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빈 초상
- 조관빈이 입양한 아들을 훈계한 글 -
唉我險釁, 遘此禍酷. 憂哀侵削, 不謀朝夕
아! 이 내 삶 험난하여 독한 재앙 만났구나. 걱정 슬픔 쳐들어와 조석조차 알 수 없네.
自視吾生, 生苦死樂. 而無一兒, 志業誰續
내 인생 돌아보니, 삶이 외려 괴로워라. 자식 하나 없고 보니 뜻과 사업 뉘 이을까?
取養斯急, 知所可擇. 非乏近親, 莫如善族
양자 취함 급하여도 가릴 것은 가려야지. 가까운 친척 좋긴 해도 선한 친족 더 낫다네.
惟爾所生, 派自東伯. 家傳美行, 棹楔煥若
다만 너의 소생은 동백공(東伯公)의 계파이니, 전해오는 좋은 행실 온 집안에 환하리라.
趨向之正, 雖窮不易. 嘗所親厚, 豈云疎逖
바르게 향해 나감 궁하여도 바꾸잖아, 친한 이 후대하니 멀다 하여 박대할까.
夙計乃决, 後事斯託. 如蜾之螟, 若㽕於木
묵은 계획 실행하니 뒷일을 부탁한다. 나나니벌 명령(螟蛉) 좇고, 나무에 접붙이듯.
父曰我兒, 聽我所祝. 彝倫一定, 慈愛靡極
내 아들아! 아비의 바람을 들어보렴. 인륜 한번 정해지면 자애함이 끝없다네.
所我望爾, 惟孝是篤. 肆謂行源, 亦爾世德
내가 네게 바라는 것 독실한 효행이니, 모든 행실 근원되고 또한 네 세덕(世德)이라.
移彼施斯, 自應順適. 若言其餘, 可勉者學
옮겨와 예 베풀면 절로 응해 꼭 맞으리. 그 나머지 말하라면 배움에 힘쓰는 일.
人不稽古, 焉所知識. 我有牀書, 足供爾讀
옛일 공부 안 한다면 식견 어이 생겨날까. 내 책상에 책 있으니 네 읽을 것 넉넉하다.
日月不與, 古人所惕. 及此幼年, 勖哉方冊
세월이 흘러감은 옛 사람도 근심했지. 너처럼 어린 나이 글공부에 힘을 쏟아,
毋荒爾志, 毋怠爾力. 思卒父業, 免忝先澤
뜻을 황폐하게 말고, 힘을 나태하게 말라. 아비 사업 끝마치고, 선대 은택 지켜야지.
哀哀爾父, 至痛塡臆. 父心爲心, 是固子職
슬프다! 네 아비는 아픔 맘 미어진다. 아비 마음 마음 삼음 자식의 본분일세.
曁爾子孫, 世世是克. 我生心嘉, 我死神格
네 자손에 미쳐서도 대대로 능히 하면, 내 살아서 기쁠 테고 내 죽어서 편안하리.
嗟嗟我兒, 終始敬服. 父子之初, 斯用明告
아아! 내 아들아 시종일관 명심해라. 처음 아비 아들 되어 이 글 써서 고하노라.
회헌(悔軒)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이 먼 친족에게서 후사를 입양하여
양자로 들이고는, 처음 맞는 아들에게 써준 훈계의 글이다.
조관빈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노론 4대신 중 한 사람인 조태채(趙泰采)의 아들이다. 171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에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는 당쟁과 사화의 중심에서 여러 부침을 겪었다.
1723년 신임사화 때에는 화를 당한 아버지에 연좌되어 흥양현(興陽縣)에 유배되었다가 1725년에 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나
호조참의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대사헌으로 신임사화를 논핵하였다. 1727년에는 동지돈녕부사로 임명되어 김창집과
이이명 등의 죄적 삭제를 요구 하였다가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 1731년에는 다시 신임사화의 전말을 상소하여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하였다가 대정현(大靜縣) 해도(海島)에 유배되었고, 이듬해에 풀려났다.
1744년에 호조판서에 임명되었지만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의 불화로 면직되었고, 1753년에는 대제학으로 죽책문
(竹冊文)의 제진(製進)을 거부하여 성주목사로 좌천되었으며, 이어 삼수부(三水府)에 유배되었다가
곧 단천(端川)으로 이배되었다.
조관빈은 창녕유씨(昌原兪氏) 유득일(兪得一)의 딸을 첫 아내로 맞았지만 자식이 없어 조영석(趙榮晳)을 양자로 삼았다.
본문에 나오는 입양한 아들이 바로 조영석이다. 이후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위(李煒)의 딸을 아내로 맞았지만 또 자식이 없었다.
이에 다시 박성익(朴聖益)의 딸을 아내로 맞아 영현(榮顯)과 영경(榮慶) 외 두 딸을 두었고, 측실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영득(榮得)과 철한(鐵漢)이 그들인데, 이중 철한은 일찍 죽었다. 조관빈은 네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경계의 글을 모두 남겨 놓았다.
입양한 장자 영석에 대한 경계의 글이 위 본문에 해당하고, 며느리에 대한 경계의 글이 다음 장에 소개되어 있다.
영현과 영경에 대한 경계는 관례를 올리고 지은〈관중자영현문(冠仲子榮顯文)〉과〈관계자영경문(冠季子榮慶文)〉에 담겨 있다.
영현과 영경은 모두 쉰 이후에 본 자식으로, 저자가 63세와 65세 되던 해에 각각 실제보다 이른 나이에 관례를 올렸다.
이때 저자는《주역》과《서경》에서 구절을 끌어와 자와 이름을 짓고 경계의 의미를 덧붙였다.
세 명의 아내와 한 명의 측실을 둔 조관빈의 삶은 벼슬길의 부침만큼 다난하다. 쉰 넘어 낳은 두 아들 영현과 영경, 양자로 맞아
새로 세운 장자 영석, 그들에 대한 기대와 근심이 그의 글에 고스란히 남아 전한다. 다음에 함께 읽을 글은 서자 영득의 관례 때
(1751년, 61세) 영득을 위해 지어준 〈계서자영득문(戒庶子榮得文)〉이다.
측실에게서 난 아들 영득이 장성하여 관례를 올린다. 서빈을 두고 삼가례(三加禮)를 행하는 것은 비록 예법이 아니나, 장부의
관은 아비가 씌워주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이니, 적자와 서자가 무슨 상관이랴. 이에 내가 말한다.
사람에게 관례는 성인으로서의 책무를 지우는 것이다.
《가례》서 말한 “너의 어린 마음을 버리고 네 덕을 이룸을 따르라”는 것이니 기대하여 바람이 깊고도 절실한 말이다.
한번 관례를 치르고 나면 내가 네게 권면한 바를 장차 이제부터 갖추도록 해라. 네게 지숙(志叔)이란 자를 지어준다.
대개 득(得)자의 뜻을 취하여 다른 사람의 뜻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부형에게 효도하고 순종하면 부형이 너를 아끼게 되니,
이는 부형에게서 뜻을 얻은 것이다. 향당(鄕黨)에서
공손하고 삼가면 향당이 너를 아름답게 여길테니, 이는 향당에서 뜻을 얻은 것이다.
만약 통적(通籍)으로 음직(蔭職)에 뽑혀 관직에 올라 한 가지 일을 맡게 되면 능히 부지런하고 간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수를 살펴 가업을 지키며 한 시렁의 책을 읽고 한 골짝의 밭을 경작하여 또한 한가하고 편안함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어디를 가든 뜻을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 자를 지어준 큰 뜻이다.
진실로 눈 앞에서 마땅히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을 말한다면 또 더 할 말이 있다.
너는 익복이나 조복보다 몇 살 위다. 두 아이의 문예에 대한 부지런함과 게으름, 습성은 순수함과 잡박함은
모두 너를 보고서 본받은 것이다. 이왕의 일은 말할 것이 없겠고, 네가 이제 관례를 치렀으니, 성인의 책무가 있게 되었다.
너는 마땅히 어릴 때 습관을 통절하게 끊어 버리기를 가례의 축사처럼 해야 할 것이다. 말과 행동을 합당하게 하되 먼저
스스로 몸가짐을 삼가고, 책읽기와 글쓰기에도 먼저 스스로 노력해서, 두 아이로 하여금 경계하여 깨우침이 있게 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나아가 성취함이 있게 되면 내가 반드시 기뻐하며 네 공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또한 네가 네 아비에게 뜻을 얻는 한 가지 일이 될 것이다.
아아! 너와 두 아이는 모두 내가 만년에 낳았다. 나는 이미 늙었다. 그 나머지 사업으로 권면하며 이 저무는 해를
쫓아가는 것이 다른 사람에 비해 어찌 십분이나 간절하고 다급하지 않겠느냐? 《서경》에는 “해와 달은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너는 이 말을 유념토록 해라. 신미년(1751, 61세) 정월 28일에 동호옹(東湖翁)은 정동(貞洞) 보만와
(保晩窩)에서 불러 적게 하고 주노라.
서자이지만 어엿이 관례를 치러주고 자를 지어주며 쓴 글이다. 지숙(志叔)이란 자에는 다른 사람의 뜻을 얻어,
모든 이에게 사랑 받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혹시 음사(蔭仕)를 얻어 낮은 벼슬에 오를
기회가 주어지면 근면과 간소함으로 최선을 다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분수를 지키며 안한(安閒)한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했다. 어린 두 동생에게 좋은 모범이 되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한편 조관빈은 새로 며느리를 맞은 후 며느리에게 주는 경계의 글인 〈계자부문(戒子婦文)〉도 따로 남겼다.
舅曰我婦, 天休之裔. 懿美天休, 風節勵世
말하노라 며늘아가! 너는 천휴(天休) 후옐러니 천휴는 훌륭하여 풍절로 우뚝하니,
昔我先祖, 贅于其門. 家庭所訓, 婦德惟尊
예전 우리 선조께서 그 문하에 예 올렸네. 가정의 가르침이 부덕(婦德)을 중시하니
綿綿宗祀, 賴其餘慶. 有子有孫, 昭敏忠靖
면면히 종사(宗祀) 이음 남은 경사 덕분일세. 자손 중에 소민공(昭敏公)과 충정공(忠靖公)이 계시니
式至今日, 我趙詵詵. 舅曰我婦, 爾豈偶然
오늘까지 법도 전해 우리 조씨 성대하다. 말하노라 며늘아가! 네 어찌 우연이리.
惟我兩家, 舊好朱陳. 尙挹遺風, 同祖喆人
우리 두 집안은 오래도록 가까웠지. 유풍(遺風)을 숭상하며 철인(喆人) 조상 한가질세.
自疎而近, 厥有古訓. 由今視昔, 事與相襯.
성근데서 가까워짐 옛 말씀에 있거니와, 지금에서 옛날 보니 일이 서로 꼭 맞는다.
人苟有子, 其孰無婦. 我則禍餘, 靡不傍怖
사람이면 아들 있고, 며느리도 뉘 없으리. 내가 재앙 입은 뒤라 가까운 이 두리나니,
多哉爾家. 片言結親. 舅曰我婦, 曷不淑仁
아름답다 네 집안은 한 마디로 맺어졌네. 말하노라 며늘아가! 맑고도 어질구나.
乃祖之賢, 乃父之質.矧自婉娩, 令聞有蔚
네 조부의 어짊에다 네 아비의 자질 갖춰, 곱고도 정숙하니 칭찬이 자자하다.
是謂賢婦, 庶幾我家. 我窮而慰, 我狂而嘉
현부(賢婦) 이를 이름이니 우리 집안 꼭 맞구나. 내 궁하면 위로 주고, 내 미치면 기뻐하고,
我生則養, 我死則祭. 所以人情, 惟婦斯愛
내 살아선 봉양하고, 내 죽으면 제사하리. 그래서 인정으로 며느리를 아끼나니
舅婦之初, 不可無祝.舅曰我婦, 聽我所告
시아비 며느리 처음 만나 축원 어이 없을 소냐. 말하노라 며늘아가! 내 하는 말 들어보렴
凡人有行, 必有其報. 于夫以順, 于親以孝
사람이 하는 행실 반드시 보답 있다. 지아비에 순종하고 어버이에 효도하라.
敦族必義, 御下必恩. 惟服惟食, 克儉克勤
집안 화목 의리로써, 아랫사람 은정으로. 옷 입고 밥 먹는 일 근검으로 능히 하라.
哲範美則, 懋遵女史. 誰能行此, 我祖之妣
좋은 모범 본받아서 여사(女史) 힘써 따를진저. 뉘 능히 이를 했나, 내 할머니 그분일세.
爾之爲婦, 亦惟是若. 德所相符, 自應景福
너도 우리 며느리니 이같이만 하여다오. 덕스러움 부합되면 절로 큰 복 응험하리.
多男之吉, 百孫其昌. 舅曰我婦, 敬哉毋忘
아들도 많이 낳고 많은 자손 창성하리. 말하노라 며늘아가! 공경하여 잊지 말라.
이렇듯 조관빈은 네 아들과 며느리 모두에게 경계하는 글을 남겼다.
- 정재두가 아우와 아들에게 남긴 유언 -
(전략)
무릇 경서를 읽을 때는 반드시 요체를 알아야만 한다, 간략하고 진실되게 익혀 실체에 받아 씀에 절실해야지, 들떠 넘쳐서
요점도 없이 한갓 정신만 낭비하고 아무 얻는 것 없이 해서는 안 된다. 무릇 사서 경전 속의 가르침 가운데 진실로
그 요점을 얻으면 죽을 때까지 쓸 것이 많다. 한갓 널리 섭렵하기에 피곤하면 과연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무릇 아동을 가르칠 때는 그 기운을 눌러 생의(生意)를 꺾어서는 안 된다. 다만 마땅히 순수하게 이끌어야 한다.
왕양명이 어린이를 가르친 큰 뜻도 잘 이끌어서 잘 기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니 반드시 법으로 본받을 만하다.
다만 세상 사람 가운데 능히 그 뜻을 아는 이가 없다.
(중략)
일찍이 세상의 학사와 대부들을 살펴보니, 그 지향하는 바에 높고 낮음이 있었다.
문사(文詞)의 꾸밈을 가지고 사업으로 삼는 자도 있고, 글을 외워 박식함을 뽐내는 자도 있으며, 장구(章句)를 따와
교정하고 훈고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면서 그 근본을 알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자잘한 도리에 얽매이는 것을 가지고 전문가인 양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니, 또한 마음을 밖으로만 내달리는 자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식견이 어둡고 근본을 몰라 자잘한 행실로
스스로를 훌륭하다 하고 작은 절개에 얽매여 삼가는 자가 있고, 높은 것을 따라 과감히 행동하기를 힘쓰는 자가 있으며,
행실을 도탑게 하고 절개가 높아 공경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사람도 있었다.
성질이 맑고 깨끗하며 편안하고 맑아서 자연스럽고 한가로움에 이른 자는 또한 아름답다 하겠다.
또 방랑하며 풍류를 즐기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니, 밖으로 내달리는 자다. 성실하고 두터우면서도 비근한 자가 있고,
논의와 풍절로 몸을 얽어매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도 있으며, 의리와 지식으로 실천하여 행하는 것을 유종(儒宗)으로 여기는 자도 있었다.
홀로 심성으로 인(仁)을 구하는 학문만이 성현의 종지(宗旨)가 된다. 그 요체는 『논어』의 구인극복(求仁克復)과 『맹자』의
존양집의(存養集義), 『대학』의 명덕지선(明德至善), 『중용』의 중화솔성(中和率性) 및 주정(周程)의 무욕정성(無慾定性) 등을
논한 글에서 볼 수 있다. 만약 어진 마음과 어진 재능이 있고 식견이 밝으며 재주가 높아 경세지민(經世濟民) 할 수 있다면 지극한
것이다. 세상일을 즐기고 사공(事功) 을 따지는 것에 힘쓰는 자가 있으니, 또한 밖으로 내달리는 자다. 경계하고 경계해야 한다.
하곡(霞谷) 정재두(鄭齎斗, 1649~1736) 가 아우 제태(齎泰)와 아들 후일(厚一)에게 준 유언으로
모두 5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명학자 정제두는 나중에 이 유언 외에 「가법(家法)」이라는 글을 따로 남겼다.
이 유언을 쓸 당시 정재두는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선생에게도 영결을 고하는 편지를 썼다.
이 글에서도 그는 자신읠 양명학적인 학문입장을 분명히 했다.
저는 원기가 모두 사그라져 스스로 지탱하기도 어렵습니다. 다시금 선생님을 자리에서 모실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후세의 학문은 오직 의리와 심성 두 가지에만 공력을 쓰므로, 배우는 자가 도에 대해 둘로 나누는 것을 면치 못합니다.
성인의 문하에서 인(仁)을 구하던 학문을 살펴보면 능히 다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수년 동안 발분하여 공곰히
생각한 것을 한차례 어르신께 털어놓고 두 끝을 파헤쳐서 바름을 구하려 하였으나 능히 할 수 없어 유감입니다.
생각건대 천리(天理)가 바로 성(性)이니,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로 이것입니다. 심성(心性)의 뜻은 왕양명의 학설이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 부의 『맹자』로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중용』과 『대학』의 여러 논지와
『논어』의 구인(求仁)과 요순이 주고 받은 심법(心法) 같은 것도 그 뜻은 실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약 저들로 하여금 과연 하나만 주장하고 하나는 폐하게 한다면 진실로 말할 것이 없지만, 이제 나뉘고 합쳐지는 즈음과
하나이면서 둘이 되는 사이에 다투는 바가 아주 미세하고 보니, 마땅히 힘을 다해 밝게 분별해야 할 곳일 뿐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선생께서 어찌 허투루 보아 이를 폐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천지 사이의 큰 도리와
관계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미처 능히 바름을 구하지 못한지라, 그저 묵묵히 있을 수만은 없어
감히 이에 대략 제 생각을 펼쳤사오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품은 것을 만에 하나도 다 펴지 못했사오나 다만 도를 위해 가호가 있기를 축원할 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학도(學圖)는 다만 개인적으로 표방한 것이라 볼 만한 것이 못 됩니다.
마침내 없애버려 다른 사람에게는 다시 보여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와중에도 왕양명의 학설을 옹호하면서 본격적으로 토론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정신을 곧추세워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진실을 위해 뜻을 꺾지 않은 그 의지가 참 놀랍다.
유척기 초상화
- 유척기가 후손에게 남긴 유언 -
나는 재주와 덕이 없는데도 두 번이나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차지했다. 비록 모두 시사(時事)로 몹시 힘든 때를 만나긴 했어도
명을 받아 고작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말았다. 근래에는 겨우 반년 만에 문득 실패하여 물러나니,
돌이켜보면 부끄럽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명정(銘旌)이나 제주(題主)와 표각(表刻)에는 다만 ‘영추치사(領樞致仕)’ 즉 영추(領樞)로 치사했다고만 써야지 ‘의정(議政)’이란 두 글자는 절대로 쓰면 안 된다. 내 평소의 뜻에 따르도록 해라. 판서 이진망(李眞望)의 명정에는 ‘지중추부사겸빈객)’이라고만 쓰고, 한천(寒泉) 이태(李台)의 명정에는 ‘참찬지경연빈객(參贊知經筵賓客)’이라고만 쓰고, ‘문형(文衡)’이나 ‘빙함(氷銜)'같은 말은 모두 빼도록 해라. 대개 삼관(三館)의 청화직(淸華職)에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내 경우 의정(議政)이라 함은 감히 스스로 공무를 맡는 일에 있지도 않았으니, 또한 어찌 함부로 일컫겠느냐? 대광(大匡)이나 숭자(崇資) 같은 호칭도 진실로 모두 쓰지 않았으면 한다. 실제와 어그러짐을 염려한 까닭에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자식에게 자신의 사후를 당부한 「유계(遺戒)」다.
모두 33칙의 긴 글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이 「유계」외에도 「잡지(雜識)」라는 글을 따로 남겼는데,
모두 15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 중 몇 항목만 추려 보자.
- 안정복이 아들을 경계한 시 -
君子不誇言 군자는 과장하여 말을 않느니 言無其實 과장하는 알맹이 없네.
聖人示周行 성인께서 큰 길을 보여주시니 無妄與主一 무망(無妄)과 주일(主一)이 그것이라네.
平生臨履意 평생 살얼음 밟듯 조심해야만 可以保性質 타고난 바탕을 지킬 수 있네.
身外百千事 몸 밖의 백 가지 천 가지 일은 視此以爲律 이를 살펴 법도로 삼아야 하리.
居家如釋子 집안에선 스님처럼 지내야 하고 處鄕如閨婦 마을에선 아낙처럼 처신하여라.
閨婦恒畏人 아낙네는 남을 항상 두려워하고 釋子不嫌窶 스님은 가난함을 싫어 않나니.
淡泊而謹愼 담박하게 지내며 행동 삼가야 出入免憂懼 출입함에 근심 걱정 면하게 되리.
戒爾又自警 너와 나 우리 모두 경계하여서 聊欲代矇瞽 애오라지 눈 먼 소경 벗어났으면.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아들을 경계한 시 두 수다.
그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그의 관력은 단출하다.
안종복은 관직보다는 학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그의 학문이 꽃을 피웠다.
- 박윤원이 딸에게 준 훈계 -
여자의 선악은 시댁의 흥망과 본가의 영욕에 관계된다. 하 몸으로 두 집안에 관계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몸가짐의 도리는 반드시 안팎으로 엄격함에 있고, 마음가짐의 방법은 반드시 곧고 한결같음을 귀하게 여기는 데 있다.
여자가 집에 있을 때 형제간에 우애로워냐 출가해서 동서지간에 화목하는 법이다. 이는 미루어 행하는 방법이다.
지아비는 하늘이다. 혹 지아비를 공경하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시부모는 지아비를 낳은 분이다.
시부모 사랑하기를 자기 부모같이 하지 않으면, 이는 지아비를 자기만 못하게 여기는 것이다. 부인의 행실은
성을 잘 내도 안 되고, 잘 다투어도 안 된다. 성냄과 다툼은 집안의 화기(和氣)를 해친다.
부인은 성품이 조급하고 도량이 좁으니, 더더욱 이를 경계함이 마땅하다.
부인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 방법은 순종을 위주로 할 뿐이다.
음(陰)의 도는 고요함을 귀하게 친다. 소리는 크게 내면 안 되고, 말이 많아서도 안 된다.
길쌈하고 옷 짓고 음식 만들기 등 부인의 일이 또한 많다. 부지런함이 아니고서 어찌 이를 이루겠느냐?
무릇 여자의 일을 방해하는 잡된 유희는 일절 하지 마라. 제사를 모실 때는 민첩하게 차려내되 예를 갖추어야 한다.
노복을 부리는 데는 위엄보다 은혜로움을 앞세워야 한다. 비록 야단을 치더라도 나쁜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속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오만한 기색을 얼굴에 비치지 말며, 교만한 뜻을 마음에 싹틔우지 마라.
비취 구슬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선한 행동이 아름답다. 수놓은 비단이 화려하지 않고, 덕의 아름다움이 화려하다.
재화는 구차하게 취하지 말고, 재물은 함부로 쓰지 마라.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이 시집가는 딸에게 준 14조의 훈계다.
박윤원의 문집인 『근재집』중 가훈을 적은 부분.
다음은 아들에게 주는 훈계를 담은 〈계자(戒子)〉시다.
소동파는 바보 자식 원했다하니 東坡願愚魯 / 안타깝다 올바른 뜻이 아닐세. 激哉非正義
도연명은 이른 출세 나무랐으니 淵明責太早 / 지나치다 사사로운 뜻인 것일세. 過矣亦私意
잊지 않고 조장 않음 다만 귀하니 唯貴忘助間 / 중도(中道)로서 자애와 엄격 갖춰야 하리. 中道慈嚴備
아비가 평소에 널 못 가르쳐 汝父素無敎 / 너 컸지만 아직도 아이 같구나. 汝長尙如穉
올해로 네 나이 열 다섯이니 汝今年十五 / 관 쓰고 구용(九容)의 일 행해야 하리. 弁髦九容事
옛 사람은 태학에 입학했으니 古人入大學 / 네 마음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汝心得不愧
진실로 문예를 지니려하면 文藝固宜有/ 행의(行誼)를 도탑게 함만 못하리. 莫如敦行誼
영달(榮達)이 좋지 않음 아니지만은 榮達非不好 / 선대 법도 실추해선 절대 안 되리. 先法必無墜
다른 집의 자제를 내 살펴 보니 吾觀人子弟 / 성내어 다투고 장난만 쳐서, 忿爭且狎戲
어릴 적 버릇이 점차 물들어 幼習漸馴成 / 커서도 다 버리지 못하더구나. 壯大未盡棄
너 절대 이 행동 본받지 말고 汝勿效此行 / 삼가 살펴 그 뜻을 겸손히 하라. 謹飭遜其志
네 능히 이 경계 지킨다 하면 汝能守此戒 / 내 어찌 번거롭게 나무라리요. 我何煩呵詈
시 본문에 나오는 구용(九容)은 『예기(禮記)』「옥조편(玉藻篇)」에 보이는
군자가 마당히 지녀야 할 아홉가지 몸가짐을 이른다.
-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이 조카 치우에게 준 훈계[書示致愚] -
수령의 자제로 부형의 임소(任所)에 따라가는 자는 몸가짐을 마땅히 처녀처럼 해야 한다.
남이 볼까 두려워하여, 아침저녁 문안 때 외에는 백성들의 송사를 처리하는 곁에 이르러서는안 된다.
비록 깊은 곳에 거처하며 숨어 지내더라도 자주 문을 나서 관인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
아전들은 모두 여항의 무식하고 천한 부류이다. 관부를 드나들며 간사하게 농간부린다.
아는 일과 행하는 짓이라고는 윗사람을 기망하고 사람을 속이며, 이익을 탐하고 욕심을 부리는 일 뿐이다.
만약 이들과 가까이 지내면 실로 날마다 한 통속이 될 염려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심부름 시키는 일 외에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보통 때 집에 있는 어린 하인과 함께 있는 것은 괜찮다.
고운 소리와 아름다운 음악은 사람의 마음과 뜻을 흔들리게 한다. 하물며 너는 뜻과 기운이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그 해됨이 더욱 깊다. 비록 풍악을 베푸는 때에도 절대 마음대로 나가 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예전 내가 화산(花山)의
거처에 있을 때는 어른께서 따로 부르시지 않으면 한 번도 나가서 본 적이 없었다. 이 뜻을 꼭 알아두도록 해라.
관가의 모든 물건은 공적인 물건이 아님이 없다.
비록 종이처럼 하찮은 것이라 해도 자제들은 제 멋대로 쓰려는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
네가 비록 어리다 하나 나이를 따져보니 바로 옛 성인께서 배움에 뜻을 두셨던 나이인 15세이다.
네 나이를 네 성취와 견주어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그런데도 너는 부끄러운 것을 알지 못하고 있구나.
맹자께서는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남만 할 수 있으랴.”라고 하셨다.
사람을 타이름이 지극히 깊고도 절실한 것이다.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데도 방법이 많다.
과거 시험공부가 남만 못한 것은 부끄러워 할 것이 못된다.
글씨나 글솜씨가 남만 못한 것도 부끄러워 할 것 없다. 사람 일을 주선함이 남만 못해도 부끄러워 할 것이 없다.
오직 품은 뜻이 옛사람만 못한 것은 부끄러워 할만하다.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고 말한
안연(顔淵)이 어찌 나를 속여 거짓말을 했겠느냐? 너는 타고난 자질이 본시 어질고 착하니 그래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뜻만은 아직도 부족하다. 대저 뜻이 없는 사람은 자질이 비록 아름답다 해도 마침내 하류가 될 뿐이다.
내가 이를 몹시 근심한다. 이제 ‘지치(知恥)’ 즉 부끄러움을 안다는 두 글자를 가지고 너를 위한 약으로 펴 보이니,
너는 진실로 이 말을 돌아보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리되면 장자 스스로 발분(發憤)하려는 마음이 생겨나서
문득 진보하는 효험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깊이 바라는 바다.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이 아버지의 임소로 따라가는 조카 치성(致成)을 위한 당부로 써준 훈계의 글이다.
네가 벌써 15세로구나. 공자께서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셨다고 했다. 너는 어떠냐? 놀 궁리만 하고 몸가짐은
제멋대로이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제 네가 네 아버지를 따라 임소로 간다 하니 내가 몇 마디 적어준다.
첫째, 사또의 아들이 몸가짐을 잘못하여 광망한 행실을 하면, 아버지를 욕보이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자신 또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다.
부끄럼을 타는 처녀처럼 문을 나설 생각을 아예 말고, 들어 앉아 학문에만 힘쓰도록 해라.
둘째, 아전 붙이들과 어울려 다니면 안 된다. 그들과 어울려 못된 행실을 흉내내면 결국은 한 통속이 되고 만다.
셋째, 마음을 흔드는 음악에 귀 기울이지 말고, 공적인 물건은 털끝도 손댈 생각을 마라.
넷째, 벽에다 ‘부끄러움을 알자[知恥]’란 두 글자를 써 붙이고 꼼짝도 말고 옛 사람의 정신에 미치지 못함을 맹렬히
반성하도록 해라. 그저 사람 좋다는 소리나 듣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일인 줄을 알아야 한다.
발분(發憤)하는 마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
한 발짝도 더 진보 할 수가 없다. 명심 또 명심하도록 해라.
오희상은 본관이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 시호가 문원(文元)이다.
그는 이 글 말고도 생질 이윤우에게 준 훈계와 손자에게 준 글을 남겼다.
먼저 이윤우에게 준 〈서증생질이윤우(書贈甥姪李胤愚)〉를 함께 읽는다.
나와 너는 의리로는 비록 외삼촌과 생질이나, 정리로는 부자간이나 진배없다. 너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나 또한 너를 자식으로 여긴다. 너는 태어나면서부터 내 집을 떠나지 않았고, 올해로 나이가 18세다. 그
런데도 여태 어리고 어리석어 옛 사람의 뜻을 지니지 못하고, 한갓 벼슬길에만 마음을 쏟으려 하는구나.
그렇게 해서 설령 소원을 이룬다 한들 다만 한 사람의 속된 명사가 되고 마는 것일 뿐이다.
어찌 귀하달 것이 있겠느냐. 이는 내가 너를 잘 이끌어 너의 뜻과 행실을 일찍 성취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어찌 한갓 이 같은 데 그칠 뿐이겠느냐?
생각해보면 나도 나이 열 서너 살 때는 놀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어느 날 우연히 우리나라
여러 선생들의 연보와 행장 및 묘지를 살펴보고는 비로소 발분하여 스스로 힘 쏟을 줄 알게 되었다.
이제와 늙었어도 아무 이룬 것은 없다. 하지만 그 당시의 마음만은 몹시도 좋아서 지금껏 가슴 속에 그 때 기억이
남아 있다. 대개 우리나라의 어진 이들은 다른 시대의 선현과는 같지가 않다. 행한 일의
친절함에서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이 마치도 집안 선대의 문자와 같다.
너 또한 틈이 나거든 시험 삼아 이존중이 지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과 다른 선배들의 절행(節行)이나 사실을
기록한 글을 가져다가 마음 가는대로 살펴보도록 해라. 장차 그같이 되려는 뜻이 격앙되고 고무됨이 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병든 사람이 위가 졸아들어 먹지를 못하게 되어, 비록 맛난 반찬과 진귀한 요리가 앞에 가득 차려져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문득 한 가지 입에 맞는 담백한 음식과 만나 차츰 입맛을 돋워, 마침내 위 기능이
회복되고 병도 낫게 되는 것과 같다. 이제 내가 네게 이제껏 경험한 것으로 권면하노니,
병자가 담백한 맛에서 입맛을 붙이듯 반성하여 깨달음을 만나 원대한 데로 나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윤우야! 너는 우리 집에서 태어나 지금껏 한 집에 살았다. 부자간의 의리도 이러하진 못할 터.
나는 네가 큰 선비가 되어 바른 행실로 사람들의 표양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데 너는 온통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해서 떵떵거리려는 마음뿐이로구나.
그나마도 노력하지 않고 그저 얻으려고만 드니, 내가 너를 위해 몹시 슬퍼한다.
나도 너만 했을 때는 놀기만 좋아했었다. 그러니 너를 어찌 나무라기만 하겠느냐?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이 뜻을 세우려면 본받아야 할 표양이 있어야겠지?
그렇다면 누굴 본받아야할까? 먼데서 찾을 것이 없다. 《해동명신록》도 좋고,
그밖에 명현들의 행장이나 묘지명 같은 글을 틈날 때마다 읽어보도록 해라. 그들이 어떻게 뜻을 세워
마음을 다잡아 학문에 몰두하여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을게다.
지금까지 해오던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지기야 하겠느냐? 하지만 조급한 마음을 품지 말고, 차근차근 차분하게 마음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학문의 깊은 재미에 빠져들게 될 게다. 위장병 난 사람에게 산해진미의 진수성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야말로 그림의 떡인 게지. 하지만 담백한 죽으로 속을 달래 차츰차츰 위장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면,
묵은 병도 어느새 고칠 수가 있다. 입맛만 돌아오면 소화시키지 못할 것이 없게 되지. 그때는 욕심 사납게 이것저것
욕심을 부려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다잡아
작은 일부터 조심조심 출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예전 시험해 보아 효험을 본 것이니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18년간 한 집에 살았으면서도 내가 사람답게 성취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이 아니 슬픈 일이냐?
부디 네가 내 자랑이 되고, 네 가문의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
다음에 읽는 한편은 오희상이 손자의 공부방에 써서 걸어둔 훈계의 글이다. 제목은 〈서게손아서실(書揭孫兒書室)〉이다.
근자에 고량계(高梁溪)의 유서를 보니 이런 말이 있었다. “자제들이 만약 명절(名節)의 제방과 시서(詩書)의 재미, 농사일의
힘겨움을 안다면 어질다 하기에 충분하다.” 이 세 마디는 비록 천근한 듯 하지만 실로 지극한 이치가 담겨 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면 몸을 지킬 수가 있다. 시서를 도타이 하면 식견을 늘일 수 있다.
어려움을 알면 절약하여 검소할 수가 있다. 오늘날 다른 집의 자제들은 온통 명절과 시서가 어떤 물건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오직 호화스럽게 사치하는 것만 높인다. 온 세상이 한 통속으로 그러하여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들은 곤궁해져서, 나라의
살림이 장차 엎어질 지경이다. 어찌 명나라 말기의 풍속이 지금과 더불어 한 가지여서 고량계의 말이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 아아! 너희가 능히 이 말을 지켜 따른다면 설령 세상에 도움은 못 된다 해도
선인의 끼치신 사업을 실추하지는 않을 것이다. 힘쓸진저.
고량계는 명말의 학자다. 그는 유언에서 세 마디 당부를 남겼다.
오희상은 이 세 마디 말로 당부를 적어 손자의 공부방에 내걸었다.
첫째, 명절(名節)이 든든한 제방이 됨을 알아야 한다. 물이 불어 넘실댈 때 제방이 튼튼하지 않으면 둑이 무너져
온 마을이 물에 잠겨 떠내려간다. 선비로서 명예와 절개를 지키는 일은 홍수에도 끄떡없는 제방을 지키는 것과 같다.
명절은 환난과 역경에서 인간의 길을 지키게 해주는 든든한 보루다.
둘째, 시서(詩書)의 무궁한 자미(滋味)를 음미하라. 《시경》과 《서경》을 읽되, 그저 글자 풀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간을 차근차근 음미해보고, 그 정경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 《시경》의 시 한 수 한 수가 바로 눈앞의 인간사 아님이 없고,
《서경》의 구절구절이 음미하고 되새겨야 할 교훈 아님이 없다. 이런 것이 바로 공부하는 재미다. 그저 한 구절 배워 어디다
써먹을 궁리만 하는 공부는 공부랄 것이 없다. 이런 마음을 하나하나 미루어 확장해 나가면, 공부에 힘이 붙고 방향이 생기게 된다.
셋째, 가색(稼穡), 즉 씨 뿌리고 거두는 농사 일이 고된 줄을 알라. 봄에 때맞춰 씨를 뿌리고, 여름에 김을 매며, 가을에 추수해서,
겨울에 간직하는 일은 사계절의 운행과 맞물린 거룩한 사업이다. 땅이 풀려 씨 뿌리는 일은 고되고, 한 여름 굵은 땀을 흘리며
김 매는 일은 괴롭기만 하다. 추수의 기쁨도 잠시, 수확에 따르는 노동과 이를 곳간에 넣어 간수하는 일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손자들아! 내가 이 세 구절을 너희의 공부방에 써서 내건 뜻을 잊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벼슬을 높이 해서 부귀와 함께 하고,
고대광실 으리으리한 집에서 아랫것들 마음껏 부리며 사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차라리 명절로 제 한 몸을
오롯이 지켜 역경의 때를 허물없이 건너고, 시서를 부지런히 익혀 세상 보는 안목을 키우며, 노동의 신성함과 흘린 땀의
가치를 알아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세상은 온통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모두들 미친 것처럼 그리로만 달려가고 있구나.
사치가 만연하여 재물을 물 쓰듯 하니, 나라꼴이 장차 어찌 되겠느냐. 너희가 이 할애비의 말을 명심하도록 해라.
세상이 필요로 하는 큰 인물은 못된다손 치더라도 선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못난 자손이 되지 않기만 바란다.
힘쓰고 힘쓸진저!
- 서경창이 자제들을 경계한 편지 -
성인은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 고 하셨다.
이는 선악(善惡)에는 응보(應報)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선을 행하는 것은 한갓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인 셈이다.
본래부터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선을 행함에 미쳐서는 매번 저도 몰래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지 훗날의 경사를 위해
한ㄴ 것은 아니다. 진실로 능히 선에 마음을 두어, 한 가지 일이나 두 가지 일에 이를 행해 이것이 오래 쌓이면 그 보답이
바로 '남은 경사'인 것이다.
하지만 비록 선한 마음이 있더라도 만약 자기를 이롭게 하려고 남 해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이는 실로 악이 된다.
어찌 '남은 지양'의 응보가 없겠느냐? 나는 말한다. 선을 행함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스스로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선은 그 가운데 있다.
정자는 이렇게 말했다. "일이 의리에 해될 것이 없다면 시속(時俗)을 따라도 괜찮다."
군자가 어찌 경솔하게 시속을 끊겠느냐?
하지만 진실로 시곡과 한통속이 되는 것으로 통달했다고 여기는 것은 군자의 행실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시곡을 멀리하고 다름을 추구하는 것은 더더욱 군자의 마음이 아니다.
서경창의 문집인 『학포헌집』의 표지.
학포헌(學圃軒) 서경창(徐慶昌, 생몰연도 미상) 이 자제들에게 내린 훈계다.
내가 너희에게 두 가지를 말해주마. 『주역』에서는 '선행을 하면 남은 경사가 있고, 악행을 하면 남은 재앙이 있다' 고 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훗날 내 후손들에게 복이 되고 화도 된다. 후손에게 경사를 남겨줄까, 재앙을 남겨줄까?
이렇게 생각하면 일거수일투족이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아라. 선행을 하면서 훗날의 복을 위해 저축하는 것쯤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선행은 조금도 순수하지 않다.
이런 선행은 오히려 악에 가깝다.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불안하다. 그래서 내 마음이 기쁘려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 기쁨이 오래 쌓이다 보니 기쁜 일이 많아진다. 이것이 '남은 경사'다. 염불을 열심히 외니까 잿밥이 절로 들어온다.
잿밥에만 온통 신경이 쏠려 있으면 염불도 안 되고 잿밥도 안 들어온다.
너 자신, 나 스스로를 위해 선행을 쌓아라. 그 복은 후손이 고루 누리리라.
또 시속을 따르는 일에 대해 말하겠다. 정자(程子)는 『논어』를 풀이하면서 '의리에 해될 것이 없다면 시속을 따르는 것이
문제 될 것 없다' 고 말했다. 이것은 시속을 따른느 것이 마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을 경우 따를 수도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말을 보고 시속과 하나가 되는 것을 통달한 군자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기에 토를 달아둔다. 그렇다고
애써 시속과 달라지려 하는것은 더더욱 군자의 마음이 아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조화를 추구하되 한통속이 되지는 않으려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나는 너희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행을 쌓고, 조화를 추구하되 시속과 한통속이 되지는 않는 그런 군자가 되기를 바란다.
좋은 일 하나 하고 보답을 기다리고, 응답이 없으면 하늘을 원망하며 금새 선에서 멀어지는 그런 소인이 되지 않았으면 싶다.
함께 가되 휩쓸리지 않는 줏대를 지닌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서경창은 중인 출신 학자로, 그 생몰연도는 정확치 않지만 19세기 초 실학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바로 구황 작물인 고구마를 심고 저장하는 방법을 고서적과 당시의 서적들을 참조해 저술한 『종저방(種藷方)』의 저자다.
『종저방』은 조정에 올려져 8도에 반포되었을 정도로 가치와 의미가 큰 책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19세기 초 피폐한
백성들에 대한애정이 짙게 깔려 있다. 이는 그의 다른 시문을 통해서도 쉬 확인할 수 있다.
첨찰산을 배경 삼은 운림산방(雲林山房)
-소치(小痴) 허유(許維, 1808-1893)가 자손에게 남긴 유언 -
내가 근래 들어 기침이 심해지고 사지가 늘어져서 몸을 가눌 수가 없구나. 필시 가야할 길이 멀지 않은 모양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문득 한번 떠난 뒤에는 만사가 다 끝이로구나. 한두 가지 마치지 못한 일 중에 눈 감기 전에 마음에 오가는 것들이
누군들 없을 수 있겠느냐. 죽음에 임해 유언을 한다지만 그러지 못할 까봐 염려된다. 대저 병으로 누운 것이 오래 되면
정신이 산란해져서 저승사자가 찾아오는 날에는 혼미하여 인사불성이 되고, 목구멍은 가래로 막히고 눈빛은 흐릿해지고 만다.
비록 처자가 양 옆에서 부축하여 수없이 흔들어 깨우며 한 마디 말을 구하려 하지만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
앉은 채 발을 굴러도 소용없고, 소리쳐 외쳐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오늘은 조금 정신이 돌아오고 기운이 안정되므로, 죽음에 임해 당부하는 뜻을 직접 몇 줄 글로 이렇게 쓰니,
망령되다 여기지 말거라. 노인의 아침저녁 일은 알 수가 없는 법이니라.
내가 세상을 뜬 뒤에는 집 뒤 가까운 산기슭에 무덤을 쓰도록 해라. 연전에 한가할 때 무덤을 이장했던 것은 훗날 쌍분으로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매번 생각해 봐도, 이 산의 형국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산자락 아래로 습기가 늘 있어 이끼가 푸르게 덮혀
있고, 풀뿌리가 덩굴져 이어질 지경이니 이미 묻은 광중(壙中) 안의 일이 염려스럽다. 긴 말 할 것 없이, 내 죽은 뒤에 장례
시기를 미리 정하거든 우선 이 무덤을 뚫어 보아 광중 밑을 살펴보도록 해라. 필경은 물이 드는 근심이 있을 게다.
그렇거든 광중을 깨서 관을 꺼내 한쪽에 놓아두고 곧장 세동(細洞)의 산소로 가서 좌우로 나눠 품(品) 자 모양으로 묻도록 해라.
이곳은 비록 협소하지만 어찌하겠느냐. 달리 쓸 만한 땅이 없지 않느냐.
서책은 내 목숨과도 같다. 책과 두루마리가 소략하지만 또한 고심 속에서 나온 것이다. 대개 거두어 보관함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특히 돌아가신 아버님의 필적은 더더욱 공경하고 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 책 끝에 자잘한 기록을 살펴 하나하나
싸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안 된다. 책자와 글씨는 늘 잃어버리기가 쉬우니 십분 조심해서 상자에서 꺼내지를 말아야 한다.
한번 나왔다가는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집은 병진년(1856)에 지어서 30년이 다 되었다. 사면에 둘러쳐진 무성한 나무숲은 모두 내가 손수 심은 것이다.
아울러 여러 가지 화훼들은 먼 곳에서 구해와 심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떠난 뒤에는 모두 쓸모없이 되겠구나.
또 갈아 먹는 척박한 논밭은 이미 새것과 옛것을 이어대기에도 부족하니, 어찌 여기에 기대 생계를 꾸려가겠느냐?
만약 한꺼번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거든 조금도 아까워 말고 허락해서, 필경은 가솔들을 이끌고 읍내로 들어가 살도록 해라.
맏자손은 성안에 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 신세에 비추어 볼 때 만약 궁벽한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면 어찌 능히 이름을
얻어 세상에 행세하며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느냐? 너희는 다만 깊이 생각해서 처리하도록 해라.
두보는 그림을 잘 그리는 조패(曹覇)에게 시를 지어 주며 이렇게 읊조렸다. “예로부터 성대한 이름 주변 살펴보면, 온종일
불우함이 그 몸을 얽었다네.[但看從古盛名下, 終日坎壈纏其身〕”라 하였다. 내가 한 세상에서 외람되이 삼절(三絶)의 이름을
얻었으니, 분수에 넘치는 일이었다. 어찌 다시 부귀까지 얻겠느냐? 이는 하늘이 반드시 꺼리고 귀신이 막을 것인지라
애초부터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내 분수 안에서 일을 한다면 여러 곳의 산소에 표석을 세우고, 족보를 바로잡고
집안간의 수계(修禊)를 다시 세우는 일만큼은 미약한 정성으로나마 이루었으면 싶다. 안타까운 것은 산소에 부러진
비석을 온전히 고치지 못한 것과 세 칸 재각을 세우지 못한 일이다. 이는 소나무가 필요한 일인데, 재물이 없음을
탄식할 따름이다. 무엇보다 우리 고장의 풍속을 변화시키려 하였지만, 시작만 있었고 마침내 이룰 수는 없었던
일은 비록 지하에 들어가더라도 길게 탄식할만한 일이다.
병술년(1886) 11월 12일에 쓴다
소치(小痴) 허유(許維, 1808-1893)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과 더불어 구한말을 대표하는 화가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 소치(小癡)·노치(老癡)․석치(石癡)․옥주산인(沃州山人)이다.
소치는 1835년(28세)에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해남의 녹우당에 소장되어 있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그림과 소장 화보를 보고 회화에 눈을 뜨고, 1839년(32세)에 초의의 소개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회화수업을 받게 된다. 이후 1849(42세)년에 헌종(憲宗) 앞에 불려가서 어전에서
그림을 그리는 영광을 누렸다. 한 시대의 명성이 찬란해서,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일컬어졌다.
소치는 추사가 타계한 1856(49세)년에 진도로 귀향하여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하였다.
1866년(59세)에〈소치묵연기(小癡墨緣記)〉를 지었고, 그 이듬해인 1867년(60세)에 자서전적 서술인《몽연록(夢緣錄)》
(일명)《소치실록(小痴實錄)》또는《소치실기(小癡實紀)》로 통칭됨)을 지어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정리하였다. 1887
(80세)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고, 이후 생을 마칠 때까지 세상을 주유하며 화가로서의 삶에 충실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인해 많은 작품이 전하고 있다.
소치는 추사와 초의 외에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권돈인(權敦仁), 신관호(申觀浩), 정원용(鄭元容), 정학연(丁學淵),
민영익(閔泳翊) 등 여러 명사와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등 위항문인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소치가 교유한 인물들은
모두 19세기 당대의 문화를 선도했던 인물들로, 이들과의 깊이 있는 교유는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고
작품세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촉매가 되기에 충분했다.
허소치 <초옥산수도(草屋山水圖)>
위쪽에 추사 김정희가 써준 제발(題跋)이 있다.
소치는 회화의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고 산수화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러한 소치의 그림을 두고 추사는 “그의 화법이 우리나라의 누추한 습속을 깨끗이 씻어 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을 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위 유언은 1886년(79세)에 쓴 것이다. 세상을 뜬 것이 1892년이니 세상을 뜨기 6년 전에 쓴 글이다.
나이 쇠잔해 가는 예전 같지 않은 건강을 보며 그는 문득 죽음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겨울,
모처럼 기운이 가뜬한 날에 맑은 정신으로 유언을 남겨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먹을 갈아 글을 썼다.
소치는 유언에서 보듯 아주 꼼꼼하고 침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신이 당대의 명류들과 교유한 자취와 임금 앞에 불려가 괴임을 받은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여 남겼다.
《소치실록(小痴實錄)》이 바로 그것이다. 1877년 소치가 서울 걸음을 했을 때, 그가 왔단 말을 들은 흥선대원군이 그를 불렀다.
대원군은 “소치가 이승에서 나를 알지 못한다면 소치라 할 수가 없네.”라고 하며 그를 처음 만난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뒤에 소치가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작별을 고하자 대원군은 그를 위해 난초를 그려주고 그 끝에다가
“평생 맺은 만남이 난초인양 향기롭네.[平生結契, 其臭如蘭]”이라고 적어 주었다.
그는 한 시대 예단의 정점에 우뚝 서서 한 시대 예술계의 흐름을 바꿔 놓은 화가였다.
하지만 유언에 인용한 두보의 시처럼, 쓸데없이 이름만 높았을 뿐 불우와 가난 속에 쓸쓸한 삶을 마쳤다.
인용: 정민 · 이홍식 著,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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