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고굴
(1)
장안長安에서 지중해 동쪽 연안까지 이어진 실크로드.
그 중 간쑤성 하서주랑河西州廊 서쪽 끝 돈황敦煌은 중원과 서역의 교통 요충지로써
동 서양의 문명 교차점이자 여러 민족의 문화가 교류와 융합을 거듭한 역사적 현장으로,
그 중에서도 4~14세기까지 불교의 영향이 지대했던 곳이다.
막고굴, 천불동, 유림굴 등 여러 불교 관련 석굴 사원을 통칭해서 돈황 석굴이라 한다는데
단 한 번도 발걸음을 해본적이 없지만 늘 꿈에 그리던 곳이기에
오늘도 자료를 챙겨가며 눈팅을 시작하려 한다.
막고굴조상비莫高窟造像碑, 육자진언갈六字眞言碣
실크로드 안내도
비단길의 개통에는 장건(張騫,?~서기전 114)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데...
돈황 漢 왕조 장성 유적
돈황 진묘(晉墓) 초상화 벽돌 이광(李廣)
막고굴 제323굴 <장건출사서역도>, (당나라 초기)
건원建元 2년, 장건은 명령에 따라 서역으로 사신의 길을 떠난다. 당시 하서 일대는 흉노에 점령되어 있었다.장건의 사절단은 하서 지역에 들어서자마자 흉노에 투항했다고 여겼고, 특별히 흉노족 미녀를 뽑아 장건의 아내로 주었다.장건은 흉노족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도 낳았지만 자신의 사명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11년이란 길고 험난한 세월이흐른 후, 흉노는 장건에 대한 감시에 소홀해졌고 그 기회를 틈타 자신의 일행을 이끌고 흉노 땅을 탈출해 월지족의 영역으로향한다. 10여 일을 걸어 대완국(오늘날 키르기스스탄)에 닿았다. 장건은 1년 정도 머물다 한나라로 돌아가다 또 다시 흉노에붙잡혔다.1년여 시간이 흐른 후 탈출하여 장안으로 돌아온 것. 사절단은 출발 시 100명이 넘었는데, 그 중 장안으로돌아온 사람은 장건과 당읍부 두 사람 뿐이었다. 한무제는 장건을 중용하여 끊임없이 북과 서로 전진하게 된다.
막고굴 제296굴 실크로드 상단 그림
서기 전 119년 한무제는 다시 대군을 보내 흉노를 쳤다. 흉노는 크게 패배하고 막북(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러났다.한나라 변경 지대와 실크로드 교통로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양관 유적
옥문관 유적
한나라 이래로 하서 지역의 개발은 돈황에 경제적인 번영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깊이 있고 강력한 중원 문화를하서지역에 전파했다. 유가 사상을 위주로한 서적도 돈황에 광범위하게 전해졌다. 당시 돈황에는 뛰어난 인재가 쏟아져 나와 문화적으로 하서 지역에서 제일이라고 손꼽혔다.
장지의 글씨
후한의 명장인 장환(張奐104~181)은 돈황 연천 사람으로 동탁의 부름을 거절하고 돈황에 은거, 제자를 길렀다.장환의 아들인 장지(張芝, ?~192?)는 유명한 서예가로 특히 초서에 능해 '초성(草聖)'으로 불렸다. 그의 글씨는훗날 왕희지 등이 제창한 서예법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진晉 시대 필사본 《삼국지》<보즐전步騭傳> (돈황연구원 소장)
장건이 서역으로 통하는 길을 뚫은 이래 200여 년 동안 왕조의 통치잗르은 실크로드의 개발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4세기 초 서진(西晉, 265~316) 왕조가 멸망했다. 그들은 남하하여 오늘날의 난징에 동진(東晉, 317~419)을 세우고
長江 이남의 땅을 통치했다. 광대한 북방 지역은 그때부터 5호 16국의 혼란기가 시작된다.
서량 시대 필사본 《십송비구계본(十誦比丘誡本)》 돈황에서 출토된 서량의 벽돌 그림 <연음독차도宴飮犢車圖>(돈황 문서 S,797호
)
가욕관 위진묘(魏晉墓) 벽돌 그림 <목축도牧畜圖>
북량의 석탁(돈황연구원 소장) 아마라바티(Amaravati)조각 <나무 아래서 태어나는 석가모니> (1세기)
간다라 조각 <수하관경상樹下觀耕像>
아잔타(Ajanta) 석굴 <항마>
인도 산치(Sanchi) 불교 기념물군의 대탑(大塔)
막고굴 제275굴 남벽의 <출유사문)
막고굴 제254굴 <항마변>
막고굴 제263굴 <초전법륜도>
막고굴 제290굴의 불전도
막고굴 제329굴 <승상입태> 막고굴 제329굴 <야반유성>
돈황 장경동 《정법화경》1권
키질 석굴 앞에 세워진 구마라집 동상
불교가 동진 시기에 형성된 남북 구역은 북방의 19국은 대부분 불교를 수용했다.특히 삼진三秦, 오늘날의 산서성 일대)의 불교는 중국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그 대표적 인물이 석도안과 구마라집이다. 구마라집의 조상은 인도 사람이지만 그는 구자국에서 태어났다.그의 선조는 대대로 천축국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구마라염은 벼슬아치가 되는 것을 피하려 출가했고동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지나 구자국에 왔다. 그자국왕은 구마라염을 환대하고 그를 국사로 삼았다.
돈황 구마라집 백마탑(白馬塔) 우웨이 나집탑(羅什塔 )
돈황사경 담무참 역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구마라집이 장안에서 불경을 번역하는 동안 하서 지역인 양주에도 유명한 역경승譯經僧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담무참(曇無讖, 385~433)이다. 인도 중부 출신으로 사문 달마야사를 따라 출가하였다.나중에 빅두선사를 만나 《열반경》을 전해 받고 대승불교를 익힌다. 담무참의 불경 번역 활동은 주로 둔황과 고장두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그는 중국에서 불교 교리의 한 학파를 개창했기에 특히 중요한 승려로 자리매김 된다.
병령사 서진 제169굴 내부
북량의 석탑들(돈황시박물관 소장) 막고굴 제275굴 북쪽 벽 공양인
마제사 석굴군 전경(북량의 저거씨 정권이 초기에 활동했던 린쑹산)
막고굴 제156굴 전실 서쪽 벽에 새겨진 <막고굴기(莫高窟記)> 제기(題記) 모사본
막고굴은 현재 700여 개의 석굴이 남아 있다. 그중 벽화와 채색 소조상 등이 있는 굴은 492개다.막고굴은 크게 남쪽 구역과 북쪽 구역으로 나뉘는데 남쪽에는 모든 석굴에 벽화와 소조상이 있고, 북쪽에는 몇몇 개별 석굴에벽화 등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승려가 살았던 주거용 굴이거나 수행을 위한 참선용 굴, 승려의 입적 후 시신을 매장한 예굴이다.
돈황 막고굴이 처음 창건된 연대에 대해 최초로 나타나는 기록은 성력聖歷 원년698년 5월 14일의 <이군막고굴불감비李君莫高佛龕碑>다.
노을이 비치는 싼웨이산
막고굴 제268굴 주실 내부 북량 시기의 세 석굴 평면도
막고굴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굴은 북량 시대에 창건되었다. 현재 세 개의 굴이 남아 있는데,
돈황연구원의 번호 체계에 따르면 제268굴(제267굴부터 제 271굴까지는 사실상 한 조의 석굴로 본다), 제272굴, 제 275굴이다.남쪽 구역 동굴 중에서 중단의 세 번째 층에 위치하며, 북량 시대에 만든 세 굴이라고 해서 북량삼굴이라고 부른다.석굴의 형태로 보면 세 개의 석굴은 각각 특색이 있고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다.
제268굴의 평면도를 보면 장방형이고 반듯한 천장에는 평기平棋,(바둑판 장식) 형식으로 조각했다.서쪽 벽(정면의 뒤 벽)에서 첨미원권형 감실이 만들어져 있다. 감실 내에는 교각交脚 불상이 있다.감실 아래로 공양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두 번에 걸쳐 수정한 흔적이 있다. 제일 위에 덧그린 그림은 북위 때 그림이다.그 그림 아래에 다른 사람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 북위 시대의 그림이 벗겨지면서 드러났다.
학자들은 이 석굴이 낙준법사가 썼던 참선용 석굴로 추측한다.
막고굴 제272굴 주실 내부
제272굴은 제268굴의 북쪽에 가까이 붙어 있다. 대략 정사각형이고 남북의 넓이가 3.1미터다.
석굴 천장은 아치형에 가깝고 중심에는 사각으로 짜 올린 조정漕井 형식으로 도드라지게 빚어놓았다.
서쪽 벽은 바닥과 가까운 쪽에 아치형 감실을 만들었는데, 감실 내에 불상이 하나 조각되어 있다.
높이가 1.38미터이고 손은 둘 다 사라졌다. 머리와 목 부분은 나중에 새로 만들어 수리를 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형식의 가사를 걸치고 네모난 자리 위에 앉은 자세다 .
광배에는 머리 부분에 부처의 화신을, 몸 부분엔 천인天人을 그렸는데 각각 다른 자세로 춤을 추고 있다.
북쪽 벽에는 천불도를 그렸다. 섭법도는 부처와 두 명의 보살, 네 명의 제자로 구성되었는데, 부처는 결가부좌
자세로 수미좌 위에 앉아 있다.남쪽 벽에도 천불도 중간에 가로 0.7미터, 세로 0.75미터의 설법도가 들어가 있다.
역시 부처와 두 명의 보살, 네 명의 제자로 구성되며, 부처는 결가부좌 자세로 사자좌 위에 앉아 있다.
두 점의 설법도와 감실 내의 불상을 종합해 보면 과거, 미래의삼세불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굴은 주로 승려가 예불을 드리던 용도였다.
막고굴 제275굴 주실 내부
제275굴은 제272굴 북쪽에 가까이 붙어 있다. 세로로 긴 장방형이며 남북의 폭은 3.34미터, 동서으 깊이는 5.5미터다.
천장은 완만한 시옷자 형태다. 서쪽 벽에는 감실이 없고 다리를 교차하고 앉은 보살상이 세워져 있다. 보살상의 높이는
3.4미터로, 북량삼굴 중에서 가장 큰 소조상이다. 보살의 머리에는 삼주화불관을 썼고 목에는 영락을 걸었다. 어깨에 큰
천을 덮고 아래에는 주름이 잡힌 치마를 입었다. 오른손은 훼손되었지만 왼손은 무릎 위에 얹혀있다. 손 모양을 보면
여원인을 맺고 있는 듯하다. 보살은 쌍사자좌 위에 앉아 있다. 이 보살상을 두고 미륵보살이라는 사람도 있고
성불 하기 전의 석가보살, 전륜왕이라는 사람도 있다.
남쪽 벽에는 상부에 감실 세 개를 만들었다. 서쪽부터 동쪽으로 처음 두 개의 감실은 감실 바깥이 집 모양인 궐형감이다.
감실 내에 하나씩 교각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세 번째 감실은 감실 바깥이 두 그루의 나무로 만들어진 쌍수감인데,
사유보살 상이 하나 앉아 있다. 세 개의 불감 아래에 석가모니의 생애를 다룬 불전 중'출사유문' 장면이 그려져 있다.
북쪽 벽 상부에는 역시 불감 세 개가 만들어져 있고, 남쪽 벽과 동일하게 조성되었다.
불감아래로는 비릉갈이왕 본생, 건니파왕 본생, 시비왕 본생, 쾌목왕 본생, 월광왕 본생 등
다섯 개의 본생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막고굴 제275굴 북쪽 벽 <비릉갈리왕본생고사화>
북량삼굴은 선굴과 전당굴, 두 가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선을 하는 장소와 예불을 드리고 강설을 하는 장소가
하나로 합쳐져 있는 것이다. 건축 양식은 인도 불교 건축과 중국의 전통 건축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채색 소조상은
대부분 단체상이 아니라 개인상이다. 불상의 옷은 장식적인 무늬가 많고 얇은 천에 신체가 비쳐 보이는 느낌이다.
벽화의 내용은 천불도, 설법도, 부처의 화생, 본생, 불전, 고사, 다양한 무늬, 설굴 공양인의 초상 등이다.
석굴 내의 주제가 되는 내용은 당시 중국 북부 지역에서 유행하던 훈염법으로 입체감을 살렸다. 인물의 모습은 황토색
선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채색을 하고, 채색이 끝남변 진은 철선으로 형태를 정돈했다. 선묘가 섬세하고고 힘이 있다.
서역인과 한족의 얼굴형이 모두 드러난다. 예술적 양식은 인도와 서역이 중심이지만 중원지역의 분위기도 섞여 있다.
막고굴 제275굴 북쪽 벽 <월광왕본생고사화>
동양왕 원영의 사경(寫經)
동양왕東襄王과 원영(元榮, ?~541?)과 건평공建平公 우의(于義, 533~583)는 막고굴 창건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북조北朝 시대 선후로 과주자사瓜州刺史를 지낸 두 사람은 돈황 불교사에서 "낙준, 법량은 종파를 발전시켰다면
건평, 동양은 유적을 널리 알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자사인 건평공과 동양왕이 각각 큰 석굴을 창건했다"고들 말한다.
돈황 석굴의 전승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원법영이 필사한 경전의 제기
막고굴 제249굴 내부
막고굴 제249굴 천장 남쪽 경사면의 서왕묘
막고굴 제285굴 내부
막고굴에 현존하는 서위 시대 석굴은 11개다. 이 시기 석불은 양식과 제도가 모두 갖춰져 있다. 석굴 안에 탑으로 조성된 기둥이
세워져 있는 중심탑주굴은 제288굴, 제246굴, 제432굴이다. 굴의 형태는 중심탑주에 시옷자 지붕이 걸쳐져 있고, 기둥의 사면에
위 아래로 감실을 파고 석가모니의 선정, 고행, 항마, 설법 등의 장면을 표현한 불상을 모셨다.
남쪽과 북쪽의 벽 상층에도 궐형감을 만들고 교각보살상을 안치해 도솔천을 상징했다.
북위 때 창건된 제259굴은 중심탑주굴과 전당굴 사이의 과도기적 석굴 형태를 보인다. 중심 기둥이 직접 서쪽 벽과 이어져 있고,
기둥 정면에 감실을 파고 석가모니와 다보불이 나란히 앉아 설법하는 이불병좌설법상을 모셨다. 남쪽과 북쪽 벽에는
각각 네 개씩 감실을 파고 선정불을 모셨다. 이렇듯 서위 시대 및 그 후기의 석굴은 정면 벽에 감실을 파고
사신불상을 공양하는 전당식 굴로 가는 과도기적 형태라고 하겠다.
선굴은 제285굴이 대표적이다. 전당굴 혹은 복두정굴이라고 부른다.
복두정굴은 사다리꼴 지붕 또는 천장을 가진 굴을 말한다. 평면은 대부분 정방형이다. 정면의 감실에는 불상을 모시고,
석굴 내부 공간이 넓다. 여러 신도들이 모여 불경 강설을 듣거나 불상을 바라보며 수행할 수 있다. 연대가 가장 빠른
석굴은 북량 때 만들어진 제272굴이다. 서위 전당굴은 제249굴, 제247굴이 있다. 그리고 감형굴이 있는데,
면적이 좁고 감상이 없다. 참선수행과 관상을 위한 석굴이다.
선정관상禪定觀象은 이 시기 불교의 주요 사상이었다.
서위 초기에 착굴한 제 249굴은 복두형 전당굴이다. 굴 천장의 서쪽 경사면에 제석천왕이 거주하는 수미산과
산 정상의 희견성喜見城이 그려져 있다. 수미산의 양 옆에는 뇌공雷公, 풍신風神, 우사雨師, 주작朱雀, 우인羽人 등
한족 문화의 전통적인 소재를 그렸다. 남쪽과 북쪽 벽에는 중국 전통 신화 전설 속에 나오는 동왕공東王公과
서왕모西王母를 그려서 불교의 제석천과 그 부인인 제석천비帝釋天妃를 표현했다.
예술 양식으로 볼 때 서역의 요철화법凹凸畵法과 옛날 유생들의 옷차림인 헐렁한 옷과 넓은 띠, 맑고 깨끗한
얼굴형이나 신선처럼 가볍게 나풀거리는 모습 등 중원 예술의 기법도 함께 나타난다.
중국 전통 신화 속 인물이 묘실 벽화에서석굴 벽화로 진출한 것이다.
이는 불교예술에 새로운 내용을 더해 주었다.
복식에서는 큰 관과 높은 신발, 헐렁한 옷과 넓은 띠를 입은 한족 복식이 보살상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처럼 중원 문화의 영향이 확연히 드러나는 점을 볼 때 동양왕이 중원에서 이런 문화적 영향을 가져왔다는
연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석굴은 명백히 제석천왕에게 공양하는 것으로, 동양왕이 대량의 불경을 필사하여
제석천왕에게 바쳤건 것과 관련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학자들은 이 석굴이 바로 동양왕굴이 아닌가 추측한다.
막고굴 제285굴 천장 동쪽 경사면
제285굴은 대통 4년 538년에서 5년 539년 사이의 내용이 담긴 방제榜題가 있어서 막고굴 초기 석굴 중에서는
유일하게 연도를 알 수 있는 석굴이다. 원영의 통치 말기에 착굴했기에 이 석굴을 동양왕굴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제285굴은 선굴이다. 주실 서쪽 벽에 세 개의 감실을 팠고, 남쪽과 북쪽 벽에 각각 네 개씩 참선실을 만들었다.
석굴 천장은 복두형이고 황제 등이 사용하던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양산인 화개華蓋 처럼 장식 무늬 천장을 꾸몄다.
네 개의 천장 경사면에는 중국 전통 도상과 불교 문양이 결합되어 의인화된 초기 천상도를 만들었다.
서쪽 벽에는 힌두교의 신이 그려져 있다. 남쪽과 동북쪽 벽에는 모두 불교 제재의 도상들이다. 남벽 상단에는
막고굴에서 처음으로 500명의 강도가 부처가 된 이야기를 그렸다. 남벽 중단에는 '화발제化跋提 장자長者와
누이의 인연 이야기'와 '사나운 물소 인연 이야기'가 있는데막고굴에서는 하나뿐인 내용이다.
네 개의 참선실 사이에는 어린 사미승이 계율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제285굴은 중국과 서역의 서로 다른 심미적 사상이 서로 판이하게 다른 두 가지
예술양식이 적절히 융합되어 독특한 미적 성취를 만들었다.
동양왕은 돈황을 17년간 다스렸다. <이군막고굴불감비>에 적힌 대로 동양왕은 큰 굴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 기간 동안 착굴한 석굴은 많든 적든 동양왕이 참여했거나 그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서위 시대의 석굴에
중원 왕조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것도 동양왕이 돈황에 미친 영향력을 떠올리게 한다.
막고굴 제428굴 내부
막고굴에 현존하는 북주 시대 석굴은 열여섯 개다. 이들 석굴의 규모와 예술적 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많은 학자들이 건평공이 만들었다는 석굴이 제428굴이라고 생각한다. 제428굴의 공양인 초상화는 거의 2천 명이다.
그 중에 "진창군(과주) 사문 비구 경선慶仙 공양"이라는 기록이 있다. 경선이라는 비구는 둔황의 서적 유물 S. 2935호
에도 등장한다. 경선은 천화天和 4년 569년에 영휘사永暉寺에서 《대비구니갈마경大比丘尼羯磨經》을 필사하고
그 제기에 등장한다. 경선이라는 비구가 돈황에서 활동한 시기는 건평공이 과주자사로 있던 때와 일치한다.
북주 시대의 돈황 막고굴 예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불교는 이전 시대에 강좌던 정좌 수행에서 벗어나 불교의 진리를
배우고 연구하며 설법을 듣는 데 치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참선 수행을 위해 만든 선굴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석굴 안에 불상을 모신 기둥을 넣고 부처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한 중심탑주굴도 숫자가 줄었다. 대신 설법회를 열기에 적합한
전당굴이 대거 나타난다. 불상은 부처와 보살 둘, 제자 둘로 이뤄진 조합이 주류가 되었다. 벽화에도 이런 조합으로
설법도가 많이 나타난다. 불상은 부처와 보살 둘, 제자 둘로 이뤄진 조합이 주류가 되었다.
벽화에도 이런 조합으로 설법도가 많이 나타난다. 불경 속 인연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림인 고사화도 크게 늘었다.
유교적인 불교의 본생 이야기 속에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제 296굴의 <미묘비구니인연微妙比丘尼因緣>,
<선사태자입해인연善事太子入海因緣>, <수사제본생>, 제299굴의 <섬자본생睒子本生>, 제428굴의 <수달나태자본생
須達拿太子本生>, <독각선인본생獨角仙人本生>, <범지적화추명인연梵志積花墜命因緣> 등이다.
막고굴 제428굴 중심탑주 북면의 공양인 초상
표현 양식도 다양해졌다. 그림의 구도상 요凹 자 형, 파도 형, 지之 자 형, S자 형 등의 서사구조가 나타난다.
고사화는 사면의 벽 외에도 시옷자 모양의 천장 경사면 등에도 보인다. 공양인의 초상화도 전보다 훨씬 많아졌는데
이는 북주 시대에 여러 사람이 단체로 불사에 참여하는 것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막고굴 제428굴 노사나불
제428굴은 막고굴에서 가장 큰 중심탑주굴이다. 또한 현존하는 막고굴 석굴 중 천불도의 부처가 가장 많은 석굴이기도 하다.
북쪽, 남쪽, 서쪽의 세 벽은 상단에 다섯줄로 1,485명의 부처가 있다. 또한 이 석굴은 막고굴에서 공양인 초상이 가장 많은
굴이기도 하다. 삼면의 벽 하단에 1,198명의 공양인이 그려져 있다. 서쪽 벽면에는 <석가다보이불병좌도>, <열반도>,
<오분법신탑五分法身塔>이 그려져 있고, 남쪽 벽면에는 <노사나법계도盧舍那法界圖>가 있다. 불교의 인연고사, 본생고사
등을 그린 그림은 동쪽의 석굴 문 양쪽에 있고, 남쪽 벽의 측면에는 살타태자본생薩埵太子本生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비어 있는 곳에는 독각선인본생, 범지적화추사인연梵志積花墜死因緣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데, 이들 그림은 막고굴 벽화 중에서
이 소재를 다룬 유일한 그림이다. 북쪽 벽의 측면에는 수달나태자본생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데 막고굴은 물론 중국에서 면적이
가장 큰 본생고사화다. 제428굴은 면적이 넓고 벽화나 불상의 제재가 다양하다. 구도는 엄숙하며 공양인이 아주 많은 것을 볼 때
석굴의 주인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느낄 수 있다. 공양인 초상 중에는 승려, 여승이 절반이 넘는다. 이는 북주 시대 돈황 불교의
번창함을 느낄 수 있는 한편, 당시 출가인의 진짜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인물의 모습은 중원 예술 양식처럼 신체가 가늘고
깨끗한 인상의 얼굴과 서역의 풍만한 모습이 융합되어 흔히 '얼굴형이 짧지만 아름답다는 인물화적 특징을 보인다.
인도의 요철법과 중국화의 훈염법이 나타난다.
이야기 속 인물(불국 인물, 즉 인도인)은 대부분 서역의 화풍을 따랐다. 얼굴 부분에서 채색이 산화된 후 코, 눈, 특 등이
하얗게 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더욱 강렬한 입체감을 준다. 고사화는 중원의 예술 양식을 따라서 불국 인물들을 서역의
기법으로 표현한 것과 비교된다. 동양과 서양의 예술 양식이 점차 융합하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인용: 둔황연구원 · 판진스 편저 / 강초하 易『실크로드 둔황에서 막고굴의 숨은 역사를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