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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만시(挽詩) 2

 

 

 

 

 

이가염, <목우도>, 1984, 지본담채

 

 

 

이 불 오 사 곡   오 하 이 서 곡

爾不吾死哭  吾何爾逝哭

너는 내가 죽어도 곡하지 못할 텐데 내가 어찌 네가 간다고 통곡해야 하느냐

 

 

차 곡 시 하 곡   부 자 결 골 육

此哭是何哭  父子訣骨肉

이 통곡은 또 무슨 통곡이란 말이냐 부자가 골육이 떨어져나가는 이 마당에

 

 

슬 하 일 무 농   총 혜 수 양 독

膝下日撫弄  聰慧秀兩獨

내 무릎에서 날마다 너를 어르며 놀았는데 똑똑하고 준수함은 둘도 없을 것이라

동 치 수 다 재   이 능 임 한 오

童稚雖多在  爾能任寒○

아이들이 비록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너는 추위와 더위도 잘 견뎠지

 

 

이 모 미 독 질   수 월 우 사 곡

爾母彌毒疾  數月寓社谷

너의 어미 심한 병이 갈수록 더해져 수개월을 사곡에서 살았을 때

치 심 방 초 읍   래 왕 경 삼 복

稚心方焦泣  來往經三伏

어린 마음에도 애타하며 울면서 삼복더위 지나도록 오고갔었지

득 차 근 환 제   이 홀 득 진 숙

得差僅還第  爾忽疹○

네 어미가 조금 나아 집에 돌아왔을 때 갑자기 너에게 홍역이 생기고 말았네

 

 

현 리 호 위 혹   참 담 절 기 육

玄理胡爲酷  慘惔折○育

하늘의 이치는 어찌 이처럼 혹도하단 말인가 참담히도 이 아이를 길러보지도 못한 채 꺾어버리다니

통 결 렬 간 장   불 선 치 의 복

慟結裂肝腸  不善治醫卜

통곡이 맺히어 애간장이 찢어질 듯하구나 의술과 점술로도 제대로 다스려보지 못했으니

 

 

이 응 일 식 존   오 금 오 내 벽

爾應一識存  吾今五內擘

너는 단 한 번만이라도 알아야 하리라 내 오장이 지금 찢어질 것만 같음을

생 전 불 부 견   사 후 당 면 목

生前不復見  死後當面目

살아서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요 죽은 뒤라야 네 얼굴 볼 수 있겠지

 

 

장 하 위 사 전   애 서 만 단 족

裝何慰死前  哀緖萬端簇

이제 어떻게 너의 죽음 위로해야 하나 슬픔만 만 가지로 쏟아질 뿐인데

요 락 칠 세 성   매 몰 일 산 록

寥落七歲星  埋沒一山麓

쓸쓸하구나, 일곱 살 아이 저 산 한 귀퉁이에 묻어야만 하다니



-「」 『』 갑술년에 철이를 통곡하며 甲戌哭喆兒창암집蒼巖集권 1


 

 

영조 때의 중인 출신으로 여항시인이었던 창암 김상채金尙彩(생몰 미상)가 자신의 아들을 잃고 쓴 오언고시다.

김상채는 막내를 잃은 슬픔에 바로 또 한 수의 고시를  썼는데, 그 앞자리에 이렇게 쓴다.

 

내가 아들을 잃어버리고 상심한 이후로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였다.

몸도 쇠하여지고 병도 깊어졌으며 슬픔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이어져만 갔다.

이에 고시 한 수를 즉흥적으로 읊으면서 눈물로 앞의 시에 이어 쓴다.

 

 

김상채는 아이의 생일을 맞아 또한번 지독한 그리움에 눈물짓는다.

 

 

거 세 차 신 무 이 농    금 년 금 일 묘 무 형

去歲此宸撫爾弄  今年今日杳無形

지난해 바로 오늘 널 데리고 놀았는데 올해 그 오늘은 아득히 흔적조차 없구나

중 장 통 결 하 시 이    수 루 매 간 적 재 정

中腸痛結何時已  垂淚每看跡在庭

마음 깊이 맺힌 이 아픔 어느 때나 끝날까 마당에 네 자취는 볼 때마다 눈물이 나니

 

- 「죽은 아이의 생일을 맞아서 亡兒生日」 『창암집蒼巖集』권 1

 

 

 

다음의 시는 아이의 첫 기일에 적은 것이다.

 

촉 물 가 애 절     경 년 기 혹 망

觸物街哀切  經年冀或忘

거리에 보이는 것마다 슬픔뿐 해가 바뀌면 혹 잊혀질까 했더니

추 사 전 오 내    지 통 결 중 장

抽思轉五內  至痛結中腸

생각이 날때면 오장이 뒤집어지고 지곡한 아픔은 마음속에 맺혔어라

쇠 병 불 거 주    한 화 공 자 향

衰病不擧酒  寒花空自香

지치고 병들어 술잔조차 들 수 없고 쓸쓸한 꽃은 부질없이 절로 향기라

차 여 금 이 의    영 아 일 하 상

蹉汝今已矣  令我日何傷

아! 너는 이제 끝이 나버렸지만 어찌 나를 날마다 이토록 아프게 하느냐

 

 

- 「죽은 아이의 첫 기일을 맞아 옛일을 추억하며 적다」

 

 

 

 

 

 

 

분청사기철화연지조어문장군, 15~16세기, 높이 15.4, 동경 12.8×23cm, 리움미술관 소장

 

 

 

거 년 상 애 녀    금 년 상 애 자

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다가 올해엔 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애 애 광 릉 토    쌍 분 상 대 기

哀哀廣陵土  雙墳相對起

슬프고도 슬픈 이 광릉 땅에 두 무덤이 서로 마주보고 섰구나

 

 

소 소 백 양 풍    귀 화 명 송 추

瀟瀟白楊風  鬼火明松楸

백양나무 스산한 바람 일어나고 도깨비불은 묘지에 번쩍인다

지 전 초 여 백    현 주 전 여 구  

紙錢招汝魄  玄酒奠汝丘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 무덤에 현주를 따르네

 

 

 응 지 제 형 혼   야 야 상 추 유

應知弟兄魂  夜夜相追遊

너희 남매의 혼은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겠지

종 유 복 중 해    안 가 기 장 성

 

 

縱有腹中孩  安可冀長城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랄까

 

낭 음 황 대 사    혈 읍 비 탄 성

浪吟黃臺詞  血泣悲呑聲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며 피눈물 삼키며 슬픈 울음소리를 삼키노라

 

 

- 「죽은 자식을 통곡하며 哭子」 『난설헌시집蘭雪軒詩集』

조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이 어린 두 남매를 차례로 잃고서 쓴 것이다.첫째 시구로 보아

한 해 간격으로 딸이 먼저 죽고 그 다음 해에 아들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시 가운데 '광릉 땅'이라 한 것은

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산29-5를 말한다.  

남매를 나란히 묻고 자신 또한 이곳에 묻혔다. 난설헌은 강릉 출신이지만 남편의 선영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 시 가운데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랄까" 라는 구절은

전체적인 시적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당시 난설헌의 뱃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도 결국 잃고 만다. 그러니 섣불리 단정짓기는 어려울 터이다. 또한 시 속의 '황대사黃臺詞'는

당나라 고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태자 현賢이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려고 했던 계후繼后의 계략을

아버지에게 깨우쳐주기 위해 지었다는 노래다. 하지만 고종은 아들이 만들어 부른 이 노래의 뜻을

 깨닫지 못했고 결국 태자 현은 계후의 손에 쫓겨나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인 만큼, 난설헌이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린다고 한 것은 어미로서의 구실을 제대로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내용이겠다.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김홍도 164 x 76cm, 개인소장

 

 

 

오 형 이 상 유    조 만 백 운 인

吾兄已桑楡  早晩白雲人

우리 형님 이미 늙으셨지만 예부터 욕심없이 사셨네

여 역 소 지 권    기 이 시 종 신

汝亦所之倦  ○以詩終身

너도 그렇게는 살기 힘들었을 텐데 어찌 시인으로 일생을 마쳤더냐

 

 

상 강 수 귀 학    초 초 수 사 빈

霜降水歸壑  稍稍洙泗濱

서리 내리자 물은 골짝으로 돌아가 차츰차츰 수사가로 나아갔네

비 연 성 문 광    점 야 이 기 린

斐然聖門狂  點也爾其隣

찬란한 문장 마름질은 못했지만 증점만은 너의 이웃이 되었구나

일 소 락 화 분    반 경 기 연 순

一笑落華芬  反經其淵醇

한바탕 웃음에 꽃향기 스러졌지만 그 순박함은 정도正道로 돌아갔네

빙 호 저 추 월    초 부 대 재 진

氷壺貯秋月  初不帶滓塵

옥병의 얼음에 가을 달 담았으니 애당초 티클하나 없었음이라

연 어 이 완 심    산 뢰 차 이 신

○魚以玩心  山雷且頤神

참다운 도에다 마음을 두었고 산뢰괘山雷卦로 맘과 정신을 길렀네

인 간 부 자 락    임 하 도 의 진

人間父子樂  林下道義眞

인간 세상 부자간 즐거움은 산림 속의 도의가 참됨이라

 

 

장 비 사 태 기   고 유 천 불 인

將非事太奇  故有天不仁

너무 기이한 일 말아야 하리니 이 때문에 하늘을 매정타 함이라

적 료 경 시 혼    교 도 여 침 륜

 

 

 

寂蓼竟詩魂  郊島與沈淪

쓸쓸하다! 끝내는 너의 시혼이 맹교와 가도처럼 사라져버렸구나

 

 

- 「숭겸이를 곡하며 哭崇謙」 『삼연집三淵集』권7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자신의 조카인 관복암觀復菴 김숭겸金崇謙의 죽음에 부친 시다.

모두 10 수로 이루어진 시 가운데 위는 가장 마지막 수이다. 김숭겸의 아버지는 당대의 문장가요 유학자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다.  훗날 정조 임금이 『홍재전서弘齋全書』「일득록日得錄」에서

이들 안동김씨 일족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참으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최고의 명문가임을 극찬한 바 있다.

 

겨우 19세밖에 살지 못한 김숭겸, 그의 시집 『관복암시고觀復菴 詩稿』에 300여 수의 시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재능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김창협은 2남 5녀를 두었는데 그중 맏이가 김숭겸으로 김창협의 나이 32세에 본 아들이다.

 38살에는 김재겸을 낳았는데 태어잔 이듬해 죽고 말았다고. 이후로 김창협은 아들을 두지 못했다.

결국 하나 밖에 없던 아들 김숭겸을 그의 나이 50에 잃고 만 것이다.

 이로서 집안의 대가 끊어진 셈인데, 김창협의 인생 말년에 참으로 혹독한 시련이 닥친 것이다.

숙종 때 좌의정을 지낸 당시의 대학자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은 다음과 같은 만시를 지었다.

 

 

 

 

삼 주 유 망 두 산 여    시 례 추 정 유 백 어

三洲儒望斗山如  詩禮趨庭有伯魚

삼주는 유림의 명망이라 태산북두 같았고 뜰에는 시례 배우는 백어 같은 아들 있었네

목 약 명 성 안 옥 설    신 모 추 수 구 경 거

目若明星顔玉雪  神侔秋水句瓊琚

눈빛은 밝은 별이요 얼굴은 옥설 같았네

 

 

천 생 미 질 호 섬 아    세 선 영 재 최 석 거

天生美質胡殲我  世鮮英才最惜渠

하늘은 인재를 내고는 어찌 우릴 죽이는가 세상엔 영재 드문데 그대 가장 애석하구나

만 실 서 향 차 고 적    서 하 지 통 약 위 서

 

 

 

 

滿室書香○古迹  西河至痛若爲紓

방 안 가득 글 향기 이제 다 옛 자취뿐 서하의 아픔 무슨 수로 풀어주나

 

 

- 「숭겸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金生崇謙挽」 『한수재선생문집寒水齋先生文集』권1

 

 

삼주는 김창협의 별호로 그가 당시 유림에서 존경받던 학자였음을 말한 것이다.

시의 서두에서부터 그는 김숭겸이 그 아버지를 닮아 세상을 너무 욕심 없이 살았다고 했다.

시를 지으며 야인野人으로만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사洙泗' 란 洙水와 泗水이다. 이는 노나라에 있는 강 이름으로 공자의 고향 가까이에 있다고 하여

공자의 가르침곧 유교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즉 그가 유학에도 점점 깊이를 더해갔으며, 문장에 있어서도 뛰어났지만

 결국 짧은 생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증점만은 이웃이 되었다고 했다. 이 말은 『논어』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취향을 몯자 제자 대부분은 각각 세상에 대한 큰 포부를 말하였으나 증점만은 오직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올라가 시를 읊조리고 돌아오겠다고 대답함으로써 공자의 칭찬을 받았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산뢰괘山雷卦' 란 실력을 기르고 뜻을 기른다는 의미의 『주역』괘사卦辭이다.

즉 그가 한 일은 오로지 이 산뢰괘처럼 자연 속에서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길렀을 뿐이라는 뜻이다.

끝 구의 맹교와 가도는 중당中唐 때의 시인으로 사람들은 그들을 '島寒郊痩' 즉, 가도는 차갑고, 맹교는 매마르다' 는 평을

내릴 정도로 그들만의 독특한 시풍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이들은 생애가 불우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삼연 김창흡은 창昌자 돌림의 소의 6창이라 불리는 형제 중에서도 특히 시로써 이름이 났던 사람이다.

그는 조카 김숭겸의 유고 시집을 펴내면서 서문 첫머리에 그 스스로를 "나는 세상일에는 아둔하고 서툴러서 무슨 일이든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오직 시도詩道에만은 30년간 마음을 써왔다" 고 말하기도 했다.

 

 

 

 

유 장 종 야 장 개 안    보 답 평 생 미 전 미

 

 

惟將終夜長開眼  報答平生未展眉

오직 두 눈 뜬 채 이 긴 밤 지새며 평생을 고생한 당신에 보답하려네

 

 

위의 시는 唐나라의 원진元榛이 쓴「슬픈 마음을 부쳐 보내며」라는 3수의 詩야말로 역대 최고의 명편으로 회자된다.

아내는 27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시에서 "귀한 집안의 어리고 가장 사랑스런 딸이 / 가난한 이에게

시집 와 온갖 일 다 어그러지고 말았다네 (···) 이전에 장난삼아 죽은 뒤의 일 얘기했던 / 오늘 이 아침에는 다 눈앞에 닥친

일이 되고 말았구려" 라고 읊으며 셋째 수 가장 마지막에 위에 적시한 천고에 남을 만한 아름다운 시구를 남겼다.

'미전미未展眉' , 말 그대로 '눈썹 한 번 펴지 못할 정도' 로 고생만 한 아내라는 뜻이다.

그렇게 죽은 아내에게 기껏 해줄 수있는 일이라곤 두 눈 꼬박 뜨고 밤을 지새우는 일뿐이라며 애통함을 토한 것.

 

조선시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는 근엄한 유학자들의 문집에 감히 실릴 수 없는 주제이자 금칙禁飭.

그런데 한시에서 만큼은 이 남녀의 정을 풀어낼 수 있는 통로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도망시悼亡詩' 영역.

도망시는 아내의 죽음에 부치는 만시다. 조선의 사대부가의 남자가 자신의 체통을 내던지고

오로지 한 여자를 위해 목놓아 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도망시 뿐이었다.

 

 

 

 

나 장 월 모 송 명 사    내 세 부 처 역 지 위

那將月姥訟冥司 來世夫妻易地爲

뉘라서 월모에게 하소연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아 사 군 생 천 리 외    사 군 지 아 차 심 비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我此心悲

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 「유배지에서 아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만시를 짓다 配所晩妻喪」

 

 

추사가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 시 쓴 만시로 조선조 사대부들이 쓴 도망시 중에서도 압권으로 꼽힌다.

추사의 절절한 슬픔의 극치는 바로 상대방이 자신의 아픈 마음처럼 그렇게 이해하고 느끼지 못한다고 강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월모月姥는 부부의 인연을 맺게 해준다는 전설 속의 노파다. 위리안치圍籬安置 된 추사의

처지 가운데 비록 칠언절구에 그치는 내용이지만, 죽은이를 향한 구구절절함이 극진하게 묘사되어 있다.

 

추사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은 이희민의 딸인 한산 이씨로 추사 나이 15세 되던 1800년에 혼인을

맺었다. 하지만 한산 이씨는 1805년 스무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후로 23세 때 이병현의 딸인 예안 이씨와

다시 결혼을 한다. 추사의 도망시는 바로 예안 이씨를 추모하는 시이다. 제주 유배 시 추사는 아내의 부음을 한 달이나

지난 뒤에 듣게 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아내가 죽은 줄도 모른 채 바로 그 다음 날인 14일에 편지를 보내 아내의 병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 아래는 추사의 한글 편지 일부를 현대어로 바꾼 것이다.

 

 

어느덧 동지가 이르렀는데, 아픈 몸은 어떠한지요? 그 병의 증세는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간 병의 차도는 어떠한지요? 벌써 석 달이 넘었는데, 몸의 원기가 오죽이나 쇠하였겠습니까.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염려는 되나 어떻게 할 길이 없소이다. 잠자는 것과 식사하시는 형편은 어떤지요?

그동안 무슨 약을 드시는지요? 아주 몸져 드러누웠다 하시니, 나의 간절한 심려가 갈수록 진정치 못하겠습니다.

 







 

 

김두량, <월야산수도>, 18세기, 종이에 수묵, 81.9×49.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 렴 충 망 경 생 진    문 엄 도 화 적 막 춘

粧奩○網鏡生塵  門掩桃花寂寞春

화장함엔 거미줄, 거울엔 먼지 일고 닫힌 문에 복사꽃 핀 적막한 봄이라

의 구 소 루 명 월 재    부 지 수 시 권 렴 인

依舊小樓明月在  不知誰是捲簾人

예전처럼 다락에 밝은 달은 떴건만은 그 누가 있어 저 주렴 거두어줄까

 

- 「죽은 아내를 슬퍼하며 悼亡」 『손곡시집蓀谷詩集』권6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2)이 쓴 시다. 이달은 조선중기 시로써 이름을 날렸던 천재적 시인으로 교산 허균과

그의 누나 허난설헌에게 시를 가르쳐준 스승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허나 그는 기생의 몸에서 태어난 미천한 신분에다

달리 벼슬을 한 것도 없어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시쳇말로 전업 시인이자 시가詩家였기에

이런 시를 남긴 것이다. 흔히 보는 애끓는 만시에 비한다면 덤덤하다 못해 되려 낭만적인 분위기마저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달이 쓰는 시어들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이미 선대에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는 사실.

서포 김만중은 이달의 「별이예장別李禮長」이라는 짧은 시 한 수를 가리켜 '조선 최고의 오언절구'라 극찬한 바 있다.

이달의 시는 오언이나 칠언 같은 짧은 절구가 대부분이며, 또 이런 시 형식에 있어 뛰어난 창작능력의 소유자다.

 

한시는 오언이 짓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단 20자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의미를 다 담아내야만 하는

부담 때문에 그런 것. 하여 웬만한 시재試才의 소유자가 아니고선 쉽게 손댈 수 없는 형식이자 영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행했던 소위 '당시풍唐詩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달은 바로 당시풍에

탁월했던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달은 훗날 당시풍을 읊었던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과 더불어

소위 '삼당시인三唐詩人' 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중국의 시는 크게 송시宋詩와 당시唐詩로 나누어지는데, 이 둘은 시적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흔히들 말하길 당시가 '보여주는 시라면 송시는 '말하는 시'라 하고, 또 당시가 '가슴으로 쓴 시'라면

송시는 '머리로 쓴 시'라고 평한다. 자연히 당시는 낭만적이자 감성적이며, 송시가 매우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반면

당시는 상상력이 동원되면서 일견 심한 과장법을 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당시는 시적 멋을 한껏 부리곤 하는데,

이를테면 사실에서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시적 흥취를 살리는 데 초점을 둔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당시는 송시보다

비평가들에게 있어 더 우월한 평가를 받곤 하는데 그것은 당시가 시라는 본래의 특성을 보다 더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

이라고 한다. 바궈 말하면 말 또는 이치로 사람을 설득하려는 송시보다 당시는 사람의 감성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

 

이달의 만시는 시인 자신의 울음은 뒤로 숨긴 채 독자 스스로 은연중에 문득 처연해지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돋보인다.

그 표현 또한 매우 서정적으로 흐르는 것도 이달의 공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언뜻 만시의 진정성이

떨어져 보일지 몰라도 가슴속을 휑하니 스쳐가는 듯한 슬픔과 외로움은 통곡보다 되려 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법이다.

 

 

 

 

 

 

 


<강촌의 첫 눈 江村初雪> 신위 申緯

 

 

 

 

 

 

 

 

 

 구 합 방 진 만     신 천 동 로 장

舊閤芳塵滿   新阡凍路長

그 옛날 집엔 고운 먼지만 가득하고 새 무덤은 얼었고 길은 멀기만 하오

 

백 년 성 설 재    부 여 루 천 행

百年成設在  付與淚千行

백년해로 하자던 약속의 말만 남긴 채 수없이 흐르는 눈물에 부쳐서 보낼 뿐이오

 

 

 

만 사 임 조 경    공 여 설 빈

萬事臨朝○  空餘雪顰明

인생살이 아침 거울 앞세서 들여다보면 허망하게도 허연 귀밑머리만 남았구려

가  능래 유 일    욕 곡 이 무 성

 

可能來有日  欲哭已無聲

앞으로 더 살 수 있는 날이야 있겠지만 울고 싶어도 이미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오

 

 「남을 대신해서 지은 만시 晩代人作」 『옥봉집玉峰集』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1537~1582) 도망시로 '대인작代人作'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만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내를 잃은 사람을 대신 만시를 지었다는 뜻으로 백광훈 또한 이달과 함께 조선 중기 당시풍의 시로

명성을 날린 바 있다. 앞서의 이달의 만시가 슬픔을 내면에 삭인 서정품의 만시라면 백광훈의 시는 있는 그대로의 정을 다

드러내면서 길게 그리워하는 만시로 이달의 만시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도망시는 비록 남자라고 하지만 한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 한스러움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진솔하면서도 애절한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것도 가능한 한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해야만 하는 유가적 분위기 속에서 사대부 남자가 그리워서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파격 그 자체라고 볼 수밖에 없을 터이다.


 

 

 

 

 

 

 

김정희, <고사소요도>, 종이에 수묵, 24.9×29.7cm, 간송미술관 소장

 

 

 

 

 

 

 

옥 모 의 희 간 홀 무    각 래 등 영 십 분 고

玉貌依○看忽無  覺來燈影十分孤

곱던 모습 희미하게 보일 듯 사라지고 깨어보니 등불만이 외롭게 타고 있어라

조 지 추 우 경 인 몽    불 향 창 전 종 벽 오

早知秋雨驚人夢  不向窓前種碧梧

가을비가 내 잠을 깨울 줄 알았더라면 창 앞에다 오동나무 심지도 않았을 텐데

 

- 「아내를 잃은 후에 꿈을 꾸고서 적다」 『도망후기몽悼亡後記夢』

 

 

 

숙종 조 예문관 제학을 지냈던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1633~1709)가 쓴 도망시다.

18세기 남인 계열의 문인이었던 강준흠이 쓴 시화집 『삼명시화三溟詩話』에는 이서우가 시인으로서 당대 으뜸이었으며,

그의 시는 편마다 보석과도 같았는데, 특히 주변 사물을 소재로 읊은 소위 영물시詠物詩에 매우 뛰어났다고 했다.

이 시에서 좋은 꿈을 깨게 한 원인을 가을비와 오동나무에다 돌렸다. 오동나무 잎은 넓고 커서 빗소리가 크기 마련이다.

시의 마지막 구에서의 넋두리는 죽은 아내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는지를 우회적으로 말했다는 점에서 시적

효과를 배가시킨 매우 돋보이는 대목이라는 생각이다.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비통함 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애꿎은 오동나무 탓으로 돌려버리는 수사법은 작가의 미묘한 지경을 드러내고 있다. 이서우의 아내 청송 심씨는 1650년

18세에 시집와서 22년을 함께 살다가 1672년 3월 10일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송파집』에는 아내의 사후 이듬해에

지은 제문 한 편과 사후 29년이나 지난 1700년에 아내의 묘를 이장하면서 지은 글 한 편이 실려있다.

이중 제문의 일부분을 살펴보자면.

 

 

비록 당신의 바탕이 맑고 허약했다고는 하나 여름에는 땀도 잘 흘리지 않았고, 겨울에는 추위도 잘 타지

않아서 마땅히 장수할 것이라고 했었는데, 어찌 마흔밖에 되지 않아 간단 말인가요? 병을 고치지 못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하늘의 명이 그렇게 재촉학 것인가요? 예전에 당신과 함께 살 때에는 그 즐거움이 큰 줄

잘 알지 못했었는데, 지금 나 홀로 남아 있자니 사는 것이 참으로 지겹기만 하오. 꿈속에서라도 한 번 당신

을 만나 나의 이 애틋한 마음을 하소연하고 싶은데, 꿈에서마저 당신은 보이질 않고, 또 설령 본다고 하나

당신의 그 모습은 또렷사질 않구려. 몸도 약해지고 정신도 흐릿해지니 잠깐의 세월 속에 머지않아 서로

만나 저 저승에서 함께 노닐 것이오. 그때에 서로가 알아본다면 함께 정을 나눌 것이고, 모른다 해도

슬퍼하지 않으리다. 한 잔 술 올리며 길이 이별함에 세상만사가 다 아득해지는구려.

 

 

 

 

 

 

푸바오스, <서호지야西湖之夜)>, 1961, 34.3×45.9cm,

 

 

 

 

 

 

 

 

 

 

 

잔등명멸반기혼  원원계성기별촌

殘燈明滅伴羈魂  遠遠鷄聲起別村

희미한 등불은 가물대며 떠도는 넋을 짝하는데 저 멀리 닭 우는 소리는 외딴 마을에서 들리네

시탁동창간야색  효산여몽월류흔

詩拓東牕看夜色  曉山如夢月留痕

짐짓 동쪽 창을 열고서 밤 풍경을 보고 있자니 새벽 산은 꿈속인 양 달빛 지난 흔적만 남았네

 

- 「늦은 밤에 앉아 시를 짓다 晩坐口呼」 『낙전당집樂全堂集』권 4

 

 

낙전당樂全堂 신익성申翊聖(1588~1644)이 지은 시다. 신익성은 인조 때 영의정에 오른 상촌象村 신흠申欽(1506~1628)의

맏아들이다. 아버지 신흠은 계곡 장유, 택당 이식, 월사 이정구와 함께 조선중기 4대 문장가로 일컬어질 만큼 시문에 뛰어났던

인물. 이런 아버지 영향으로 신익성 또한 상당한 경지의 문학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문집 속 제목이 '晩坐口呼' 라고만 되어

있어 이 시가 도망시인지 확실치 않지만 당시 평론가였던 임방의 말를 일단 신뢰할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신익성의 아내는 선조 임금의 셋째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1587~1627)로 40세에 세상을 떴다.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었기에 신익성의 충격과 슬픔은 남달랐으리라. 그리고 그 허망함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컷을 터. 그는 아내를 잃은 허망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옹주를 잃고 나서는 살아갈 생각마저 거의 없어져서 집안의 아이와 아낙들을 맡겨놓고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는 세상일을 거의 끊고 지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런 무익한 슬픔은

단지 나의 본성만 해칠 뿐이었다. 그리하여억지로 약을 먹고 책을 읽으면서 여생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 여겼으나 지나간 날들은 아득해지고이 세상은 더욱 꿈처럼만 느껴졌다.

 

 

신익성은 1599년 당시 12세의 나이로 자신보다 한 살 위였던 정숙옹주와 혼인하고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말하자면 선조의 사위가 된 것이다. 정숙옹주는 10세에 작봉爵封을 받고 15세에 궁궐을 나가 신익성과 27년간을

살았다. 옹주는 유달리 선조의 사랑을 받았는데, 선조가 직접 『소학』을 가르쳐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정유

재란 당시 선조가 피난처에서 옹주에게 썼다는 편지는 비록 짤막하지만 전쟁 통에도 딸의 안부를 걱정하는 부친의

각별한 정이 엿보이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리 간 후의 안부 몰라 하노라. 엇디들 잇는다?

셔울 각별한 긔별 업고 도적은 물러가니 깃거하노라.

나도 무사이 인노라. 다시곰 됴히 잇거라

 

 

아끼고 사랑했던 딸이었기에 훗날 선조는 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틀 동안이나 조정의 일을 폐하고서

크게 애통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옹주는 의리에 밝아 광해군의 폭정 때 모두들 몸을 움추릴 때에도 올바른 길을 걷기를

주저하지 않는 단호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신익성은 "당신은 잠자리에서 좋은 친구처럼 유익한 조언을 해주기도

했고, 환란을 겪으면서도 평소의 곧은 행실을 지켰다오. 일마다 내 잘못을 가혹하리만치 지적해 바로잡았지만 태도는 공손

했고, 내 장점만 보면 더욱 권면해주어 내조해준 바가 적지 않았소" 라고 회고한 바 있다. 신익성은 아내를 위한 제문의

끝머리에서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 앞으로 홀로 살아가야 할 아득하고 쓸쓸한 날들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제 나의 노쇠함을 생각하면 세상에서 어찌 더 오래 살 수 있겠소

길어야 수십 년이고 짧아야 몇 달이 되겠지요. 그러니 당신과 떨어져 살날은 얼마 도지 않을 것이고,

함께할 날은 무궁할 것입니다. 달관한 경지에서 본다면 먼저 가고 뒤에 간다는 차이일 뿐이겠지만,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목이 매이는구려. 부들자리를 깔고 앉아 차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나의 평생을 마치려 하오. 참 썰렁한 삶이겠지만 이것도 내 운명이겠지요. 아! 이전에는 당신이 내게

밥을 차려주었는데, 이제는 내가 당신의 밥을 차려놓고 대접하고 있으니, 사람의 일이 어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단 말인가요? 아아! 애달프구려!

 


인용 : 전송열 著 『옛사람들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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