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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윌리엄 켄트리지

 

급진적 메시지를 드로잉에 싣다

 

 

 

 

 

 


 


 

세상을 치유하고자 하는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

 

William Kentridge, b.1955

 


 

 

 

 

195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정치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이어서 예술대학에서 미술을, 연극학교에서 마임을 공부했다.

2010년 2월 샌프란시스코 MoMA와 뉴욕 MoMA 공동 주최로 회고전을 가졌고,

2009년 샌프란시스코 MoMA, 2008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2007년 스톡홀름 근대미술관, 2004년 뉴욕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등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1997년과 2002년, 2012년 카셀 도쿠멘타에 참여했으며, 2007년 부루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 프랑스 아비뇽 연극 축제 등에 그의 오페라 <코(The Nose>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초연됐다.


 

 

영상을 다루는 작가들에게 켄트리지는 그림자 깊은 큰 산이다. 특히 젊은 작가들이 그에게 보내는 연정은 뉴욕에서도 뜨겁다.

켄트리지의 무엇이 그들을 달뜨게 하는지 잘 모른다. 내가 느끼는 반가움과는 다른 빛깔이리라. 나는 걸개그림과 날선 판화가

당당하던 시절을 지나왔기에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업을 처음 접했을 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미술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나왔던 우리의 고통 받는 삶의 이야기는 새천년엔 낡은 틀이 되었다. 그 내용마저 한 시절의 타령으로 외면되었다.

지금도 이어지는 거대 담론인데, 현대미술이라는 각광받는 상품들 속에서 변죽도 울리기 어렵다. 그런데 이 설움을

켄트리지가 씻어주었다. 그의 조국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이어지는 억압을 이야기하며

세상을 감동시켰다. 그는 전통적인 드로잉 기법으로 현대미술을 현대화시켰다. 답은 예술성에 있었다.

 

 

 

 

남아공의 현실에 천착하다

 

윌리엄 켄트리지, 그는 아프리카인이다. 그의 아버지 시드니 켄트리지는 인권변호사이다.

넬슨 만델라를 포함한 대표적 활동가들의 변론을 맡으며 인종분리 정책을 무너뜨리는 데 앞성서왔다.

켄트리지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부조리를 보았다. 그것은 초콜릿이 들어 있으리라 기대하고 열어본 노란 상자

속에 잔혹한 모습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달콤함을 상상하며 입맛 다시던 아이는 총탄에 터져 핏물 고인 사내의 가슴팍을 봐야 했고,

관절이 꺾여 구겨진 젊은 몸뚱이를, 총알이 지나간 구멍으로 피를 쏟는 아낙의 머리를 봐야 했다. 1960년 3월 21일 흑인 거주지

샤프빌에서 벌어진 학살을 담은 사진이었다. 그날 행진에 나선 시민에게 경찰이 총질을 했고 69명이 숨졌다.

사진은 캔트리지의 아버지가 준비하던 재판의 증거품이었다.

 

예술가로 세상에 나온 윌리엄은 늘 그 기억과 고향의 현실을 놓지 않았다. 남아공의 인권, 정치 현안을 주제로 20세기 산업화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 소외까지 동시대의 문제들이 얽힌 핵샘 고리를 흔들어왔다. 필름, 드로잉, 조각, 애니메이션,

그리고 퍼포먼스까지 동원하여 시적인 서술 구조로 풀어냈다. (·····)

 

●  남아공에서는 샤프빌 학살을 기억하고자 3월 21일을 국경일로 정해 인권의 존귀함을 기린다.

 

 

 

 

 

 

「다른 얼굴들」을 위한 드로잉, 종이에 목탄 · 색연필, 2011

Coutesy of the aryist andMoodman Gallery. New York

 

 

「다른 얼굴들」의 배경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그의 전작들에서 자본가로, 개발업자로 등장하던, 켄트리지의 외모를 닮은

주인공 소호 엑스타인이 다시 나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악역의 사내가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여인의 토닥임을 받고,

아이로 변한 어머니를 가슴에 품으며 순하게 잦아든다.

영화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시작한다. (·····)

 

영상을 본 지 2년이 지난 지금 내 귀에는 당시의 모든 소리가 까마귀와 아기, 엄마의 소리로 압축되어있다.

혀로 입천장을 두드리며 내는, 마음을 열게 하는 평화의 소리다. 품 안에 있는 아기를 어를 때, 새에게 모이를 건네며,

또 내 손 내밀고 강아지의 앞발을 기다리며 만드는 혀와 입천장이 부딛히는 퍼커션이다. 그 소리에 생명 있는 모두는 안락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순한, 젖니조차 돋지 않은 갓난아기의 웃음과 닮아 있다. 켄트리지의 필름에서 함성으로 커졌다

잦아들던 소리들은 나는 이렇게 기억한다. 상영시간 9분 36초, 그의 드로잉과 원초적 소리에 싸여 나는 눈물을 훔쳤다.

눈물은 두 번째 상영이 끝날 때까지 마르지 않았다.

 

 

 

 

 

 

 

「다른 얼굴들」을 위한 드로잉, 종이에 목탄 · 색연필, 62×121cm, 2011

Coutesy of the aryist andMoodman Gallery. New York

 

 

보는 이들이 필름을 만들며 지나온 나의 여정에 함께해주었으면 합니다. 이 필름이 진정 무엇인지 그걸 발견해주면 좋겠어요,

이 작업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겁니다. 삶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시간과 그 기억, 생각에 대한 거죠. 언어가 사라진 것에 대한

상징도 볼 수 있고, 분노도 있습니다. 교통사고 후 화난 남자들이 서로에게 소리 지를 때, 당시를 사실적으로 묘사해 그려 넣었습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그런 종류의 언쟁이 아니에요. 자동차 때문에 고함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에워싼 모든 상황에 대해 쌓여 있던

분노와 갈등이 폭팔한 거죠. 새는 요하네스버그 우리 집 마당에 들르는 새입니다. 우리 동네엔그런 새가 참 많아요. 이집트 따오기

입니다. 긴 부리로 벌레를 찾죠. 그렇게 땅에서 나는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관객은 새들이 대지에서 벌레의 소리를 듣는다고

감지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성의 낮선 음성이 나오고, 이는 또한 새소리이기도 하죠. 두 가지 다예요.

또 여성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내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다른 얼굴들」을 위한 드로잉, 종이에 목탄 · 색연필, 165×90cm, 2011

Coutesy of the aryist and Marian Goodman Gallery. New York

 

 

내게는 그 소리가 어머니의 소리처럼 들렸다. 켄트리지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소리 혹은 엄마에게 안겨 있는 아이의 소리'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했다. 그 아이와 있던 여인은 나이 들고 병든 아낙이었다. 그런 쇠약해진 늙은 여인은 어린아이로 서서히

되돌아간다. 마침내 여인은 가기처럼 작아지고, 여인의 아들 같은 중년 남자가 그 아기를 안아든다. 켄트리지는 이 장면이

그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본가의 상징으로, 수탈자의 모습으로 켄트리지의 필름에 20년 넘게 등장해 오던 소호 엑스타인이 아기처럼 작아진 여인을

안고 있는 장면. 내게는 켄트리지의 작가로서의 여정이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한 인간이 갖는 복합적인 여러 얼굴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가 갖는 여러 얼굴들······ 그 속에서 순환을 보는 윌리엄 켄트리지를 본다.

 

 

 

드로잉의 힘으로 세상을 치유하기

 

그는 1989년 첫 16밀리미터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 「요하네스버그, 파리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를 시작으로 일련의 남아공 연작을

발표했다. 1990년 35밀리미터 필름으로 발표한 「망명 중인 필릭스Felix in Exile」는 그가 여섯 살 때 열었던 노란 초콜릿 상자에서 본

그 사진들 이야기를 담았다. 켄트리지는 지그껏 25년 가까이 때론 직접적으로 그가 사는 곳의 이야기를 전했고, 때론 인간 삶의 본질을

건드리며 아프리카의 억압도 엿보이도록 풀어냈다. 그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질문을 해야 했는데, 내 사연을 빼고 질문을 하려니

 쉽지 않았기에 주저리주저리 내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1990년 시작된 나의 스무 살은 걸개그림들이 햇빛을 막아도 다수가 침묵으로 견디던 때였고, 음악대학의 온 창을 덮는 그림 속으로

바람이 뭉쳐 들어 물감 먹은 광목이 풀무질하듯 벽을 쳐도 다 같이 조금은 참던 때였으며, 저항하는 함성을 감싸주는 공동의 의지에

수궁하던 시절이었다고. 그래서 칼 맛이 배어 있는 목판화가 티셔츠에 찍혀 명동 거리 아가씨 배 위에서 강강수월래를 추고, 울산

중앙동 아저씨 등판에서 스패너 쥔 주먹으로 솟구치기도 했다고 주절거렸다. 그런 날들이 흐르고 야전에 있던 집채만 한 걸개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들어가 역사의 한 장면이 된 다음, 그 속에 있던 내용들은 아직도 현실 속에서 시난고난 이어지는데, 현대미술

이라는 범주 속에서 온갖 시도를 부추기는 시장에선 색 바랜 장르로 심지에 박히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고 있다고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의 작업은 정곡으로 달려드는데도 대체 어떻게 해서 시장의 중심까지 차지했느냐고,

주책맞게 눈물까지 찍으며 묻고 말았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는 신호처럼 그의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였다.

곧 말을 꺼낼 테니 기다리라는 언어였다.

 

 

부분적으로 소리에서 왔을 겁니다. 음향도 그런 역할을 하겠지요. 다른 하나는 드로잉입니다.

뿜어져 나오는 드로잉이 힘을 발산하죠. 내가 쓰는 매체의 힘입니다. 드로잉으로 내가 도시에서 보았던 것을 그렸어요.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고, 내가 붙잡은 순간들입니다. 그것을 드로잉으로 옮긴 다음 연속적 이미지로 태어나도록 하는 과정에서

힘이 증폭될 겁니다. 이번 필름을 만들면서 '오직 내가 본 것만을 말하겠다' 라고 다짐했어요. 온갖 세부 묘사들······ 군중의 모습,

자동차 점화 플러그를 들고 말하는 사내, 총, 손, 새들과 경치, 이 모두는 특정한 곳과 연결되는 일종의 고리입니다.

굳이 이 필름을 보기 위해 요하네스버그를 알 필요는 없지만, 사람들이 그걸 감지하기를 바라기는 하죠.

 

 

켄트리지는 미술 작가로서 내게 답을 주었다. 인문학적 · 사회학적 해석으로 말문을 열지 않고 자신의 언어가 된 도구로 설명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며 미술관의 벽은 수많은 기록과 글자 들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해 나갔다. 2010년 휘트니 비엔날레

에 가서도 지치지 않고 작품으로 등장하는 덩치 큰 소파에다 그에 덧붙여진 설명까지 읽어야 했고, 사진과 낙서 옆에는 또 사진과

낙서를 설명하는 말들이 이어지고, 낮장의 일기들 옆에도 부연되는 사고의 전개가 있어, 다 따라가야 작품을 진득하게 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켄트리지는 그런 시류와 무관하게 오래된 도구로 그저 단출하게 프레임 안에 모든 것을 담아 보여준다. 공명을 부르는 힘은 자신이

고른 매체에서 나왔을 거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켄트리지의 말 속에서 나는 거장의 힘을 본다. 자신을 근사하게 부풀리는 설명들을 쳐내고

또 쳐내고 쳐낸 다음 남게 된 단출한 핵심만을 그는 말했다. 그 매체에 다가가기까지 지나왔을 그의 끈질긴 사유와 경험을 상상해보았다.

본질을 담아내는 정제된 표현 수단에 닿기까지의 담금질은 나 따위의 어림잡음으로는 도달하지 못할 곳이겠지 싶었다.

 

 

 

 

 

 

 

「망명 중인 펠릭스」를 위한 드로잉. 종이에 목탄 · 파스텔, 120×150cm, 1994

Coutesy of the aryist and Marian Goodman Gallery. New York

 

 

영화에 등장한 문장이 있다. "모두와 세상을 치유하기Healing to all and Global" 이다. 강렬한 문장이다.

그는 문장을 요하네스버그에서 본 광고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때쯤, 요하네스버그에는 예언자라 자처하는 이들이 꽤 많이 출몰했고,

주로 짐바브웨에서 온 사람들인데 근심을 해결해준다며, 사랑에 빠지는 법, 돈 버는 법, 저주를 멈추게 하는 법 등을 알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벽처럼 광고판을 세운다 했다. 그 중 한 문구가 "모두와 세상을 치유하기"였다.

 

 

 

 

 

 

 

 

그 의미가 뭔지 정확히 와 닿진 않아요. 낮선 문장이죠.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내가 이 문장을 작품 속으로 가져오며 마음속에 품었던 바람이예요.

예, 우리는 세상이 치유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바랄 수는 있는 겁니다.

 

 

켄트리지에게 물었다.

"왜 드로잉을 선택한 거죠?"

"드로잉이 나를 골랐어요. 그래서 내가 그 일을 하는 겁니다."

단숨에 그가 대답했다. (······)

 

 

화면에 드러나는 입자감은 중간중간 그저 거친 목탄선으로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드로잉은 참 소중합니다.

아주 유연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수정하거나 지울 수 있고 아주 빨리 새 드로잉을 만들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손으로 작업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손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 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에게 있어 드로잉은 작업의 시작이자 완성이다. (······)

켄트리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질문을 하면 그의 손이 답을 했다.

 

 

많은 세월 동안 그렇게 지냈더니, 드로잉 활동과 나 사이에 동지애 같은 게 생긴 것 같습니다.

종이와 목탄이 함께하는 우정이죠. 조용하게 이들과함께 때론 앉아서, 때론 일어나서 그림을 그립니다.

한참을 그리고 나면 고요해지죠. 드로잉이 그런 작용을 해요. 드로잉은 여러 작업들을 해냅니다. 그래서 분노가 일거나,

언짢거나, 곤란함, 슬픔 같은 감정이 밀려올 때, 스튜디오에서 두 시간 정도 드로잉을 합니다. 그러면 뭔가 정돈된 상태를 맞게 됩니다.

그때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이 생겨나요. 내 생각에 그래서 드로잉은 단지 예술적인 것뿐 아니라

물리적 활동으로도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는 드로잉이 생각을 지워준다 했다.

 

 

 

 

 

 

 

 

그의 드로잉에서 동양의 묵화墨畵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더니, 뜻밖에도 반가이 톤을 높였다.

 

 

네, 맞아요. 내가 뭘 갖고 있느냐면 으깬 목탄을 담은 항아리입니다. 완전히 가루죠. 붓에 그 가루 목탄을 묻혀 커다랗게

붓질하듯 그려요. 나는 한국이나 일본, 중국의 거대한 붓글씨를 좋아합니다. 팔 전체 아니면 몸 전체를 움직여서 만드는

그 필체의 역동성이요. 그래요. 이는 일종의 동양의 붓질과 연결되어 있지요. 서양화를 그리는 터치보다 말이죠.

 

 

 

한 번이 움직임으로 시간의 자국을 남기는 서예처럼 그의 드로잉도 시간을 가지고 놀이를 하는 느낌이라고 하자,

이번엔 빠른 속도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애니메이션의 장점은 시간이 다른 미디엄medium으로 변화하는 것을 굉장히 잘 감지한다는 겁니다.

거리는 시간이 되고 시간은 거리가 되면서요. 예를들면여기 종이 위에 날아오르는 새를 그려서 필름으로 만들 겁니다.

(······)

 

 

 

 

 

 

 

파이어 워커(Fire Walker)」, 철의 채색, 324×220×204cm

Coutesy of the aryist and Marian Goodman Gallery. New York

 

입체 덩어리지만, 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는 평면적 이미지로 존재하고,

게다가 조각의 첫 출발인 드로잉 작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책상 위에 있던 도록을 펼쳐 보였다.

 

 

여기 한 이미지가 보이지요? 손에 불을 든 여인의 2차원적인 이미지 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느 한 지점에서 보이는 평면적 모습이예요. 당신이 지 조형물 주위를 걸어가며 본다면 매우 다른 오브제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건 내 친구와 공공 조형물로 만든 겁니다. 요하네스버그 시에 있는 대형 조각인데, 그 주위를 감아 돌면 일종의

움직임 같은 것도 느끼게 됩니다. 여인의 형상은 해체되죠. 이것은 '순간nowness을 가져다가 그것을 확장하고 분해하기'라는

아이디어와 같습니다. 이는 뭔가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가 인식하는 과정을 이해하도록 만든 겁니다. 알 만한 한 가지 형태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 작품과 작용하면서 움직이도록 하는 거죠. 덩어리에서 형사을 꺼내가는 관객의 활동이

있습니다. 딱 맞는 지점으로 본인이 다가가는 것, 그림으로써 관객이 그것을 손에 불을 쥔 여인으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작품을 완성하는 관람자의 관람자의 에너지와 가능성입니다.

(·····)

 

 

 

 

「다른 얼굴들」을 위한 드로잉, 뉴욕 매리언 굿맨 갤러리 설치 장면, 2011

Photo: John Berns Courtesy of the artst and Marian Goodman Gallery New York

 

 

그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이는 고백하자면, 내 안에 있던 편견을 드러내는 질문이다.

백인이자 지식인으로 엘리트 가문에서 자란 그에게 뼛속까지 아프리카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을까 하는 나의 삐딱한 의문이다.

(·····)

 

네, 나는 아프리카 사람입니다. 아프리카가 얼마나 넓은 의미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걸 영혼으로 느끼는 거요. 아프리카 사람이라는 범주에는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포함됩니다.

전통적인 아프리카 방식으로 성장했지만, 서양적인 교양을 가지고 재즈를 사랑하고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생활하다 가족과 돌아온 사람도 있고요. 아시아에서 온 사람도 있습니다. 계층이 많고 다양합니다.

모두 함께 아프리카를 만듭니다. 그러한 의식 속에 있는 모두가 아프리카 사람입니다. (·····)

 

한 번 더 캐물었다. 아프리카의 면모가 지닌 핵심적인 요소는 그렇다면 무엇이냐고.

 

하나를 집어 낼 수 없어요. 핵심도 없고 면모도 없어요. 이는 다수에 대한 겁니다.

경험의 다양성. 모든 아프리카는 지난 200년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의 충돌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중동 · 아랍 국가들과

아프리카의 관계 이전에요. 그래서 아프리카인에 대한 정의는 순수, 정통purity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있어서 이는 대륙입니다. 유일 혈통이 없고, 셀 수 없는 차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아프리카인이다. 그리고 세상 모두를 치유하길 바라는 예술가다.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의 저자 안 희 경

 

 

 

 

 

 

 

 

A Wonderful Day - Sweet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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