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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범 종단과 함께

홍암(弘巖) 나철(羅喆)


홍암 나철 기념관

(보성군 벌교읍)






















  

                        

                               (대일외교항쟁 당시의 나철)                  

                                                              













1905년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하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4명의 동지들

(이기, 나철, 홍필주, 오기호)


일제 기밀문서 「요시찰 한국인 거동」(일본외무성 소장)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문

















을사오적 처단의거 미수사건 판결문 표지(국가기록원 소장)







나철 어록비(독립기념관)
















대종교총본사와 직원(동경성 시기, 1935~1945)

앞열 첫번째 나정련, 두번째 윤세복, 네번째 이수원, 맨 오른쪽 이현익 뒷열 첫번째 나정문, 두번째 김진호


























나철이 친구 소운 황병욱에게 남긴 유서(김동환 소장)































대종교 독립운동


1914년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청파호로 대종교총본사를 이전한 후, 대종교는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대 대종교도가 주도한 독립운동의 중심지는 북간도 왕청현(汪淸縣) 일대였다. 왕청현에서의 동도본사 책임자는

서일(徐一)이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독립정신 함양과 군사교육에 진력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중국에 망명중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연명으로 대한독립선언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서명인사 39인 중 대부분이 대종교도였다. 서일은 중광단을 토대로

대한정의단으로의 확대를 거쳐 대한군정서, 일명 북로군정서로 발전시켰다. 대한군정서는 북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 되었고, 대한군정서 독립군 병사의 대다수는 대종교도였다.

이로써 대종교는 항일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 10월 대한군정서는 총재 서일의 지휘아래 부총재 현천묵(玄天默),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 나중소(羅仲昭)

이범석(李範奭) 등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서 대종교 독립군들은 1925년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하여,

민정과 군정을 하우른 한인자치부 성격을 띤 독립군단을 성립시켰다.


대종교 제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 은 한희제(安熙濟) 등과 함께 1933년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국외 독립운동기지인 발해농장을 경영하였다. 또한 1936년 대종학원 설립과 더불어 많은 양의 대종교

교리 · 교사에 관한서적들을 간행하여 종교적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1919. 2)

대한독립의군부가 주체가 되어 대종교총본사에서 발표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인사 39인 중 대부분의 인사가 대종교 중심인물들이다.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 제1회 식(1920년 . 9 . 9)

사관견성소 소장은 김좌진, 교관은 이범석, 김규식으로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였다.





서일 등이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에게 보낸 서신 내용


개천절 기념기사(『독립신문』1923. 11. 10)










학우단 규약 표지                                                      학우단 규약 본문





청산리대첩 승리를 자축하는 독립군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한 일본군 제19사단 사령부 나남 19사단 예하

 일본군 보병 75연대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에 참패당하였다.




청산리대첩 당시 대한군정서(김좌진부태)가 사용했던 피묻은 태극기.

당시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대한군정사가 후일을 기약하며 민족학교인 영신학교 창고에

숨겨두었던 무기를 청산리대첩 후 일본군이 노획하였다.




홍범도 부대가 소지했던 수류탄




청산리대첩 이후 일본군 추격을 피해 철수하는 과정에서 노획당한 독립군 탄약




청산리 대첩 후 일본군에 노획당한 독립군이 사용했던 무기




청산리 대첩 당시 독립군이 사용했던 소총



+


독립군이 사용했던 수류탄





대한독립군단 취지서

1920년 12월 대한군정서 주도하에 대한독립군 · 대한신민회 · 대한국민회 ·  군무도독부 · 의군부 · 혈성단 · 야단 ·

 대한 정의군정사 대표들이 노령 연해주로 건너가 장기 항일전을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중국 길림성 화룡시 임장입구)




대종교 3종사 묘역(중국 길림성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






흑룡강성 영고탑 대종교총본사 제14회 중광절기념(1922)





신민부 보도 기사 (『매일신보』1925. 4. 8)





천진전 건립준비회를 마치고(1942)





임오교변이 일어나던 해 개최되었던 대종교 제7회 회의장(1942. 5. 1)




 사무실(1930년대)




발해농장 사무실(현재)







발해농장 수문 입수기념(1936. 6. 5)




발해농장 수전




발해농장 수로




일제의 대종교 탄압


임오교변(壬午敎變)은 1942년 일제가 대대적으로 대종교를 탄압하 사건이다.

임오교변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당시 서울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던 이극로가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널리펴는 말』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일제가 검열과정에서 조작하여 일으킨 것이다.

이극로의 원고 중에서 『널리펴는 말』이라는 제목을 일제가 조선독립선언서로 바꾸어 붙이고, 내용 마지막 부분의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이 도우신다" 라는 구절을 "봉기하자 폭동하자! 한배검이 도우신다"

라고 날조하여 대종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던 것이다.


제3세 교주 윤세복과 대종교 간부들이 동시에 검거되었으며 대종교총본사의 각종 비품과 서적을 압수 당하였다.

이때 검거된 대종교 간부중에서 권상익 · 이정 · 안희제  · 나정련 · 나정문 · 김서종 · 강철구 · 오근태 ·  이창헌 ·

이재유 등 10명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악형으로 순명하였다. 대종교에서는 이들을

 '순교십현(巡敎十玄)'  또는 '임오십현(壬午十玄)'이라고 한다.








흑룡강성 액하감옥



대종교총본사 환국기념(1946. 6. 10)



4열(왼쪽부터)

이영재, 진성준, 김흥곤, 이용열, 정 일, 성낙영, 임승호, 허 암, 양문현, 엄주천, 이원갑, 서성순, 조병애

3열(왼쪽부터)

김우진, 이대호, 김희군, 강진구, 신백우, 나경석, 심성수, 김두종, 백남규, 이흥수, 김공순

2열(왼쪽부터)

태흥선, 윤태선, 박정식, 김상호, 정 관, 윤일병, 이극로, 정열모, 강용구

1열(왼쪽부터)

황학수, 조성환, 이시영, 윤세복, 조완구, 김 준, 김영숙




























『대종교 교보』(1946년)


일제의 대종교 탄압으로 『교보』발행이 중지되었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환국기념호를 발행하였다.


참조:  보성군 『홍암나철기념관』







Jeg Ser Deg Sote Lam - Susanne Lund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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