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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그림이 된 문학, 문학이 된 그림 (4)

도연명은 정절선생靖節先生, 오류선생五柳先生 등으로 불리며 흠모된 인물이다.

그의 「귀거래사」는 벼슬을 모두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간 그해(405년) 혹은 그 다음 해쯤 지어진 글이다.

이 작품에는 전원으로 돌아가는 기쁨과 전원생활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고, 전원에서 누릴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열거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행복을 위해 현실의 부귀와 권력에의 욕망은

물론이요, 생명이라는 삶 자체에 대한 집착에서마저 자유로워질 것을 독자들에게 권하고 있다.

 

 

 

 

전기, 「귀거래도」, 종이에 수묵담채, 109.0×34.0cm, 삼성미술관 리움

 

 

「귀거래사」를 그린 그림 「귀거래도」는 중국과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제작되면서, 유배를 떠난 이들에게나

현실에 머무는 이들 모두에게 현실 너머의 기상을 누리게 해주고 전원의 행복을 상상하게 해주었다.

여기서 감상하고자 하는 그림은 조선후기의 「귀거래도」 한 폭이다.

19세기 중인화가 전기가, 유배의 명을 받고 전원으로 쫓겨 왔던 한 어의의 요청을 받아 그리게 된 것이다.

 

전원에의 소망은 복잡한 인간관계와 소음과 매연에 시달리는 현대 도시민만의 것이 아니었다.

1,500년 전, 5세기에 중국의 도연명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들 들락거리고 수레먼지 이는 세속의 소란을 벗어나 대자연의 평온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도연명은 당당하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전원으로 돌아갔다. 그의 「귀거래사」는 전원으로 돌아가는 순간의

기쁨과 전원생활의 가능한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남향집 작은 창에 기대어 나무를 바라보다가 슬슬 걸어

나가  소나무의 두툴두툴한 몸통을 어루만져보고 둥지로 드는 저녁 새들을 바라보는 여유 속에서 맘대로

음악을  연주하며 맘대로 책을 읽는 영원한 안식의 노래이다. 혹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돌아간 후 그의

꿈을 다잡고자 노래를 지었는지도 모른다. 이 노래에서 도연명은 은일자로서의 해피엔드를 예상하고 있다.

 

 

 

돌아가리!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왜 돌아가지 않으리

내 스스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었던 것을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지난 일 탓할 필요 없고 앞으로의 일을 올바르게 할 것을 깨달았도다.

길을 잘못 들었지만 더 멀리 가기 전에, 이제는 옳고 예전은 잘못되었던 것을 알았다.

배가 흔들흔들 가볍게 가고, 바람이 한들한들 옷을 스치는구나.

길손에게 길을 물어 가노라니, 새벽빛 희미한 것이 한스럽구나.

이윽고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마음이 기쁘고 설렌다.

머슴들이 마중 나오고, 어린 것들이 문에서 기다린다.

세 갈래 길은 잡초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살아 있구나.

어린 놈 손잡고 방에 드니, 술 가득한 항아리가 있네.

술병과 술잔을 가져다 혼자 따라 마시며, 뜰의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웃음 짓노라.

남쪽 창가에 기대어 멋대로 하니, 무릎 겨우 들일 작은 집이 편안하구나.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기리라. 문이야 달렸지만 언제나 닫혀 있겠지.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가다가 쉬고,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리라.

구름이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다 지친 새들이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저녁해 어두워지려 할 제, 홀로 선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거리리.

 

돌아가리!

사람들과의 교제를 모두 그만두노라.

세상과 나는 인연을 끊었으니,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하리.

친척들의 정담에 즐거워하고, 금琴을 타고 책 읽으며 시름을 달래리라.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다 알려주면, 서쪽 밭으로 가 밭을 갈리라.

혹은 휘장 두른 소레를 부르고,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으리.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나무들은 즐거운 듯 자라나고,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르리.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나의 생이 머지않아 끝날 것을 느끼리라.

 

끝났노라!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리. 이제 초조한 마음으로 욕심내어 무엇하리.

부귀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고, 신선계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리라.

동쪽 언덕에 올라 나직하게 노래하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지으리.

자연조화를 타고 생명이 끝나는 대로 돌아가리니,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悲. 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塗其未遠, 覺今是而昨非. 舟搖搖以輕颺, 風飄飄而吹衣. 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

乃瞻衡宇, 載欣載奔. 僮僕歡迎, 稚子候門. 三徑就荒, 松菊猶存. 携幼入室, 有酒盈樽.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 倚南牕以寄傲, 審容膝之易安. 園日涉以成趣, 門雖設而常關.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游觀.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景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

 

歸去來兮. 請息交以絶游. 世與我而相遺,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于西疇. 或命巾車, 或棹孤舟. 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木欣欣以向榮, 泉涓涓而始流. 善萬物之得時 感吾生之行休.

 

已矣乎! 寓形宇內復幾時, 曷不委心任去留, 胡爲乎遑遑欲何之.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耔.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보수가 많거나 적거나 간에 사회조직의 번화함 속에 들면 감정이 소모되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변질되고 있다는 위기감이 들 때면, 이를 떨치고 떠나고 싶은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대개는 떠나지 않는다. 현실의 의무와 욕망이 쉽게 놓아지지 않기 때문이리라. 현실의 의무와 욕망의 몫이 

사실 얼마나 큰가. 가족을 거느린 가장이 세속을 툭 떨치고 나면, 그 자신의 사회적 포부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가족 부양과 자녀 교육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온다. 도연명의 경우 귀족사회의 부패 속에서 미관말직을 얻은 신세

라 벼슬로 인한 수입이 넉넉지 않았고, 벼슬살이를 떠나 고향의 토지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경제적 판단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작은 보수 오두미五斗米에 허리를 굽히기 싫었다는 그의 자존심을 받쳐줄 만한 물질적 여건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도시를 탈주한 지식인 도연명이 맞닥뜨린 실제 상황은

농사짓는 아내와 시골의 뜰에서 놀고 있는 자녀들이었다.

 

우리가 현실을 떠나지 않듯이, 옛 문인들도 그들의 현실을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전원으로 '돌아가리' 라는 귀거래歸去來는 현실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을 '떠나가리' 이다. 

있어야 했고 있고 싶었던 곳을 떠나는 것이다. 도연명 역시 현실에서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룰 수 없었기에

떠났다. 떠나는 도연명의 참 속내가 어떠하였으리라마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떠나는 자의 기상을 높이

세우고, '떠남의 행복' 과 '떠남의 미학' 까지 훈련시켜주고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한중일의

동아시아에서 천 년이 넘도록 끝없는 사랑을 받은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준다.

 

현실 속에서 승승장구하던 고위직 관료들이 '귀거래' 를 가장 즐겨 읊었다.

벼슬생활의 숨은 어려움을 토로하며 그들 내면의 초월적 기상을 확인해보거나 혹은 자랑하기 위함이었을까.

그렇다면 「귀거래사」는 세속의 굴레 속에서 세상의 역사를 일구어 가는 관료문인들의 노고를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기능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한편, 머물고 싶었으나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즉 정치

판에서 쫓겨난 사람들에게도 「귀거래사」는 절묘하게 읽혔다.  떠남의 억울함을 잊을 수 있도록

떠남의 행복과 미학으로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선, 「귀거래도」, 종이에 수묵담채, 26.0×106.6cm, 1285년경

 

 

 

 

 

 

도연명의 '귀거래' 는 당나라 시인 두보, 송나라 철학자 주자에게 모두 흠모되었다.

유배를 당했던 북송의 소식이 도연명을 떠올렸고, 같은 시절 문인화가 이공린이 「귀거래도」를 그렸다.

조국 남송이 부패하고 몰락하는 현실 속에서 은일을 꿈꾼 전선이 「귀거래도」를 정성스럽게 그렸다.

한반도에서도 그러하여, 고려조 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성리학계에서 가장 엄격한 정도전과 송시열의

사상체제에 모두 도연명이 수용된 것은 특기할 일이다. 조선전기 성공적 관료였던 서거정이 '귀거래하리' 를

읊었고, 같은 시절 세상 밖을 떠돌던 김시습도 귀거래의 기상에서 기운을 얻었다. 조선중기 사화와 당쟁이 분분

하여지면서 관직생활의 불안함이나 관직에서 밀려난 억울함이 소용돌이칠 때, 떠난 자와 머무는 자 모두에게

「귀거래사」는 유효했다. 이현보는 일찌감치 벽에다 「귀거래도」를 붙여놓았고, 말년에 이렇게 읊조렸다.

"조정에 출입하기 10년 세월에 귀밑머리 희어졌으니, 벽에 붙인 「귀거래도」를 이루지 못했구나."

그가 일흔이 넘어 은퇴를 하면서 다시 읊었다. "귀거래, 귀거래, 말뿐이고 떠날 이 없네!"

 

19세기 중엽 조선의 궁전에서 왕실의 신병을 돌보던 어의로 이기복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하루아침에 어의 자리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유배까지 당했다.

이유는 그가 지어 올린 약이 적절한 효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유배된 곳의 한적한 전원에 앉아 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읽었다.

어의가 되기까지의 고생이며 급작스레 쫓겨난 참담함 속에서 그는 「귀거래사」의 위로에 귀를 기울였다.

"인정받는 어의가 되려고 마음을 졸이며 살던 시절은 당신의 정신을 노예로 만들며 살았던 잘못된 삶이었어.

인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그러니 하늘이 주신 수명을 천천히 즐기며 자연 속에서

즐겁게 살게 된 것을 차라리 즐기시게나.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게나!"

 

 

 

 

전기, 「귀거래도」세부도 상, 하

 

 

 

고람 전기가 그림 이 그림, 「귀거래도」는 조선시대 회화작품 가운데서도 손에 꼽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

그림의 오른편 위로 '歸去來圖' 라는 제목이 선명하고, 그림의 아래를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연명의

모습이 조그맣게 담겨 있다. 《고문진보》에 실려 잘 알려진 「도연명 초상화」를 보면 도연명의 모습은

"도연명 선생 심양의 골짝에 돌아가시네. 명아주 지팡이에 부들로 엮은 짚신 신고 한 폭 두건 두르셨다네"

라고 묘사되고 있다. 그림 속 도연명은 작게 그려져 있지만 머리에 두건을 둘러쓴 모습은 알아볼 만하다.

또한 도연명의 고향은 강서성의 심양인데 그곳에는 파양호라는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이 그림 속 산수는

심양의 파양호일 것이다. 이 그림은 조선중기 시인 백광훈이 읊은 시를 떠오르게 한다.

"심양 구비로 도연명이 돌아가니, 후인이 사모하여 그림으로 그렸지.

새벽빛 희미하고 갈길 아직 멀구나, 물과 구름 속에 흔들리는 작은 배 하나."

 

그림 속 물 건너 도연명의 집 앞을 보니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다. 오류선생이라 자칭한 그의 전원저택이다.

도연명의 저택으로는 지나치게 초라하고, 걸상도 없는 테이블은 아무래도 조선화된 상상의 이미지이지만,

쪽배와 어울린 고요한 분위기가 감상자에게도 여유로움을 안겨준다. 그 위로는 푸른 소나무가 유난스럽게

큰 키를 자랑하며 목을 빼고 섰다. 도연명이 읊었듯이, 그 등짝을 어루만질 소나무이니 도연명의 도착을

기다리는 듯하다. 이 그림은 이렇게 귀거래를 실천하는 도연명의 호쾌함을 그리고 있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혹은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도 설렘이 전달되는 장면이다. 전원에 도달한 후 실제 상황은

여기서 따질 것이 없다. 이 그림은 떠나가는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온전한 꿈과 기대의 설렘을 보여준다.

이 순간, 현실을 떠나는 슬픔은 본향으로 '돌아가는' 귀거래의 행복으로 바뀌어 있다. 떠남의 슬픔이

가려진  이 그림은, 결국 떠나는 이를 축하해주고 떠나감을 꿈꾸게 한다.

 

 

 

 

김홍도, 「오류귀장도」, 《고사인물도》 8폭병풍, 종이에 담채

각 111.0×52.6cm, 조선후기, 삼성미술관 리움

 

 

 

떠나가는 장면으로 귀거래를 표현한 전기의 그림보다 그 운치는 못하지만, 전원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린

「오류귀장五柳歸庄」이다. 가족들과 해후하는 행복한 귀향의 기쁨이 주제이다. 왼편 하단에 버드나무가 

보란 듯 늘어져 있고, 화면의 중앙에 잘 자란 소나무가 집의 남향에 자리잡고 있다.

머리에 두건을 두른  도연명 선생은 아직 배에 앉아 있다.

 

조선말기 「귀거래도」는 민화로도 그려져 널리 팔려나갔다. 춘향의 어미 월매의 방에도 「귀거래도」가

붙어 있었다고 할 정도다. 기생 방의 「귀거래도」는 그녀를 찾아오는 남성들을 달래주기 위한 것이었을까.

문인 한 분이 탄식하였다. "이 세상에 도연명 선생 다시 나지 않으셨으니, 선생의 그 기상을 누가 알겠는가"

라고. 도연명 같은 기상이 다시 나지 않았기에, 그림이라도 그려 붙여 기렸던 것일까. 쥐꼬리 같은 월급에

머리를 숙일 수 없다고 사직서를 던져놓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림 속 도연명 한 사람이지만, 우리도

이까짓 세상살이 우습게 여길 줄 알고 그림 속 도연명의 호방한 기상을 즐길 수 있노라고, 서로를

도닥이느라 도연명 선생의 귀거래하시는 모습이 서민의 방에도, 기녀의 방에도 붙게 되었을 것이다.

 

 

 

 

조석진, 「귀래도」 부분(왼편), 종이에 수묵담채, 전체 크기 38.5×114cm, 개인소장

 

끝으로 조선왕실 마지막 화원화가였던 조석진이 남긴 「귀래도」를 소개한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주장되었던 '귀거래'의 정체에 대하여 우리에게 묘한 반성을 일깨워주는 그림이다.

 

 

 

인용: 고연희 著 <그림, 문학에 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