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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국화 2

 

1. 종교 · 사상으로 본 국화

 

하나 |한국

 

유불선의 경계가 따로 없는 국화

 


 

 

 

 

 

 

 

국화도(菊花圖)정조대왕, 조선,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744호.

조선시대 후기 문인화의 한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상·중·하 세 방향으로 나 있는 들국화의 모습이 생기발랄하면서도 청초하다.

 

 

지조와 절개의 이미지

 

중국의 대표적인 은일군자인 도연명(陶淵明, 365~427) 의 문확고 일화가 한국에도 전해져

국화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의 시조, 가사, 한시 등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국화는 유교적 덕목 혹은

그것을 구현한 인물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그중 고려 말 충신 이곡(李穀)은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국화를 보았다.

 

(전략)

나 혼자 이 고운 꽃을 사랑하나니 / 늦은 계절에 나와 뜻을 같이 하네

바람 따라 향기를 맡으려 해도 / 세속의 구린내 묻어 올까 두려워

차라리 좋은 술에 꽃잎을 띄워 마시고 / 언근히 취한 채로 저녁을 맞이하려네.

 

이곡은 고려 말 혼란기에 원나라에 들어가 처녀 징발을 중지하도록 요청하기도 했던 기개 높은 조정 중신이다.

나라가 기울면서 명리를 쫓아 헤매는 구린나 나는 인간세태를 개탄했다. 그가 의탁할 곳은 뭇 꽃과 아름다움을

다투지 않는 의연한 국화의 지조밖에 없음을 깨닫고 한탄했던 것이다.

가령 조선의 문인 이정보(李鼎輔, 1693~1766)가 국화를 노래한 것에서도 그러한 이미지는 계속 이어진다.

 

국화(菊花)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연대 미상의 조선시대 가사인 <사시풍경가(四時風景歌)>이다.

 

금풍(金風)이 소소(瀟瀟)하여 국화가 난개(爛開)하니 

은일처사(隱逸處士) 높은 절개 개연(慨然)히 보았어라.

 

쓸쓸한 가을 바람 속에 활짝 핀 국화의 모습에서 벼슬을 멀리하고 혼자 지조를 지키며 살아가는

은일처사를 연상하고 있다.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2)이 임금에게 지어 바친 <어사황국가(御賜黃菊歌)>를 보자면.

 

풍상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운 황국화를 /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挑李)야 꽃이온 양 말아 임의 뜻을 알괘라.

 

조선시대 삼사(三司)의 하나인 홍문관(弘文館)은 곧 옥당(玉堂)이다.

조선 13대 왕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이 어원의 황국 한 분을 옥당에 내려 주고

가사를 지어 바치라 하니 그에 답한 응제가(應製歌)였다.

작자 송순은 국화와 복숭아꽃과 오얏꽃을 대입해 당시 세력가들에게 임금님의

총애를 과시하지 말라는 비수같은 필봉을 휘두른 것이다.

봄에 잠시 화려한 자태를 뽐내다 이내 시들어 버리는 복사꽃과 오얏꽃의 속성을 소인 간신배에 비유했던 것이다.

임금이 옥당의 성실한 신하들을 믿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된 감정을 감추지 않은 솔직한 작품이다.

 

 

 

 

 

 

묵국도(墨菊圖) | 윤양근(尹養根),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잎이 다 떨어진 추운 늦가을,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활짝 핀 국화의 모습에서

의연한 선비의 모습이 연상된다.

 

 

 

깨달음의 경지와 영원성

 

고려와 조선의 승려들은 국화를 예로 들어 불교의 유명한 진리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언명을 해설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서선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재송국(載松菊)>이라는 시를 읊었다.

 

지난해 처음 뜰 앞에 국화를 심고 / 금년에 또 난간 밖에 소나무를 심었네.

산속의 중이 화초를 사랑해 이들을 심은 것이 아니라 / 사람들로 하여금 색이 곧 공임을 알게 하고자 함이네.

 

아름다운 국화나 푸르디 푸른 소나무는 세상 사람들이 절개나 지조 등의 고상한 가치를 부여하는 식물들이다.

그러나 도승의 눈에는 이들 역시 언젠가는 스러질 허망한 현상 중의 하나지 궁극적 본질은 아니다.

고려의 명승 혜심(惠諶, 1178~1234)은 "9월 9일에 국화가 새로 핀 것은 지절의 인연이 눈앞에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마찬가지로 혜심에게 있어 국화는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다. 궁극적 본질은 현상의 이면에 따로 있다.

불승들의 국화에 대한 인식은 유교에서 국화를 군자나 충신의 화신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불법의 세계에서는 이들 이상적 인물이 달성한 명예조차도 찰나적이며 허망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의 심상에 비치는 국화는 오직 오랜 시간을 인고하며 추구하는 피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부처의 세계였을지 모른다.

 

국화를 복용하면 불로장생의 존재 곧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마 중국으로부터 들어왔을 것이다.

이에 따라 고려시대부터 국화주를 담가 먹는 관습이 생겼다.

이밖에도 국화전(菊花煎)을 부쳐 먹거나 국화를 배갯속에 넣어 베는 민속 모두

국화가 불로장생을 가능케 한다는 도교적 사고에 근거를 두고 있다.

 

 

 

 


 

 

| 중국

 

유교의 덕목과 도교와의 만남

 

 

 

 

 

왜병의국도 | 변수민. 청, 난징 박물원 소장그림 중앙에 담묵으로 화병과 국화를 그렸으며 농묵으로 잎을 그렸다. 참신한 구도 속에 고졸하고 순박한 모습의 국화를 그려 탈속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


은자 · 지사 · 의사로서의 유교적인 덕목
동진(東晋)의 전원시인 도연명은 일찍이 고향에 돌아와서 「오솔길 모두 황폐해졌는데 소나무와 국화만이 여전하네(三徑就荒 松菊猶存) 」라고<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읊었다. 그는 국화의 의연한 자태에 주목했고 그 옆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즐길 정도로 국화를 각별히 사랑했다.이에 대해서는 《송서(宋書)》<도잠전(陶潛傳)>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언젠가 9월 9일 날 술이 떨어졌는데 도연명은 집 근처 국화꽃 무더기 속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때마침 태수가 술을 보내오자 그 자리에서 마시고 취한 후에야 귀가하였다.
북송(北宋)의 유학자 주돈이는 도연명의 이러한 일화에 바탕하여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으니,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다.」라고 그의 저서 <애련설>을 통해서 말했다. 남송의 문인 범성대 역시 《범천국보(范村菊譜》에서 국화를 「숨어 사는 선비의 지조.」로 빗댐으로써 국화는 지조를 지키며 고고하게 사는 선비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귀거래사도(歸去來辭圖) | 이재(李在), 명(明), 랴오닝성 박물관 소장.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주제로

마식(馬軾), 이재, 하지(夏芷) 세 화가가 그렸다. 이 작품은 9폭의 그림 중 이재가 그린 네 번째 그림이다.

그림 속 도연명은 먼 산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교의 영생사상과 국화
도연명은 은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국화를 사랑했고, 이로 인해 국화는 고고한 선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도연명의 은거생활은 벼슬과 같은 세속적인 명리를 멀리하고 청빈하게 사는 선비의 전형적인 삶이 되기도 했지만 나아가 대자연에 순응하며 물외(物外)의 세계를 꿈꾸는 도인의 삶이기도 하다. 그의 <독산해경시(讀山海經詩)>에서 알 수 있듯 도연명은 평소 《산해경》과 《목천자전(穆天子傳)》과 같은 신화서를 탐독하며 이상 세계를 동경했다. 이러한 동경은 결국 문학적으로 표출되어 그의 산문인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수준 높은 작품으로 탄생된다.국화의 시인 도연명에게 있어서 국화는 바로 이러한 도교적 진리를 표현하는 중요한 상관물로 작용한다. <음주(飮酒)>가 그것이다.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꽃을 꺾어들고 / 물끄러미 남녘 산을 바라보네// 이 가운데에 참뜻이 있으니 / 말하고자 하나

이미 할 말을 잊었다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여기에서 국화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말하는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는 도교적 진리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객관적 상관물과 같은 기능을 한다. 국화는 철학적 의미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로장생을 위한 약재로서의 효능도 지닌 것으로 믿어졌다. 결국 국화는 도교에서 추구하는 불사약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 일본
화태에서 찾은 수명장수의 염원


백국유수수금도(白菊流水水禽圖) 부분 | 이토 자쿠츄, 궁내청 소장

「보랏빛 서운(瑞雲) 그 속에 섞여 있는 저 국화꽃은 맑디맑은 성대(聖代)의 별인 듯 보이도다.」

 

 

생과 사를 꿰뚫는 이미지의 국화

 

오늘날 장례식의 헌화로 국화가 쓰이는 것은 우리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다. 국화는 장의차를 빼곡히 덮기도 하고, 관 속의

시신 옆에 채워 넣어지기도 한다. 출상(出喪) 을 하기 위해 관을 집 밖으로 내가는 출관(出棺) 행사를 하기 직전,

고인과 가까운 사람들이 국화 한 송이씩 손에 들고 시신의 옆을 빈틈없이 채워 넣는 것이다.

더럽고 속된 때로 찌든 이승에서의 삶을 국화로 씻고, 깨끗하고 성스러운 구원의 세계로 고인을 보낸다는 의미가 담긴 의식이다.

국화는 장수나 영원불멸의 이미지를 띠는 삶의 꽃임과 동시에 죽음까지도 감싸안는 꽃이기도 한 것이다.

즉, 생(生)의 심벌(symbol) 과 사(死)후 생애의 이미지도 아울러 안고 있는 꽃이다.

일본인들의 전통 운문인 와카(和歌)에서 국화는 종종 '늙음(老)' 을 자각 시키는 꽃으로 읊어졌다.

 

가을이 깊어 바자울에 시드는 국화꽃 보니 / 꽃만의 신세라고 여겨지지 않는구나

-《모토스케슈》 135 노래

 

가을이 깊어감과 더불어 집의 울타리에서 시들어 가는 국화꽃의 모습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노쇠해 가는 작자의 신세와도 겹쳐져 보인다는 뜻의 노래다

. 시들어 가는 국화는 '잔국(殘菊)'이라 하여, 많은 옛 일본인들이 상찬해 마지 않았다. 일본 고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겐지모노가타리》에도 주인공 겐지를 칭송하는 와카에 이 변색한 국화가 등장한다.

 

보랏빛 서운(瑞雲) 그 속에 섞여 있는 저 국화꽃은 / 맑디맑은 성대(聖代)의 별인 듯 보이도다.

 

여기서 '성대(聖代)' 란 말은, 주인공 겐지가 천황과 동급의 지위에 오른 것과 결부지어 칭송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 성대(聖代)의 별인 양 보인다는 국화가 보랏빛 구름 속에 섞여 있다는 것은, 변색되어

연보랏빛을 띠게 된 잔국을 가리켜 그리 표현한 것이다.

이 잔국은 천황급의 지위에 올라 영화의 극치를 누리는 주인공 겐지의 상징이다.

이쯤 되면 가히 최상급의 찬사라 할 만하며, 잔국을 향한 헤이안 사람들의 몰입도(沒入度)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꽂빚깔이 퇴색하다'라는 뜻에 해당하는 일본어 '우쓰로우'에는, 말라서 시든다는 뜻 이외에

변화와 쇠퇴의 관념이 배어 있다. 따라서 종종 남녀관계에서의 '변심' 을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국이나 중국의 국화의 이미지와 달라진다.

 

하얀 국화가 변색해 가는 것이 서글프구나 / 그이의 마음도 이렇게 떠나고 마는 건가

《고슈이슈》 355번 노래

 

퇴색해 연보랏빛을 띠게 되는 국화는 황국(黃菊) 보다는 백국(白菊)이다.

국화의 본고장 중국에서는 잔국을 그리 주목하지 않았을 뿐더러, 황색이 중화의 국토색인데다

군왕이나 중앙을 상징하는 색으로 인식되어 오로지 황국이 칭송되었다.

그러나 잔국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듣이 일본인들은 황국보다는 백국을 더 선호했다.

이러한 차이를 일본 근세를 대표하는 학자인 게이추(1640~1701)도 그의 수필 《가와야시로(河社)》에서 지적한 적이 있다.

일본인들은 '백(白)'을 모든 색의 근원적 기조라 여겨 선호한다. 여기에 '자(紫) · 홍(紅)' 등의

적색 계통을 결부지어 기리는 미의식이 있다.

 

보랏빛 띠는 구름 사이 별인 듯 보이는구나 / 빛바래 남아 있는 저 백국의 꽃잎은.

- 《기요스케슈》 189번 노래

 

'서기(瑞氣) 감도는 보랏빛 구름 사이의 별빛'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에 전국의 아름다움을 견주고 있으니, 일본인들의 잔국에 대한 의식 체계를 가늠할 수 있다.

 

 

장수 식품으로서의 국화

 

뭐니뭐니 해도 국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의 중심은 역시 '장수(長壽)' 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화에 장수의 효능이 있다고 예로부터 일본인들이 믿게 된 것에 중국 문화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은 새삼 언급할 나위도 없겠다.

산 위에 만개한 국화꽃의 꽂물이 유입된 감곡(甘谷)과 800세를 살았다는 국자동(菊慈童)의 중국 설화에서 일본이라고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전래 설화들은 국화를 주제로 하는 일본 병풍 그림의 한 제재가 되기도 했다.

후세에 흔히 그려지기도 했던 '물가의 국화' 라는 화제(畵題)에도 그 영향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흔히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 일컬어지는 벚꽃을 누르고, 국화가 일본 왕실의 상징적 꽃으로 채택된 것은, 국화가 가진

장명(長命)의 효혐과 관련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껏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금새 져 버리고 마는 벚꽃에 비해,

장수의 영험이 있는 국화 쪽이 영원불멸을 기원하는 왕실의 지향성과 품위 유지에 어울린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2. 문학 속의 국화

 

하나  |  한국  |  시가문학으로 본 국화

 

 

뭇 꽃들 지고 마지막 피우는 꽃

 

 

 

 

 

 

국화도(菊花圖) |  김수철(金秀哲), 조선.

국화는 오상 · 상하걸과 같이 찬 서리를 겁내지 않는 의연함과 자세를 바로잡고 서 있는 자태를 지칭하는 이칭이 있다.

 

 

 

인고와 지조의 오상고절

 

 

「소쩍새가 지겹도록 울어대는 봄부터 폭풍우와 천둥치는 지루한 여름을 견디며」란 시어가 아니라도 찬 서리 앞에 오만하게

버티고 서서 마침내 꽃을 피워내는 결연한 자태가 국화가 아니겠는가! 미구에 다가올 서릿발 앞에서도 국화는 망설임 없이

향기 높은 꽃을 피워 내는 '오상고절(傲霜孤節)' 이 아니고 무엇인가?

명리를 좇아 뛰는 무리를 보면서 초연했던 참다운 지성인의 눈은 국화 한 송이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덕목을 봤을 것이다.

국화는 그래서 상하걸(霜下傑)이니, 은일화(隱逸花)니, 그것이 지녀야 할 알맞은 이칭들을 수없이 갖고 있는 것이다.

고려 때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늦은 가을에 피는 국화에서 신이한 생태를 먼저 보았다.

 

봄의 신이 꽃 피우기 맡고 있는데 / 어찌 가을의신이 또 꽃을 피우려 하나

서늘한 가을바람 밤낮으로 부는데 / 어디서 따뜻한 기운 빌어 꽃 피우나

(靑帝司花剪刻多 如何白帝友司花 金風日月吹蕭瑟 借底陽花芳艶葩).

 

이규보는 국화에서 다가오는 역경을 아랑곳하지 않는 두려움 없는 정신과 기어코 완성에 이르려는 인고의 의지를 보았던 것이다.

한편 세종 대의 강희맹(姜希孟, 1424~1483)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시가 건듯건듯 철이 바뀌니/ 봄여름 온갖 꽃 시드네/ 뭇 꽃들 피고 난 다음 꽃을 피워서/

맑은 향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네

만장의 홍진 눈을 가리고/ 된서리가 머리칼에 날아들어도/ 너는 끝네 그대로 향기를 지녀/

밝은 달에게 그윽한 향기 보내누나

 

(奄四時兮倐忽 念群芳兮衰歇 殿百花兮始發 香淸冷兮逼骨 塵萬丈兮眯目 颯乾霜兮入髮 保芳馨兮無闕 寄幽情於明月)

 


이<우국재부(友菊齋賦)> 란 시에서 뭇 꽃 다 지고 늦게 핀 꼭의 향기가 뼛속을 파고들고

세속적인 욕망을 뛰넘어 세상을 맑게 한다고 감탄했다.

이는 인고의 역경을 넘어서서 마침내 세상을 맑게 지켜 주는 국화의 환유세계를 본 것이다.

 

 

 

군자의 기개와 충의

 

고려 말 혼란기를 살다간 충신의  국화시가 또 있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 또한

<대국유감(對菊有感)>이란 시를 남겨 그의 생애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인정이 어찌 물건의 정 없음 같으랴/ 요즘은 마주치는 것마다 불평스럽네

동쪽 울 슬쩍 보니 얼굴 가득 미안하니/  가연명이 진짜 국화를 만났기 때문이네

(人情那似物無情 觸境年來漸不平 偶向東籬羞滿面 眞黃花對僞淵明 )

아마도 이 시는 목은이 향리에서 은둔할 때의 작품으로 보인다.

고려왕조를 지키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자신의 처지와 인심을 탓하다가

문득 눈에 띄는 국화 한 송이를 보고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경계했던 것이다.

역시 비슷한 시기인 여말선초의 이현 성여완(成汝完, 1309~1397)이 남긴 시가 있다.

 

일찍 심어 늦게 피니 군자의 덕이로다/ 풍상에 아니 지니/ 열사의 절(節)이로다/

세상에/ 도연명 없으니 뉘라 너를 이르료?

 

이 가곡에서 성여완은 국화가 군자의 절의의 표상임을 직접 화법으로 노래한 최초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절의가 없는 군자가 있을 수 없고, 명리를 다투는 은사[陶淵明]가 있을 수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여치와 국화 |  심사정(沈師正),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학 속에 등장하는 국화는 혼란에 빠진 나라의 위기를 아낱까워하는 충신들의 기개와 충의로,

안정기에는 계절과 은일로 종종 나타난다.

 

 

 




군자의 절개와 향기
또 영조 때의 문인가객으로 '노가재 가단(老歌齋歌壇)'을 주도했던 김수장(金壽長, 1690~?)은

 아래와 같이 군자의 상징으로 노래한 바 있다.
한식(寒食) 비 갠 날에 국화 움이 반가워라/ 꽃도 보려니와/ 일일신(日日新) 더 좋와라

풍상이/ 섞어 치면 군자절(君子節)을 피운다.
지은이는 이른 봄 새 생명의 국순(菊笋)이 하루하루 새롭게 자라나 마침내 찬 바람과 혹독한 서리 앞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국화를 사실적인 표현으로 은유하고 있다.

이른 봄에 솟아나는 구고하의 새 순에서 바로 군자의 절의를 본 것이다.

한말 여류시인 송설당(松雪堂, 1855~1939)최씨는 <국화>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절개롭다 저 국화야/ 신기롭다 저 국화야!/ 낙목한천(落木寒天) 소슬한데/ 너만 홀로 피었구나 //...중략 //황금 백금 봉한 듯이/ 봉지 봉지 견봉(堅封)하여// 머리 위에 이고 서서/ 때 오기를 고대타가// 반갑도다! 중양가절기약 맟춰 돌아오니// 아담하다 저 국화야/ 향기롭다 저 국화야!// 아름다운 높은 절개/ 냉상양로(冷霜凉露) 가소롭다.


송설당은 조상이 홍경래의 난에 연루된 혐의로 집안이 몰락하자 가문을 일으키고자 절치부심 노력 끝에

불명예의 멍에를 벗는데 성공했다.뿐만 아니라 만년에는 육영사업에 헌신한 여장부로서 '냉상양로'를

가소롭게 여긴다는 구절로 자신의 생애를 국화의 기개에 은유해당당하게 표현한 것이다.


은인의 풍류와 계절의 상징
인고나 절의의 은유로서 국화를 표현한 시가는 극도의 사회혼란기에 많이 나타난다.

반면 안정기에는 국화가 계절이나 은일의 사유세계와 어울리게 된다.

조선 중기 인조 때의 선석 신계영(仙石 辛啓榮, 1577~1669)은 전원에 묻혀 신선처럼 사는 모습을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동리(東籬)에 국화 피니 중양이 거의로다/ 자채(自采)로 빚은 술이/ 하마 아니 익었느냐?아이야/ 자해(紫蟹) 황계(黃鷄)로 안주 장만하여라.
《선석유고(仙錫遺稿》에 실린 <원원사시가> 중 한 수이다.

외교사절로 일본과 청나라를 몇 차례 다녀오기도 했던 작자는 비교적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은일의 세계에 들었던 모양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잇다. 자채벼라는 올벼쌀로 빚은 술에 가을무논에서 잡은 참게와

살진 누런 닭을 잡아 안주로 하여 친구들과 즐겁게 술을 마셨던 것이다.

때는 중양절이니 술마저 국화주라면 최상의 풍류가 아니던가?

작자는 조정이든 세속이든 멀리 떨어져 '전원사시(田園四時)' 를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특히 번다한 봄이나 여름 보다는가을을 좋아했다.


삼월이 좋다 해도 구시월만 못하리라/ 봉봉이 단풍이요/ 골골마다 국화로다

아마도/ 놀기 좋기는 구시월인가(하노라).


이쯤 되면 인고나 절의 등의 이식세계는 이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직 자연에의 귀의로 무위의 경지에 들어간 은일지사가 된 것이다.





국병도(菊甁圖)

양기훈(楊基薰), 조선, 호암미술관 소장.전형적인 완상용 정물화로 담묵으로 처리된 국화 꽃잎이 아취를 띠고 있다.


퇴색되고 있는 국화의 전통적인 환유세계
《동국가사(東國歌辭)》나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국화와 계절을 즐기는 작품이 각각 실려 있다.

 

삼월 삼일 이백 도화 구월 구일 황국 단풍/ 금준에 술이 익고/ 동정에 추월인 때/ 백옥배/ 죽엽주 다리고 완월장 취하리라.《東國歌辭 86》

 

창밖에 국화를 심어 국화 밑에 술을 빚어/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 돋아온다

아이야/ 거문고 청처라 밤새도록 놀리라.  海東歌謠》- 石本 533

가을을 상징하는 국화와 음주의 배경으로 노래된 국화와는 그 차별화의 경계가 매우 민감한 관계에 있다.

그 예가 될 수 있는 두 작품으로 계절이주체인지 국화나 술이 주체인지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국화의 전통적인 환유세계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이 두 작품은 국화와 달을 벗삼아 취하도록

마시겠다는 뜻을 노래해 국화를 취락의 배경 또는 분위기 조성자로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결코 우리 선비들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고 도연명으 시 <음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화를 '은일화' 라고 따로 일컬을 만큼 국화와 은일의 관계는 아주 오래됐다. 그러나 이 역시 도연명의 글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단은 화중왕이요/ 향일화는 충신이로다/ 연화는 군자요, 행화는 소인이라

국화는 은일사(隱逸士)요,  매화는 한사로다/  ... 하략 ...



 


국화도(민화) | 가회박물관.기이한 괴석 뒤에 숨어 피어 있는 국화.

그 자체에서 화려함을 뽐내지 아니하는 겸손과 순박함이 느껴진다.

 



여기에서 보면 김수장은 이 시에서 분명 국화를 '은일사' 라고 규정했다. 그런가 하면 안민영(安玟英) 또한 맥을 같이하고 있다.

주렴계(周濂溪)는 애련(愛蓮)하고/ 도정절(陶靖節)은 애국(愛菊)이라/ 연화는 군자어늘 국화는 은일사라 ...하략...
김수장이나 일 백 수십 년 뒤에 활약한 안민영이나 다 같이 자신들이 지은 <편삭대엽(編數大葉 ): 男唱歌曲)>에서 국화를

명확히 은일지사로언급했다. 이 두 사람은 가객이면서 저술가로 이름을 남겼으며 한국시가문학의 맥을

영원히 끊이지 않게 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여말선초 선비들의 의식세계였던 국화의 전통적인 환유세계는

이때쯤이면 이미 바뀐 것이아닌가 한다.

 

 


 

중국 시가문학으로 본 국화

 

정인군자 인인지사의 국화

 

 

 

 

국죽도(菊竹圖) | 서위(敍渭), 명(明), 라오닝성박물관 소장.

국화가 꼿꼿하게 서 있으며 그 옆에 길게 자란 대나무가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어 정취가 넘쳐흐른다.

국화, 대나무 아래에는 끝이 뾰족한 풀이 있는데 필묵이 힘차고 통쾌하다. 마르고 젖고 짙고 옅음의 변화가 풍부하다.

전체 작품에는 단숨에 그려낸 기운이 있으며 깊고 심오한 정취가 느껴진다.

 

 

은자와 미인과 양생의 가을 꽃, 국화

 

음력 9월을 구추(九秋)라고 부르는 이외에, 국화라는 말을 넣어 국월(菊月), 국령(菊令), 국추(菊秋)라고도 한다.

중국 문학에서 국화는 난초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상징했다. 한나라 7대 황제 무제(武帝, 재위 BC 141~87)가 지은

<추풍사(秋風辭)>에 보면 「난초가 빼어나고 국화도 아름다워라, 가인을 사모하여 잊을 수가 없도다

(蘭有秀兮菊有芳 懷佳人兮不能忘).」라고 했다. 가인은 여신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이 노래에서 구고하는 여신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자태를 상징하는 셈이다.

굴원은 <이소>에서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노라(夕餐秋菊之落英).」고 하여 꽃을 먹었다고 했다.

도연명도 (중구일에 한가하게 있으면서(九日閒居),>라는 시에서 「술은 온갖 근심을 제거하고

국화는 나이 먹는 것을 억제한다.」고 하여, 국화를 약용으로 삼았음을 암시했다.

하지만 국화는 대개 식용보다는 관상용으로 가치가 높았다. 국화는 생명력과 천진(天眞), 임진(任眞)의 이미지를 지니고있다.

이후 중국 문학에서 구고하는 대체로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방일(放逸)한 문인들의 친구로 형상화되었다.

굴원의 <이소>에서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도 실상 고결하면서도 방일한 이미지를 지닌다.

국화는 색으로 보더라도 경국(傾國)의 색이 없고, 맛을 보더라도 달지가않고 자채를 보더라도 달지가 않고 자태를

보더라도 요염함이 없다. 따라서 당나라 말의 시인 사공도(司空圖, 837~908)는 《시품(詩品)》<전아(典雅)>에서,

「사람이 담박하기가 국화와 같다.」는 표현을 사용 했다. 곧 국화는 마치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처럼

가난한 속에서도 자신만이 즐기는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담박한 맛이 있다고 인식되어 왔다.

그렇기에 중국 문학에서 국화는 대개 은둔자의 이미지를 지닌다. 《삼보결록(三輔決錄》에 보면,

한(漢)나라 애제(哀帝, BC 7~1) 때 장우(葬詡)라는 사람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뜰에

삼경(三逕 :三經0을 만들어 놓고 놀았다 한다. 그런데 삼경, 곧 세 갈래 길에 대해 《연주시격(聯珠詩格)》의

주석에서는 송경(松徑) · 국경(菊經)을 말한다고 했다. 삼경은 은사가 사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데,

세 갈래 길에 각각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달리 심었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수긍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역시 동진 때의

도연명도 오두미(五斗米)의 봉급 때문에 굽실대는 것을 혐오해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와서는

역시 삼경을 만들어 홀로 즐겼다고 한다.

그가 지은 유명한 <귀거래사>에 보면, 「세 갈래 길은 황량하게 되었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히 남았도다(三徑就荒 松菊猶尊. 」라고 했다.

 

특히  도연명의 <음주> 20수 가운데 다섯째 시는 자연 속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는 심경을 읊은 시로 유명한데,

그 시에는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꽃을 딴다(采菊東籬下).」는 구절이 들어 있다.
초가집 얽어 사람 사는 데 있어도/ 수레 말의 시끄러운 소리가 없구나/ 그대에게 묻나니, 어떻게 그러한 게요/

마음 멀면 땅도 저절로 외지다네/ 동족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하게 남산을 바라보니산 기운은

저물녘에 아름답고/ 새는 서로 함께 돌아오누나/ 이 가운데 참뜻이 있나니/ 그 뜻을 밝히려다가 말을 잊었도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송나라 때 철학자인 주돈이는 <애련설>에서, 도연명이 국화를 사랑한 사실을 언급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국화는 꽃 가운데 은일자다(予謂菊花之隱逸者也).」라고 했다.

당나라 시인 맹호연든 도연명에 가까운 시품을 추구했다.

그의 <친구의 별장에 들르다(過故人莊)>라는 시에서도, 국화는 은둔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친구는 기장과 닭을 갖춰/ 나를 맞아 농가로 이끈다/ 녹수는 마을 가를 둘럿고/ 청산은 성곽 밖에 비낀 곳/

보리타작 장포에 자리 펴고/ 술잔 잡아 뽕과 삼 이야기/ 중양절 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와서 보리라 국화를

(故人具鷄黍 邀我至田家 綠樹村邊合 靑山郭外斜 開軒面場圃 把酒話桑麻 待到重陽節 還來就菊花).

 

 

 

 

 

 

 

록주도(鹿酒圖) | 정운봉, 명(明), 상하이 박물관 소장

중국 문학에서는 국화는 대개 은둔자의 이미지를 지닌다. 가난 속에서도 자신만이 즐기는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담박한 맛이 그림 속의 술지게미를 거르는 고아한 선비와 동자의 모습에서 담뿍 전해진다.

 

 

 

 

국화는 정인군자, 인인지사의 이미지

 

국화는 마르고 여윈 것이 가시나무 같다. 그런데 무성한 풀이나 이끼와 함께 거처하면서도 우뚝하게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이미지를 준다. 따라서 국화는 곧잘 정인달사(正人達士), 인인지사(仁人志士),

 단인지사(端人志士)를 상징한다.  범성대는 《범천국보》의 서문에서 「산림의 호사자들은 혹 국화를 군자에 비긴다.

그 설에 따르면 한 해가 저물어 초목이 시들고 변하게 되면 홀로 아름답게 피어나 바람과 이슬을 깔보는 것이,

유인이나 일사가 지조를 지녀서 비록 적막하고 황량하여도 도를 맛본 것이 두둑하여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특히 국화는 서리 내리는 세모에 피어나므로, 봄꽃과 아름다움을 다투지 않고 신록과 풍채를 다투지 않는다.

세모는 인간의 만년과 같아, 만년에 피어는 국화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절조를 지키는 것을 상징한다.

송나라 시인 양만리는 시 <황국(黃菊)>에서, 「울긋불긋한 다른 꽃들보다 늦게 피지만,

시절이 오면 반드시 핀다네(比他紅紫開差晩, 時節來時畢竟開).」라고 했다. 역시 송나라 시인 육우(陸遊

1125~1209)도 <구월 십이일에 국화를 꺾으며>에서 「늦게 피어도 서리를 이기는 절조를 볼 수 있나니,

아동이 그냥 지나치는 것이 우습구나」라고 했다. 특히 국화꽃의 노란색은 중국인의 인문세계에서는 정색(正色)으로 간주되어,

존귀한 이미지를 지닌다. 그래서 국화라고 하면 '황금빛으로 가을에 빛난다'라는 칭송을 한다.

어째서 색을 우선시 하느냐고 물으면 노란색이 오방의 가운데 색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곧 음양오행에 따르면 노란색이 중앙에 배당되므로, 국화의노란색은 정색의이미지를 지니는 것이다.

 

 

 

시들어 가는 잔국도 불굴, 고절의 이미지

 

무엇보다도 국화는 늙고 시들더라도 표일하게 청분(淸芬)을 띤다. 그 모습은 투혼을 상징한다.

늦가을가지 피어서 남아 있는 국화를 잔국(殘菊)이라고 한다. 곧 오상고절의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소동파의 <겨울 풍경(冬景)>에서 「국화는 시들어도 여전히 서리를 이기는 가지가 있도다(菊殘猶有傲霜枝).」라고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양만리도 <흰 국화(白菊)>에서, 「서리와 더불어 다시 맑은 하늘 아래 싸워, 서리는 녹아도

국화는 녹지 않노라.」라고 했다. 잔국의 향은 특히 불굴의 정신을 상징한다.

육유가 만년에 지은 <시월(十月)>이란 시를 보면, 「국화는 다 시들어도 향기는 여전히 남았기에, 다시

동쪽울타리 아래에서 한바탕 잠이 든다」고 했다. 그는 <잔국>에서도, 「잔국 한 가지에 향이 아직 시들지 않았나니,

한밤 창 아래에서 백번이나 "깨어 살피게 되네.」라고 했다. 하지만 잔국이라 하면 서리를 맞아 상한 국화를 뜻하기도 한다.

한가을의 국화가 성대하고 온전하며 유유작적한 이미지를 주는 데 비해, 상한 국화는

훼손과 영락의 이미지를 주는 시문의 예 또한 있다.

 

 

 

 

 

 

취죽황화도(翠竹黃化圖) | 왕곡상(王穀祥), 명(明), 상하이 박물관 소장.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노란색이 중앙이 되므로 국화의 노란색은 존귀한 이미지를 지닌다.

 

 

 

흥취를 돋우고 고향을 그립게 하는 국화주

 

국화는 국화주를 곧잘 연상시킨다. 9월 9일의 중양절에 국화 아래에서 술동이를 두고 술을 마시는 일을 국화준(菊花樽)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양절에 국화주를 마시는 것도 오래된 풍습인 듯하다. 국화주는 재액을 막아 준다는 속설이 일찌감치 있어 왔다.

중양절에 가족 및 친척이나 친구들이 함께 모여 국화주를 마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국화주는 대체로

가을의 흥취를 고취시키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국화는 중양절의 국화주와 연결되어 훈훈한 인정과 고향을 연상시킨다.

앞서의 맹호연의 시에서도 조금은 그러한 면이 겹쳐 있다.

그런데 두보(杜甫)가 불우하게 지내면서 쓴 <밤(夜)> 이라는 시를 보면,

국화는 더욱 시인의 고향상실의 애상을 부추기고 있다.

 

이슬 내린 높은 하늘, 가을 기운 맑은데/ 빈산에 홀로 있는 밤, 나그네 심혼이 놀라라

쓸슬한 등잔만이 비추는 외론 돗배의 숙소/ 초승달 아직 걸린 저녁에 다듬이 소리

남국의 국화를 재회하고 병으로 누웠는데/ 북쪽 편지는 오지 않나니 기러기 무정해라

지팡이 짚고 처마 밑 거닐며 견우 북두성을 바라본다/ 은하수는 멀리 봉성에 닿았으리

(露下天高秋氣淸 空山獨夜旅魂驚 疎燈自照孤帆宿 新月猶懸雙杵鳴 南菊再逢人臥病 

北書不至雁無情  步簷倚杖看牛斗 銀漢遙應接鳳城)

 

두보는 55세 때 쓰촨 성(四川省) 기주(䕫州)에서 칠언율시 형식으로 <추흥팔수(秋興八首)>를 지었는데,

나그네 생활의 괴로움과 지난날에 대한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는 매우 서정적인 연작시다.

그 첫째 수에도 보면  떨기 진 국화꽃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옥 이슬은 단풍나무 숲을 시들게 하고/ 무산 무협에는 가을 기운이 엄중하다

장강의 파랑은 하늘까지 닿을 듯 솟구치고/ 변새를 덮은 풍운은 땅에 닿을 듯 어둡다

국화  떨기를 보고 흘리던 눈물을 올해에도 또 흘리니/ 외론 배를 기슭에 묶어 고향 그리는 마음도 거기 묶어 두네

겨울옷을 마련하느라 곳곳마다 재봉을 서두르매/ 백제성 높은 곳에 다듬이질 소리 급하구나

(玉露凋傷楓樹林 巫山巫峽氣蕭森 江間波浪兼天湧 塞上風雲接地陰 叢菊兩開他日淚 孤舟一繫故園心 寒衣處處催刀尺 白帝城高急暮砧)

 

 

 

 

 

정신은 물론 재화까지 보듬는 국화

 

낙백(落魄)한 문인들은 노랗고 궁근 국화를 동전에 비유해 자조하고 스스로를 위안 했다.

국화가 동그랗고 또 노랗기 때문에 금전(金錢)에 비유 했던 것이니, 그것을 국전(麴錢)이라고 한다.

양만리는 <희필(戱筆)>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들국화와 이끼가 각각 동전을 주조하니/ 노란 금전과 푸른 동전이 서로 어여쁨을 다투누나

/조물주가 가난한 시객에게 준 것이다만/ 맑은 시름은 살 수 있어도 밭은 살 수 없구나.

 

 

국화는 중국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도 모두 아름다운 꽃으로 인식되어 왔다.

조선의 문인 강희안은 1474년 무렵에 엮은 《양화소록》에서 국화를 소나무, 대나무, 매화, 난초와 함께 다루었다

. 곧 노송, 만년송, 오반죽 다음에 국화를 거론하고, 국화 다음에 매화와 혜란(蕙蘭), 서향화(瑞香花), 연화(連花) 등을 열거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국화를 칭상한 이유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듯하지만,

국화를 정절의 이미지로 보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관념이었던 듯하다.

 

 

 

 


 

 

 

| 일본 | 시가문학으로 본 국화

 

국화에 의탁한 장수의 꿈

 

 

《고킨슈》에 처음 등장하는 국화

 

국화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닌토쿠 천황(仁德天皇, 재위 313~399) 무렵에 약용 식물로 들여왔다는 설과, 8세기 중엽에

전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중국으로부터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의 문학 속에는 주로 한시문의 세계에 등장하고 있다.7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한시집《가이후소》에 용례가 보이며,

와카(和歌) 문학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루이쥬코쿠시》에 실린 간무 천황, 재위 781~806)의 작품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격을 갖춘 문학적 소재로 점차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이 중양(重陽)의 연회는 가을의 주요 궁중행사로 행해지기도 했다. 이 연회에 국화가 빠질 수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국화에 장수의 효능이 있다고 믿은 탓이다.

일본 문학 속의 국화의 전형은 《고킨슈》에 거의 다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유형의 음송(吟誦)이 보인다.

따라서 일본 문학 속의 국화를 이 《고킨슈》에서의 용례를 중심으로 설명해도 무방하리라 싶다

. 그 유형의 몇 가지를 들자면, 장수의 상징으로 읊어진 것, 시든 국화(殘菊), 비유적으로 쓰인 것, 수면에 비친

국화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장수의 상징과 잔국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여기에서는 이 두 작품 군(群)에 시선의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이슬 젖은 채 꺾어서 머리에 꽂자 국화 꽂송이/ 늙지 않는 가을이 오래오래가도록. - 《고킨슈》270번 노래

 

여기에서 '가을'은 '세월'과 같은 뜻으로 쓰였으며, 위 작품에는 이슬에 젖은 국화를 머리에 꽂음으로써

장수를 누려 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그 노래 뜻의 밑바닥에는 국화의 이슬에 불로장수의 영험이 있다는 사고방식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고사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주(周)나라 목왕의 시동이었던 국자동(菊慈童)의 이야기다.

이 국자동이 어느 깊은 산 속에서 국화의 이슬을 먹고 800세의 장수를 누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국화의 이슬'이란 말에 국자동의 불로장수의 고사를 떠올리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거의 상식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하이쿠(俳句) 작자 마쓰오 바쇼, 1644~1694)의 작품에도 이 '국화의 이슬'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가을 깊도록 나비도 핥고 있네 국화의 이슬.

 

뜻풀이를 해보면, 「가을이 깊은 무렵까지 살아남은 나비야, 너도 오래 살고 싶어서인지,

연명(延命)의 효능이 있다는 국화의 이슬을 핥고 있구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앞의 《고킨슈》작품과는 800년 정도 시간의 차이가 있으나, '장수'라는 테마 속에서 두 작품은 서로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같은 소재로 읉어진 또 다른 예를  《고킨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젖어 말리는 산길 구고하의 이슬 잠깐 사이에/ 어느샌가 천년을 나는 살아버렸나. - 《고킨슈》273번 노래

 

헤이안 시대의 승려 문인 소세이의 작품이다.

'이슬'의 일본어는 '약간'이라는 말과 음이 같고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 관계여서,한 표현으로 두 뜻을 동시에 걸쳐서 표현하는

'가케코토바'의 기법이 여기에 쓰였다. 이 작품의 앞에는 「국화 속을 헤치며 선궁(仙宮)으로 사람들이 나아가는 모습을 읊다」

라는 짤막한 설명이 붙어 있어, 작자가 신선이 산다는 궁전에 나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읊은 것이라 봐도 되겠다.

즉 이 노래의 밑바탕에는 선계의 시간을 애기한 중국풍의 신선사상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문을 고려해서 위의 작품을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산길 오르다 국화의 이슬에 젖은 옷을 말리는 잠깐 사이가 잠시인 줄 알앗는데, 이 선계에서 나는 천년을 지냈던 것인가.」

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한편 한국, 중국과는 달리 장수의 상징 못지않게 시든 국화인 잔국의 이미지로

읊어진 작품들 또한 논에 많이 띈다. 헤이안 시대의 일본인들에게는 한창 때를 약간 지나서

빛바래기 시작한 국화를 칭송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을 말고도 한창 때가 있는가 국화 꽃잎은/ 변색하고 나서도 한결 더 고와지니.

- 《고킨슈》278번 노래, 작자 미상

 

국화의 본토인 중국과 한국에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이 잔국을,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시 등의 소재로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해, 9세기 말경에는 '잔국'이라는 말이 이미 하나의 시어로서 정착되기에 이른다.

국화의 경연을 별이는 궁중행사였던 '기쿠아아와세(菊合)' 때 읊어졌던 잔국 관련 와카의 수나 《고킨슈》를 비롯한

많은 와카 작품집에서의 등장 빈도 등을 감안하면, 왕조 대의 일본인들의 미의식 속에서 이 잔국이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의 크기를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추화도 | 문징명(文徵明), 명(明),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장수성 태호에서 나는 돌인 태호석과 국화, 난 등 화초를 제재 삼아 약식으로 그리는 기법을 운용해 사물의 형식보다

그 내용과 정신에 치중하여 그리는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전체적으로 그림의 선은 간단하지만 운치가 가득하며, 정취가 느껴진다.

 

 



 


 

 



| 중국 | 서사문학으로 본 국화
국화선녀와 아우소년의 백국전설

어머니의 눈병을 고친 지극한 효심
중국 하북  천진으로부터 저강 성에 이르는 대운하가 시작되는 항주 주변에 먼 옛날 아우라는 착한 사람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는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베를 짜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어머니를 의지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남편을 여의고 어린 아들과 함께 힘들게 살아가느라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 두 눈이 짓물러 버렸다. 

어린 소년은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잣집 일을 해주는 등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던 중 어느 날 밤 꿈에

한 아가씨가 나타나 그가 채소를 가꾸고 잇는것을 거들어 주며 말하기를 "운하를 따라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천화탕(天花蕩)이라는 얕은 호수가 있는데, 그 호수 가운데에 흰색 국화 한 그루가 있으니 가히 눈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 꽃은 9월 9일 중양절에야 비로소 꽃을 피우니 그때 그 꽃을 따다 달여 당신 어머니에게 드리세요.

그러면 분명 어머니의 눈병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중양절에 백국을 구하기 위해 천화탕을 찾아 나섰다.

오후 내내 찾다가 비로소 풀이 무성한 늪 한가운데 작은 흙 언덕이 나오고 우거진 풀숲에서 한 그루의

하얀 야생국화를 찾아냈다. 한 가지에 9개의 줄기가 있는데, 꽃이 한 송이만 피어 있었다.

나머지 8개의 줄기 끝에는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꽃 봉우리가 달려 있었다.

그는 이 백국화를 뿌리채 뽑아서 집에 돌아와 자기 집 울타리 옆에 심었다.

머지않아 8송이의 꽃봉우리 또한 잇따라 꽃망울을 터트렸는데 향기가 매우 좋았으며, 꽃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는 매일 한 송이씩 백국을 따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7송이의 꽃을 드신 후 어머니의 눈은 신기하게도 말끔히 나았다.

아가씨는 또 꿈속에 나타나 국화 심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자신을 천상의 국화선녀라고 소개하면서 당신을 도우러 내려 왔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일러 주는 <국화심기노래>대로 행하면 앞으로도 백국화를 얼마든지 잘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3월에 나누고 4월에 꼭대기를 평평하게 하고, 5월에는 꼭대기에 물이 뚝뚝 떨어지게 하고, 6월에는 꼭대기에

거름을 뿌리고 7~8월에는 꼭대기에 흙을 돋우면, 9월에는 수국이 흐르네."라고 읊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국화선녀의 <국화심기노래>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마침내 그 뜻을 깨우쳤다.

백국을 심을 때 3월에 옮겨 심어야 하며, 4월에 순을 잘라내고, 5월에 물을 넉넉히 주며, 6월에 부지런히 비료를 주고,

7~8월에 뿌리를 잘 보호하면 9월에는 능히 수국처럼 핀 국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소년은 국화재배 기술자가 되었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어 이 일대는 국화단지가 되었다.

물론 그 소년은 가난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9월 9일에 이 백국화를 찾았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날을 국화절이라 했다.

 아울러 국화를 감상하고, 국화차와 국화주를 마시는 등의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는 많은 중양절 풍속의 또 다른 연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인용도서 : 책임편찬 이어령 著 「국화」

 

 

 

 

In Your Hands - Tony O'Con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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