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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청량산>

이의성李義聲, <하외도십곡병河隗圖十曲屛>

1828년, 130×5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의성이 정원용鄭元容과 유철조柳喆祚의 부탁으로 안동 및 하회 부근을 그린 그림으로 그리고,

동래 정씨의 선산이 있는 순흥順興 부근 지보知保 구담龜潭도 함께 그렸다. 16세기에 유중영柳仲郢이

그렸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周世鵬, 「청량산 유람록遊淸凉山錄」

 

 

계미일, 걸어서 문수사에서부터 보현암을 거쳐, 절벽을 돌아서 몽상암夢想庵에 다다랐다.

벼랑길이 끊어져 있어 두 개의 나무를 꺾어다 걸쳐서 잔도棧道를 통하게 하였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어, 두 다리가 후들후들하고 모골이 쭈뼛하였다. 게다가 문원文圓(司馬相如) 처럼 소갈병을 앓아서,

목구멍에 연기가 나듯 하였다. 비폭飛瀑이 있는 것을 보고, 절벽 사이에서부터 두레박을 떨어뜨려

물을 길어 소라 물그릇으로 마셨다. 그러자 오장이 신선처럼 원기를 되찾았다.

 

층층 돌계단을 더위잡거나 더듬더듬 발을 내디뎌 올라가서, 마침내 암자에 들어갔다.

암자의 서쪽에는 가파른 절벽이 천 인仞 높이로 서 있어, 끊어진 골짝을 굽어보고 있다. 즉 연대사連臺寺의 위쪽 경계

이다. 승려 조안祖安은 나이가 거의 일흔이 다 되었으나, 걷는 것이 아주 민첩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절벽에 임해서도 아무 두려운 기색이 없다. 오이원吳仁遠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거의 원숭이 후신이로군!"

돌아올 때는 돌 잔도를 거쳐서 절벽 사이의 틈새를 통해서 나왔다. 원효암에 오르는데, 길이 아주 위태하고 가파르다.

이른바 '앞사람이 뒷사람의 정수리만 보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만을 본다' 라든가, '배와 등이 모두 뒤흔들린다'

라든가 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승려 계은戒誾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암자는 여러 번 이전되었습니다. 원효가 옛날 거처하던 곳이 아닙니다.."

암자의 동쪽은 절벽이 쇠를 깎아둔 듯하고, 그 아래에는 옛 유적지가 있다. 아마도 그 터인 듯하다.

 

오수영吳守盈에게 열두 봉우리의 이름을 판벽에 차례로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암자의 동쪽으로 해서 절벽을 탔는데, 등넝쿨을 부여 잡고 거듭 쉬면서 만월암滿月庵에 이르렀다.

나만 홀로 오인원과 함께 암자 앞 석대에 앉았는데, 이상한 새들이 와서 내가 그 아래 앉아 있는 나무의 가지 끝에

모여서 즐거운 듯 깃을 털고, 마침 기심機心(욕심)을 잊고 유유자적하더니 한참 있다가 떠났다. 또 다람쥐 두 마리가

돌축대 사이에 출몰하면서, 탐내어 무언가를 도모하듯 하고 화들짝 놀라 듯하며, 사방을 둘러보다가는 달려가고

달려가다가는 숨고 숨다가는 다시 둘러보면서, 그저 구멍을 찾을 따름이었다. 이원이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하였다.

이날 저녁,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도 없고 달빛은 씻은 듯하였다. 한밤중에 문을 열고 홀로 서 있노라니,

마치 광한전廣漢展(달)에서 인간세상을 굽어보는 듯하였다.

 

갑신일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아침을 먹고는 백운암白雲庵에 올라 조금 쉬웠다.

마침내 맨발로 밟고 손으로 부여잡고 해서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는데, 이르는 곳이 차츰 높아질수록 보이는 것이

더욱 멀어져서, 학가산 · 공산(팔공산) · 속리산 등 여러 봉우리가 이미 시선 아래 깔려 있다. 여러 차례 쉬면서

자소산 정상에 이르렀다. 푸른 바위벽이 일천 인仞이나 되어 사다리를 놓아 부여잡고 오를 수가 없다.

탁필봉卓筆峰도 역시 송곳처럼 솟아나 있어서 오를 수가 없다. 마침내 연적봉硯滴峰에 올랐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참 동안 서북의 여러 산들을 바라보면서 호탕하게 휘파람을 불다가 돌아왔다. 

 

다시 백운암을 찾아, 이경호李景浩(이황) 사인舍人의 기記「백운암기」를 읽었다.

정말 어린 아이나 아낙네가 지을 만한 그런 글이다. 마침내 만월암을 경유하여 동쪽 시내를 따라,

서로 밀고 굽어 돌고 하면서 내려왔다. 왕왕 위성류 그늘 아래 쉬었는데, 좌우는 모두 푸른 벽이었다.

더 가서 문수사 뒤에 이르매, 골짝이 자못 컸다. 곧 자소봉의 동쪽이자 경일봉擎日峰의 서쪽이다.

시냇물이 한데 합하여 내리쏟아, 문수사의 비폭이 된다. 길 위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아주 사랑스럽다.

길 아래에는 봉우리가 가파르게 쑥 뽑혀 나 있고, 상대승上大乘이 그 발 언치에 있다.

요사寮舍의 주인이 아주 비루하고 더러워서, 앞서 들어간 자는 웩웩 구토를 하면서 나왔다.

나는 끝내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김생굴金生窟에 이르렀다. 벼랑의 잔도가 썩어서 끊어져 있어서,

손으로 등덩굴을 움켜쥐고 이끼가 덮혀 있는 벼랑을 엉금엉금 기어서 갔다.

몸이 흔들거리면서 올라가니, 너무도 두려워 아주 벌벌  떨렸다. 김생굴은 큰 바위 아래에 있었다.

바위는 아주 웅장하고 빼어나, 마치 천연으로 이루어진 듯이 안으로 감싸고 있다.

비폭은 바위 위에서부터 흩어지며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돼지가 울부짖는 소리 같으며

물살은 백일 아래에 빗줄기처럼 튄다. 나무를 깎아서 그것을 받아서 마셨다. 승려가 말하였다.

"비가 온 후에는 기세가 커서 그 소리가 더욱 웅장하여 마치 은하를 거꾸로 쏟은 듯합니다."

바위굴의 방은 청정하여, 상방의 여러 사찰 가운데 으뜸이다. 밤이 다하도록 비폭 소리를 들으니

삽상하여 사랑스럽다. 만일 영험한 신선이 있다면반드시 여기에 깃들여 살 것이다.

 

나의 집에는 김생金生의 서첩이 있는데, 그 자획이 모두 억세고 굳건하여 바라보면 마치 뭇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는 듯하다. 지금 이 산을 보니, 김생이 이곳에서 글씨를 배웠다는 사실을 알겠다. 필법의 정신이 신묘한

지경에 들어간 것은 겹겹으로 뾰족한 상봉우리 끝을 몰래 옮겨서 그런 것이다. 지난날 공손대낭公孫大娘이

추던 혼탈무昏脫舞의 경지를 장욱張旭이 터득하여 초서를 잘 썼는데, 그것과 오묘함의 경지가 같다.

정말로 오묘한 경지를 터득한다면 괘卦를 긋지 않더라도 옳은 법이다. 춤과 산이 어찌 차이가 있으랴.

다만 이 산은 바르고 저 춤은 기이하였다. 그러므로 김생의 해서와 장욱의 초서가 갈렸을 따름이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장욱의 초서가 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전하지만,

김생의 서법이 산에서 얻은 것이란 사실은 모른다.

이 사실은 정말 분명하게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청량산 淸凉山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남쪽에 있는 해발고도 870미터의 산.

소금강이라고도 하며 최고봉은 장인봉丈人峰이다. 외장인봉 · 서학봉仙鶴峰 · 축융봉祝融峰 · 경일봉擎日峯·

금탑봉金塔峰 · 자란봉紫鸞峰 · 자소봉紫宵峰 · 연적봉硯滴峰 · 연화봉連花峰· 탁필봉卓筆峰 · 향로봉香爐峰 ·

등의 고봉들이 늘어서 있다. 산의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조선 중기의 학자 주세봉周世鵬(1495~1554)은 고향 산인 청량산을 자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산이 비록 안동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그 아래는 모두 예안禮安의 지역이다. 송재松齋 이우李㻦(1469~1517와

농암聾岩 이현보李賢輔(1467~1555) 이후로 대유학자와 석학들이 줄이어 나왔다.

속언에 '청량이란 것은 안동의 산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은 예안에서 나왔다.

그러니 지령이 인물을 낸다는 설을 어찌 그르다 하겠는가!"

주세붕은 우리나라의 여러 산들 가운데 웅장하게 온축되어 있는 것으로는 두류산(지리산)만한 것이 없고,

너무도 맑은 것으로는 금강산만한 것이 없으며 기이한 승경으로는 박연의 폭포와 가야산의 골짝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단정하고 산뜻해서 비록 작아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으로는 오직 청량산이 그러하다고 보았다.

 

주세붕은 청량산 유람 때 인근 현감 · 속관 · 재지사족들과 함께 늙은 기생 ·  피리 부는 사람 · 노래하는 어린

재인 · 거문고 타는 어른 여종, 아쟁을 켜는 어린 여종까지 이끌고 가서 탕유宕遊, 곧 호탕한 놀이를 즐겼다.

주세붕은 기흥奇興을 즐기면서 기심穖心, 즉 세상 욕심을 잊으려고 하였다.

이현보가 조카 이국량李國樑을 통해 노래를 보내오자 젓대 소리라고도 하였다.

사실 새와 다람쥐의 미세한 동작에 눈을 주고 있는 의식 상태는

그것이 곧 '기심을 잊은' 상태였다.

 

주세붕은 1544년(중종 39, 갑진) 4월 초 9일(정축)부터 18일(병술)까지 청량산을 등반하였다.

그리고 1547년(정미)에 「청량산 유람록遊淸凉山錄」을 완성하였다. 아마도 유람 때 작성한 일록을 토대로

하였을 것이다. 그 등람에서 시 85수를 지었는데, 전후 청량산에서 노닐며 내키는 대로 읊은 시들까지 합쳐

근 100편을 함께 묶었다. 그러면서 남송 때, 주희가 남악에 노닐고 창수唱酬(한 사람이 시를 지으면 다른 사람

들이 그 시의 운자와 시상을 이용하여 시를 지어 화답하는 일)한 일을 환기하고 경계의 말을 붙였다. 주희는

장식張栻과 함께 남악에 노닐어 이레 동안 창수 시 49편을 지었다. 주희는 「남악유산」의 후기에서 "시를 짓는 것이

본디 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깊이 징계하여 통렬하게 끊어버린 것은 그것이 흘러가서 병통을

나을까 봐 염려하여서다. 무리지어 거처할 때는 서로 인仁의 덕을 보완하여 성장시키는 보탬이 있다고는 해도

어쩌다 보면 말류로 흘러감을 면하지 못할 수 있다. 하물며 무리를 떠나 홀로 거처하게 된 이후에는 사물의

변환이 무궁하기에 기미의 사이와 미세한 차이에 이목을 혼란시키고 마음과 뜻을 느껴 움직이게 만들 수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막겠는가!" 라고 경계하였다 주세붕도 유람할 때 시 짓는 일에 골몰하여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했지만 그의 유람은 탕유, 즉 호탕한 놀이였다.

 

청량산은 안동부 재산현才山縣에 있지만, 실은 태백산의 한 지맥이 날아와서 정수가 엉긴 것이다.

그 넓게 퍼져 응집되어 있는 기세가 결속하여 여러 뾰족한 산들이 되어 우뚝함을 자랑하고,

차가운 기색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푸른 죽순이 겹겹이 무리져서 뽑혀 나 있는 것 같다,

큰 강이 그 산기슭을 둘러가니, 곧 황지黃池의 하류이다. 주세붕의 시대에는 바위가 무섭고 물살이 거세어

거룻배를 띄울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산은 그 둘레가 불과 100리이되, 산봉우리가 첩첩하고 모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그리고 깎아지른 절벽을 이고, 아지랑이와 남기 낀 수목이 마치

그림과도 같고, 시렁과도 같았다.

 

주세붕의 자는 경유景游,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1522년(중종 17)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41년

(중종 36) 풍기군수가 되었고, 1543년(중종 38) 백운동서원(훗날의 소수서원)을 세웠다. 그후 성균관 사성 · 황해도

관찰사 · 대사성 ·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동쪽의 금강산, 개성의 천마산과 성거산, 남쪽으로 가야산과 금산

錦山의 정상에 올라보았고, 두류산의 왼쪽 어깨 부분을 익숙히 보아 와서 사마천司馬遷에게 견주지는 못하더라도

구름 낀 산을 우아하게 감상하는 일은 자부할 수 있다고 하였다.

 

1544년 4월 초9일, 주세붕이 청량산을 오르려고 풍기군 관아를 발할 대, 전송하는 사람과 종행자도 많았다.

전송한 사람은 서생 장응문 · 이학령 · 박승원 · 권숙란 · 이기 · 배억 · 민종중 · 유분 · 권태수 · 권호금이었다.

종행한 사람은 이원 · 박숙량 · 김팔원 및 자신의 아들 주박周博 등 4인이었다. 그는 그날 구대龜臺에서

열린 승문원 저작 박승간朴承侃과 승정원 주서 박승임朴承任 형제의 영친례榮親禮에 먼저 참석하였다.

 

그 후 용수현龍壽峴을 넘어 온계溫溪를 거쳐 가다가 분수汾水의 이현보 댁에 들러 바둑을 두기까지 하였다.

이현보는 당시 78세의 고령이었는데, 아들 이문량李文樑(1498~1581)이 모시고 있었다. 그는 바둑을 둔 후

술을 내오라 하고, 대비大婢를 시켜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소비小婢를 시켜 아쟁을 연주하게 하였다.

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노래하기도 하고, 장형張衡의 「귀전부歸田賦」를 노래하기도 하였으며,

이하李賀의 「장진주將進酒」를 노래하기도 하고, 소식蘇軾의 「달밤에 손님과 더불어 행화 아래서 술을 마시다」

의 '행화가 주렴에 날아 남은 봄을 흩누나' 를 노래하였다. 아들 이문량도 「수곡壽曲」을 노래하였다.

주세붕은 이문량과 함께 일어나 춤을 추었고, 이현보도 일어나 춤을 추었다.

 

주세붕은 저녁나절에 말을 달려 부포夫浦에 이르렀다. 치마輜馬(짐말)를 먼저 건너게 한 후 여러 문생들과

더불어 뗏목에 누웠다. 만호 벼슬을 지낸 금치소琴致韶와 그 자제와 조카 네댓 사람이 맞이하여 그 집에 묵게 하였다. 

금치소는 주세붕의 먼 친척이었다. 다음 날 가랑비가 내리는데, 주세붕 일행은 동쪽으로 떠나 첩첩 산속으로 들어갔다.

잠깐 비가 왔다가 잠깐 개었다가 하였고, 혹은 도롱이를 걸쳤다가 혹은 벗었다가 하였다. 첫 번째 산마루인 단곡령을

넘고, 두 번째 산마루인 회선령을 넘었다. 탁립봉의 아래로 동쪽 벼랑을 따라서 오른쪽으로 돌아나가

해가 기울었을 무렵에 연대사蓮臺寺에 이르렀다.

 

12일(경진)은 날이 쾌청하였다. 말과 종복을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연대사 승려 계은戒誾의 인도로

길을 떠났다. 이원과 박숙량이 피리 부는 자를 인솔하여 먼저 치원대致遠臺에 올라 피리를 불게 하였다.

김팔원과 아들 주박은 모두 꽃을 머리에 꽂고 뒤에 따랐다. 진불암眞佛庵에 들어가고, 치원대에 이르렀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에 하청량사下淸凉寺로 가서 묵었다.

 

13일(시사) 아침, 안중사安中寺로 들어가고, 극일암克一菴에 이르러 돌사다리를 따라 올라갔다.

혈구穴口에 두 개의 판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최치원이 바둑을 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오인원이 피리 부는

사람을 시켜서 보허자步虛子 곡을 불게 하였고, 또 따라온 젊은이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하고,

춤을 추게 하였다. 마침내 치원암을 찾아가서 총명수聰明水를 마셨다. 하대승下大乘을 거쳐 문수사에 이르

렀는데, 피리 부는 악공 귀흔貴欣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피리를 불어 주었다.

 

14일(임오), 보현암普賢庵에 들어갔다. 오인원과 함께 바위 위에 앉아 있는데, 선성宣城 현감 임내신任鼐臣이

사람을 시켜 술을 보내왔다. 또 이현보의 조카 이국량과 오인원의 아들 오수영이 왔고, 이국량은 이현보가 장난

스럽게 지은 노래를 적은 서한을 가져왔다. 주세붕은 오수영에게 그 노래를 부르게 하고, 선성현감 임내신이 보낸

술을 마시며 복주福州 생산의 ㄷ나무로 만든 피리를 연주하게 하였는데, 주세붕은 그것을 '산중의 한 가지 기이한

흥취' 라고 회고하였다. 느지막하게 서대西臺로 나와서 달 아래 자리를 깔고 감상하다가 문수사로 돌아와 묵었다.

 

15일(계미), 몽상암 · 원효암을 거쳐 만월암에서 묵었다.

16일(갑신), 만월암을 떠나 백운암을 거쳐 연적봉에 올랐고, 백운암으로 돌아와 김생굴을 구경하였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바로 15일과 16일의 기록이다.

 

 

주세붕은 김생굴에서 집에 소장하고 있는 신라 명핑 김생(711~ 791)의 서첩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생의 글씨가

당나라 장욱의 초서에 견줄 만하다고 하였다. 장욱은 초성草聖이라 불릴 만큼 초서에 뛰어났던 인물이다.

두보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장욱은 술 석 잔에 초성이라 전하였으니, 귀한 분들 앞에서

모자 벗어 맨머리 드러낸 채, 붓을 휘둘러 종이에 쓰면 마치 구름과 아지랑이가 이는 듯하였네" 라고 하였다.

정재서 교수의 집안 가보로 김생이 썼다고 전하는 여섯 줄짜리 사경寫經이 있다. 최근 그 종이를 탄소연대측정한 결과

789년 ±60년으로 김생의 생몰연도와 비슷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사경은 조선 영조 때 경북 청도군수로

있던 정 교수의 9대조 정창유鄭昌兪 공이 관내 사찰의 화재사건 때 파손된 불상 내부에서

발견한 것을 보관해 온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은 17일(을유)에 연대사로 돌아와 승려들과 이별하고 사자항獅子項으로 나아갔다.

거기서 말을 타고 삼각묘三角墓를 거쳐, 동구를 나와 큰 강을 건넜다. 이문량이 나루 어구에서 영접하고, 오인원은

길옆에 장막을 설치해 두었다. 주세붕은 오인원과 함께 고려 때 세워진 거대한 사찰인 용수사龍壽寺에서 묵었다.

다음 날 18일(병술)에 고려학사 최선崔詵의 비문을 읽었다. 아들 주박은 이국량 · 오수영 · 이원 · 이숙량 · 팔원

· 오생과 함께 중도에 먼저 산을 나가서 온계에서 묵고 있었는데, 이 때 와서 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현보가 이문량을

데리고 견여로 왔고, 금치소도 찾아왔다. 불당에서 술자리를 벌였다. 그날 저녁에 주세붕은 아들 주박과 이원 · 이숙량

· 팔원과 함께 고을로 돌아왔다. 그런데 주세붕은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와 명승에 이름을 붙였다. 불교식 이름은

전부 유교식으로 바꾸었다. 그는 그렇게 명명하는 이유를 정당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점필재佔畢齋, 金宗直(1431~1492)는 두류산에서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은 믿지 않아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도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하물며 나와 같은 자는 어떠한 자라고, 감히 참람함을 잊은 채

이름을 붙이겠는가? 하지만 주문공(주자, 주희)은 여산廬山에서 기이한 절경을 마주치게 되면 곧바로 이름을 붙였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름을 안 붙이지 않았다. 이 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이름이 없다는 것은

산을 좋아하는 지자智者들이 부끄럽게 여겨야 할 바이다. 만약 주자와 같은 어진 이를 기다려서야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면, 이 산들이 이름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아니하겠는가? 그래서 짐짓 이름을 지어 붙여두고,

훗날 철인이 고쳐주길기다린다고 하여도 무엇이 해되겠는가?

 

 

주세붕은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바깥 봉우리 가운데 긴 것을 장인丈人이라 하였다. 큰 대大 자의 뜻을 부연하여

중국 태산의 장악丈岳에 비긴 것이다. 서쪽 봉우리는 선학봉仙鶴峰이라 하고, 동쪽 봉우리는 자란봉紫鸞峰이라고

하였다. 안쪽 산봉우리 가운데 으뜸 되는 것은 자소봉紫霄峰, 동쪽 봉우리는 경일봉擎日峰, 남쪽 봉우리는 축융봉

祝融峰이라 하였다. 이밖에도 탁필봉卓筆峰 · 연적봉硯滴峰 · 연화봉蓮花峰(옛 의상봉) · 향로봉香爐峰 ·

금탑봉金塔峰 등의 이름을 재확인 하거나 고쳤다.

 

이황은 1552년(명종 7, 임자) 9월에 주세붕의 청량산 유산록에 발문을 붙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위대하여라 선생이 이 산에 얻은 것은! 홍몽한 상태로부터 음양의 기운이 나뉘어 높은 하늘과 깊은 바다의

기운이 형체를 응집한 이래로 몇 천만 겁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하늘이 갈무리한 승경과 땅이 감추어 둔

기이한 구역이 바로 선생의 글을 기다려서야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으로서는 커다란 만남이

아니었겠는가? 하물며 이 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불경의 말과 여러 부처의 음란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것은 정말로 이 선경의 모욕이요 우리 유학자의 수치였다. 선생이 일일이 고쳐 주시고 통렬하게

씻어내어 주셨으니, 그로서 산신령을 위로하고 정채精彩를 빛나게 하신 업적이 얼마나 크냐!

 

 

또한 이황은 「주경유의 청량산 유산록 뒤에 적다」라는 독후시도 남겼다.

 

 

반세半世의 심장과 내장이 강철이 아니라

신선 산에 진 빚을 오래도록 갚기 어렵네.

몽혼夢魂은 때때로 다시 맑은 봉우리를 질러오를 수 있지만

형체에 부림당해 여전히 연향軟香 속에 타락해 있도다.

백거이는 광려산에 들어가 해 쪼이는 광경을 읊었고

한유는 화악에 올라 하늘의 빛이 요동하는 것을 보았네.

거작을 부쳐 주셔서 보게 되었으니

천 길 높은 곳을 함께 옷자락 떨치면서 구경하는 듯하네.

 

 

재미있는 것은 주세붕이 「청량산 유람록」에서 이황의 「백운암기白雲庵記」를 두고,

"정말 어린아이나 아낙네가 지을 만한 그런 글이다" 라고 깎아내린 사실이다.

하지만 이황은 그 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주세붕을 선배로서 예우하였다.

그 넉넉한 인품을 상상할 수 있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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