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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팔공산>

 

 

 

 

 

정시한丁詩翰, 「산중일기山中日記」

 

 

 

6월 초 1일(임인), 간혹 흐리고 간혹 갬.

보기普機가 아침밥을 갖추어 주었다. 자원紫遠이 은해사銀海寺로부터 왔으므로, 

즉시 두 종으로 하여금 짐을 지게 하고는 걸어서 상용암으로 올라갔다.

진언 · 혜원 · 천우 등 여러 승려들이 운부사雲浮寺 문밖의 산 아래에서 전송해 주었고,

초선 · 보기 · 대영은 멀리 산허리에서 전송해 주었다. 벽원碧遠이 따라와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갔는데, 험한 산비탈을 5리쯤 가서 암자에 이르렀다. 아래를 굽어보니

미륵전의 채색한 누각이 높은 봉우리의 암석 사이에서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는데 신기루 같았다.

 

상용암 앞의 누각에 들어가 앉아 있자니 종장 향학向學이 맞이한다.

한참을 쉬었더니 흐르는 땀이 조금 말랐다. 벽원과 암자의 스님 몇 명과 함께 미륵전에 올랐다.

북쪽벽으로 벼랑을 타고 나가, 또 바위틈 사이로 갔다. 그 가장 높은 곳에 2층 누각이 있었다.

올라가 층루에 앉아보니, 커다란 바위에다가 돌 불상을 새겨 놓았는데, 자못 기이하고 교묘하였다.

암자가 그 곁에 있었으나, 텅 비어 있었다. 바위틈을 따라서 동석대動石臺로 올라갔다.

그곳은 곧 기우제 지내는 곳이다. 동석대 위에서 굽어보니, 수백 리의 들판과 신녕 · 영천 등의

고을이 무릎 아래에 있는 듯하였다. 산들이 모두 낮게 늘어서 있어 마치 밭두둑과 논두렁 같았고,

옥산 · 경주부 · 불국사의 여러 산들이 눈 아래 늘어서 있다. 비가 개어 하늘이 맑았으므로 아득하여

아스라한 곳까지 시선을 다하였다. 산 밖에는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닿아 있고, 의흥과 의성 등지도

눈 앞에 있다. 남쪽으로는 동래와 울산을 바라보니 좌우로 300여 리가 모두 시야에 들어 왔다.

진실로 반평생에 처음 보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또 남쪽으로 10여 보 내려가 바위틈 사이를 가니 별도로 높은 봉우리가 있다.

암자의 터 전후와 좌우의 암석이 기괴하여, 진실로 도인의 수행장이었다. 벼랑을 타고 내려와 기다시피해서

바위 구멍으로 들아가 중암中庵에 이르니 단지 한 명의 스님이 있을 뿐이었다.

암자의 기반은  기울어져 위태하였으나, 돌샘에서는 말고 찬물이 솟았다.

또한 서쪽에 대가 있어 노닐 만하였기에, 거기서 앉아서 오랫동안 쉬다가 돌아왔다.

 

자원紫遠을 은해사로 보내고 아래로 수백 보를 내려갔다.

또 서봉에 올라가 사자암에 이르렀는데 수좌승 도신道信이 맞아주었다.

앞 기둥에 기대니 시계가 확 트여 동석대에 버금갔다. 또 묘봉암에 갔는데

수좌승 진한 · 묘훈 · 지영 등이 맞아주며 환대하기를 시평始評 스님이 있을 때처럼 하였다.

원주의 목수 승려 양호良浩 상좌는 일찍이 나를 들밭 사이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하면서

특별히 기쁘게 맞아주었다. 점심밥을 먹고 앉아서 한참 이야기 하다가 일어나 돌아왔다.

여러 스님들이 자고 가라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사자대까지 전송해 주었다.

 

상용암에 돌아오니 말생이 와서 인사하고 말편자 한 부와 대구어 한 마리를 주고 갔다.

벽원이 이별하고 떠났다. 상학이 떡과 과일을 가지고 왔으며 또 저녁밥을 주었다.

상암 · 중암 ·하암의 수좌승들이 반가운 얼굴로 와서 인사하고 갔다. 상학의 방에서 잤다.

 

 

 

 

 마애약사여래좌상

 

 

 

 

팔공산 八公山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영천시 · 군위군 · 칠곡군 · 경산시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1,193미터의 산.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동쪽 동봉에서 관봉, 서쪽 서봉에서 가산산성까지 20킬로미터가 넘는 산줄기가

대구 분지의 북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옛 이름은 공산公山 · 부악父岳이며 신라5악의 하나였다.

원효 · 의상 등이 여기에서 수도하였다.

 

 

 

 

동봉 석조여래입상

 

 

 

갓바위로 이어지는 라인.

 

 

 

이 글은 정시한丁詩翰(1625~1707)의 「산중일기山中日記」가운데 팔공산 일대를 등산한 기록이다.

정련한 문체가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는 문장이라서, 다른 여행기록들과는 구별된다 하지만 이 글의

'보고' 측면은 매우 놀랍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은해사와 운부사의 1680년대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정시한의 호는 우담愚潭, 본관은 나주이며 정조 때의 남인 명신 정법조丁範祖(1723~1801)의 증조부다.

벼슬에 나서지 않고 강원도 원주 법천리에 은거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어 여러 직책이 주어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 후 진선進善의 품계에 올랐는데, 1691년(숙종 17)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일을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가 삭직,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96년(숙종 22)에는 집의로 있으면서 상소하였는데, 송시열을 비난하였다고 해서

노론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문제된 내용은 이러하다.

 

"송시열은 임금을 폄박貶薄한 죄로 다스린다면 마땅하지 않을 듯하나, 집요한 성질과 부정不正한 학문으로

나라의 의례를 마음대로 결단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를 배척하고, 편당의 화를 빚어서 인심과 세도世道가

크게 무너지게 한 것은 역시 송시열이 그 책망을 피할 수 없을 듯합니다. 여느 원우院宇에서 받드는 것도 인심

에 만족되지 않는데, 이제 대현大賢에 종사從祀하여 함께 제사하니, 신은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인지 모르겠습니다."

 

1704년에 노인직老人職으로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정시한은 비록 노론의 배척을 받아 불우한 일생을 보냈으나, 성리학의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이황의 입장을 명석하게 해명하고,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익李瀷 · 정약용 등 남인계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시한은 62세 되던 1686년(숙종 12) 3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각 도의 명산 고찰을 두루 다니며

일기를 적었다. 그는 부친이 14년간이나 병석에 누워76세로 돌아가시기까지 수발을 하였고, 부친상을 마치지마자

또 모친상을 당해서 오랫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였다. 전상과 후상을 다 치룬 그는 말과 노새에 음식과 서책을 싣고

노비 두세 명을 데리고 반야봉을 오른 후, 그 길로 꼬박 3년 동안 서북방을 제외한 전국을 유람하였다.

 

「산중일기」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와 함께 석굴암 변천에 관한 기록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고금창기>는 1703년(숙종 29)에 대겸大謙이 중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중수 사실

과는 관계가 없으나 1688년 5월 15일 석굴암에 유숙할 때의 석굴암 현황을 자세히 말하였다.

정시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석굴의 전실과 후실의 석상들이 완전한 형태로 건재할 뿐 아니라 입구의

호예, 본존상과 좌대석, 주변의 여러 조각들과 천개석들이 모두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하였다.

 

정시한의 여행은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고만 있지 않고 스스로를 발견하려고 나선 결단이었다.

그가 불우하였지만 학문적 업적을 이룬 사실에 대해서 정약용은 귀양살이를 시작한 42세 때인

1803년에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폐족은 오직 벼슬길에서만 거리낌이 있을 뿐, 폐족으로서 성인聖人이 됨에는 거리낌이 없고

문장가文章家가 되기에는 거리낌이 없고 진리를 통달한 선비가 되기에는 거리낌이 없다.

거리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크게 나은 점이 있다.

그것은 과거科擧의 걸거침이 없고,

또 빈곤하고 궁약窮約한 고통이 심지心志를 단련시키고 지려知慮를 개발해 주어서

인정과 물태物態의 진실과 거짓이 드러나는 바를 두루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선배 율곡 같으신 분은 어버이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여

곤란을 겪기를 몇 해를 하다가 마침내 한 번 돌이켜 도道에 이르렀다.

우리 우담(정시한) 선생도 세상의 배척을 받고서 더욱 그 덕이 진보되었다.

성호星湖 께서도 집안에 화를 당한 뒤로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다.

그분들이 우뚝하게 서신 것은 권세를 잡은 부호가의 자제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이것은 너희도 전에 듣지 않았느냐. 폐족에게 후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영달榮達하려는 마음이 가리지 않으므로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능히 참다운 면목眞面目과 진정한 골수骨髄를 알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정시한은 불우한 삶을 살았지만, 영달의 욕망을 아예 끊었기에 여행을 통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인용: 심경호 著 <산수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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