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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가훈과 유언 1

 

 

 

 

면앙정(俛亭)

 

 

 

 

- 송순이 자식에게 준 훈계 -

 

송순은 우후(虞侯) 설남중(薛南仲)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두 아들의 이름을 관(寬)과 용(容)으로 지어 자식들에게 바라는 바를 담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명이자설(名二子說)」에 남아 전한다.
관아! 네 이름을 '관'이라 지었다. 관(寬)이란 관대하고 인자함을 말한다.옛날 중궁(仲弓)은 현자를 높이고 무리를 포용해 곧장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너는 이를 경계토록 하라용아! 나는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노라.
적장자인 해관은 병오년(丙午年, 공의 나이 54세)에 생원이 되고 이후 참봉이 되었지만 자녀 없이 죽었다.둘째아들 해용 역시 자녀 없이 죽었다. 이에 현감 최세윤(崔世胤, 공의 사위)의 아들이자 종실인 순흥군 몽우(夢禹)의둘째 아들인 정의 이름을 고쳐 해관의 아들로 삼고, 서장자(庶長子) 해청(海淸)의 큰아들인 덕미(德美)를 해용의 아들로 삼았다. 이후 덕미가 면앙정의 종사를 이었다.
송순의 부인 설씨는 계축년(공의 나이 61세) 12월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송순이 「훈자(訓子)」에 '일찍 어미를 잃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두 아들을 늦은 나이에 보았던 모양으로.연보에 서장자 해청을 나이 마흔(임진 6월)에 얻었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처음 얻은 아들이라 서자임에도 부기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 두 아들이 공이 81세 되던 해에 차례로 죽고 말았다. 송순은 아들 잃은 슬픔을 스물네 자로 이루어진 짧은 사언시(四言詩) 「곡자문(哭子文)」에 담는다.

 

 

 

​哭我哭    

 네 곡을 내가 하니

 我哭誰哭   

 내 곡은 누가 할꼬. 

汝葬我葬 ​   

네 장사 내 치르니 

我葬誰葬   

내 장사는 누가 하나.

 白首痛哭

흰머리로 통곡하니

 靑山欲暮

푸른 산도 저무는 듯.

 

 

 

 

 

 

연계정에서 조망한 유희춘 종가, 모현관 연지.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선친 성은공(城隱公 유계린(柳桂隣))의 언행과 문장은 순수하고 흠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일찍이 가르침을 잃어버려 항상 하늘이 끝나는 듯한 아픔을 품었으며, 또 불초하여 부모를 세상에

 드러내지도 못하였다. 지금 적지 않으면 다 없어질까 두려워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님이 집안에서 독실히

행하신 10조(條)를 기록하여 날마다 경계를 더하고자 정훈을 짓노라.

 

 

 


- 유희춘(柳希春)의 「십훈(十訓)」-

 

제1 기상(氣像), 제2 질욕(窒慾), 제3 사친(事親), 제4 제가(齊家), 제5 수신(守身),

제6 처사(處事), 제7 지인(知人), 제8 접물(接物), 제9 계사회천(戒仕誨遷), 제10 문학(文學)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존경심과 함께 자식의 벼슬길을 경계하며 운명을 예언하고,

마땅한 거처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다가 온다.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부인 송덕봉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고, 측실에게서 다섯 딸을 얻었다. 외아들 경렴(景濂)은찰방(察訪)을 지냈는데,

하서 김인후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이 십훈(十訓)은 문집 권4에 실려 있다.

이외에도 「정훈내편(庭訓內篇)」과 외편(外篇)이 더 있다. 끝 부분에 아버지가 친히 써서 내려주셨다는 부사 이나의

「훈자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 「아들 안명에게 부침」이라는 시를 말한다.

 

 

朔風號怒雪飄揚

삭풍이 몰아치고 눈보라 흩날릴 제

念汝飢寒感歎長

너의 기한(飢寒) 생각하며 길게 탄식 하노라.

色必敗身須戒愼

여색 필히 몸 망치니 경계하고 삼가하며

言能害己更詳量

말은 몸을 해치나니 세세하게 가늠하라.

狂荒結友終無益

광망한 자 벗 삼으면 끝내 유익함이 없고

 驕慢輕人反有傷

교만하여 남을 경시하면 외려 해를 입느니라

萬事不求忠孝外

만사에 오로지 충효만을 추구하면

一朝名譽達吾王

하루아침 그 이름이 내 임금께 이르리라.

 

 

「십훈」의 아홉째 항목에, 『주역』의 점괘로 자식이 운명을 경계하며,

"벼슬길은 끝까지 가지 말고 중도에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오라"는 주문이 나온다.

미암 자신이 그 경계를 소홀히 해서 머나먼 함경도 오지에서 19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음에 빗댄 것이리라.

그가 적은 방대한 『미암일기(眉巖日記)』는 가시밭길을 걸어온 조선조 지식인의 내면이 그대로 담겨 있어

당시 사회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이에겐 더없이 소중한 사료이다.

 

              

                     

 

 

- 사류재(四留齋)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의 유서 -

 

 

죽음을  보름여 앞두고 아들과 손자, 사위에게 준 유서다. 자기 사후의 일을 꼼꼼하게 당부한다.

글의 주요 부분만 살펴보도록 하자.

 

 나이 쉰을 넘겼다. 젊어서는 곤궁하여 늘 집안의 가난함 때문에 동분서주했다.

성격은 뻣뻣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사물과 더불어어그러짐이 많았다. 혼자 자신을 헤아려봐도

 필시 세속의 근심을 받으려니 하였다. 애써 세상을 떠나 지내느라 너희들을 어려서부터 춥고 주리게 하였다.

내 일찍이 한나라 왕패(王覇)의 어진 아내 유중(孺仲)의 말에 느낌이 있었다.낡은 솜옷을 걸친다 해도

어찌 자식들에게 부끄럽겠느냐. (중략)

 

질병을 앓은 후로 점점 쇠약해지는구나. 친구들이 날 버리지 않아 매번 약과 침으로 도움을 받지만,

수명이 장차 다해갈까 염려되는구나. 너희는 어리고 집은 가난하여 매번 나무 하고 물 긷는 노고를 감당하니,

어느때나 면하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중략)

 

『시경』에서는 "높은 산을 우러르며 큰길을 간다"고 했다.

비록 능히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해도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이를 숭상해야 할 것이다.

너히들은 삼갈진저, 내 다시 무슨 말을 하랴.

 

 

 

이정암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당시 연안성(延安城) 전투에서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도 왜군에게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그가 막상

조정에 올린 장계는 "적이 아무날 쳐들어와서 아무날 물러갔나이다" 라는 딱 한 줄 뿐이었으니 그 사람의 됨됨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후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이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난이 끝나자 풍덕에 은퇴하여 시문으로 소일하다가 1600년 9월 10일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독역고(讀易攷)》·《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사류재집》 등이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 윤광부(尹光富)의 딸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부인 윤씨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공의 나이 57세) 7월에 먼저 죽었다. 다섯 아들 중 둘째인 이남(李湳)과 넷째인   이위(李湋)는 일찍 죽었고, 큰 아들 이화(李澕)도 공보다 먼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유서에 두 아들 뿐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정암은 부인 윤씨의 상이 끝난 뒤인 1598년에 남은 아들 준(濬)과 홍(洚)에게 재명(齋名)을 지어주며

말에 대한 경계를 강조했다. 제목은 〈이자명재설(二子名齋說)〉이다.

 

 

옛 사람은 반드시 재명(齋名)이 있었다. 이름을 돌아보아 뜻을 생각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아름다운 이름을 훔쳐 취하여

스스로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주자의 호는 실제 회암(晦庵)이고 아버지 주송(朱松)의 호는 위재(韋齋)이니, 또한 스스로

뜻을 취한 것으로, 전기에 기록된 것으로 대개 가늠할 수가 있다. 너희들은 타고난 자질이 아주 둔하지는 않다. 하지만 가정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또 사우(師友)의 일깨움이 부족한데다 변고를 만나고 시습(時習)에 점차 물들고 말아, 군자가 되지는

못하겠고, 마침내 촌사람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근심하는 바는 촌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을 걱정할 뿐이다. 지금 네가 어머니의 복을 마치고 사는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나는 아침저녁으로 서로 본보기가 되지 못할 것을 염려한다. 삼가 《논어》의 “행실은 바르게 하되 말은 겸손하게 하라.”는

가르침과《중용》의 “침묵은 용납되기에 충분하다.”는 말을 취하여, 준의 재명은 “손재(遜齋)”라 하고

 홍의 재명은 “묵재(默齋)”라 짓는다. 이어서 이렇게 설을 짓는다.


무릇 마음이 쉬 드러나 제어하기 어려운 것으로는 말보다 심한 것이 없다. 수치와 다툼을 일으키는 연유와 계단이 되는 것도

 말만한 것이 없다. 예로부터 성현들이 서로 힘써 삼갔던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물며 준은 빼어나고 예리하며,

홍은 우직하니 어찌 병에 맞는 좋은 약이 아니겠느냐? 돌아가 이 설을 벽 사이에 써 두고 아침저녁으로 돌아보고 생각하여

이것을 염두에 두게 되면, 비록 천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오히려 슬하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만약

 ‘아버지께서도 정도대로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서 물러나 뒷말을 하고 장 단지를 함부로 뒤집는다면, 내가 오늘 너희

둘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너희 둘은 힘쓰도록 해라. 이미 써서 주고, 또 인하여 스스로를 경계한다.

무술년(1598년) 상완(上浣)에 쉰여덟의 노인이 덕수별업(德水別業)에서 쓴다.

 

어머니의 상을 마치고 아버지 곁을 떠나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에게 당부를 겸하여 지어준 글이다.

준에게는 『논어』의 '위행언손(危行言遜)' 에서 의미를 가져와 '손재(遜齋)' 라는 재명을 주고, 홍에게는 『중용』의

'기묵족이용(其默足以容)'에서 의미를 따와 '묵재(默齋)' 라는 이름을 준다고 했다. 준은 빼어나고 예리하니 겸손으로

말을 다스리라는 뜻이고, 홍은 우직하니 고요함으로 말을 다스리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별서 터.

 

 

 

- 이덕형이 고을 원이 되어 가는 아들 여벽을 훈계한 글 -

 

이덕형은 자식들에게 가르침이 될 만한 인물들과 그들의 언행을 기록해 첩으로 남겼다.

「훈제자첩(訓諸子帖)」이 그것이다. 주렴계, 정명도, 정이천, 장횡거, 소강절, 호무이, 주회암(주자) 등

송나라 유자(儒者)들의 본받을 만한 언행을 정리한 것이다. 그중 세 항목만 간추리자면.

 

염계 주무숙(周茂叔)은 어려서부터 옛것을 믿고 의리를 좋아해 명절(名節)로써 스스로를 닦았다.

자신을 위하는 일에는 매우 검약하여, 봉록은 모두 종족과 분사(分司)에게 나눠주고 돌아왔다. 처자가 죽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그 또한 호방하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품은 생각은 시원스럽고 깨끗했으며, 우아하여 운치가 높았다. 특히 아름다운 산수를 즐겨

뜻에 맞는 곳을 만나면 혹 온종일 서성이곤 했다. 황산곡(黃山谷)은 "주무숙은 인품이 아주 높고 가슴속이 깨끗하여 광풍제월

(光風霽月)과 같다" 고 했고, 주자는 "이른바 쇄락(洒落)하다는 것은 행동이 청명하고 고원함을 형용한 것이다. 만약 터럭 하나라도

사사로이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어느 곳에 이 같은 기상이 있겠는가? 라고 했다.

 

소자용이 말했다. "인생은 부지런함에 달려 있으니,

부지런하면 다함이 없다. 문지도리는 좀먹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이것이 바로 그 이치다." 손신로는 자식을 가르칠 때

행실을 중시하고 문예를 다음으로 여겼다. 늘 이렇게 말했다. "선비는 마땅히 기식(器識)을 중요시해야 한다.

문인으로만 불리는 사람은 무릇 볼 것도 없다. (중략)

 

나는 너희가 시문(時文)이나 잘 지어 고작 문인 소리나 듣는 것을 원치 않는다. 듬직하게 행동하고 식견을 길러서  한 세상이

우러르는 우뚝한 선비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가슴속에 호연한 기상을 길러야겠지.

성현의 말씀에 부지런히 귀 기울여 광풍제월의 기상을 깃들이도록 해라.

 

 

 




-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1572~1630)가 아들에게 내린 가훈 -

 

 

선대의 가법을 더럽히지 마라. 조상을 받드는 일이 어찌 재물의 많고 적음에 달렸겠는가? 조금이라도 조상을 받드는 의리를 아는 자라면 어찌 재력이 넉넉해지기를 기다리겠는가?

위는 요점만 정리한 것으로 김봉조는 1613년 문과에 급제해 '사도시직장' 이 되었고, 전적(典籍) 및 제용감정(濟用監正)등을 역임했다. 서애 유성룡을 사사했으며, 저서로는 『학호집』이 있다.


학호문집

  

학호문집

 

학호

 

 

 

 

 

 

녹우당 추원재

 

 


- 윤선도가 큰아들 인미에게 준 훈계 -

 

(전략)

하나, 의복이나 말안장 등 몸을 받드는 여러 가지 물건은 모두 마땅히 습속을 고치고 폐단을 줄여야 한다.

음식은 주림을 채울 만큼만 먹고, 옷은 몸을 가릴 정도면 된다. 말은 걸음을 대신할 정도면 그만이고,

안장은 단단하면 그 뿐이다. 그릇은 쓰기에 알맞으면 충분하다. 탈것은 다만 멀리 갈 수 있는 놈

한두 마리를 구해 행로에 대비할 뿐이다. 어찌 반드시 잘 달려야만 하겠느냐?

 

풀을 벨 때는 비록 집에서 기르는 소도 써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하인 집이나 동네사람의 농사짓는 소를 써서야 되겠느냐?

사람들이 반드시 괴롭게 여길 뿐 아니라 사리에도 크게 맞지 않는다.

이 같은 일은 지금부터 절대로 하지 말아라. 다만 한두 마리 짐말에다 실어 오는 것은 괜찮다.

 

나는 오십 이후에야 명주옷과 모시옷을 처음 입어 보았다.

시골에 있을 때, 네가 명주옷 입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보통 사람이 대부의 옷을 입을 수 있겠느냐?

이 같은 복식은 모름지기 물리쳐서 가까이하지 말고, 검소한 덕을 숭상함이 옳을 것이다.

대개 이 같은 물건은 모름지기 박실(樸實) 함에 가까워야지 사치스러워서는 못쓰는 법이다.

여기에 비추어서 구할 것 같으면 하나로 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은 이렇게 말했다. "담박함이 아니면 뜻을 밝힐 수 없고, 고요함이 아니고는 원대함을

이룰 수 없다." 소홀함 또한 나태함이다. 나태함의 폐해가 망함에 이른다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느냐?

모름지기 공경함을 마음에 지녀 감히 잠깐이라도 여기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녀자의 복식은 늙어서는 명주를 쓰고, 젊어서는 명주와 무명을 섞어 쓴다. 채색 비단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 노비의 신공(身貢)은 고조 때는 한 사람에 상목(常木) 한 필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후에는 혹 더하기도 하고 덜기도 해서 일정치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 법식을 정했더냐?

사내종은 촘촘히 짠 35자 평목 두 필이고, 계집종은 한 필 반이다.

가난한 사람으로 노역이 많은 자는 양을 감해주되, 부유한 자라고 해도 더 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하나, 집에 두고 부리는 노비에게는 후하게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모름지기 위를 덜고 아래를 보태는 방법으로,

주인집에서 쓸 것을 더욱 줄여 노비가 먹고 입는 것을 넉넉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를 보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힘들고 괴로워하면서 원망을 품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날마다 일을 시키는 데에도 모름지기 그 힘을 다 쓰지 않도록 제한을 두어 정해진 법식에 따르도록 해라.

또 노비가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작은 것은 가르치고 큰 것은 대충 매질할 뿐이다. 매번 자신을 어루만지는

느낌을 갖게 해서 학대당한자는 원망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윗사람의 도리는 다만 관대함을 위주로 함이

마땅하다. 아녀자들은 성품이 편협하니 형벌 주는 권한을 맡겨서는 안 된다. 볼기를 치는 것도 기준을 정해

지나침이 없게 해야 한다. 감히 손수 일처리를 뒤섞어 하지 말고, 또한 모름지기 잘 타이르고 엄히 경계해야 한다.

 

하나, 간혹 크게 힘쓸 일 외에 사소한 잡일이나 일상적인 심부름 등의 일이 있으면 다만 집안의 노비에게 맡기고

호노(户奴),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사노비)에게는 시키지 마라. 편안하게 지내며 스스로 본업에 힘쓰게 하여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야 한다. 동네사람은 특히나 자주 부려서는 안 된다.

이 같은 일은 모름지기 유념하여 살펴서 참고 지내는 것이 좋겠다.

 

하나, 기사(祈嗣, 아들 낳기를 비는 일)는 모름지기 『의학입문(醫學入門)』의 '구사조(求嗣條)'와

『기사진전(祈嗣眞詮)』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행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 지인(至人)의 말씀을 믿지 않고

소경이 가리켜 보이는 것을 믿겠느냐? 도에 어긋나는 점쟁이의 말은 귀를 막아 배척하여 아녀자들이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한다. 『기사진전』 10편 중 마지막편은 기도에 내용인데, 이른바 기도라는 것은

다만 니구산(尼丘山)에서 공자의 부모가 했던 것에 다름 아니다. 공자의 어머니인 안씨 처럼 쌓은 덕도

없으면서 기도만 하면, 또한 신의 노여움을 더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무속의 황당무계한 주장을 따라서

기도를 한단 말이냐? 한갓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롭게 된다는 것이

이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니, 단지 가소로울 뿐만이 아니다.

 

 

『기사진전』에서는 개과천선(改過遷善)을 제일가는 급선무로 꼽았으니, 위에서 언급한 일이 모두

이 같은 종류다. 생각하고 도 생각하라. 후사를 구하는 데는 기도가 중요한데도

오히려 할 수가 없으니, 하물며 다른 신을 섬기겠느냐?

일체 물리쳐서 끊어 집안의 도리를 바로잡고, 모름지기 더욱 격앙되어 실추하지 않도록 해라.

 

하나, 전부터 원근의 노비들은 매번 시장에 나가 물건 팔고 사는 것을 걱정했다.

승노(僧奴) 처간(處簡)이 있을적에 힘써 내게 말했는데, 내가 즉시 고치라고 명하지 못해 후회스럽다.

내 분부로 손해보는 일이 없게 했으니, 나중에도 또한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지금 만약 서울로 보내게 된다면 더욱이 주고 받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이밖에 일체의 장사일은

네가 먼저 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리고 내 말이라 하여 여러 자제의 집안에 엄히 금해서 일절

하지 못하게 해라. 너는 모름지기 형제를 위한다면서 부형을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나, 이제 비록 배로 짐을 실어나를 때 노비를 부려 선격(船格,배를 부리는 곁꾼)으로 삼더라도,

집에서 부리는 종 외에는 모두 떼에 맞게 가감해서 선격의 품삯을 지급해야 한다.

 

하나, 성현이 지은 경전의 가르침은 너희가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내가 귀에다 대고 가르쳐온 것이다.

『소학』은 사람 꼴을 만들어주니 배우는 자라면 마땅히 이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

또한 일생의 언어와 문자 사이에서 너희가 부지런히 애써야 할 것이다.

이제는 모름지기 번거롭게 얘기하지 않으련다. 다만 이까금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붙여 한가롭게

『소학』을 본다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또 장차 경전을 되풀이해서 찬찬히 음미하면

몸과 마음을 다스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모두 일생토록 마땅히 힘쓸 것이요, 죽을 때까지 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 우리 가문의 흥망이 이 한 장의 종이에 달려 있다. 절대로 허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장차 손자들 또한 명심하여 읽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라.

 

 

위 글은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큰아들 인미(仁美)에게 준 훈계서로, 1660년 공의 나이 74세 때

함경도 삼수(三水)의 귀양지에서 지은 것이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처지에, 집안의 장래를 근심하여

편지글에 하나하나 간곡한 내용을 담았다. 글의 형식은 편지지만, 항목별로 분장한 가훈이다.

 

 

 

 

 

 

Heo Mok.jpg

 

미수 허목 초상

 

 

 

 


미수 허목의 독특한 전서체. 미수체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독특한 개성을 엿볼 수 있다.

오른쪽 부터 위 아래로 차례대로 읽으면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의 여덟 자가 된다.

의미는 '경의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는 뜻이다.



 

 

- 허목이 자손에게 내린 18조목의 훈계 -

 

毋樂貨利(무악화리) / 재물과 이익을 즐거워 말고   毋羨驕盈(무선교영) / 교만과 참을 부러워 말라.

毋信怪誕(무신괴탄) / 괴상하고 허탄한 것 믿지를 말고   毋言人過(무언인가) /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疑言亂族(의언란족) / 의심하는 말은 친족을 어지럽히고  妬婦亡家(투부망가) / 투기(妬忌)하는 아낙은 집안을 망친다.

好色者敗身(호색자패신) / 여색 좋아하는 자 제 몸을 망치고  崇飮者戕生(숭음자장생) / 술 마시기 즐기면 생명을 해친다.

多言必避(다언필피) / 말 많음은 반드시 피해야 하고   多怒必戒(다노필계) / 지나친 노여움은 경계해야 한다. 

言必忠信(언필충신) / 말은 충직하고 믿음성 있게  行必篤敬(행필독경) / 행실은 도탑고도 공경스럽게.

喪祭必謹(상제필근) / 상례와 제례는 조심스레 행하고  宗族必睦(종족필목) / 집안간엔 반드시 화목해야 한다.

擇人而交者遠過(택인이교자원과) / 사람 가려 벗 사귀면 허물에서 멀어지고 

 擇里而居者遠辱(택리이거자원욕) / 마을 가려 집 정하면 욕볼 일이 다시 없다.

君子之行(군자지행) / 군자의 행실은 

不以勝人爲能(불이승인위능) / 남 이기는 것을 능함으로 삼지 않고, 

自守爲賢(자수위현) / 스스로를 지킴을 어질게 여긴다.

勉之毋忘(면지무망) / 이를 힘써 잊지 말라.

 

 

내가 늙어 죽을 때가 다 되었다. 이미 죽은 자의 혼백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지 마라.

이 말은 모두 내가 내 몸에 친히 경계하고 힘써 신칙(申飭)한 것이니, 말한 내용이 더욱 절실하다. 

 

 

자찬한 묘비명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제목은 '허미수자명(許眉叟自銘)' 이다.

 

노인은 허목이니 자가 문보라는 사람이다. 본디 공암 사람이나 한양 동쪽 성관 밑에 살았다.

노인은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으므로  스스로 미수(眉叟)라 호를 지어 불렀다. 태어날 때 손에 문(文) 자가 있었으므로

또한 문보라고 자를 삼았다. 노인은 평생 고문을 몹시 좋아했다. 늘 자봉산 가운데 들어가 고문으로 된 공씨전(孔氏傳)을

즐겨 읽었다. 늦게 문장을 이루니, 그 글은 툭 터져 어지럽지 않았고, 시원스러움을 좋아해 스스로 즐겼다.

늘 스스로를 지켜 몸에 허물이 적게 하려 했지만 할 수는 없었다. 그 「자명(自銘)」에 말한다.

"말은 그 행실을 가리지 못했고, 행실은 그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

한갓 큰 소리로 성현의 글을 즐겨 읽었으나 그 허물은 하나도 고치지 못했다. 돌에 써서 뒷사람을 경계하노라."

 

자식에게 준 가르침이나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 차이가 없다. 이런 것이 삶의 일관성이다.

일관성은 자신감에서 나온다. 거저 생기지 않는다. 평생 옳은 길을 향해 매진하는 노력 끝에 생겨나는 것이다. 

 

 

 

 

 

 

- 김경여가 아들 진수에게 남긴 유언 -

 

내 비록 어리석어도 죽고 사는 이치는 익히 알고 있다. 살던 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감에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다만 지하에서도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은 지은 죄가 깊고 무거운 까닭이다. 평생 아버님의 얼굴을 알지 못한 채 홀로

어머니만을 모셨다. 효도로 봉양할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성스러운 뜻이 얕고 얇아 하루도 편안히 즐겁게

모시지를 못했다. 이제 연세가 여든이신데 급히 내가 먼저 돌아가게 되니, 내 마음의 아픔이어찌 끝이 있겠느냐.

 너는 모름지기 내 지극한 뜻을 알아, 온갖 일에 받들어 봉양하여 마땅함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해라.

 

사람은 임금과 스승과 어버이를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 명보(名甫) 숭준길(宋浚吉)과 영보(英甫) 송시열(宋時烈)은

나의 지극한 벗이요, 너의 스승이다. 무릇 큰일이 있거든 반드시 여쭈어본 뒤에 행하여, 마을과 고을에서 죄를 얻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다행이겠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무덤을 이장하는 일은 뜻만 있었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나 죽은 뒤에는

이 일을 처리할 수 없을 듯하여 염려스럽구나. 세월이 오래 지나고 보면 또한 낭패가 될 염려가 없지 않다. 이 일은 모름

지기 사징(士徵) 및 여러 형제와 더불어 상의해서 잘 처리하도록 해라. 무덤을 이장하는 일을 혹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석물(石物)을 세우는 것은 가장 시급하니, 너는 유념하도록 해라. 할 말은 많은데 기운이 다해가는구나.

 

 

송애(松崖) 김경여(金慶餘, 1596~1653) 가 1653년 5월 11일 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아들 진수에게 남긴 유언이다.

이귀(李貴)의 사위요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했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후 비분강개

하여 회덕으로 내려가 머물렀다. 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과 친교가 깊었다. 후에 대사간이 되었으나 노모를 모시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났고, 만년에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부제학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물러나 세상을 떴다.

 

 

 

 

 

- 김휴가 자식을 경계한 글 -

 

미친 듯이 세상을 희롱하고, 뻣뻣하게 사물을 업신여기는 것은 군자의 아름다운 덕이 아니다. 비록 '자취를 더럽혀 도를

깨끗이 하고 몸을 보전하여 해를 멀리한다'고들 하지만, 명분을 밝히는 가르침 중에도 절로 명철보신(明哲保身) 하는

길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이렇게만 하겠느냐?

 

나는 어두운 때를 만나 정치는 혼탁하고 어지러웠다. 아예 자취를 숨길 작정으로 마침내 과거공부도 그만두고 감히 술 마시는

것만 일 삼았다. 마침내 '술꾼'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자, 속으로 몸을 보전하는 좋은 계책이라 여겼다. 하지만 술 취한 뒤에는

위태롭게 큰 소리로 말하며 곁에 아무도 없는 듯 굴어 남의 말을 듣곤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후회해도 소용이 없구나.

너는 마땅히 이를 몹시 경계하로록 해라. 마읆을 두고 몸을 행함은 모름지기 단정한 사람을 법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독서는 성현의 경전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그 다음에 『시경』과 『이소(離騷)』를 읽어 빼어난 기운을 보태야겠지.

무릇 글을 지을 때도 규모를 크게 하고 운격을 높이 지녀 반드시 옛사람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

과거 시험장의 진부하고 물러터진 자태를 일삼아서는 안 된다.

 

 

경와(敬窩) 김휴(金烋, 1597~1638) 가 자식을 경계하여 타이른 내용이다. 짧지만 긴 여운이 있다.

김휴는 죽기 하루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스스로 만시를 지었다.

 

臨終自輓(임종자만)

 

學何有志(학하유지)   배움에 뜻 두고도 / 竟無所成(경무소성)   이룬 것 하나 없네.

禮何欲履(예하욕리)   예를 실천 하려다가 / 而至滅生(이지멸생)    죽음에 이르렀네.

 

  上負爾親(상부이친)   위로 부모 저버렸고 / 下負爾身(하부이신)   아래로 나를 등졌구나.

爾何顏面(이하안면)   너 무슨 낯이 있어 / 歸見先人(귀견선인)   돌아가 선인 뵐까?

 

 

 

 

 

 

- 권시가 두 아들에게 남긴 시편 -

 

 

시양아(示兩兒)

 

  네 아비 중도에 공부를 폐하여서             不見伊翁中道廢

한갓 늙어 흰머리만 물든 것을 못 보았나.  徒然老大雪毛侵공연한 말 너흴 위해 은근히 외우노니       空言爲汝慇懃誦진실된 마음으로 각고하여 공부하라.        刻苦工夫眞實心너희는 젊은데도 노력하지 않으니           汝曹年少不努力세월은 무정하게 하루하루 흘러간다.       歲月無情日日侵성인 되고 현인 됨이 군자의 일이거니      爲聖爲賢君子事남아라면 초심을 저버리지 말아야지.       男兒愼莫負初心세상의 온갖 일 서책에 달렸으니             百無事在書房房고요 속에 시서 익혀 배움 날로 성장하리.   靜裏詩書學日長처자식 사랑함은 몸 망치는 일이거니       憐子愛妻壞了事남아라면 몇 개의 굳센 마음 품어야지.     男兒幾箇是剛腸툭 트인 커다란 공변된 이치              廓然大公理하늘 뜻엔 치우침 전혀 없다네.         天意自無偏너희는 억지로 일을 푼다며              小兒強解事

 신세를 빈 배에 맡기는구나.            身世任虛舡

 

젊어 노력하지 않으면 무정히 흘러버린 세월 앞에 안타까운 탄식만 남는다.

사람은 초심을 지켜 고요 속에 기운을 길러 배움을 성장시켜야 한다.

 

 

 

 

- 홍여하가 아들에게 준 훈계 -

 

거친 밥과 헌 솜옷으로 사치함을 끊고서 근면과 근신으로 헛된 자랑 하지 마라.

― 장공(丈公)은 「계자서(戒子書)」에서  "부지런함과 삼감이라는 두 글자를 따라 올라마면 무한히 좋은 일이 있다"고 했다.

명사(名士)가 되려면 명예 외려 줄어들고 이익쫓는 집안에는 재앙 근심 많아진다.

― 친척이 화목하지 않아 작은 이익 다투느라 송사를 일으켜 재앙 불러들이는 것을 경계하라. 온 마을 사람들이

 천하고 악하게 여기고 집안이 도리가 기울고 엎어진다.

작약은 번화해도 열매 맺긴 어려운 법.

― 예쁜 아내가 반드시 훌륭한 자식을 낳는 것은 아니고, 문사(文士)가 꼭 일을 알차게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솔과 대의 절조(節操) 로 꽃을 즐겨 피우랴.

― 화려한 문사(文詞)는 군자가 숭상할 바가 아니고, 얼굴을 꾸미고 정녕코 후손 향해 다시금 말하노니

남 해치는 마음으로는 도에서 멀어지리.

 

 

 

김수항의 반신 초상화. 눈매에서 그의 곧은 성품이 드러난다.

 
 
- 김수항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 -
 
내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나이 예순을 넘겼다. 명을 받아 죽는다 해도 다시 한스러울 것은 없다.
그래도 굳이 꼽자면 몇 가지 한이 있으니, 세 조정엣 망극한 은혜를 입었음에도 터럭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 마침내
큰 욕됨에 빠져 충성하려던 뜻을 두고 의리서(義理書) 보기를 좋아하여, 늙도록 감히 이 뜻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나약하고
게으름이 습관이 되어, 능히 단 하루도 그 힘을 실답게 쓰지 못한 채 마침내 들은 것 없이 죽게 되니 이것이 두 번째
한스러움이다. 비록 진작 세상길에 나오긴 했어도 벼슬에 대한 뜻은 실로 적었다.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언제나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롭게 지내며 적막한 물가에서 노년을 보내고자 일찍이 백운산 가운데 띠집을 얽으려고 했다.
뜻은 실로 여기에 있었으나 세상일에 얽매여 마침내 처음 품은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한스러움이다.
이는 너희가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를 써서 보인다.
 
나는  위태로운 때를 만나 오래도록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외람되이 차지했다. 널리 백성을 건지는 책임은 본시
내가 감당할 바가 아니었다. 관직과 나라를 병들게 한 죄는 진실로 이루 다 속죄할 길이 없다.
하지만 임금을 사랑하는 한결같은 마음만은 귀신에게라도 물어볼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하겠다.
오늘에 이르러 구구한 이 마음 또한 스스로 말할 길이 없고 보니,
다만 마땅히 후세에 양자운(揚子雲)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할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일찍이 '상례와 제례는 검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나는 보잘것없어 선조께 실로 만에 하나도
미치지 못한다. 하물며 지금 임금에게 죄를 얻어 선대의 덕에 누를 끼쳤으니, 더더욱 아무 일 없이 죽은 사람과 같게 해서는 안 된다.
상례와 제례의 모든 일은 힘써 검약하게 해서 조금이라도 정도에 넘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 이런 뜻을 따르도록 해라.
 
무릇 내 자손들은 마땅히 나를 경계로 삼아 언제나 겸퇴(謙退) 의 뜻을 지니도록 해라. 벼슬길에 나가서는 높은 요직을 멀리하고
집안생활에서는 공손과 검약을 힘써 행하여라. 교유를 삼가고 의론을 간략히 함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선대에 남기신
법도를 따라, 몸을 이끌고 집안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삼는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이제 여러 손자의 이름에 '겸(謙)' 자를 붙인 것도 바로 이러한 뜻에서다.
 
옛사람은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너희가 능히 부지런하게 여러 자식을 가르쳐, 마침내
 충효와 문헌의 전통을 실추시키지 않는다면, 문호를 지키는 것이 꼭 과거시험이나 벼슬길에만 달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
기사년(1689) 4월 7일 문곡옹(文谷翁)운 어둘 창집(昌集) · 창협(昌協) · 창흡(昌翕) · 창업(昌業) · 창집(昌緝)에게
주노니, 여러 손자가 성장하기를 기다려 또한 이 글을 보여주어라.
 
 
 
문곡(文谷) 김수향(金壽恒, 1629~1689)이 숙종조 남인과 노론의 당쟁(기사환국) 와중에 남인의 모함으로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아 죽기 전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그는 18세에 사마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23세에 알성문과에서 연거푸 장원에 올랐다. 44세에 우의정을 지냈고 뒤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김수항은 아내 나씨가 자신이 죽은 후 뒤따라 세상을 버릴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고 또 당부하다가, 마침내는 유서와는 별도로 '여러 자식을 올바로 키우지 못하면
지하에서도 만나지 맙시다' 라는 글을 써서 아내에게 주었다.
그녀는 남은 평생 자식들의 훈도에 힘써 후대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지는 여섯 형제를 길러냈다.

 

 

 

 

 

 

김창집 초상화

 

 

- 김창집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 -

 

천리 밖에 끌려와 온갖 욕을 다 보았으니, 도리어 한 번 죽어 통쾌함만 같지 않구나. 바로 성산(聖山)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후명(後命)이 있음을 들었다. 금오랑(金吾郞)이 이르면 바로 목숨을 거두어갈 것이다.

굽어보고 우러러보매 부끄러움이 없으니,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들어갈 것이다. 다만 너와 서로 얼굴도 못 본 채, 게다가

너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니, 이 한스러움만은 다함이 없구나. 단지 네가 심문에 잘 대답해서 살아 옥문을 나오기만 바랄 뿐이다.

거제도에 있을적에 이미 영결을 고하는 편지를 보냈으니, 이번에 자세한 말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이 17821년 신임사화 때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4월 27일 성주의 적소에서

사약을 받기 이틀 전에 아들 제겸(濟謙)에게 보낸 유언이다. 김창집은 앞서 본 문곡 김수항의 맏아들이다.

김창집이 지은 『남천록(南遷錄)』에는 사사되기 전 아들 제겸과 손자 및 외손 민백순(閔百順)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있다.

이를 통해 임종 직전 그의 소회와 자손들에게 남긴 유언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두 편지는 앞의 글을 쓴 다음 날인

4월 28일에 외손자 민백순과 친손자들에게 보낸 유서다. 먼저 볼 것은 「기외손민백순서(寄外孫閔百順書)」다.

 

 

전후의 편지는 근래 마음이 어지러워 답장하지 못했다. 너는 틀림없이 우울해하고 있겠지? 매번 네 편지를 보면 시대를 상심하는

마음이 글 밖에 넘쳐나더구나. 이제 나는 장차 죽을 것이다. 네가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겠느냐? 모름지기 길게 상심하지 마라.

네 어미가 보전한다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겠다. 네가 능히 문자를 즐기니, 이는 반드시 내 권유를 기다리지 않고도 성취가 끝없을

것이다. 다만 삼가서 지켜나가기를 바란다. 너의 자는 '순지(順之)' 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등루부(登樓賦)」는 살펴보고 보내지 못하니 안타깝구나.

 

 

이와 별도로 친손자들에게는 「기제손서(寄諸孫書)」를 따로 써서 보냈다.

 

오늘의 내 화(禍)는 진실로 면하기 어려운 줄로 안다. 하지만 네 아비와 형들은 능히 살아서 옥문을 나섰느냐? 생각이 이에 이르매

장차 눈을 감지 못하겠구나. 다만 바라기는, 너희가 이 화변(禍變)을 만나 자포자기하지 말고 학업을 더욱 부지런히 하여, 반드시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는 근심이 없게끔 하는 것이다. 할 말은 많지만 줄인다.

 

애석하게도 아들 죽취(竹醉) 김제겸(1680~1722) 또한 김창집이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1722년 8월) 부령이 적소에서 사사되고

말았다. 김제겸의 아들 김성행(金省行)은 이미 이에 앞서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목호령의 고변으로 국문 도중 사망한 터였다.

1689년 문곡 김수항의 사망 이후 30여 년 만에 김창집 · 김제겸 · 김성행 등 3대가 한꺼번에 화를 당햇으니, 그 참혹함을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 한집안 4대로 이어진 참변은 조선시대를 통틀어도 달리 예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인용 : 정민 · 이홍식 著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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