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 산 아래로 예전엔 없었던 새로운 길이 조성되었다.
이곳 바위 벼랑에 관어대(觀魚臺)라는 각자가 조성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 '관어대' 위에 총석정(叢石亭) 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근처 장안리 출신의 황주 변씨 정암 변진욱(正巖 邊鎭旭 1858 ~1924) 이 지은 것으로
1935년에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전하고 있다는데 아마도 일제강점기 때 지어졌던 모양.
볼 관(觀)
물고기 어(魚)
돈대 대(臺)
후송(後松) 김학순(金學純, 1876~1949)과 변승기(邊昇基)는 이렇게 읊었다.
입암산(笠巖山) 정맥이 봉암산에서 솟았거니 笠巖真脉鳳山起
백세의 남긴 터가 두 산에 있노매라 百世遺基在二山
산수는 인연 깊어 노닐어 싫지 않고 山水有緣遊不倦
고향은 무사하여 마음 항상 한가롭소 家鄉無事意常閒
송추는 풍상(風霜) 속에 울창키만 하거니와 松楸鬱鬱風霜裡
상재(桑梓)는 우로 간에 사모하는 마음이오 桑梓依依雨露間
지금은 나만 홀로 선인의 뜻 품고서 秪今獨抱先人志
정암과 내 집을 마음대로 오간다오 吾愛吾廬任往還
부엉바위
임란 때 화차를 제작한 망암 변이중의 종제인 휴암 변윤중은 종형을 도와 화차를 제작할 때 크게 공헌한 인물.
정유재란 때 왜적이 장성에 쳐들어오자 윤중은 집안의 종들과 의병을 모아 왜적과 맞서 싸웠다고.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패하고 많은 의병을 잃자 이곳 부엉바위에 올라 투신하고 만다.
아마도 예전엔 저 바위 아래로 물이 흘렀던 듯.
부인 함풍성씨가 ‘여필종부’라 하여 남편을 따라 투신하자 아들 변형윤 또한 부모님을 따라 죽으려 하니,
그의 아내 장성서씨가 “내가 대신 죽을테니 당신은 대(代)를 이으라”며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서씨 부인이 하류에 몸을 던졌건만, 기이하게도 그 시신이 급한 강물을 거슬러 올라
시어머니의 손을 꼭 움켜잡은 채 부엉바위 앞을 맴돌고 있었다고 전한다.
변윤중의 忠과 아내의 烈, 며느리의 孝로서 보기드문 소위 <일문삼절>이루었으니,
조정에서는 이른바 <삼강정려>를 내렸고 고종때 장성읍 장안리에 비와 문을 세우게 된다.
장안마을 봉암서원 앞에 세워진 삼강정려(三綱旌閭)
황주변씨(黃州邊氏) 문중의 충신 변윤중邊允中 · 열부烈婦 함평이씨(변윤중의 처) ·
효부孝婦 장성서씨長城徐氏(변형윤邊亨胤의 처)의 삼강(三綱)을 기리는 정려이다.
장안마을 어귀 산자락에 자라는 삼채
장안마을 앞 난산(卵山)에 자리한 영사정(永思亭)
열녀(烈女)
시대의 산물이자 이땅의 역사라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 볼라치면....!
고선무량변공취강처열녀영천이씨지문(故宣務郞邊公就康烈女永川李氏之門)
정유재란 때 일가족이 마을 뒤편 봉암산으로 피난하였으나 왜인들에 의해 남편인 변취강이 죽자
몸을 더럽히지 않겠노라 칼로 자신의 팔을 절단하고 죽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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