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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검정에 담긴 모순의 미학 (1)

"검정은 색이 아니다"

 

 

탄생과 소멸, 고독과 유혹, 광기와 제의

권력과 빈곤, 비애와 평화

 

······

 

검정에 담긴 모순의 미학

무엇이 '당신의 검정' 인가?

 

 

 

 

예술에서의 검정

 

 

당신의 검정은 어떤 색인가.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에겐 분명 고유의 검정이 있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검정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금욕적인 검정이 있는가 하면 슬픔이나 두려움을 자아내는 검정, 우아하거나 병적으로 보이는 검정 등

다양한 검정이 있다. 앙리 마티스의 검정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검정은 본래 다른 모든 색을 집약했다가 소멸시키는 색이다."

 

 

 

검정은 태곳적부터 인류와 함께했다. 암벽에 원시적이고 시적인 그림을 그릴때부터 검정은 인류의 친구였다.

우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냥 바라보았을 인류에게 검정을 무슨 의미였을까? 그 의미가 무엇이든 반짝이는

별들이 점점히 박힌 검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이후 인류는 여러 가지 의식과 신앙을 만들어 갔고,

밤이나 불행, 죽음과 같이 분명히 인식할 수 없는 것에도 색별할 수 있는 뉘앙스를 부여했다. 이로써 우리의

의식이 깨닫지 못하는 것, 저 아래 어딘가에 숨겨진 것,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검정으로 모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인은 검정 색조를 신화 곳곳에 부여했다.

예를 들어 제우스도 두려워한, 위대한 밤의 여신 닉스는 검은 베일로 몸을 감싸고 있으며,

흑마나 부엉이가 끄는 마차를 탄다. 무엇보다 닉스는 지하 세계에 살면서 인간의 잠을 관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색이 검은색과 흰색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색채를 쉽게 분류하게 됐다. 하지만 아이작 뉴턴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1672년, 뉴턴은 백색광이 유리 프리즘을 통과하면 색이 여러 개로 분할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새롭게 색채를

구분했다. 이 과정에서 검정과 하양은 추방 된다. 뉴턴의 주장은 중세 이래 '검정은 색이 아니다' 라고 단언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생각해 온 사람들의 인식을 그저 확인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레오나르도가 깜빡 잊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검정 안료가 당시 매우 비쌌고 공기 중으로 쉽게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 이유 때문에 그가 검정을 내쳤을지도 모른다.

 

 

 

 

 

 

 

 

 

"그림에 활기를 주고 싶다면 상아를 태워서 만든 아이보리 블랙으로 점 하나를 찍어 보세요.

아! 얼마나 아름다운지!"

 

- 오귀스트 르누아르

 

 

 

 

 

 

 

1810년 독일의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색채에 관한 1,400쪽짜리 논문집을 출판함으로써 색과 빛에 관한

뉴턴의 이론에 도전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세우는 데 20년을 할애했고, 색채 현상이 빛과 어둠의 경계

선에서 일어난다고 인식하였다. 괴테의 색채론은 비합리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미학적 관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6년 12월 6일. 파리의 매그 갤러리가 《검정은 색이다》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보수적이던 미술계에서 불손한 제목이었지만 보나르, 마티스, 부라크 등의 화가들이 검정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전시회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라스코 동굴 벽화 황소의 전(부분)

Grott de Lascaux, 기원전 18000년 - 기원전 15000년

 

1940년 9월 8일,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 지방에 사는 십 대 소년 네 명이 숲속을 산책하던 중 개 한 마리가

구멍에 빠져버렸다. 소년 마르셀 라비다가 개를 구하기 위해 구멍을 살펴보다가 커다란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 그는 마을에 있는 저택의 정원으로 연결된 비밀 통로라고 생각했다.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동굴 벽화의 흔적과 마주쳤다는 사실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선량공 필리프 3세의 초상

로히어르 판데르 베이던, 1945, 목판에 유채, 31.5×22.5cm, 다종 미술관

 

중세시대에 검정은 사랑받지 못한 색이었다. 작품 주문자들은 성령의 밝은 빛을 그 무었보다 중시하여 작품을

가장 영롱한 빛깔의 안료로 칠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돈을 지불했는데, 검정은 암흑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다.

이후에 검정은 플아드르 화가들 덕분에 권세를 되찾는다.

 

무엇보다 검정 덕분에 자수와 보석이 돋보였다. 어두운 색 천 위로 화려한 금목걸이를 거는 것보다 세련된 착장이

또 어디 있을까? 금으로 된 황금양모기사단의 목걸이는 그의 어두운 의상 위에서 더욱 고귀한 빛을 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필리프의 검정이 엄격한 정신, 더 나아가 금욕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필리프가

사치스럽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부유한 메세나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는 뭇사람의 시선을

끄는 복장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권력을 확고히 했다. 패션이 커뮤니케이션에서

어떻게 전략적으로 사용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쾌락의 정원

히에로니무스 보스, 오른쪽 날개, 1490-1500, 패널에 유채, 220×97cm, 프라도 미술관

 

난해하고 혼란스럽다. 초현실주의 등장 이전에 이미 그는 초현실주의적이었다.

단편적인 장면이나 상징의 의미를 판독하기 위해 일종의 흔적 찾기 놀이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전통적인 제단화로 관람객들은 세 개의 그림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끝내 어지러워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왼쪽 날개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저지르고 유혹과 타락을 맛본 후,

오른쪽 날개 그림에서 인류가 저주받았다고 할 수 있는 운명으로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 냈다.

천국에서 추방된 귿르은 가상의 애로틱한 에덴동산으로 나아간다. 그곳에는 성서가 허락하지 않은

유혹과 허울뿐인 한순간의 행복에 굴복한 벌거벗은 남녀들이 뒹굴고 있다.

이 그림에는 탐욕부터 탐식까지 일곱 가지 대죄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종말론적 색채가 강한 이 작품의 원경에는 화염에 휩싸인 건물들과

동시에 어둠속을 비치는 희망의 불빛 같은 것도 보인다.

 

 

 

 

나르키소스

카라바조, 1569, 캔버스에 유채, 110×92cm, 로마, 국립고전회화관

 

 

깨끗한 숲속에 맑은 샘이 있었다. 사냥을 하다 지친 나르키소스는 샘에서 목을 축이다가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한다. 그는 물에 비친 자신과 깊은 사랑에 빠져, 실체가 없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형상을 헛되이 잡으려 한다. 이것이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서 말하는 나리키소스 신화이다.

카라바조가 창안한 명암법과 극적인 화면 구성은 후대의 미술 유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화가들뿐 아니라 플랑드르파도 수용한 이 스타일은 어두운 배경과 대상에

입체감을부여하는 사실주의적 표현 기법이 특징이다.

 

 

 

 

여인의 초상

렘브란트, 1632, 캔버스에 유채, 111.8×88.9cn,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렘브란트는 델포트의 시장이었던 '코르넬리스 판 베레스태인' 의 초상화를 그렸다.

역사학자들은 검은 옷을 입은  이 여성의 초상화가 베레스테인의 초상화와 짝을 이룬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 그림은 베레스테인의 두 번째 부인 코르비나 판 호프다이크의 초상화였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어둡고

거친 색조를 이용한 명암법으로 호평을 받았다. 초상화 속 여인은 당시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오른손에 검은 타조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지만, 치마 색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부채는 부의 상징이었다. 전체적으로 풍성하고 매력적인 옷의 외형은 스페인풍의 유행을 따른 것이다.

어두운 의상 좌우로 플랑드르산産 질 좋은 하얀 레이스 크프스가 도드라진다. 당시 유행하던 검은 옷은

수수하고 꾸밈이 없으며, 심지어 청교도적인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소박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녀의 드레스는 금색 자술르 놓은 허리띠로 장식되어 있고, 옷감의 소재 자체도 값비싼

실크로 하려하게 빛난다. 그런데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러프는 자칫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여인이 살던 델르트시는 상당히 보수적인 곳. 그녀가 근엄한 옷차림을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갓난아이

조르주 드 라투르, 1648, 캔버스에 유채, 76×91cm, 렌 미술관

 

 

그림의 배경에는 아무것도 없고, 소품이랄 것도 없다.

모든 초점이 세 사람의 얼굴과 양초의 불빛에 집중되어 있다. 화가는 우리에게 고요함을 들려준다.

화가가 그린 것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면서 자양분을 공급하는 밤이다.

 

 

 

 

라플란드 마녀들을 찾아온 밤의 마녀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 1796, 캔버스에 유채, 101.6×126.4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여기 소개된 퓌슬리의 그림은 그의 야심 찬 프로젝트 '밀턴 갤러리' 에 속하는 작품이다.

퓌슬리는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의 작품에서 착상을 얻어 47점의 작품을 제작한다.

<밤의 마녀>를 그리면서 퓌슬리가 참조한 대목은 밀턴의 《실낙원》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이다.

"밤의 마녀를 따라가 보세요. 은밀히 부름을 받고 하늘을 뚫고 나와, 어린아이 피 냄새에 끌려,

라플란드의 마녀들과 지친 달이 그들에 매혹되어 이지러질 때까지, 그들과 춤을 추러 온 그녀를."

끔찍하지 않은가? 민간 신앙에서 비롯된 마녀라는 인물은 인간의 영혼에 숨겨져 있는 충동을

구현하는 사악하고 초자연적인 반反영웅으로 문학 작품에 종종 등장했다. 퓌슬리는 전통적으로

아기 예수와 그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서 풍기는 유대감을 소름끼치는 장면으로

재해석했는데, 이는 당대의 숭고 미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1808년 5월 3일

프란시스코 고야, 1814, 캔버스에 유채, 268×347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검은색과 회색 그리고 갈색이 주조를 이룬다. 중앙에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두 팔을 벌리고 가슴을

내밀어 총살 집행 대원들에게 맞서고 있는데, 샛노란 랜턴에 비친 그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순교한 예수를 연상시킨다.총을 겨누는 프랑스 군인들은 모두 등을 돌린 자세다.

고야는 난폭한 학살자들을 인간성을 상실한 익명의 집단으로 그렸다.

그림의 배경인 마드리드는 괴기스러운 건물들로 둘러싸여 마치

스멀스멀 기어가는 조용한 악마의 소굴 같다.

 

 

1808년 5월 3일(부분화)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1819, 캔버스에 유채, 491×716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제리코가 그린 것은 인간임을 포기하고 야만적인 충동에 몸을 맡긴 인간 군상이다.

그가 포착한 것은 인간성 너머에 있는 생존 본능이다. 어두운 색조가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

특히 시체와 같은 형상을 하고 얼이 빠져 있는 사람들에 집중되어 있어 절망감을 더한다.

여기에도 희망은 있다. 그것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피라미드형 구성을 통해 나타난다.

저 멀리 밝아 오는 빛 사이로 배 한 척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제 곧 악몽은 끝나리라.

제리코의 이 작품은 낭만주의를 선언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회색과 검정의 배열 - 화가의 어머니

제임스 에벗 맥닐 휘슬러, 1871, 캔버스에 유채, 144.3×162.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수많은 사람의 뇌리에 박혀 컬트cult가 된 '화가의 어머니' 와 '회색과 검정의 배열' 이라는 두 가지 제목이 있다.

특히 두 번째 제목에는 색채의 조화와 추상화 스타일의 화면 구성을 적극 지지했던 화가의 감성과 미학이 더욱 

잘 반영되어 있다. 휘슬러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림

속 어머니는 사실 장식에 불과하다. 그가 도전해 보고 싶었던 것은 회색과 흰색의 뉘앙스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의 도전에 일조했을 뿐이다. 그녀의 모습이 벽에 걸려 있는 아들의 판화 <템스강의 풍경>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보라. 윤곽과 선, 색조가 모두 일치한다. 휘슬러의 어머니는 그림 속 미술품이 되었으며, 독설가

들은 그녀를 정물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그림 속 화가의 어머니는 미국 청교도 여인의 절제되고 근엄함 모습을 하

고 있다. 아름다운 여성과 호화로운 식기를 탐했던 아들의 취향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휘슬러는 어머니를 위해

그림 속 실내를 중국풍 커튼, 일본식 발판, 그리고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선호했던 간결한 라인의 의자로 장식했다.

고전과 현대가 그림 속에 공존하는 것이다.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

에두아르 마네, 1872, 캔버스에 유채, 55×4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베르트 모리조는 인상파 최초의 여성 화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여기서는 그림의 모델로 등장한다.

그녀는 많은 예술가의 구애를 받았지만 결국 1874년 에두라르 마네의 동생인 외젠 마네와 결혼한다.

그림의 제목을 보고 화려한 제비꽃 장식을 예상하겠지만, 실제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대신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베르트 모리조가 걸치고 있는 검은 옷이다. 순수하고 강렬한 검정은 그림 속 밝은

빛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녀의 뽀얀 피부는 찬란하게 빛나는 배경 때문에기도 하지만 특히 검은 옷

덕분에 더욱 돋보인다. 에두아르 마네는 색조의 조화가 아니라 자신이 새롭게 개척한 색조의 대립을

통해 흑과 백의 아름다운 대비를 보여주었다.

모리조의 눈동자는 실제로 초록색이었지만 마네는 검정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그녀의 눈동자를 검은색

으로 그려 넣었다. 이 그림에서 검정은 근엄하고 엄격한 색이 아니다. 화가의 모델은 어두운 외관에도 불구

하고 점잖거나 엄숙해보이지 않는다. 헝클어진 머리 타래가 그녀의 얼굴을 에워싸고 커다란 눈동자는 호기

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아이러니한 눈빛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격식이나 형식을 벗

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리조는 집에 갇혀 지내는 양갓집 규수가 아니었다. 그려는 인물이 더 돋보이는

은 실루엣을 선호하던 당시의 도회 유행을 따르고 있다.

마네와 모리조가 서로 예술적 영향을 주고 받으며 플라토닉 러브를 추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마네가 검정을 승화시켰을 때 모리조는 하양을 예찬하며 화답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서로 다른 것은 더 강하게 끌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제비꽃은?

같은 해, 마네는 이 그림에서 소홀히 한 제비꽃 장식을 만회하고모리조의 마음을 끌기 위해

제비꽃 부케 그림 한 점을 남겼다.

 

 

 

 

 

마담 x - 피에르 고트로 부인

존 싱어 사전트, 1883 - 1884, 캔버스에 유채, 208.6×109.9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림 속의 도도하고 세련된 인물은 우아한 검정색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다. 언뜻 보기에

외설적인 작품이 아님에도 출품 당시엔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성은

프랑스 은행가 피에르 고트로와 결혼한 파리 사교계의 별, 지르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였다.

미국 뉴올리언스 출신인 그녀는 많은 화가들의 모델 제안을 거절했으나 사전트의 모델로서는 포즈를 취한다.

자신의 명성을 드날리고 싶은 화가와 자신의 미모를 과시하고 싶은 모델의 요구가 서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1880년대 여성들이 필수적으로 착용하던 크르셋의 영향으로 그녀의 잘록한 허리가 도드라지고 드레스가

약간 들려 있어 흘러내릴 듯하다. 당시에 검은 드레스는 외설스럽기는커녕 여성의 야회복으로 인기가 많았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왜 스캔들을 일으켰을까? 여기에는 한 가지 디테일이 빠져 있다.

사실 이 그림은 초상화의 첫 번째 버전이 아니다. 처음 그림에는 드레스의 오른쪽 어깨끈이 팔 아래로 흘러내려

과감하고 도발적인 모습이었다. 대중은 경악했다. 전문 모델이 나체로 포즈를 취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상류 사회의

유명한 부인이 벗겨질 듯한 의상을 입고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여론이 삼상치 않음을 느낀 사전트는 그림을

수정해 드레스 끈을 다시 어깨에 올렸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전트는 도망치듯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이주하고, 심지어 그림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 고트로 부인은 1891년 귀스타브 구르투아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다시 의뢰한다.

그녀의 자세는 이전과 거의 비슷했고, 드레스의 어깨끈도 여전히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논란도 없었다.

드래스의 색이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이었기 때문에 명예가 손상될 우려는 없다고 판단되었던 듯하다.

 

 

 

 

 

검은 십자가

카지미르 말렙치, 1915, 캔버스에 유채, 80×80cm, 파리, 퐁피두 현대 미술관

 

 

1915년 , 총 150점이 발표된 상테페테르부르크에서 전위파 예술가들의 마지막 합동

미래주의전 《0.10》에 말레비치는 40점을 선보이며 절대주의 회화 운동의 시작을 선언한다.

바로 이 전시회에서 절대주의의 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자 말레비치의 대표작인 <검은 사각형>이 공개된다.

이후 화가는 똑같이 사각형에 기반을 둔 그림 <검은 원>과 <검은 십자가>를 더 그려낸다

 

말레비치의 초기 모노크롬 회화는《0.10》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속 십자가는 완전히 똑바르지 않다. 가로와 세로 막대기 부분이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뒤틀려 있고 불균형하다. 무엇보다도 말레비치는 이 그림으로 가톨릭 도상학에서 제시한 십자가의 상징마저

파괴했다. 1916년에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 작품 다음에는 이제 무엇을 상상 해야 할까?"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 1937, 캔버스에 유채, 349.3×776.7cm, 마드리드, 레니아 소피아 국립 미술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도라 마르는 1937년 5월 1일부터 6월 4일까지 <게르니카> 제작의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 작업으로 스케치 45점을 그렸는데, 이 스케치는

크리스티앙 제르보가 운영하는 잡지 「카이에 다르」 특별호를 위해 요청된 것이었다.

스페인 정부는 <게르니카>를 회수 하고 싶었지만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을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에

보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스페인에 그림을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게르니카>를

뉴욕 현대미술관에 임대했고, 그의 소원은 지켜졌다. 프랑코가 사망한지 6년 후인 1981년, 피카소의

변호사은 <게르니카> 가 스페인에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1992년부터 <게르니카>는 마드리드의

네니아 소피아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는 프랑코가 살아 있는 한 <게르니카>가 스페인에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내 삶의 대표작이며, 나는 그 어떤 것보다 이 작품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 파블로 피카소

 

 

 

 

 

 

 

인용: 헤일리 에드워즈 뒤자르댕 지음 · 고봉만 옮김 <검정 / 금욕과 관능의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