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 높은 선비 물을 바라보네 高士觀水> 강희안 姜希顔
시냇가 너럭바위에 고사(高士)가 턱을 괴고 엎드려 잔잔히 흐르는 물을 바라 보며 상념에 잠긴 모습.
큼직한 잎이 달린 넝쿨이 바람에 살랑대는 가운데 그림 속 선비는 바위와 하나가 되어 한 점 속기마저 털어낸
그야말로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지경이다. 그림 속 인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작가 자신일 터.
강희안은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에 설명을 덧붙이고 <용비어천가>를 해설한 집현전 학자였다.
자신의 심상(心想)을 큼직한 붓 터치로 담아낸 명작 중의 명작이라는 생각이다.
<고사관폭 高士觀瀑> 이경윤 李慶胤
물보라가 흩어지는 가운데 두 줄기 폭포가 쏟는 장관을 지그시 감상하는 선비의 모습.
산 속 장대한 폭포는 두려움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너무도 편한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려올 터임이 분명한데도 선비의 표정은 한없이 느긋하기만 한데, 옆자리의 동자는 무섭다는 듯
선비의 팔을 붙잡고 뒤돌아 선 모습이다. 사실 이경윤은 왕족 출신으로, 성종 임금이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그의 생애에 임란과 정유재란을 겪었음을 상기한다면 위 그림 내용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리라.
<내와 산에 초목이 우거지다 계산포무 溪山苞茂> 고람 전기(田琦), 1849년 作
그야말로 한 붓으로 순식간에 그리고 써 내려간 속도감이 한 눈에 읽혀지는 속 시원한 그림이다.
갈대만 서걱대는 빈약하고 스산한 풍경이지만 자못 담대함이 느껴지는 건,
속기를 털어 낸 작가의 의중이 감상자의 눈에 들어 오자마자 곧바로 해석되기 때문이리라.
관지(款識)에는 분명 "시내와 산에 초목이 우거진 그림" 이라고 써 있지만 실제론 마치 한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몸이 불편한 가운데 그렸다는 이 그림에 나 자신은 물론이고 많은 이들이 흠뻑 빠져드는 이유인 즉,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먹선 몇 개만을 동원하여 무섭도록 칼칼한 선비 정신을 담박에 전달하는 능력 때문이리라.
글씨와 그림이 결코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명작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다.
<매화 가득한 서재 梅花書屋> 우봉 조희룡 趙熙龍
매화나무 가지를 쳐낸 솜씨에서 마치 날카로운 칼의 휘두름이 연상된다.온 산에 매화가 흐드러진 모습에서 자못 흥겨운 리듬감이 느껴질 만큼 흥겨움도 가득하다.한쪽에 제발이 있지만 너무 작아 아래의 부채 글씨(행서)를 보며 조희룡의 서체를 살펴보자.
<행서> 조희룡, 부채 글씨
굉장한 속소감이 느껴진다. 위 <매화서옥>에 나오는 매화나무 가지와 영락없이 닮았음을 본다.그림과 글씨가 다르지 않다는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의 이론이 확실하게 적용된 예라는 생각이다.우봉의 작품에서 진정한 서 · 화 일치를 확인하게 된다.
<지상편도 池上篇圖> 표암 강세황 姜世晃, 1748년
커다란 괴석에 마당에 학 두 마리가 노니는 모습에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 등은 아주 부유한 양반가를 보는 듯.시동과 학이 노니는 마당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루 위의 노인, 그 옆으로 술 항아리에와 여러권의 책과 거문고에 이르기까지, 더군다나 집 뒷편 숲속의 풍경은 마치 꿈속에 나오는 이상향을 보는 듯 하다.
● 유경종의 글 ● <지상편도> 제목 ● 유경종의 글
● <지상편에 관한 강세황의 시와 글 ● 강세황의 그림
물 있으니 한 연못이요, 대나무 있으니 천 그루이네. ······집 있고 정자 있으며, 다리 있고 배 있네. 책 있고 술 있으며, 노래 있고 거문고 있네.늘은이 그 속에 있으니, 흰 턱수염 바람에 나부끼네. ······신령스러운 학과 괴이한 돌, 보랏빛 마름과 하얀 연꽃이라. 이 모두가 내가 좋아하는 것, 내 앞에 모두 있네.······편안하고 한가로운지고, 내 장차 이 속에서 늙어 가리.
당나라 풍류 시인 백거이(772~846)의 <지상편池上篇>에 나오는 풍경이 그림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강세황도 백거이 같은 삶을 지향하였음이 분명하다고 해야겠다. 이 그림을 본 당시의 선비들도 그림 속의 필치가 뛰어남을 칭찬하고 있다.유경종은 '지상편도'라는 제목 글씨 왼쪽과 오른쪽에 "이 그림의 배치가 특별히 좋고 붓의 기세가 뛰어나서 백거이 그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 라는 글(제발)을 써 놓았다. 이는 백거이 시의 내용을 잘 표현했다는 것이고, 붓의 기세가 훌륭하다는 것은 백거이의 삶을 그림으로 잘 그렸다는 뜻일게다.
<예찬의 그림 뜻을 본받다 방운림필의 倣雲林筆意> 심사정 沈師正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고즈넉한 늦가을의 강촌이 떠올려 진다.응당 있을 법한 배나 인적이 끊긴지 오래된 듯한 쓸쓸함은 붓에 스며든 먹물을 쭉 빼고 붓 끝으로 종이를 쓸듯이 그려 까칠한 맛이 느껴진다. 옛 선비들이 자주 사용한 고필담묵枯筆淡墨이라는 필묵법이다.운림(雲林)은 예찬(1301~1374)의 호로 몽골족이 중국을 지배한 시절인 원나라 때 활동한 화가로써 먹을 함부로 쓰지 않고 먹을 금처럼 아낀다(石墨如金) 고 하여 선비 그림의 중요한 방법으로 삼았던 바예찬은 동기창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 화가로 고아한 성품을 지녔다는데 아래의 <용슬재>를 보면 그의 성품을 단박에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용슬재 容膝齋> 예찬, 1372년,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예찬은 긴 문장의 글을 쓰고 관지를 붙이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영향 때문인지 이후 선비들의 그림에서
시 · 서 · 화를 동일하게 보는 특징이 점점 강해져 명나라 때와 조선 시대 중반 관지(款識)와 제발(題跋)이
그림의 한 부분으로 정착되어 널리 유행되게 된다.
<황공망을 본받아 그린 산수 방황공망산수 放黃公望山水> 신명연 申命衍
예찬과 동 시대의 인물 황공망은 도교에 심취, 부춘산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낸 인물.조선의 화가들도 그들의 그림을 본 받고자 방고(倣古)에 나서게 되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림의 모사에 그치는 게 아니고,그들의 기상과 뜻을 배운다는 데 방점을 찍는다. 올을 풀어 놓은 삼 껍질 같다는 피마준법(披麻皴法)이 적용된 그림의 전형이다.
<부춘산거 富春山居> 부분 황공망, 1350년,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황공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너무나도 널리 알려진 그림이다.
<옥순봉 玉荀峯> 윤제홍 尹濟弘, 1833년, 호암미술관
왼편의 폭포에서 일어난 물안개가 강을 따라 그림 전체를 맴도는 모습으로 촉촉함이 전해져 온다.그런데 그림이 웬지 어색하고 뭉개져 보인다. 이유는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 이기 때문.심지어는 글씨까지도 손가락이 동원된 지두서(指頭書)라는 사실. 마치 손가락이 동원되었음을 암시라도 하듯,바위 모습 등에서 손가락이 연상되고 있다. 묽은 먹물을 사용하여 그림 전체의 느낌이 무르다는 인상을 받는다.이 그림은 앞 시대의 선비 이인상李麟祥의 <옥순봉>을 방작(倣作) 이라는데, 정자에 좌정한 선비의 모습에서탈속의 무아지경이 자연스레 떠올려 진다. 그림 속 관지(款識)의 내용인 즉,
나는 옥숙봉에서 노닐 때마다 절벽 아래에 초가집이 없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최근에 능호관 이인상의 화첩을 구해서 따라 그릴 수 있었는데, 바로 이 그림이니,이제야 홀연히 내 아쉬움을 씼게 되었노라.
<푸른 기운이 감도는 누각 > 이인상 李麟祥, 개인 소장
일전, 모 인사가 이인상을 평하길, "추사가 잘 차려진 산해진미라면 능호관은 기름기 없는 채소다" 라고 평했다 들었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다.
<완당 선생님의 뜻을 본받은 산수 방완당산수 倣阮堂山水> 허련許鍊, 소장처 미상
본디 허소치의 학문과 예술세계의 본향은 해남윤씨家의 녹우당(綠雨堂)일 터.다성(茶聖)으로 추앙되는 초의(草衣) 선사 문하를 거쳐 김정희의 애제자로 성장 수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된다.<소슬한 초목 속의 띠집> 등에서 볼 수 있는 푸석한 붓으로 그려낸 추사의 문기를 따르고 있음을 본다.
<소슬한 초목 속의 띠집> 김정희 金正喜
<비 그친 뒤의 인왕산 仁王齊色> 정선 鄭敾, 국보 제216호
청와대 서쪽에 보이는 인왕산으로 온통 화강암 덩어리 인지라 무척 당당한 느낌을 주는데겸재는 이를 짙은 먹을 듬뿍 적용하여 강렬함을 잘 살려내고 있다. 검은색 바위 느낌은 비에 흠뻑 젖었음을 나타낸다.삼각산과 변산반도 일대를 비롯, 전국 각지의 화강암에 걸리는 폭포 감상을 위해 비가 내렸다 하면 달려나가는관폭(觀瀑) 감상자 들이 나라 안에 몇 있음을 알고 있는데, 이는 실경 감상의 최고수 들로 보면 틀림없을 터. <인왕재색도> 앞에서면 모든이의 입이 떡 벌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그림의 무게감은 충분히 증명된다.국보 제216호로 지정된 사실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仁王山
<시와 그림을 함께 보네 詩畵相看> 정선 鄭敾
인왕산 자락에는 정선과 단짝이었던 이병연이 살고 있었다. 당시 세간에는 " 畵는 겸재(謙齋)요, 詩 하면 사천(槎川)" 이다. 라고 회자 되던 터였다.이 두 사람은 대학자 김창흡(1653-1722)의 제자로 나무 아래 두 사람이 너무나 정겨운 모습이다.
<양화진의 눈길을 걸으며 楊花踏雪> 정선,
양화나루의 겨울풍경은 예로부터 서울 십경 중 하나였다. 인왕산의 웅혼한 기운을 안개로 표현했다면, 양화진의 겨울 풍경은 서정성이 듬뿍 배어 있다.
<구룡폭포 九龍淵> 이인상 李麟祥, 1752년
실눈으로 한참을 들여다 보다 보면 그때서야 바위가 드러나고 폭포의 물줄기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온통 각이 진 바위를 몇 개의 선만으로 그려낸 그야말로 뼈만 발라낸 그림으로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림으로사실적 구룡폭포가 아닌 아련한 기억속의 기억을 끄집어 낸 세월의 흔적이 담긴 그림이다.
<구룡폭포 九龍淵> 김홍도 金弘道, 개인 소장
풍속화가로 유명한 김홍도의 그림은 보면 담박에 구룡연(九龍淵)임을 알 수 있겠다. 위 이인상의 九龍淵과는 상이한 의태(意態)가 읽혀진다는 사실. 이인상의 <구룡연> 관지 내용이다.
정사(1737)년 가을에 나는 임안세 어른을 모시고 구룡폭포를 구경했습니다.15년이 지나 이 그림을 조심스레 드립니다. 그런데 몽당붓에 먹을 붇혀 뼈대를 그렸으나 살집은 그리지 않고, 또 색을 칠하지 않은 것은 감히 거만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한 것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인상의 <구룡연>은 기나긴 세월을 그리려 했으며, 자신의 청빈함 속에서 터득한 바를 담아낸이를테면, 심안(心眼)으로 그려낸 내용이라고 보면 틀림 없을 터이다.
<강촌의 첫 눈 江村初雪> 신위 申緯
다소 단조로워 보이지만 계절과 바람 · 눈 · 햇빛 등이 표현되어 있다. 간단한 붓질을 통해 무채색의 겨울 풍경을 그려낸 것. 그림 상단의 제시(題詩)를 보자.
햇살이 얼음에 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누각 그림자와 검푸른 산 빛이 희미하게 어울리는 구나. ·····바스락 소리 나는 곳에 겨울 갈대가 흔들리네.
자하 신위는 썰렁한 겨울 강촌을 어떤 심정을로 그려냈을까?그의 속마음은 이어지는 시구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꿈이 돌아오고 술이 깬 저녁, 인적은 고요하고 화로에는 아직 향기가 서려 있네.한 점 한점 비스듬히 찍어 섞으며 벼루를 녹인다.
<나무와 돌> 이윤영 李胤永, 개인 소장
친구인 김무택이 나무처럼 푸르고 바위처럼 굳건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친구들은 훗날(1754년) 모임을 갖고 예전의 그림을 다시 보면서 먼저 떠난 오찬을 그리워 한다.그 중 이인상은 그를 볼 수 없음과 마지막 만남 자지에 가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글로 적었다.선비에게 있어 벗이란 단지 동료 정도의 의미가 아닌, 감정과 이상, 그리고 사상까지를 함께 나눈 정신적 동반자이다.
<차디찬 세월을 그렸네 세한도 歲寒圖> 김정희, 국보 제180호 개인 소장
문인화의 정점으로 평가되는 <세한도>에 붙여진 제발과 개인 의견 피력은 가히 산더미를 이룬다.
그림 도입부에 적은 단정하면서도 엄숙한 필치의 내용인 즉,
"차디찬 세월을 그렸네. 우선(藕船)이 감상해 보게나. 완당(阮堂)"
서화불이(書畵佛二)의 전형과 의미를 우리 앞에 핍진하게 물증으로 제시한 완당 김정희.
위리안치(圍籬安置) 된 자신의 신세를 차디찬 세월에 비유하여 그려낸 명작 <세한도>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세한도> 해서(楷書) 발문(跋文)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라고 하였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 것이어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이나,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푸르네. ······
지금 자네와 나의 관계는 이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이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네.
······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 노인이 쓰다. (원문은 발문의 색깔 띠 부분)
추사의 <세한도>에 이상적은 이렇게 답장을 한다.
"그림을 엎드려 공손히 받자오니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해 주셨는지요. 너무나 감사하옵니다."
<세한삼우歲寒三友) 작가 미상, 일본 묘만지
반증위의 글 김정희
이상적은 위 세한도를 북경에 사신으로 갈 때 가지고 가서 열 여섯 명의 중국 선비들에게 보여 준다.그들은 연이어 감탄과 존경의 염을 담아 글을 쓴다. 그 중 반증위의 글을 보자.
추사 김정희는 해외의 영준英俊한 선비로 일찍부터 높은 이름 들었네.그 드높은 이름에는 항상 비방이 따르니, 세속의 그물에 걸리기 일쑤일세.거침없는 세태의 흐름 속에서 어느 누가 선비의 맑음을 알리오. ······
<동자가 나귀를 끄네 童子牽驢> 김시金視
소나무 뒤편 가지만 남은 나무와 나귀 뒤쪽 주황색으로 물든 나뭇잎으로 미루어 그림 속 풍경은 깊은 가을인 듯.개울을 건너기 싫어하는 나귀를 동자가 애써 끌어 당기는 모습으로 마치 사진을 그려 놓은 듯 실감나게 그렸다.작가 김시는 조선초의 권세가 김안로(1481-1537)의 아들로 부러울 것 없이 자랐으나 커다란 시련이 닥친다.1537년, 그것도 그의 혼인날, 아버지 김안로가 문정황후의 폐위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의금부로 잡혀 갔던 것.이후 일찌감치 출세를 포기한 그의 일생이 서예와 그림에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나귀를 타고 가다> 함윤덕 咸允德
김시는 위 함윤덕의 그림처럼 결국 개울을 건너 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을 터이다.그림 속 나귀는 힘에 겨운 듯 다리를 후들대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나귀가 그토록 개울을 건너기 싫어했던이유를 알 것도 같다. 동자와 나귀가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단순 묘사한 게 아님을 알게 된다는 뜻.
<소牛> 김시, 일본 개인 소장
김시는 소 그림으로도 유명했다. 소처럼 한가롭고 여유롭게 은거하고자 했던 마음의 표출이라고 본다.그림 속 소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김시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설죽한매 雪竹寒梅> 김수철 金秀哲, 개인 소장
해 저물녘 집 주위와 산들 사이로 밤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언뜻 땅과 하늘을 분간키 어려운 상황. 안개는 꿈꾸는 분위기를 연상시켜 한층 분위기를 돋운다.집 곁으로 매화를 감상하는 듯한 인물이 있는데 아마도 집 쥔장이리라. 매향에 빠진이는 본디 세상 시름 따윈 먼 나라 얘기.매화 하면 서호에 둥지를 틀었던 매처학자(梅妻鶴子) 임포를 떠올리게 하는 건 당연한 수순.작가 김수철은 여항문인으로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같은 중인 출신들과 어울렸다는데 그의 생애는 거의 베일 속 수준이다.
<도원에서 나루를 묻다>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그림 아래쪽 돌문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이는 무릉도원의 입구를 나타낸 것임이 분명하다.동굴을 나서면 이른바 별천지가 펼쳐져 있어야 하거늘, 고작 몇 두락의 농지가 보일 뿐이고 그 가운데 초가 오두막이 있다.미루어 짐작컨데, 담헌은 도화 만발한 무릉도원을 사양하고 마음 속 자신의 본향을 담담하게 그려낸 것이리라.
● 인용서적 : 김현권 著 『시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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