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화, 그 역동적인 상징의 세계
절대 권력의 상징
'동쪽'의 꽃인 국화는 땅 위에서 빛을 뿌리는 태양이다. 활짝 피 꽃잎이 눈부신 햇살을 닮을 때 국화는 유럽의 동쪽 끝 그리스에서는 황금의 꽃
'(chryso+anthemon)' 이 되었고, 품격에 따라 꽃을 분류한 유럽인게게는 '불멸의 꽃(immortelle)' 이 되었다. 우리의 '국화[菊]' 는 현장법사가
지칭한 동방(중국)에서부터 한반도를 거쳐 해동의 '해돋이' 방향을 따라 일본열도로 이동했고 천황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중국의 다른 문물과
함께 문자는 그대로 고스란히 옮겨 가지만 자음(字音)은 국경을 넘을 때마다 조금씩 바뀐다. 한반도에서는 국(guk)으로,
일본에 가면 기쿠(giku)가 되는 것이다.
《중국상징사전》을 편찬한 볼프람 에버하르트(Wolfram Eberhard)는 국의 원(原)자음을 '주=ju' 로 상정한다.
피자식물(被子植物) 분포 영역의 10분의 1을 차지할 만큼 환경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국화는 '불멸의 해'를 매개로 해서 한 · 중 · 일 3국을 한데
묶는 문학, 종교, 정치적 수사학의 키워드의 하나로, 성장하는 의미의 영토를 넓혀 나간 것이다. 태양과 국화를 접목시킨 상징사고의 전형적인
전개를 우리는 일본의 신화와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로부터 통치권의 상징인 3종의 신기를 받은
그의 손자 니니기(는 미야자키 현과 가고시마 현 사이에 있는 기리시마 산 다카치호 봉우리에 처음 내려왔다고 한다. 농경의 신 니니기를 비롯해
천황계 원조신을 모시는 기리시마 신궁이 근처에 있다. 지금도 건국신화가 살아 숨쉬는 듯 울창한 숲속에 있는 신궁에는 건강장수, 사업번창, 합
격을 빌러 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이 이곳에서 사 가는 말 그림 '우마에' 를 보았는데, 이 부적에는 말이 없었다. 태양신을 즐겁게 할 제물인 말 대신 저마다 마음속에 그린 말을 소망과 함께 바치는 100퍼센트 상징에 의존하는 거래였다.
태양신은 그 지방을 선점한 주민이 그럴싸한 신들을 먼저 단골로 삼아 버렸기 때문에 한발 늦은 '정복자'가 발견한 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600년 신라와의 관계 조정을 위해서 수(隋) 나라에 파견된 일본 사신은 이런 말을 했다. "왜왕은 하늘이 형님이며 해가 동생입니다.
먼동이 트기 전에 나가서 정사를 보고 가부좌를 합니다. 그리고 해가 뜨면 일을 멈추고 동생에게 맡깁니다." 왜국의 풍습을 묻다가 그런 대답을
듣게 된 문제(文帝)는 놀라 "이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인고?" 라고 한 마디 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수나라 문제의 발언은 《수서(隋書)》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 《일본서기》의 편자가 사신을 보낸 사실을 고의로 누락했다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하늘이 태양을 통치자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국내 정치용 수사(修辭)가 국제무대에서 통하지 않게 된 일본 외교사상 최초의
좌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군주들의 태양에 대한 집착은 그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족의 태양 김일(日)성, 정일(日) 부자를 비롯해서
면면히 내려오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다.
국일한묘(菊日閑猫) | 정선, 간송미술관
국화를 고양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다룬 이 그림은 정선의 대표적인 국화 그림이다. 자색 들국화 꽃잎으로
벌 한 마리가 날아들고 검은 빛 고양이가 방아깨비를 노려보고 있으며, 나른한 한낮의 정취가 정겹게 묘사돼 있다.
도연명의 3가지 동작이 상징하는 참뜻
왜왕이 태양의 형님이라는 증언이 나오기 200년 전이다. 일본의 별명이 된 부상(扶桑)의 해를 닮은 「국화를 동쪽 울타리 밑에서 따노라」
하고 읊은 중국 시인이 있다. 시 <음주(飮酒)>를 쓴 도연명(陶淵明)이다. 얼핏 들으면 평범한 사람의 소박한 일상생활을 말한 것 같은 수백
년 동안 한 · 중 · 일 3국에서 함께 가르치고 읽어 온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한 이유 하나를 들자면 신화시대에나 있음직한 말투를 그대로
옮긴 7세기 초 일본인의 생각이 사물의 판별 기능을 벗어난 데 반해서 시인 도연명의 눈은 자신의 천부적인 시력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화를 따는 이 시인의 작은 손놀림에 이어 귀에 익은, 「우연히 고개 들어 남산을 바라본다」 는 지극히 절제된 표현이 천년의 시공을
넘어 3국의 독자들 사이에 큰 공감대를 형성했다.
국화는 은일(隱逸)의 꽃이라고 도연명이 상징의 1차적 의미를 정의한 다음부터 대륙의 전통주의자들은 도연명의 시와 사상을 은일이라는
메타포(metaphor, 은유) 하나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술을 빚으려고 국화를 꺾어 (바구니에) 담고 눈길을 먼 산으로 옮기는 미세한
몸짓, 시선, 하나하나가 예사로우면서 심상치가 않다. 산 기운을 먹음은 저녁 풍경을 헤치고 둥지로 날아 들어오는 한 쌍의 산새, 그들이 가담
해도 시행에 표출된 움직임은 3가지를 넘지 않는다. 시인은 명암의 균형이 흔들리는 낮과 밤의 한가운데 참뜻이 숨어 있었지만 입을 열기 전에
잊었노라고 한다. 그것이 끝이다. 시인이 말하려던 참뜻[眞]은 이제 도연명이 서 있던 그 자리에 돌아가서 옛날 그대로의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알 길은 없다. 본인도 잊었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심경(Private symbol)의 논리적 추적이 불가능한 자리에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단서는
상황이 남긴 흔적일 뿐이다. 시 속에 남아 있는 손, 눈, 날아드는 새의 상징성을 복원해 보는 것이다. 국자동(菊慈童) 전설대로 옛 사람들은 국화
가 흐르는 물을 마시면 신선이 된다고 믿었는데, 국화를 따는 시인의 손길은 신선이 부럽지 않은 여유로운 농부의 이미지다.
날아드는 한 쌍의 새는 평화로운 가정을 수놓은 그림이겠다.
이 모든 것을 관조하며 서 있던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눈을 땅으로 내리깔고 살아야만 탈이 없던 난세에 도연명은 도시에서 내려오는 나이 어린 상관 앞에 머리를 굽히기가 싫어 낙향을 결심한
군인이었다. 문제(文帝)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일본 사신은 고개를 들고 자기 나라 왕의 얼굴을 볼 기회마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제왕이나 저들이
모시는 신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 앞에서 허락 없이 고개를 든다는 것은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모험이었다. 코란은 여성의 성기 앞에서도 경건히
눈을 내리도록 지시한다. 그런 관습이 도처에 남아 있던 고대사회에서 고개를 들고 눈을 바로 세우는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은 군벌사회의 왜곡된
질서의식, 뒤틀린 인간관계를 일시에 뒤바꿔 놓을 용기와 고독을 각오한 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국화꽃이 진다고 해도
다시 필 수 있다는 생명에 대한 믿음이다. 중앙절의 약속을 기억이나 하듯이 국화꽃은 핀다. 지상 최대의 양기를 상징하는 9[쥬]효가 겹친 위천
(爲天)의 중양절, 9월 9일은 자연의 섭리를 지하에서 지키는 국화 뿌리가 살아 있는 한 다시 돌아온다. 쥬[久]=긴 시간을 기다리면 저절로 돌아
왔었다. 소나무와 함께 국화를 사랑한 도연명에게는 "불교적 무상감(無常感)이 드리운 어둠이 없다." 고 중국 고대문학을 연구하는
전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