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산리(泊山里) 미륵불(彌勒佛)
(전남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 작동마을)
과거, 이 미륵불을 보기 위해 몇 번인가 이곳을 찾아 왔었는데 그 때마다 문이 잠겨 있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동네 앞을 지나다 건물 앞으로 연등이 내걸린 모습이 보이길래 다가가 보니
미륵도량 '호암사' 라는 사찰명을 내 건 모습.
마당에 들어서 인기척을 내니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모습을 보인다.
'미륵불' 친견을 원한다 했더니 대뜸 법당으로 들어가도 좋다는 대답이 돌아 온다.
참고로 이곳 작동마을 전화번호부를 살펴보니 거의 '황주변씨' 일색이더라는 사실.
고려(혹, 신라) 말 오산리(오산현)의 아전이 매년 매년 섣달 그믐날만 되면 호환으로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호환을 당할까봐 두려워 하던 중, 마침 마을을 지나가던 道僧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그가 이르길, 작동마을 뒷산 호암봉에 있는 호랑이 바위(虎岩)가 호식을 하기 위해 호산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형국이라서 호환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설명과 함께 해결책을 제시하길, 호암(虎岩) 아래에 미륵불을
조성하면 호환이 없을거라 하였다고. 이에 마을 사람들이호암 앞에 미륵불을 세웠더니
아닌게 아니라 이후론 더 이상의 호환은 없었다고 전한다.
두 개의 현판 그리고 주련의 서체가 나름 볼만한지라 한참을 뜯어 보았다.
이 법당 건물은 6.25 직후 변씨 할머니가 지었다는데, 미륵불은 개금되어 옛 석불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도금할 당시 훼손된 팔을 새로 만들어 붙였다는데, 호암사를 지키는 비구니의 설명으로는
언젠가 건물에 불이나는 바람에 석불이 시커멓게 그을려 개금을 하게되었다고.
석상이니만큼 깨끗하게 닦아내면 될 것을 굳이 개금까지... ?
미륵불 앞 작은 법고라...!
미륵불의 키는 120cm 정도 되어 보인다.
커다란 얼굴에 기다란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큰 코에 비해 입은 작은 편이고,
얼굴에 비해 동체(胴體)가 왜소한지라 전체적인 균형美는 찾기 어렵다.
의습(衣褶)은 뚜렷하지 않으나 양어깨로부터 긴 띠 모양의 줄이 양각(陽刻)되어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팔은 반쯤 치켜올린 상태이다.
미륵불 양 옆으로 두 기의 작은 부처상이 좌정한 모습인데,
미륵불 조성 당시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미륵불의 측면.
미륵신앙 차원에서 조성된 투박한 민불이라고 보면 되겠다.
호암사 비구니의 말씀으론 이 북일면 소재 미륵불과 약 십여리 윗쪽에 자리한
북이면 원덕리 미륵불이 짝을 이룬다는 말씀이던데,
글쎄요? 과연 그 진실은...
미륵불 우측으로 용상에 실눈을 째리고 좌정한 두 기의 부처상인데
미적 감각을 논할 대상은 아닌 듯.
범을 깔고 있는 송하산신도에다...
장군신에 이르기까지...
작동마을 도로 건너편에 자리한 ≪서능비각(徐稜碑閣)≫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62호)
서능 선생은 이곳 작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약관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에 올랐다고.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선생의 모친이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1245년(고종 32) 12월 한겨울, 의원의 청개구리 처방을 받고 고심하던 중 난데없이
청개구리가 나타나 약탕관 안으로 뛰어들어 모친의 병을 완치 시킬 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서능 선생은 향리에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쳐 이 고장에 학문의 기풍을 세웠으며
유교적 덕목과 생활습관을 규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훈인「거가십훈(居家十訓)」을 남긴 인물.
서능정려비
효자 서능의 행적을 기린 비로 1578년(선조 11) 호남유림과 후손들이 세웠다.
이 비는 당시 호남의 종유(宗儒)로서 명성이 높던 사암 박 순(1523-1589)이 비문을 짓고
옥봉 백광훈이(1537-1582)이 글씨를 썼다.
그 뒤 1669년 (현종 10) 변휴 등 12人이 중심이 되어 비각 건립을 시작,
1694년 (숙종20)에 완결시켰으며 이때 동춘 송준길(1606-1672)이 편액을 썼다.
이 비는 1824년(순조 24)에 김장환 등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13년 서택환 등의 주도로 중건된 것으로 지방문화재 162호로 지정되었다.
비명 : 高麗侍中 節孝先生 徐公碑銘 (고려시중 절효선생 서공비명)
총 고 : 266cm (고 136cm) 폭 62cm, 두께 53cm
연화태석 : 고 60cm, 폭 178cm, 두께 150cm
손톱으로 긁으면 떨어질 정도의 아주 연한 석질인지라 닳아서 비문 판독이 어렵다.
출입문이 굳게 잠겨있어 담너머로 정려문을 힐끗거릴 수 밖에 없었다.
원덕리 미륵불을 찾아가는 길가에 무더기로 피어난 수국.
전남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소재 원덕사(院德寺)
원덕리 마애불
마애불 담 너머로 호남선 철길이 바짝 붙어 있는 모습.
별 무리 없이 보존되고 있어보이지만 아무래도 열차 운행에 따른 진동이 염려된다.
전체높이 535cm.
왼쪽 손이 각진 모서리에 새겨져 있다.
오른쪽 손을 가슴에 모아 연꽃 몽오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8각 형태의 옥개형 관을 쓰고 있는데 각 면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보아
원래는 종을 비롯한 뭔가 장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 옆에 선 배롱나무꽃이 활짝 피어날 때의 모습이 머리속에 그려진다.
뒷편 산자락을 가로지른 바위가 수 많은 전설을 간직한 '갈애바위'다.
정읍을 지나 갈재를 내려오다 보면 영락없는 눈썹 형태를 볼 수 있는데,
당연히 이 원덕리 마애불도 그 전설 속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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