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세한도」, 종이에 수묵, 23.7×108.2cm,
「세한도」는 김정희가 그의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쓴 편지 앞에 그려 붙인 조그만 그림이다.
편지를 쓰고 남은 먹으로 찍어 그린 듯 칼칼하게 마른 붓질이 소략한 그림이지만, 「세한도」는 하나의
회화작품으로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필묵의 긴장감과 구성의 간결함이 돋보이는 그림이면서,
그 화면 너머 그림 내면에 얽혀 있는 특별한 사연이 있기게 더욱 그러하다.
「세한도」의 사연은 함께 적혀 있는 편지글에 곡진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과 편지에는 제주에 유배중인 김정희의 개인적 비분이 서려 있고, 유배지에서 바라보이는
인간사 속 비분강개가 담겨 있다. 이 편지 모든 구절들이 사마천의 《사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은
이 편지의 내면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사람마다 주어지는 시련이 다르고,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이 다르다.
억울하게 당한 혹독한 시련으로 중국 전한前漢시대 사마천이 궁형宮刑을 당한 일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벌을 사형보다 심한 벌로 여겼지만, 사마천은 사형을 거부하고 궁형을 택하였다.
남성을 잃은 분함으로 치를 떨고 피를 토하며, 사마천은 역사서 《사기》를 집필하였다.
누군가 말했지. '천도天道는 공평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에 선다' 고.
그렇다면 백이와 숙제 같은 이들은 착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어질고 고결한 덕행을 쌓기를 이같이
하였건만 그들은 굶어죽었지. ······ 나는 감히 이것을 의심하노라. 과연 '천도' 라는 것은 있는가 없는가?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若伯夷叔齊, 可謂善人者, 非邪?
積仁絜行如此而餓死. ······ 子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사마천 《사기》 「백이열전」
'천도는 공평무사하며 언제나 착한 사람 곁에 선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는 말을 《노자》에 실린 문구이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덕행을 행하고도 억울하게 죽어간 인물이 숱하게 많고, 악의로 남을 헤치고도
부유하게 천수를 누린 인물이 셀 수 없이 무수하다. 사마천이 질문을 던진다. '천도라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천도를 역사는 증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은 오히려 정반
대 였다. 사마천은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오랜 역사에 비추어보면서, 자신의 삶이 그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위로받았던 것일까. 사마천은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몰두함으로써
그가 당한 시련을 극복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선량함이 하늘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의 몸으로 절감하였다.
그러나 그가 저술한 《사기》는 우리로 하여금 선량하고 올바른 삶을 포기하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사마천은 눈을 부릎뜨고 역사 속 진상을 밝히려고 하였다. 천도가 있는지 없는지는 밝히지 못했지만,
사마천은 사람들이 남긴 행적의 옳고 그름是非에 대하여 삼엄하게 판가름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기를 읽으면서 깊은 숨을 들이마시게 되고 시비是非를 가르는 기상을 키우게 된다.
《사기》는 가장 권위 있는 역사서로 남게 되었고, 일찍이 우리나라 《삼국사기》의 기본체제를
제공 하였으며, 조선의 학자들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하였다.
김정희가 「세한도」 곁에 쓴 편지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마천의 《사기》를 인용하고 있다.
김정희, 「세한도」 중 편지글
이우선에게
지난 해(1843), (그대가)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 두책을 부쳐주었고,
올해에는 또 《황조경세문편》을 부쳐주었소. 이 책들은 모두 세상에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천만리 먼 곳에서
여러 해에 걸쳐 사들인 것이지 일시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오. 더구나 세상의 흐름은 권력가와 재력가를
좇는데, 그대는 이 책들을 구하느라 이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들여서, 권세와 재력가 들에게 주지 않고,
외딴 섬에서 초췌하게 몰락한 사람에게 주기를 세상 사람들이 권세가와 재력가를 좇듯이 하였구려.
태사공 사마천이 말했다오.
"권력이나 이익으로 만난 사람들은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유도 소홀해진다" 라고.
그대 또한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한 사람이거늘, 어찌 이 세상의 권력과 이익의
도도한 흐름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권세나 재력의 잣대로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이오?
사마천의 말이 틀렸던가?
공자께서 가로되, "추운 시절이 된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 하셨소.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상관없이 시들지 않는 나무들이오. 추워지기 전에도 소나무 잣나무요,
추워진 뒤에도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이거늘, 성인께서는 유달리 추어진 뒤에 그들을 칭찬하셨다오.
기금 그대가 나에게 대하는 것이 이전에 더한 것이 없고, 이후에 덜한 것이 없소.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것이 없었으나, 이후의 그대 또한 푸른 정조와 굳건함 때문만이 아니라,
추워진 뒤에 느끼신 바가 있었기 때문이오.
오호라! 전한前漢의 순박한 시절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같은 훌륭한 사람들마저
그 빈객들은그들과 잘 교유하다가 돌아서곤 하였으니,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을 써 붙여
풍자한 것 같은 박절迫切의 지극함이라오. 슬프도다!
늙은이 완당이 쓰노라.
去年, 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 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上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
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이 글은 「세한도」의 왼편에 있으며, 후에 그의 문집 《완당전집》에 「이우선에게」라는 편지글로 다시 실렸다.
이 글에서 김정희는 사마천이 「정세가鄭世家」에서 권력과 이익으로 사람들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는
변덕스런 인심을 한탄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상적의 행위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을 칭송하고 있다.
이 글은 또한 사마천이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인용한 공자의 말, "날이 추워진 뒤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를 재인용하고 있다. 공자의 이 말은 원래 사람들의 근본이
서로 다른 것이었는데, 사마천이 '천도' 를 논하며 이 구절을 적용함으로써, 이 구절은 역사 속
인간들의 배반에 대한 삼엄한 인식으로 그 의미를 거듭 부여받게 되었다.
- 김정희 그림의 주제이며 편지의 주제 개념이 되는 세한송백歲寒松柏의 구절이 공자의 《논어》에서
직접 온 것이 아니라 사마천의 비통한 역사인식을 거쳐 온 구절이라는 사실은 그동안 이 그림의
해설자들에게 종종 간과된 경향이 있다.
글 마지막 문단에 예로 든 급암, 정당시, 적공 등의 이야기들도 모두 《사기》의 「열전列傳」 편에 기록된 이들이다.
김정희는 이 편지글 전편을 매우 의도적으로 사마천의 《사기》에서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 편지의 말미에 예로 든, 적공이 방을 붙인 사연은 이러하다. 한나라의 적공이 높은
벼슬에 오르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열 배도 넘었다.
그러나 적공이 힘을 잃자, 적공의 대문에 참새집이 지어질 만큼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적공이 다시 벼슬에 오르자 빈객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적공이 대문에 방을 써 붙였다.
한번 죽고 한번 살아봐야 비로소 사귐의 정을 알게 되고, 한번 가난해지고 한번 부귀해봐야
비로소 사귐의 양태를 알게 되며, 한번 귀해지고 한번 천해지면 이내 사귐의 정이 드러난다.
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贫一富, 乃知交態, 一贵一贱, 交情乃見.
-사마천 《사기》, 「급정열전(汲鄭列傳)」
세상의 인정, '사귐의 정交情' 이란 이러한 것이라고 사마천은 단정하였다.
그러니, 이상적이 귀양 사는 김정희에게 귀한 책을 잔뜩 보내준 일은 사마천이 거듭 한탄한
세상인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김정희는 물었다. "사마천의 말이 틀려던가?"
- 그럴리 없다! 이상적 한 사람이 책을 보냈다고 해서 세상 인심이 좋아진 것도 아니며
사마천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김정희는 이 편지글은 '슬프다悲夫!' 라는 탄식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곧 사마천이 「적공열전」을 기술한 후 뱉어낸 탄식이며, 사마천이 그 글을 끝맺은 마지막 한마디였다.
생각해보면 비통할 뿐이다. 이상적이 보내준 책 선물은 김정희로 하여금 제주에서 받고 있는 세상인심에 대하여
토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편지는 고마움의 기쁨보다 분한의
'슬픔' 이 농도 짙게 흐르고 있다. 김정희는 이상적으로붐터 분명히 큰 위로를 받고 있는 듯하다.
역사가 사마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모진 고문을 받고 제주라는 외딴섬에 든 김정희는
여전히 외롭게 두 주먹을 다시 쥐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신세 아닌가.
제자 이상적의 선물은 김정희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었겠지만, 동시에 그의 분한 마음을 더욱 흔들었을 것이다.
성인이 높이 기린 겨울 송백의 생리적 굳건함 때문만이 아니라 겨울날의 그 푸름에서 공자가 감동을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더하였다. 이 말은, 이상적의 행동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유배된 척박한 처지에서 이상적의 행동이 김정희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뜻이다. 김정희는 설명하고 있다.
이상적의 행동이 김정희가 유배 오기 이전과 다르지 않기에, 만약 유배 오기 전이라면 책을 선물한 이런 일은
특별히 칭송될 일이 아니었노라고. 송백을 빗대어 이상적을 높이 기린 칭송은 김정희가 이상적으로부터 받은
감동과 고마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김정희의 이러한 감동의 표현 이면에는 이전같이
대해 주지 않는 다른 모든 사람들, 즉 세상인심에 대한 뼈저린 절감이 더 크게 울리고 있다.
이상적을 높이 칭송한 김정희의 태도에는
사마천으로부터 배운 역사 이해가 또한 반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뜻이 곧았던 충신 백이와 숙제, 우직했던 제자 안회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칭송되는 것은 공자의 칭송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마천이 「백이열전」에서 지적하였다. 김정희는 이러한 역사의 공력을 그의 상황에 적용하였다.
역사 기록의 효력에 대한 사마천의 지적도 과연 틀리지 않았다. 김정희가 이상적의 행적을 기록하고 칭송한
이 편지와 그림으로 인하여 이상적의 이름은 우리 문화사에서 높은 족적으로 남게 되었다.
김정희는 「세한도」라는 제목의 작은 그림을 편지 앞에 더하였다.
편지를 펼친 이상적은 그림 곁의 글을 가장 먼저 보았을 것이다.
"우선은 이를 감상하시오! 藕船是賞"
이 글은 '歲寒圖' 라는 그림의 제목 아래쪽 옆에 세로로 작게 적혀 있다.
이 글귀는 이 그림 「세한도」가 편지의 도입부라는 것을 말한다.
글과 혼연일체를 이룬 그림으로 이만한 것이 드물다.
「세한도」는 추사선생이 글에서 말한 감동과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바짝 마른 붓질의 갈필渴筆이 성마르고, 앞뒤도 맞지 않게 기묘한 꼴로 웅크리고 있는 달창집은 외롭기 짝이없다.
그린 이의 심정에 묻어 둔 슬픔이 속절없이 드러나는 이 달창집과 이 마른 붓질은 푸른 송백을 세울 배경이 된다.
이 그림의 화제는 추운 날의 송백이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송백의 꿋꿋한 푸름과 그들이 견디고 있는 추위와
외로움을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이로써 송백에 빗댄 그의 칭송을 담아내고자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희가 그린 뒤편 잣나무들은 어딘가 성글지만 두 그루가 나란히 꼿꼿하고, 오래 묵은 소나무는 온 몸이
거의 말라 묵직하게 내려앉았지만 뻗어난 한 가지에 난 솔잎이 튼실하다. 이 꼿꼿함과 튼실함은 칭송받을
만한 겨울날의 기상이요 고마움이다. 그런데 치켜들듯 서 있는 어린 잣나무들은 몸이 너무 가늘고, 튼실한
솔잎을 피워낸 소나무 가지는 오직 한 가닥이며 그 소나무의 몸통은 너무 늙어 거의 다 말라 죽어간다.
이 그림에서 가장 압도적인 이미지를 던지고 있는 이 소나무는 그 모습이 볼수록 처연하여
위태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림 속 송백이 한겨울의 푸름을 견디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추위 속에도 푸름을 지키고 선 송백에게 고통이 없겠는가.
그 고통이 없다면 송백의 푸름에 무슨 감동이 있었을 것인가.
그것을 표현하려는 것이 김정희의 뜻이었을까. 혹독한 시련과 외로움을 견디고 선
이 그림 속 송백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 끝이 저리듯이 시려온다.
이 편지를 받아든 이상적이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유는 스승의 칭송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여전히 바다 건너 외딴섬에 갇혀 있는
스승의 신세에서 울려나는 슬픔 때문이었으리라.
이 그림 「세한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이상적의 입장이 되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어렵고, 혹은 송백 같은 사람이 되리라고 다짐하기도 쉽지 않다.
이 편지와 글의 주제는 고마움을 전달하는 마음 그 밑바닥에 거대한 지하광맥처럼 흐르고 있는 '슬픔' 이다.
그 슬픔을 공감하는 것이 이 그림 감상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세상인심이란 예나 지금이나 송백 같지 않다
는 것, 송백 같은 사람이 되더라도 사늘의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사마천의 통찰이며, 김정희의 슬픔이다. 역사를 돌아보고 이를 통탄하며 그림 속 송백의 존재를 기특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이 그림과 글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춥고 외로워도 푸름을 지키는 송백의 존재가 이 세상에 귀貴하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 그림 속 송백의 기상이 언제 보아도 소중하게 보일 테지만, 송백의 기특함을 감상하노라면
우리는 이 그림과 편지의 주제인 슬픔悲을 벗어날 길이 없다.
추운 날 푸른 송백같은 존재가 드물고 귀하다는 사실은, 우리를 분하게 하는 슬픔이며
동시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인용: 고연희 著 <그림, 문학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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