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 유물을 보관한 림부르흐 십자가함의 뚜껑.
10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만들었으며, 도금한 은과 준보석을 사용했다.
제 1천년기 초에 불교와 기독교가 아프로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전파되면서 선교사와 순례자들이 종교적 메시지와
필사본, 그리고 성스러운 유물들을 새로 개종시키려는 지역으로 가져갔다.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순례자들은
인도로 가서 붓다의 유물을 구했다. 반면에 기독교도들은 예수와 관련된 사건들의 유물(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
잔편 등)이나, 베드로 성인 같은 사도와 덜 알려진 순교자 등 여러 성인들의 유물을 유럽 곳곳으로 옮겼다.
두 종교 전통의 유물 숭배 의례는 놀라운 유사성을 보였다.
독일 할버트슈타트 대성당 금고에 있는 세 성인의 유골을 담은 기독교 유물함.
1125년 무렵 도금한 은과 준보석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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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비마란의 유물함
석류석을 박은 이 금제 유물통은 1833~1834년에 영국 탐험가 찰스 매슨(1800~1853)이 탁실라 서북쪽에 있는 비마란 마을의 2호 사리탑에서 별견한 것이다. 지금은 영국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통은 글자가 새겨진 돌단지 안에서 발견됐고, 그 단지는 작은 유물실에 놓여 있었다. 돌단지에 쓰인 글에는 시바락시타라는 사람이 유물을 기증했다고 나와 있다. 통과 단지 안에는 준보석과 유기물질로 된 염주 구슬 여러개와 금단추들, 도장반지 하나가 있었다. 통은 높이 6.5cm였고, 뚜껑은 없었다. 거기에는 부처가 그려져 있고, 양 옆에는 남아시아에서 중요한 두 신 브라흐마와 인드라(제석천)가 그려져 있다. 인드라 옆엔 알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숭배의 못짓으로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있다. 네 인물은 모두 벽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아치 아래 서 있는데 각기 두 번씩 묘사했다.
(우) 사리탑 숭배를 보여주는 서기전 2세기의 돋을새김 조각.
인도 산치의 큰 사리탑에서 나왔다.
카이사리우스 성인의 유물
장식판과 귀금속(보통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버클이 달린 허리띠들이 스텝지역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허리띠 장식판이 어디서 만들어 졌는지는 알 수 없다. 버클의 포도 열매 디자인은 기독교적인 상징이지만, 이는 아프로유라시아 대륙 곳곳에서 다양한 맥락으로 사용됐다. 장식판 중앙에 예수의 무덤이 있고 양 쪽 옆에 예루살렘 성문이 있다. 잠자는 병사들은 여자들이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 허리띠가 카이사리우스의 몸 가까이 있었다는 점은 그것이 중요시됐음을 말해준다. 허리띠는 그의 신발, 튜닉, 팔리움(어깨 장식띠)과 함께 발견되었고, 현재 아를고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금보다 귀한 것: 청금석 -
'우르의 깃발' 일부.
나무 상자에 조가비와 붉은 석회석, 청금석을 박아 넣었다. 서기전 26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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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의 청금석 카메오
루브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동로마의 조각 장식품 카메오는 12세기 전반기의 것이다. 청금석으로 만들었고 금을 박아 선조세공을 했다. 가로 6cm, 세로 10cm의 판은 은박이며, 진주와 터키석을 박아 넣고 밀랍으로 고정했다. 틀의 가장자리를 두른 고리는 본래 진주 목걸이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꼭대기에도 고리가 하나 잇어 목걸이에 달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동로마 미술에서는 이례적인 것이다. 사용된 재료도 그렇지만 예수를 한쪽에 넣고 마리아를 다른 쪽에 나란히 배치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청금석의 산지는 거의 틀림없이 중앙아시아의 힌두쿠시산맥일 것이다. 그리고 금과 이 귀한 암석의 조합으로 보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때인가 이 카메오는 프랑스로 옮겨졌다. 아마도 동로마의 사냥을 그린 비단 잔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궁정의 사절이 선물로 가져온 것이거나, 십자군 원정 때 약탈되었을 것이다. 이 카메오는 1501년 생드니 수도원 소장품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진한 청색과 금 · 은이 어우러진 이 물건의 멋스러움은 기독교의 다른 맥락이나 불교 및 이슬람교 쪽에서도 나타난다. 그 사례 가운데 하나가 푸른 바탕에 금으로 쿠르안 구절을 새긴
'푸른 쿠르안'이다.
필리포 리피(1483~1484)의 <성모자상>.
이 시대에는 마리아의 옷을 표현하는 데 청금석으로 만든 군청색 안료를 사용하는 것이 대세였다.
로마의 히폴리토스 물병.
'세우소 보물'에 들어 있는 4세기 말 또는 5세기 초의 도금한 은제 그릇이다.
서기전 5~4세기의 도끼 주조용 거푸집.
1953년 북중국 평원의 싱룽에서 발굴되었다.
- 실크로드 일대의 물병 -
과일인 배 모양의 은제 물병은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 것으로 보고되었다. 지중해 동아 세계, 사산 왕조의 이란, 박트리아 · 소그디아나의 중앙아시아, 중국 서부 등이다. 이렇게 지리적 · 문화적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나타난 것은 교역로를 통한 사치품의 이동과 함께 문화권 사이의 형태 및 도상의 교류와 응용을 보여준다. 의미 있는 고고학적 정황이 없기 때문에 이런 그릇들의 연대표나 제작 장소 등을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미술 양식이 새로운 문화적 맥락에서 어떻게 동화되고 의미를 찾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병들의 특징은 배 모양의 몸체, 목과 높은 굽다리 위의 쇠시리, 엄지손가락 자리까지 있는 끝이 화려한 곡선의 손잡이 등인데, 그 원형은 4세기 이후 로마에서 발견된 사례들이다. 위로 세번 째의 히폴리토스 물병은 부분 도금을 하고 호화롭게 꾸민 4세기 말 또는 5세기 초 로마의 그릇으로 현재 헝가리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실크로드 일대의 사례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특색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이런 종류로는 가장 큰 축에 속하는 높이 57.3cm의 이 물병은 오크잎 화관 모양의 볼록한 목 쇠시리 등 특징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주둥이와 굽다리에 구슬선 장식을 했고, 누름단추는 사자 모양이다. 손잡이는 테두리의 암수 염소 머리 위에서 끝나고, 예술의 여신 무사가 바닥의 아칸서스 잎에서 올라오고 있다. 압착세공 돋을 무늬로 장식하고 세 구역으로 나뉜 그릇의 몸체는 신화 속 켄타우로스의 사냥 장면, 전통적인 멧돼지 및 사자 사냥, 히폴리토스와 파이드라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사냥 장면과 사랑 이야기, 그리고 신화 속의 영웅들은 로마 말기 은그릇에 자주 등장하는 디자인 요소다. 그런 소재들은 대중적인 이야기와 주제들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문학적 전통에 대한 지식을 드러내고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와 연결해 주었다.
6세기 무렵 사산 왕조 이란과 박트리아 및 소그다니아에서 로마 물병의 변종을 생산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런 그릇들은 로마의 양식을 조형으로 한 것이지만, 이 특징적인 물병 모양을 처음 수용한 곳이 사산 왕조 이란이었는지, 아니면 박트리아 같은 그 동쪽의 이웃 지역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와 상관없이 그 특성을 공유하고 형태와 형상화에서 변형을 준 것은 이 지역에서 문화 접촉이 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오른쪽 사진의 은도금 물병은 6~7세기의 것으로 인정되는, 몇 안 되는 사산 제국 물병 가운데 하나다. 높이는 32.4cm다.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산의 사례에서는 특정한 형태가 나타나 구별되고 있으며, 그들의 외형과 디자인이 표준화됐음을 시사한다. 히폴리토스 물병과 대조적으로, 장식은 몸체를 몇 개의 수평 구역으로 나누는 대신 그릇을 둘러싼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화려한 공 모양의 누름단추는 그릇의 높이를 넘지 않고, 손잡이 끝은 당나귀 머리로 처리했다. 이 물병은 여성의 모습으로 장식한 은도금 그릇의 유형에 속한다. 사산 세계의 잔치와 축제의 사회적 · 종교적 양상과 관련된 상징들을 집어넣었다. 역시 디자인은 지중해 세계의 발상을 따왔다. 특히 고양이가 병에서 마시는 모습 등 축하 의식 및 주연(酒宴)과 관련된 디오니소스 모티프 같은 것이 그렇다. 디오니소스의 광란하는 무녀와 로마의 축제 시즌의 표현은 여성을 묘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인도의 관능적인 귀신 약시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산의 것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그러한 모습은 박트리아 지역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그리스-로마의 영웅이야기 및 신과 관련된 모티프와 대조를 보인다. 이런 영향은 중국 서북부의 이현 무덤에서 발견된 물병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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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편의 물병은 높이가 37.5cm이며, 현재 구위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물병은 박트리아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에프탈(450?~560?) 지배 기난 동안이었을 것이다. 이는 사산과 함께 로마와 그리스계 박트리아의 은제품을 모방한 물병의 유형에 속한다. 이 물병은 형태 면에서 사산의 물병과 비교될 수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로마 말기의 영향이 엿보인다. 목과 다리에 세로 홈이 있고, 다리 바닥에 구슬 장식이 있으며, 쇠시리와 사람 머리 모양의 화려한 누름단추도 마찬가지다. 위 쪽의 선화에 보이는 것처럼 장식 띠는 그리스 신화 속의 트로이 전생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이 물병은 셀레우코스 제국(서기전 312~서기 63)과 그리스계 박트리아 왕국(서기전 256~125) 이후 이 지역에 헬레니즘의 영향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와 문학이 유행한 것은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담은 그림에 반영되었다. 물론 도상과 양식에서는 차이가 있어, 그것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고 5~6세기 무렵에는 본래의 모습에서 멀리 벗어나 있엄을을 보여준다. 손잡이 끝 부분은 쌍봉낙타의 머리로 장식되어 있다. 이는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반영하는 특성이며, 이런 양식 조합의 또 다른 사레다.
소그디아나의 한 은도금 물병(오른쪽)에는 날개 달린 낙타가 그려져 있다. 털 달린 꼬리는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고 있고, 부풀어 오른 보자기가 다리에 걸쳐져 있다. 7세기 말 또는 8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이 물병은 높이가 39.7cm이며, 현재 예르미타시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날개 달린 낙타는 승리의 신 베레스라그나와 연결시켜왔고, 왕권 부여나 행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는 날개 달린 동물(때로는 합성된 형태의 동물인 경우도 있다) 전통에 속하며, 여러 문화적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고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형무늬 안에 날개 달린 동물이 들어가는 조합은 사산의 디자인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사산 말기 은제 물병에 그려진 이란 신화의 날개 달린 새 시무르그 같은 디자인이 그렇다.
소그디아나 물병의 좀 더 둥글납작한 몸체는 4~5세기 이후 지중해 동안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테두리에 손잡이를 붙인 방식은 히폴리토스 물병과 비슷하다. 이는 사산 및 박트리아 물병과 대조적인데, 이들 지역에서는 위쪽 손잡이가 몸체에 붙어 있다. 목은 둥근 구멍을 묘사한 배경에, 꼴무늬 모티프로 윤곽선을 그린 모습으로 장식했다. 이런 모습은 나중에 중국 당나라의 기술자들에게 수용되었다. 이 그릇이 사산조 이란과 그 조상 격인 서유럽 양식에서 가져온 모티프를 보여주고 있지만, 소그디아나 미술가들이 자기네 세계관에 맞는 독특한 양식과 서사를 개발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진시황제의 능을 지키고 있는 병사 조각상.
중국의 등신대 조각상의 가장 이른 사례다.
동부 스텝 우시긴 우부르 의례 단지의 사슴돌.
서기전 제1천년기의 것이다.
간다라의 불상
간다라의 조각가들은 인간의 모습을한 불상을 아시아 미술에 도입했다. 많은 양의 좌상 및 입상이 현지의 잿빛 편암으로 조각 되었다. 놓이 52cm의 이 작품은 2~3세기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베를린 아시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붓다는 사자 두 마리가 새겨진 옥좌의 방석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초기 페르시아 왕들의 초상을 떠올리게 한다. 없어진 오른손은 두려움이 없음을 나타내는 표시인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보이고 있는 듯하며, 비슷하게 없어진 왼손은 아마도 입고 있는 옷의 단을 잡고 있는 듯하다. 주름이 잘 표현된 고부조의 옷이 양 어깨를 덮고 있다. 이는 헬레니즘과 로마 미술의 관행을 연상시킨다. 이런 유형의 붓다 좌상은 간다라의 후원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고, 다양한 변형으로 조각되었다. 이 사례는 파키스탄 마르단 부근의 몇 몇 산꼭대기에 퍼져 있던 대형 수도원 단지 타흐트이바히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유적지는 1세기부터 7세기에 영향력을 잃을 때까지 성행했다. 중국의 순례자였던 승려 현장은 그 사리탑이 여행 중에 본 것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구조물이라 했다.
중국 중부 룽먼 불교 석굴 사원 단지의 대형 불상.
측천무후의 지시로 676년에 완성되었다.
몽골 알타이 산록 고비사막의 눈 덮힌 명사산을 배경으로 길을 가는 쌍봉낙타 행렬.
타클라마칸 사막의 단풍이 든 검은 포플러.
메르브: 붉은 사막의 도시들
메르브의 도시들은 카라쿰사막의 남쪽 끝에 있는 무르가브강의 풍요로운 충적 삼각주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장 이른 것은 서기전 5세기 무렵의 것으로, 아케메네스고 제국(서기전 550~330)의 행정 및 교역 도시였다. 오늘날 에르크칼라라고 부르는 곳이며, 면적은 12헥타르 정도다. 서기전 3세기에 셀레우코스 제국(서기전 312~ 서기 63) 은 방대한 팽창 계획을 추진 했다.메르브는 1221년 몽골에 약탈당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일부 연속의 흔적도 있다. 아마도 옛 요새 안이나 주변에 제조업 종사자들이 정착했던 듯하다. 15세기가 되자 옛 도시는 결국 버려졌다. 그리고 테무르(1370~1507)의 작은 계획도시 압둘라한칼라가 건설되었다. 남쪽으로 2킬로미터 되는 지점이었다.
타림분지 투루판 부근의 야르골(교하). 차사 왕국(서기전 108?~서기 450?)의 수도였다.
타클라마칸사막의 왕국 호탄은 몇몇 오아시스 왕국들 가운데 가장 장수했다. 호탄의 초기 역사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이 왕국은 아소카왕(재위 238?~232?)의 추방으로 간다라에서 쫓겨 온 망명자들이 세웠다고 한다. 그들은 또한 불교의 사천왕 중 하나인 바이슈라바나(다문천왕)에게 의지했고, 호탄은 참으로 많은 수도워노가 신전을 보유한 번성하는 불교 왕국이 되었다. 호탄 왕들은 이란계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현지 언어인 호탄어는 동(東)이란어군에 속하며, 인도계 문자인 브라흐미 문자로 표기됐다. 미술 또한 이 봉헌 목판에서 보이는 것처럼 독특했다. 호탄은 서쪽과 북쪽에서는 튀르크의 영향을 받았고, 남쪽에서는 티베트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10세기에 동쪽 둔황의 왕국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지배 가문들끼리 혼인을 했고, 모가오의 불교 석굴 사원 벽에는 호탄인 후원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 왕국은 1006년 무렵 카라한의 침입으로
종말을 고했다.
타클라마칸사막 오아시스 왕국 호탄의 지배자 비샤삼바바(이성천, 재위 912~966).
··이웃 돈황 왕국의 모가오 석굴 98호 기부자로 그려졌다.
호탄은 쾌적하고 번영을 누리는 왕국이다. 인구도 많고 번성하고 있다. (···) 온 나라에 민가가 별처럼 널려 있고, 각 가정에는 문 앞에 작은 사리탑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가장 작은 것도 높이가 적어도 두 길(丈)은 넘을 것이다. 수도원에는 (···) 그곳에 오는 여행 승려들을 위한 방이 있고, 그들에게는 다른 원하는 것들도 모두 제공된다.
- 법현(法顯, 337~422), <불국기(佛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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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깊숙한 곳 타클라마칸 사막 가장자리에는 북쪽의 텐산산맥과 남쪽의 쿤륜산맥에서 녹아내린 물이 오아시스를 만들고 여러 왕국들의 키워냈다. 정착지와 무덤들은 청동기시대의 것들까지 발굴됐지만, 제1천년기 초 무렵의 중국 역사 자료들은 36개 또는 55개의 왕국이 있었다고 다르게 전하고 있다.
(좌) 타림분지 코초(고창) 부근에서 발견된 모시 현수막에 그려진 튀르크계 위구르 군주.
10세기에 만든 기념 초상화로 보인다,
(우) 모직 카프탄
돈황 왕 조연록의 호탄 출신 왕비와 가족들.
돈황 모가오 61호 석굴에서 발견된 것이다.
타림분지 키질 석굴 사원에서 나온 토하라인의 채색 점토 조각상.
6세기의 것이다.
- 아라비아반도: 유황과 물약의 땅 -
타이마는 큰 도시이며, 그 나라의 크기는 16일의 여정이 필요한 규모다. 북쪽에 있는 산들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유대인들이 여러 큰 성곡도시들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교도의 굴레가 씌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이자 동맹자인 아랍인들과 협력해 먼 나라에 가서 약탈하고 전ㄴ리품을 얻는 일에 나서고 있다. 이 아랍인들은 사막을 주거리로 삼으며, 천막에 산다. 그들은 ㅈ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시나르와 엘예멘의 땅에서 약탈을 하고 전리품을 얻는 데 힘쓴다.
- 투렐라의 벤야민(1130~1173) -
낙타를 타고 메카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그린 야흐야 알와시티의 그림.
무함마드 알하리리이 《마카마》(바그다드, 1237)에 실려 있다.
힘야르 왕국 사아드일랏 카르요트의 아들 이글룸의 설화 석고 묘비.
1~3세기의 것으로 "이것을 깨는 자는 누구든 나트라르신의 벌을 받게 될것이다' 라는글이 시바아 방언으로 새겨져 있다.
카산과 이스파한 사이의 지하수로인 카나트.
산에서 야즈드 부근 사막 마을 하라나크로 물을 끌어오는 데 쓰였던 도수관.
텐산 타슈라바트의 석조 카르반사 라이. 15세기의 것이다.
낙타 무늬
1985년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체르첸 부근에 있는 자군룩 1호 묘지에서 발굴된 이 양모 잔편은 크기가 가로 29cm, 세로 7.5cm다. 동부 실크로드 사막의 필수적인 짐꾼 동물인 쌍봉낙타가 그려져 있다. 대략 서기전 제1천년기 중반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크로드가 또오르기 전의 이 사막왕국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무늬는 갈색 평직 바탕에 왼쪽 꼬임 염색 양모 씨실을 가지고 손으로 뜬 사능직(四綾織)이다. 비슷하게 손으로 뜬, 낙타와 영양(뿔을 과장되게 표현했다)이 나비 모양의 이중삼각형 가운데에 나타나는 더 큰 작품이 있다. 크기는 가로 86cm, 세로 53cm다. 이 물품은 본래 침대보나 몸에 두르거나 천막에 비치하는 용도로 쓰였던 듯하다. 이 유적지에서 나온 연장과 도기 등을 보면 사용자가 농경과 사냥을 겸하는 반농ㄷ반목의 주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당시 양잠을 ㅎ살 줄 몰랐으며, 유적지에서 비단 몇 조각이 발견됐을 뿐이다. 동쪽의 중국과 활발하게 접촉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발견된 물건들은 현재 신장위구르자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사이에 있는 리바트이말리크 카르반 사라이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11세기 저수조 사르도바 말리크.
제라프산강으로 부터 지하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받았다.
단검 속의 낙타
이 짧은 무기는 말 타던 사람들이 지녔던 유형으로, 폰토스 스텝의 아조프 부근에 있는 다치의 도굴된 사르마티아계 알란족 무덤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 무기는 금 자루가 달린 쇠날 단검과 칼집으로 이루어졌다. 칼집 전체에 걸친 고부조 장식은 맹금이 쌍봉 낙타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네 개의 돌출부와 칼집 끝은 소용돌이 구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스텝 미술의 영향을 보여준다. 낙타 그림은 동방으로 가는 사막 교역로와 연결돼 있음을 드러낸다. 금에 박아 넣은 터키석과 홍옥수의 광범한 사용은 사르마티아와 알란족의 세공품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 보석들은 더 동쪽에서 얻었을 것이다. 무덤의 연대는 1세기 중후반으로 추정한다. 칼집의 특징적인 네 개의 돌출부 모양 역시 동쪽의 카자흐 초원에서 기원했다. 서기전 3세기 이후 네 개의 돌출부가 있는 나무 칼집이 알타이산맥에서 발견됐다. 비슷한 유형의 금제 칼집이 흑해 북안 지역의 포로기, 코시카, 고르기피아 등 다른 사르마티아계 알란족 유적지에서 발굴됐다. 비슷한 단검을 찬 왕의 모습이 파르티아 주화와 콤마게네 왕국(서기전 163~서기 72)의 조각품, 노용올의 흉노 무덤에서 나온 피륙에 나타난다. 형태와 장식 개념 양 측면에서 가장 가까운 사례는 틸라테페에서 나온 터키석이 박힌 단검 칼집이다. 다만 그것은 더 분명한 스키타이-시베리아 양식의 구불구불한 동물 모양으로 장식됐다.
- 버려진 아내 -
현재 영국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고대의 편지'들은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일대로 수송하던 중에 잃어버리거나 압수된 것이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이른 소그드어 중이 문서들이며, 연대는 대략 313년 무렵이다. 이 편지들은 지금의 중국 서북부에 있던 소그디아나 상인들이 쓴 것인데, 대체로 장사와 관련된 내용이다. 비단 등 여러 가지 상품과 여러 중국 도시의 소그디아나 중개상 및 거류지 등을 언급하고 있다. 한 편지는 악화되고 있는 중국의 정치 상황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의 관심은 그것이 장사에 미칠 영향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외국 상인들에게 미치는 파멸적인 결과에 집중돼 있다. 편지 가운데 두 통은 미우나이라는 여성이 쓴 것이다. 여기 보인 사본 '편지 3'은 남편인 나나이다트에게 보낸 것인데, 자신을 궁핍한 상태로 둔황에 버려둔 남편을 책망하며 화가 나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 마누라가 되느니 차라리 개나 돼지 마누라가 되는 게 낫겠어!"
두 사람의 딸인 샤인은 좀 더 부드러운 어투로 쓴 추신에서 그들 모녀가 중국인의 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미우나이는 자신의 어머니 차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친정에 데려다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적었다.
알와시티가 그린 카르반사라이의 여행자 모습.
무함마드 알하리리의 《마카마》(바그다드, 1237)에 나온다.
- 인도 융단 -
사막은 다른 곳에서는 금새 썩는 나무와 피륙 같은 유기물질을 보존하기 위한 최상의 조건을 제공한다. 타클라마칸사막 역시 예외는 아니다. 많은 피륙이 무덤과 사원에서 발굴되었다. 위리현 잉판과 케리야에서 나온 것들이 대표적이다. 다른 곳의 경우에도 2~4세기 카도타 왕국(니야) 터의 마른 과일나무와 포플러나무 가옥 골조가 현재 모래에 반쯤 묻혀 있다. 이 융단 잔편은 평직 양모에 테피스트리 장식을 더한 것으로, 3세기 말에 버려진 카도타의 한 집에서 발견되었다. 이 융단은 거의 틀림없이 인도에서 만들었거나 카도타에서 인도인이 짰을 것이다. 간다라에서 이주해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자기네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왔다. 이 시기의 피륙은 인도 안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번성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인도 직물 전통의 희귀한 사례다. 홀치기염색을 한 무명 등 다른 인도 피륙 잔편도 카도타 동족의 카라동에서 발견되었다.
- 이슬람교: 실크로드의 새로운 신앙 -
역사가들은 이슬람 세력이 부상할 때가 7세기 초 무함마드(570?~632)의 전도부터라고 파악한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자화상에서 무함마드의 예언은 이슬람교의 마지막 장의 시작을 나타낸다. 쿠르안은 이슬람교를 천지창조 이래의 진정한 신앙으로 제시한다.
아부 하니파(699~767)의 <피크아비 하니파>에 나오는 메카 카바 신전의 순례자들.
1140~1141년 이스칸다르 술탄을 위해 만든 후대의 집성본에 포함됐다.
사마라 이슬람 대사원의 정탑
847~861년. 이 나선형의 기원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예루살렘: 바위 돔
예루살렘에 있는 바위 돔은 7세기 말에 지어졌는데, 이슬람 건축에서 첫 번재 대형 작업이었다. 그것은 한때 솔로몬 신전이 있던 탁 트인 넓은 터 간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예루살렘의 첫 이슬람교도들이 예배 장소로 선택했던 곳의 바로 북쪽이다. 팔각형의 건물이 노출된 자연석 위에 지어졌고, 그 바위에는 동굴이 하나 있다. 거디에는 중앙의 반구형지붕을 인 바위 위 공간이 있고 기둥과 벽의 회랑으로 나뉜 팔각형의 복도가 이를 둘러싸고 있다. 안벽은 십자를 새긴 대리석 판자와 상상 속의 식물 장식을 묘사한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회랑 꼳대기에는 이슬람 서체인 쿠파체로 긴 글이 쓰여 있는데, 쿠루안을 길게 인용한 뒤 692년에 해당하는 날짜로 끝맺고 있다. 바깥벽 역시 한때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그리고 20세기에 다시 한 번) 매끄매끈한 타일로 교체됐다. 이 장소는 일반적으로 선지자 무함마드가 신비로운 밤의 여행('미라지')으로 승천한 것을 기념하는 곳으로 여겨지지만, 글에는 이런 언급이 없고 오히려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쿠르안.
버밍험대학에 있는 두 책의 양피지는 탄소 연대 측정 결과 6세기 말에서 7세기로 밝혀졌지만, 글을 쓴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 푸른 쿠르안 -
'푸른 쿠루안'은 청색 물을 들인 짙푸른 양피지에 금으로 쓴 필사본이다. 묶음은 풀어졌다. 20세기 초에 이스탄불에서 며 장이 입수됐는데, 처음에선 9세기 초 이란 동북부에서 만든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그 뒤 튀니지에서 여러 개의 낱장이 더 발견되자 다른 가능성들이 제기되었다. 9세기 바그다드 설, 10세기 북아프리카 또는 이베리아반도설 등이다.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카이로우안에 있는 이슬람 사원 도서관의 13세기 말 목록에 따르면 이 필사본은 그때 이미 이 도서관에 있었다. 본래의 필사본은 90장 안팎이었다. 각 폭의 크기는 가로 40cm, 세로 30cm이고, 15행씩의 글이 금박으로 쓰여 있다. 글자는 검은 일크로 테두리를 표시했다. 절(節)은 은박 장식으로 표시했는데, 이는 나중에 검게 변색됐다. 금색과 청색의 이례적인 색채 조합은 그 기원과 의미에 대한 여러 추측을 불러있으켰다. 다른 쿠루안 사본들도 금으로 쓴 경우가 있지만, 짙은 청색 바탕은 이례적이고 시각적으로 놀라운 것이다. 이는 때로 자줏빛 양피지에 금 또는 은으로 쓴 동로마 제국의 필사본들과 비교도기도 하지만, 청색 물을 들인 종이에 금으로 쓴 중국 불경과 더 가까이 닮았다. 아래 왼쪽 사진은 둔황 장경동에서 나온 것의 일부다. 청색은 쿠르안에 딱 한 번, 그것도 부정적인 의미로 나왔지만, 청색 바탕과 금 글자의 조합은 바위 돔으로부터 코르도바의 이슬람 대사원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모자이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금과 청금석의 조합은 먼 옛날부터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장신구와 기타 예술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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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둔황 장경동에서 나온 불경.
(우) 우마이야 칼라파 압말리크의 디나르 금화.
695년(이슬람 기원 76년)에 주조했다.
- 사만 제국의 능묘 -
사만 제국(819~1005)은 아바스 칼리파들을 대신해 바그다드에서 인도 사이 지역의 상당 부분을 다스리게 됐다. 수도 부하라에 있던 그들 왕가 능묘는 10세기 초에 세워졌는데, 내화벽돌로 만든 비교적 작은 정육면체(한 변이 10미터 정도다) 건물이다. 스킨치(모서리 아치) 위에 반구형 지붕을 덮었으며, 네 귀퉁이에 아주 작은 반구형 지붕이 또 있다. 사방 각 면의 중앙에는 안으로 들어가는 큰 반원지붕의 입구가 있고, 그 위에는 비슷한 모양의 축소판 모형 입구가 각 면에 열 개씩 외벽을 두르고 있다. 내부는 사만 왕가의 몇몇 가족들의 무덤이다. 약간 경사진 벽은 내벽과 외벽이 모두 별돌의 위치와 간격을 달리해 만들어진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돼 있다. 이 기법은 페르시아어로 하자르바프('천 번 짜기')라 하는데, 직조한 피륙의 무늬와 비슷해서 나온 이름이다. 이것은 반원지붕 정육면체 형태의 기념 건축물로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다. 선지자 무함마드가 죽은 자의 무덤을 기념하는 일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이슬람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런 건물을 흔히 볼 수 있다. 더 이른 사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주조와 장식 기법의 숙달된 솜씨를 보면 더 이른 시기에도 이런 형식의 건축물이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루제로 2세의 대관식 외투 -
노르만계 시칠리아 왕 루제로 2세(재위 1130~1154)가 대관식 때 입었던 외투는 1133/4년(이슬람기원 528년) 팔레르모에서 만들어졌다고 아랍어 헌사에 적혀 있다. 이 오투는 유라시아 대륙 각지에서 가져온 시간언어를 조합한 디자인과 장식으로 유명하다. 현재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혼종의 미의식은 넓은 범위의 신앙과 언어를 포괄하는 다양성의 왕국이었던 시칠리아 왕국의 자기표현에서 중심적인 것이었다. 학자들은 야자나무 양쪽 옆에 단봉낙타를 공격하고 있는 사자가 대칭으로 그려진 도상의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려 고심하고 있다. 지배적인 견해는, 사자는 노르만인, 단봉낙타는 아랍 세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길이 3.45미터, 폭 1.46미터의 이 외투는 무늬를 넣은 세이마이트 비단으로 만들었다. 켈메스 염료를 써서 진홍색으로 물들인 바탕에 적색 · 청색 · 백색 명주실로 수를 놓았고, 벌레 무늬 선조세공(線條細工)을 한 금과 칠보 · 진주 · 루비 · 사파이어 · 첨정석 · 석류석 · 유리로 장식했으며, 가장자리를 땋았다.
눈에 보이는 표현은 루제르 2세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는 1147년 테바이에서 비단 직조공들을 잡아왔다. 파티마식으로 차린 자신의 왕실 작업장에서 동로마 수준의 고급 피륙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이 외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다양한 재료와 기술은 이 옷 주인의 정치권력을 드러낸다. 주레로 2세와 그 후손들이 지중해 세계 왕국들로부터 그림과 글과 통치 방식을 가져오고 변형시켰지만, 이런 요소들은 시칠리아 왕국에서 구체적으로 노르만적인 맥락과 결합되었다. 외투의 붉은 아마포 안감에는서로 다른 비단 세 조각을 붙였는데,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얻은 것이었다. 테피스트리로 짠 본래이 안감은 다섯 조각으로 돼 있고, 가죽 바탕에 일곱 가닥의 색 명주 씨실과 질긴 재질의 금실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은 핵심 모티프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생명나무 옷, 용의 옷, 새의 옷 등이다. 초목 장식이 잇는 13세기의 초록색 무늬 비단 안감과 꽃무늬가 있는 15세기의 장미색 이중 안감도 댔는데, 이는 이 외투가 수백 년에 걸쳐 재사용됐음을 입증한다.
모슬의 맘루트 지배자.
아마도 바드르잇딘 불루(?~1259)인 듯하다. 아부 알파라지 알이스바하니(1897~967)의
《노래의 책》후대 판본에 나온다.
- 류트, 비파, 우드: 현악기의 실크로드 전파 -
현명악기(통상적으로 현악기라고 한다)는 조직화된 소리를 만드는 기술이자 뮤지컬과 그 밖의 예술의 매개체다. 세 가지 주요 유형의 류트가 먼 옛날부터 유라시아 대륙 일대에서 나타났고 그것들이 교류되고 혼합됐다는 증거는 현대 현악기의 형태와 연주 기법에 분명하게 남아 있다.
우드 연주자와 관객을 그려 장식한 유약 바른 사발.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의 것이다.
5현 루트
류트는 서기전 제3천년기 이후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전파됐고, 타원형 류트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와 중국으로 간 뒤 한반도, 일본, 동남아시아로 전해졌다. 이 8세기 타원형 류트는 그 품질과 상태로 보아 사절단이 일본 궁정에 선물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황실 보물창고인 나라 쇼쇼인에 있다. 이 악기는 길이가 108.1cm이며, 백단이라는 나무로 만들었다. 자개를 박은 픽가드에는 야자나무 주위를 도는 새와 그 아래 낙타를 탄 음악가가 그려져 잇다. 그려진 인물은 아마도 중앙아시아 또는 페르시아 사람인 듯하다. 이는 이 악기가 중앙아시아의 그 조상과 연관이 있음을 드러낸다. 중국 당나라(618~907) 궁중의 많은 음악가와 무용수들은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
천상의 음악가가 류트를 연주하고 있다. 중국 수도 장안(시안)의 6세기 소그드인 공동체 지도자
안가(安伽), 518~579)의 무덤 상인방에 그려진 것이다.
붓다의 탄생을 그린 석회석 돋을새김 조각.
천상의 음악가와 무용가들이 그려져 있으며, 그 가운데 타원형 류트 연주자가 있다.
인도 아마라바티, 2세기.
타림분지 키질의 불교 석굴 사원 벽화에 나오는 류트 연주자. 7~9세기.
중국 원강 불교 사원에서 나온 칠현금 연주자 조각상. 6세기.
편암에 새겨진 천상의 음악가들. 파키스탄 스와트 계곡. 4~5세기.
신 · 구카이로
푸스타트, 즉 구카이로는 641년 아랍의 정복 시기에 나일강변에 건설되었다. 이곳은 칼리파국 병사들을 위한 기지이면서 도자기 같은 고급 공예품의 생산지이기도 했다. 번성을 누리던 이곳은 12세기에 불이 나서 도시 상당 부분이 타버렸다. 벤에즈라 이슬람 사원과 그곳에 있던 게니자는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성장을 이어갔다. 19세기 이곳의 발견은 중앙아시아 둔황의 장경동 발견과 함께 실크로드학의 변모를 가져왔다.
중국의 황도 장안
국제도시 장안(長安)은 중국 영토의 심장부에 있었고,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다. 2천 년 동안 대부분의 중국 왕조들은 이 전략적인 위치에 수도를 건설했다. 이곳은 서쪽으로 가는 길목들을 통제하고 있었고, 북중국의 거대한 농경 평원에서 가까웠다. 수 왕조(581~618)의 첫 황제 문제는 582년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직사각형의 성곽 도시는 동서가 10킬로미터, 남북이 8킬로미터였다. 이는 110개의 방(坊)으로 나뉘었는데, 동서 방향의 큰 도로 12개와 남북 방향의 큰 도로 9개로 나눈 것이었다. 폭 155미터의 주작대가(朱雀大街)는 북쪽으로 황성(皇城)의 남문인 주작문까지 이어졌고, 이 거대한 도시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 황성의 각 구역은 2~4개의 문을 가진 외벽으로 둘러쌌다. 각 방에는 대저택과 불교 · 마니교 등 여러 종교 사원들도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도시의 양대 시장 가운데 서시(西市)는 사방 1킬로미터 정도의 크기였고, 실크로드에서 온 상인들이 물건을 거래하던 곳이었다. 실크로드 교역의 전성기에 인구 200만 명에 육박했던 이 도시에는 수천 명의 외국 상인들이 몰려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장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주론적 · 정치적 · 종교적 중심지였다.
다종교 도시 이스파한
이스파한은 이란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 도시들 가운데 하나다. 별나게 비옥한 땅들에 둘러싸인 그 전략적 위치로 인해 이곳은 교역 도시로 발전하는 데 이상적인 장소였다. 고원을 거너는 동서 교통로와, 자그로스산맥 동쪽의 남북 연결 모두에 중요한 곳이었다. 메디아 제국(서기전 678?~549?) 시절에 이미 자얀데강변에 가바이(나중에는 자이로 불렸다)라는 중심 도시가 발전했는데, 이 강은 이란 내륙의 어느 강보다도 수량이 풍부했다. 나중에 아랍 지리학자들은 이 지역을 낙원으로 묘사했다. 이 지역은 아케메네스 제국(서기전 550~330) 창건자들의 본향이었다. 그러나 초기 도시와 조로아스터 신전들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산의 페로즈 1세(재위 459~484)는 마을을 건설하고, 인반적으로 '유대인의 문'으로 알려져 있는 문 밖에 조로아스터교의 배화 신전을 만들었다. 이는 자이 서북쪽 약 3킬로미터 지점에 있던 야후디야의 유대인촌을 말한 듯하다. 사산 왕 야즈데게르드 1세(재위 399~420)의 유대인 왕비 슈산데흐트가 건설했다고 하는 그곳이다. 두 도시는 점차 합쳐졌고, 야후디야가 중심지가 됐다. 642년 이슬람 정복 이후 이스파한은 지역 중심지가 됐으며, 수백 년 동안 번성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1226년 몽골군에 약탈당했고, 1228년에 덤령당했다. 1327년에 이곳을 방문한 이븐바투타(1304~1369?)는 이 도시가 거의 폐허가 됐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스파하은 사파비 왕조(1501~1736) 시절에 다시 중요한 위치를 되찾았다. 아바스 1세(재위 1588~1629) 치세에 국제적인 중심 도시가 됐고, 아르메니아인 · 튀르크인 · 중국인 도공들과 유럽의 선교사 ·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에는 또한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많았다. 이스파한은 17세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발전했다. 위 사진의 자메 이슬람 사원 같은 기념물들은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인용: 수전 쉿필드 外 著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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