등에 특히 주목했다.

우선 2.5미터 정도의 강철판 네 개를 수직으로 세웠다. 각 판들은 전시실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안쪽으로

향하는 각도로 세워지며, 이 판들이 모인 중심에는 정방형의 텅 빈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해서 생긴 공간은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관람객들은 세워진 각각의 판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새롭게 형성된 작품 안으로도 들어가게 된다.

그들의 동작과 걸음에 따라 주변 공간과의 관계가 계속 변화한다.

물체와 예술과의 대화의 장이 이렇게 마련되는 것이다.

 

작품 제목 '회로' 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본래 이 말은 '흐름' 과 '순환' 을 의미하고

경로를 한바퀴 막힘없이 돌 수 있음을 암시하는데, 세라의 <회로>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컴컴한 색조의 강철판 모서리들은 각진 모양새가 위협적이고 정신을 어지럽힌다.

작품을 따라 돌다 보면 방향 감각을 잃어 더듬대기 일쑤다.

 

이처럼 세라는 별것 아닌 것들로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공포를 깨운다.

 

 

 

회로 (부분)

 

 

 

 

 

디테일 드로잉

키스 해링, 1987, 종이에 잉크와 펜, 79×109cm, 개인 소장

 

 

1980년대 미국 화단을 대표한 인물을 꼽으라면 해링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 특히 뉴욕의 사회, 정치, 문화적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1979년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그리피티 아트' 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 새로운 표현 매체는 그를 매료했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예술을

공유하고자 했던 그의 예술적 이상과 딱 맞아떨어졌다. 해링은 스스로 '거리의 예술가' 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표현 공간을 찾았다.

 

그는 지하철역의 비어있는 검은색 광고판에 흰색 분필로 그림을그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패턴이 일정한 방식으로 되풀이되는 그의 그림들은 '불법 낙서' 로 찍혀 경찰의 제재를 받았으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해링의 예술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일상생활과 밀착되어 있다.

그의 작업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단일 색조를 다채롭게 그리고 거침없이 사용한 해링의 작품을 살펴보면, 만화같기도 하고 그라피티 같기도 하다.

그림책처럼 단순한 형상으로 이루어진 해링의 그림들은 금새 식별할 수 있다. 검정 윤곽선으로 강조한 수많은

실루엣이 모여 있는 모양은 마치 개인 신전 같다. 여기에 표현된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은 어린이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즉각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해링은 자신의 작품으로 마약과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디테일 드로잉>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우리는 삶의 에너지, 유머와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해링은 이 작품을 발표하고 일 년 뒤인 1988년 에이즈 진단을 받게 된다.

어찌보면 <디테일 드로잉> 은 에이즈에 대항하는 화가의 부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여인들의 꿈

로니 참피친파, 1991, 캔버스에 아크릴, 90×60.5cm, 게 브랑리 박물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미술은 무엇보다 교리의 전수자, 전통의 수탁자,

지상과 천상의 매개자로 간주된 예술가들의 신비로운 증언이다.

 

기하학적인 선이 작품의 특징이다. 그림 속 선들은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듯한데,

얼핏 즉흥적으로 그린 것처럼 보여도 하나로 이어지는 정신과 육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사물의 테두리를 잇는 선을 처리하는 과정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조상의 형혼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영토와 사막같은 척박한 땅의 색깔도 표현되어 있다.

인간과 하늘, 세상이 하나로 상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로니 참피친파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의 의례와 제식을 잘 표현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에게 성스러운 '다른 땅' 에 몸을 맡겨 보라고 채근한다. 그곳은 노래와 북소리를 타고 모습을 드러낸다.

노래와 북소리의 리듬은 그림 속 윤고가선의 움직임을 따라 읽을 수 있다.

 

<여인들의 꿈>은 가장 내밀한 꿈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서양 사회에서 꿈은 부드러운 무감각 상태를 일컫는 말이거나 심리적 성찰이 머무는 곳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에서는 꿈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다른 땅' 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는 우리의 영혼과 조상들이 서로의 귀에 익은 노래를 함께 흥얼거린다. 꿈에는 국경이 없고 시공간 제약도 없다.

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차원을 넘어선다. 마치 <여인들의 꿈>에서 그림의 틀을 벗어나 바깥쪽으로

나아가려는 선들과 같다. 꿈은 그 속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자유롭다.

 

 

 

 

인용: 헤일리 에드워즈 뒤자르댕 지음 · 고봉만 옮김 <검정 금욕과 관능의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